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x 45 cm /종이에 먹과 수채/08.11.19
['목어' 06 - 괴물을 만나다]
내 눈앞을 가로막고 있는 괴물의 몸집은 내 몸 보다 얼추 스무 배는 더 크게 보였다.
그가 크고 까만 눈으로 나를 멀뚱하게 바라보면서 다 큰 어른이 왜 손가락을 빨고 있느냐고 묻고 있었다.
깜짝 놀라서 앉은 채 엉거주춤 뒤로 물러나는 나를 보며 그도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재빨리 머릿속을 굴렸다. 내 기억은 물류창고 책상위에 놓인 장부를 뒤적였다.
최근의 물품이 들고나는 숫자를 떠올려서 오늘 내가 이런 괴물을 만날 수 있는 확률을 따져 보았다.
아뿔싸! 이런 괴물을 만날 수 있는 확률은 확실하게 제로였다.
그런데도 괴물을 만났으니 나의 셈법은 엉망이 되었고 아울러 머릿속도 엉망이 되었다.
내가 좀 더 뒤로 물러앉아 괴물의 전체 생김새를 대중했다.
거대한 나무로 만든 물고기 형상이었다. 그의 몸을 이루고 있는 오래된 나무는 여기저기 작은 금이 가 있고
오랜 세월의 풍파에 씻긴 나무결은 도드라져 있었다.
왼쪽 아가미에서 배 아래쪽으로 내 손가락이 들어갈 정도로 큰 금이 벌어져 있었다.
거대한 몸집에 비늘이나 지느러미가 소박한 칼놀림으로 새겨진 것으로 봐서 사람의 정성이 제법 들어가 보였다.
큰 눈과 함께 양옆의 아가미 까지 들어찬 두툼한 입술에도 사람의 손길이 묻어 있는 것이
나를 해칠 괴물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두려움에서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도 큰 눈을 끔쩍 거리더니 가슴지느러미를 바닥에 대고 몸을 뒤척이며 뒤로 물러났다.
그가 눈을 굴릴 때 마다 나무도르래가 돌아가는 ‘삐이꺽’ 소리를 냈다.
내가 눈을 꼭 감아 몸을 둥글게 오그리고 엄지손가락을 빨면서 이곳 바닥까지 내려오는 모습을
이 괴물도 줄곧 따라 내려오며 빤히 쳐다보았을 것이다. 내 눈물도 보았을 것이다.
나는 은밀하게 묻어 두었던 나만의 비밀을 들킨 것 같아서 좀 부끄러웠다.
그러나 이 창피한 상황을 감추려고 곧 뻘쭘한 표정을 지으면서 얼떨결에 그에게 물었다.
‘요즘 밤마다 도시의 공원을 드나들며 골목길에서 쓰레기통을 뒤진다는 괴물! 바로 너지?’
‘괴물? 인간들은 자기들이 처음 본 것은 모두 괴물이라고 부르지.
물고기가 땅위로 올라가 돌아다니면 세상이 망한다는 징조라고 하던데, 아직도 세상이 망하지 않은 걸 보면
그 괴물은 내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
아항! 괴물이라고?
그래, 나는 하루라도 빨리 썩어서 열반하기만을 기다리는 괴물인지도 모르지‘
‘물고기?’
‘그렇지? 나무로 만든 물고기’
그의 말하는 표정이 나에게 특별한 적의를 보이진 않지만 그러나 아직은 더 경계를 늦출 순 없었다.
내가 그를 두려워하는 표정을 보인다면 오히려 그를 자극할까봐 애써서 태연한 척 했다.
그는 분명히 나무로 만들어진 물고기 木魚 였다.
요즘 도시의 밤거리를 배회하는 괴물 소동의 주인공이 바로 내 눈 앞에 있는 목어일지는 아직도 모를 일이었다.
아무튼 내가 너의 적이 아니라는 표시를 해 둘 필요가 있어서 그냥 미소를 지으며 주변 풍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모든 감각은 내 앞의 괴물 목어에게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가 내 어설픈 미소를 이미 알아챘는지 꼬리를 천천히 몇 번 헤저어 보여주었다.
즉 나는 나무로 만들어진 목어지만 이렇게 얼마든지 살아 움직일 수도 있으니 감안하라는 말이었다.
물속 바닥 멀리 낯익은 공장이 보였다. 네 개의 높은 굴뚝이 우뚝 세워져 있는 공장이었다.
저 공장을 어디서 보았는데.... 의문이 내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는 여러 가지 숫자들을 뒤적였다.
높은 굴뚝 네 개 짜리 공장... 네 개의 굴뚝이 서있는 공장...
그것은 별망성 아래 포구가 있던 예전의 자리를 뭉개고 세워진 이 도시의 열병합 발전소가 분명했다.
굴뚝에 녹색 띠를 둘러서 이 굴뚝이 무슨 녹색환경처럼 보이게 위장한 것 까지 빼닮아있었다.
뭍에 엄연히 존재하는 공장을 마치 그대로 이 물속 바닥에 왜 저렇게 옮겨 놓았는지 저것이 혹시
신기루 같은 현상이 아닌지 좌우지간 모든 내 기억을 동원하여 계산을 해 보았다.
더구나 공장의 크기를 가늠해 보면 뭍에 있는 실제 공장을 약 십분의 일 정도로 줄여놓은 크기였다.
사람의 머릿속은 맥락과 단서를 중심으로 조작된 기억의 창고나 다름없다.
믿고 싶은 것만 믿으려는 나의 심리구조를 견제할 수단은 창고 장부에 깨알처럼 적힌 숫자 밖에 없다.
그러나 물속으로 들어오면서부터 나의 셈은 엉망이 되어버린 터라서 확신할 수 있는 숫자는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공장은 네 개의 굴뚝에서 하얀 안개를 거침없이 피워 올리고 있었다. 뭍의 열병합발전소를 닮은 물속 안개공장인 셈이다.
조개껍질을 곱게 갈아 놓은 것 같은 질감의 물속안개는 바로 이 공장에서 피워 올린 것이었다.
나는 눈으로 안개공장을 가리키며 혼잣말처럼 물었다.
‘저런 장난질을?’
‘끅끅... 이곳에서 뭍을 바라보면 인간들이 하는 짓이란 죄다 아이들 장난 같더구나’
‘누가 이 물속에 안개공장을....’
‘누구긴? 물이지. 물!
도시에서 밀려 내려오는 안개를 막으려고....’
더 이상 이야기를 끌게 되면 새로운 인연이 만들어진다. 인연이란 시시때때로 나를 따라다니며 괴롭힌다.
나는 숫자 외엔 아무것도 신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런 괴물 목어와의 인연은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그와 나눈 몇 마디 대화 속에서 나에게 필요한 정보는 이미 충분히 얻은 셈이다.
바다의 안개는 도시의 안개를 막아서기 위해서 생겨났다.
그러므로 바닷가를 벗어나 바다 한 가운데로 들면 이 답답한 안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나는 일어나서 엉덩이를 털고 뒤로 돌아 물속을 헤어가기 시작했다.
시화바다 가운데로 나아가면 분명히 안개가 없을 것 같았다.
이 물속 안개공장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안개가 없는 곳을 찾아야 했다.
이왕에 들어온 바다 속이니 나는 안개보다는 바다 속의 많은 풍경을 보고 싶었다.
나는 떠나면서 고개를 뒤로 돌려 그에게 눈인사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새로운 인연을 만들 것 같아서 그만 두었다.
그와의 인연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 무엇인가 바쁜 척 표표하게 떠나는 나의 뒷모습을
그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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