30 x 45 cm /종이에 먹과 수채/08.12.04
['목어' 07 - 물속 도시를 보다]
그는 나를 부르지 않았다.
뒤로 돌아서 바다 속을 헤어가는 나의 뒷모습이 너무 단호했던 모양이다.
바다 속은 하얗게 말라죽은 구멍갈파래들과 그 위를 덮고 있는 누르죽죽하거나 검은 오니들의 천지였다.
살아있는 것은 더 이상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나는 말 그대로 죽음의 공간을 헤어가고 있다.
살아있다는 것은 끊임없이 주변을 간섭하고 주변에게 간섭 받는 일이다.
이 죽음의 바다 속에선 어느 것도 나를 간섭할 수도 없고 나도 간섭하기 위해서 신중할 필요가 없다.
살아있는 것이 없으니 나를 지켜보는 눈도 없어서 나는 갑자기 해방된 기분이 되었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 거림직한 것이 남아있기는 했다.
스스로 자기 자신을 물고기라고 말하던 나무로 만들어진 거대한 괴물의 존재가 마음에 걸리지만
그러나 그 큰 몸을 이 썩은 바다 속에서 마음먹은 대로 유지하기란 힘들 것이다.
결코 죽음의 문턱을 넘지 않으려고 문고리를 꼭 잡고 있는 듯한 그 괴물이 어쩐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괴물은 죽은 것이나 다를 바 없다는 결론을 나의 마음속에 내렸다. 그렇다. 괴물은 죽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장부에 적혀진 숫자에 의해서 풀어보자면 내가 이 바다 속에서
저런 괴물을 만날 확률은 제로였던 것이 아닌가. 숫자들이 서로 씨와 날줄로 엮어서 만들어진 셈에서는
그런 괴물의 존재조차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 드넓은 바다 속엔 결국 나 혼자만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더없이 좋아져서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그런데 물속에서 수영을 하는 내 몸의 움직임은 이미 누군가의 눈을 의식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수영하는 내 몸은 한껏 멋이 들어가 있었다.
물을 끌어당겨 양 옆으로 밀어내는 나의 손이 어깨에서부터 손톱 끝까지 리듬의 일관성을 유지하려고 애를 쓰고 있고
무릎을 당겨서 뒤로 물을 밀어내는 발바닥까지 모두 일정한 율동에 맞추려고 자꾸만 발끝과 손끝을 돌아보았다.
물속을 헤어가는 나의 몸짓을 조금이라도 더 아름답고 우아하게 보이려고 나는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어림짐작으로 서쪽 방향을 잡아서 나아갔다.
물속 검은 바닥에 부글부글 끓듯이 공기방울들과 수증기가 올라오는 것이 간혹 보이기도 했다.
약간 시야가 흐려지면서 넓은 바다가 눈앞에 펼쳐졌다.
이 바다를 건너면 우음섬 음도를 통해 화성땅 송산 고정리에 닿게 될 것이다.
바닥에 건물의 잔해들이 보였다. 멀리 빌딩숲도 어른거렸다.
모두 검고 하얀 이끼들과 오니들을 뒤집어쓰고 마치 폭탄이라도 맞은 듯한 폐허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것들이 모두 도시에 실제 존재하는 건물들을 십분의 일 혹은 오분의 일로 축소하여 지어놓은 것들이었다.
마치 영화 세트장이나 미니아춰의 세상에 들어선 기분이었다. 내가 매일 출퇴근하면서 많이 보았던 낯익은 건물도 있었다.
실제크기보다 줄여서 지은 탓인지 아무튼 어딘가 어설프게 보였지만 그런대로 땅위의 도시를 흉내 내기 위해
갖은 애를 쓴 흔적이 보였다. 그러나 이것들은 이미 오래전에 이 상태에서 그냥 손질을 멈추고
폐허의 정적에 맡겨버려 오래된 화석처럼 보였다.
이것들도 역시 도시의 광기를 막아서기 위해 바다 스스로 한 짓인가 싶었다. 방금 전 물속 안개 공장 앞에서
그 괴물은 모든 것을 도시의 탓으로 돌렸다. 나는 아무래도 별 상관이 없었다.
지금 바로 내 눈 앞에 벌어진 것들에 만족할 수 있다면 무엇이 어떻게 되든 별 상관이 없었다.
나는 도시에 의해서 그렇게 교육이 되어 만들어졌다.
나는 어디선가 얼핏 본 듯한 낯익은 건물들의 폐허 위에서 비로소 썩어가는 바다 속의 정적을 느꼈다.
살아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흐릿한 시야나 정적 때문인지 검은 이끼들과 오니들에 덮여있는 물속도시의 폐허는
이상야릇하게 아름답게 보이기도 했다. 그 이유는 정적과 폐허가 가져다주는 나의 정신적인 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었다.
물속 여기저기에 검버섯 같은 어두움이 피어났다.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희미한 색깔들이 검버섯과 검버섯 사이에서 고요하게 돋아나고 있다.
이제야 내 눈이 열리기 시작하는가 보다.
수많은 잉태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자궁 속에 나 홀로 내던져진 느낌이 들었다.
살아 숨 쉬는 것은 모두 떠나거나 죽어버린 이 바다 속에서 나는 잉태의 순간을 떠올리고 있다.
허옇게 말라붙은 이끼들이나 폐허들이 검은 오니에 잔뜩 뒤덮인 모습은 애절한 아름다움을 자아냈다.
나는 벌써 우음섬 음도 바다 속을 지나고 있었다. 아름다움의 밀도는 슬픔이 좌우한다.
숨 막히는 아름다운 풍경에 서서히 녹아버린 내 몸은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는 것 같았다.
두꺼운 벽을 통과하려는 몸을 억지로 빼내듯이 발바닥으로 물을 강하게 찼다.
나의 몸이 위를 향해 거의 수직으로 솟구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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