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담의 그림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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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개그림<세월오월>에 새겨진 文身 ‘계엄령과 야스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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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국제미술축제인 <비엔날레>를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 있다.

‘각 지역과 민족을 대표하는 젊은 화가들이 자신들이 겪고 있는 현실적인 다양한 문제를 시각언어로 내보이면서 그런 다양한 문제들의 중심을 꿰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또는 각 문제들의 외형을 둘러싼 상황은 도대체 어떤 모양으로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것인지, 세계의 인류가 동시에 고민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함께 추구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지금 당장 인류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서로 캐묻고 대답하는 난장(亂場)이다. 시각언어는 상징성과 사실성이 강하다. 은유가 강한 만큼 설명 또한 강하다. 단순명료하지만 때로는 우주를 넘나드는 광범위한 서사성을 갖고 있다. 이러한 시각언어의 풍부한 감성이 전시장을 난장으로 만든다. 세계의 모든 문제가 시각언어로 분출되면서 전시장은 펄펄 끓는 용광로와 같다. 관객들은 세상의 모든 현실적인 문제들이 서로 다른 작가들의 작품과 작품을 넘나드는 모습을 감상하면서 각각 나름대로 인류가 만들어 가야할 세상의 모습을 상상한다’

그러나 서구 미술시장이 풍요를 구가하는 20세기 후반부에 들어서면서 자연스럽게 <비엔날레>는 퇴조하기 시작했다. 화상과 컬렉션과 미술브로커들이 주도하는 <아트페어>가 <비엔날레>의 필요성을 용도폐기 한 셈이다. 바로 그 무렵인 1995년에 제 1회 광주비엔날레가 출범했다.
광주는 정치적 경제적 소외를 받는 대신에 <문화>를 선택했고, 이것은 지역민의 필요성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당시 정치권력이 별다른 무리 없이 적은 예산으로 광주지역민들에게 베풀 수 있었던, 즉 광주의 소외를 달래기 위한 정책적 배려이기도 했다.

그래서 1980년대 내내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서 흘렸던 광주시민들의 땀과 피 대신에 받은 집단 보상이 바로 <광주비엔날레>라고 광주시민들은 믿고 있다. 이점은 ‘광주비엔날레 출범 선언문’에 잘 나타나 있다.

“광주비엔날레는 광주의 민주적 시민정신과 예술적 전통을 바탕으로 한다.”(광주비엔날레 선언문 중)

그만큼 光州精神(또는 五月精神)은 광주비엔날레의 근간이자 역사이며 창조의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광주비엔날레의 횟수가 거듭할수록 서구미술계가 제시하는 미술양식과 전시형식에 매몰되기 시작했다. ‘光州性’이라는 정체성이 글로벌이라는 미명아래 퇴색되었고 광주비엔날레 시스템은 세계미술기획자라고 하는 미술브로커들끼리 서로 돌려가면서 대접받는 잔칫상이 되고 말았다.
광주비엔날레 20년이 되도록 아시아적 전시 양식과 형식은커녕, 오히려 서구미술의 선전장이 되었다.
그래서 광주시민들은 광주비엔날레의 존폐여부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으며, 광주정신을 되찾는 비엔날레가 되기를 권고했다.
이러한 광주시민들의 비판을 눈속임하기 위해서 비엔날레 재단은 비엔날레 본전시를 광주정신의 이름위에 올려놓은 대신에 ‘광주비엔날레 20주년 특별프로젝트’라는 행사를 시의 예산 지원의 도움으로 따로 계획하고 ‘光州精神特別展-달콤한 이슬’이라는 전시회를 끼워 넣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는 2014년 1월에 광주정신특별展 책임큐레이터 A씨로부터 특별展의 ‘킬러프로젝트’라고 하는 ‘걸개그림’의 작가로 선정되었으나, 두 번이나 그 선정요청을 조심스럽게 거절했다.
거절 이유는 ‘첫째, 걸개그림은 집회나 시위에서 사용되는 그림으로써 그 목적이 있으며 지금 우리사회는 이러한 걸개그림을 그릴 만한 이슈가 없다. 둘째, 1980년대 나와 함께 걸개그림을 공동제작 했던 광주시각매체연구회(光州視覺媒體硏究會) 회원들이 모두 자신들의 일이 바빠서 도저히 손발이 맞는 작가들을 동원할 수 없다’였다.

2014년 4월 16일 오전에 ‘세월호(世越號)’가 침몰되었다.
세월호에는 제주도로 수학여행 가는 경기도 안산(安山)의 단원(檀園)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 약 270여명과 일반 승객이 승선해 있었다. 나는 약 10년째 이곳 안산에서 거주하며 그림을 그리고 있다.
나는 다음날 즉시 안산의 시민단체 회원들과 함께 세월호 침몰 현장인 진도(珍島) 팽목항(澎目港)으로 달려갔다.

팽목항 앞 바다는 입을 굳게 닫은 것처럼 침묵하고 있었다. 구조당국은 승객을 충분히 구조할 수 있는 천금의 초기 기회를 모두 놓쳤다. 구조에 가장 최선을 다해야 할 해경과 정부는 마치 세월호를 억지로 침몰시키려는 듯이 우왕좌왕 하기만 했지 실제 구조현장에서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다. 승객의 생명 안전에는 상관없이 최대의 이익을 남기려는 ‘천박한 기업’과 ‘부패한 관료’와 ‘무능력한 정부’가 서로 강력한 카르텔을 형성하여 만든 시스템이 300 여명의 승객을 학살한 것에 다름아니었다. 승무원들은 선내 방송을 통해 승객들에게 ‘제자리에 가만히 있어라’라고 몇 번이나 강조한 뒤에 해경 구조선을 타고 제일 먼저 빠져나갔다.
배에 남겨진 아이들과 승객들은 강화유리창을 두들기면서 구조해달라고 외쳤으나 배는 무심하게 천천히 아주 천천히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그 광경을 대한민국 국민들은 TV 생중계를 통해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목격했다.
34년전, 1980년 광주오월학살이 정권장악에 눈이 먼 신군부에 의해 총칼로 재빨리 이루어진 학살이었다면, 오늘 ‘세월호 사건’은 타락한 사회시스템이 전국민이 생중계로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300 여명의 승객을 천천히 약 이틀 동안 아주 천천히 물고문으로 학살한 것이다.
광주오월학살 이후 34년, 한 세대만에 우리는 다시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된 국가폭력에 의해 저질러진 ‘세월호 학살사건’을 나는 목격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상황을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었다.
사건 당일, 진도 앞바다에서 세월호 학살사건이 일어나고 있던 바로 그 시각에 7시간 동안 행방이 묘연한 박근혜 대통령부터 안전행정부, 해양수산부, 해양경찰청, 그리고 세월호가 소속된 기업 청해진, 세월호 승무원들까지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었다.

안산에 있는 내 작업장에는 작년 2013년 여름부터 단원고등학교 학생 2명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그들 중에 1명의 여학생이 세월호에 타고 있었으며, 그녀의 시신은 수색 3일 만에 뭍으로 올라올 수 있었다. 텐트로 만들어진 임시 영안실에서 나는 그녀의 가족과 함께 시신으로 돌아온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에니메이션 관련 대학 진학을 위해 나의 작업장에서 일주일에 한번씩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그림을 배우고 있었다. 1989년 IMF 당시에 실직한 아버지는 모녀만을 남겨두고 어딘가로 떠나버렸다. 예쁘고 똑똑한 소녀는 식당에서 일하는 가난한 어머니를 위로하면서 만화가의 꿈을 키우고 있었다. 밝은 표정의 그 소녀가 오늘은 내 앞에 하얀 시신으로 누워 있었다.  사건 당일, 수학여행 첫날 아침 설레는 마음으로 바른 가벼운 화장기가 아직도 얼굴에 남아있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시신을 끌어안았다. 어머니의 서러운 울음소리를 뒤로하고 나는 연안실 텐트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광주정신특별展 책임 큐레이터 A씨에게 전화를 했다.

“그렇다. 나는 당신이 요청했던 광주비엔날레 20주년 특별프로젝트 광주정신展의 걸개그림을 그리겠다”

2014년 7월 2일, 광주 도청광장과 가까운 곳에 걸개그림을 제작할 임시작업장을 개설하고 ‘광주시각매체 연구회’ 회원 8명을 전원 소집했다. 7월 4일에 임시작업장 오픈식에 광주의 다양한 사람들을 초청했다. 시민사회단체, 환경단체, 세월호 市民喪主모임, 518관련단체, 전교조(전국교사노동조합), 그리고 34년전 나와 함께 오월현장에서 총을 든 동지들이 참여했다. 광주정신특별展 걸개그림의 주제와 소재, 그리고 걸개그림에 그려야 할 여러 가지 내용을 그들의 5분 스피치를 통해 수합했다. 이 수합된 내용을 걸개그림의 주필인 나와 보필을 맡을 ‘광주시각매체연구회’ 회원들이 토론을 통해 결정한 사항을 중심으로 캔버스에 스케치를 시작했다.

그리고 걸개그림 제작 현장인 임시 작업장에서 일주일에 한번씩 시민들과 함께 다양한 이벤트를 진행했다. 두 번째 이벤트는 일본의 가수 <미카미칸>을 초청하여 ‘한·일 국가폭력에 희생한 사람들을 위한 진혼 콘서트’가 있었다. 세 번째 이벤트는 <한국 팝아티스트 협동조합>을 초청하여 퍼포먼스와 강연을, 그리고 그림주막 <판갈이>을 열어 시민들과 노래와 춤으로 밤을 새웠다. 무대는 자연스럽게  작업중인 걸개그림<세월오월>이 되었다. 걸개그림 속에 그려진 인물들이 무대 위로 뛰쳐나오고, 무대 앞 사람들이 걸개그림 속으로 들어가 그림이 되었다. 걸개그림 속 인물들과 무대 위의 사람들이 서로 어우러져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네 번째 이벤트는 시민들과 작가들이 팽목항으로 향했다. 하얀 종이로 만든 작은 배에 쌀을 가득 싣고 종이꽃으로 장엄(莊嚴)한 뒤에 촛불을 켜서 바다로 띄워 보냈다. 서쪽 수평선에 해가 잠기는 순간에 하얀 종이배에 불꽃이 일었다. 석양 노을이 온통 붉게 물들었다. 배를 태우던 불꽃이 사라지자 바다의 어둠이 밀려왔다. 물에 빠져 죽은 영혼들을 위로하는 <진씻김굿> 퍼포먼스였다. 세월호 사건으로 수중에서 학살당한 망자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피안의 강을 건너길 기원하는 굿이었다.

시민들의 관심 속에서 걸개그림<세월오월(世越五月)> 제작은 거침없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광주정신 특별전 당사자인 기획자에 의해서 사건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협력큐레이터 B씨가 <세월오월>에서 문제가 될 만한 부분을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촬영한 사진을 문화관련 행정관료에게 보여주면서 ‘이 문제는 내가 직접 해결하겠다’라며 장담했다. 그는 이렇게 공적을 세워서 승진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림 수정요구에 대한 나의 단호한 거절에 그의 계획은 빗나가고 말았다.

사태가 커진 후일, 광주시 관계자는 ‘광주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는데 비엔날레 관계자가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요청했다’며 기자들의 질문에 어물쩡하게 대답했다.

7월 17일,  책임큐레이터 A씨와 협력 큐레이터 B씨가 작업장에 찾아와서 작품 수정을 다음과 같이 요구했다.
“시민시장이 정치적 경험이 부족하여 중앙정부로부터 예산을 받아오는데 여간 애를 먹고 있다. 수완이 좋은 시장은 약 10%의 예산을 더 가져오기도 하고, 수완이 없는 시장은 오히려 약 10%의 예산을 깎이기도 한다. 걸개그림에 정권을 비판하는 내용이 있으면 중앙정부로부터 약 10%의 예산이 깎인다. 그러면 4천억의 세수가 부족하게 된다. 이 4천억의 용도는 빈민층과 노인복지에 쓰이는 예산인데 걸개그림 때문에 광주의 빈민과 노인들이 아무런 복지를 받지 못하게 된다면 그게 모두 홍성담의 탓이 된다. 그러므로 광주의 복지를 위해서도 그림 수정을 해주기 바란다”

나는 예전에 행정고위관료 경험이 있었던 지인에게 전화로 위의 사실을 문의했으나 그로부터 “말도 아닌 소리다. 이미 중앙정부에서 책정된 예산이 그런 일 때문에 깎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는 대답을 들었다.

당연히 그들의 수정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리고 나는 <세월오월> 전시에 관해 낙관적으로 전망했다. 왜냐면 (1) 15년만에 기획된 광주정신특별展이며, (2) 시민들과 함께 공개적으로 그린 걸개그림이며, (3) 지난 7월1일 취임한 새로운 시장이 시민운동가, 인권운동가 출신이기 때문에 이런 정도의 부드러운 정치풍자 그림은 당연히 전시될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7월 28일,  책임큐레이터 A씨와 협력큐레이터 B씨가 작업장을 방문하여 박근혜 대통령 묘사 부분 수정을 다시 요구했다.
나는 (1안) 박근혜를 흰색으로 지운 채 그대로 두겠다  (2안) 박근혜를 지우고 대신에 닭대가리를 그리겠다는 두 개의 대안을 내놓았다.
즉시 두 명의 큐레이터는 내 앞에서 약 10분간 논의한 후에 닭대가리로 수정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래서 내가 “박근혜 대통령의 별명이 닭인데, 괜찮겠는가?”라고 묻자, 그들은 “좌우지간 소든 닭이든 개든 박근혜의 얼굴만 보이지 않으면 된다”라고 대답했다.
내가 닭으로 수정할 것을 결정하자 그들은 “너무 고맙다”며 내가 먼저 말리지 않았다면 내 발 앞에 엎드려 마치 큰절이라도 할 것처럼 고마워했다.

8월 3일,  오후 3시쯤에 협력큐레이터 B씨가 작업장에 방문하여 닭으로 교체한 부분을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촬영한 후에 밖으로 나갔다가 약 1시간 후에 다시 작업장에 돌아와서 다음과 같이 요구했다.

B씨 - 광주시의 관료에게 저 닭그림을 보여주었더니 오히려 더욱 큰 난리가 났다. 닭으로 그린 곳을 다른 무엇으로 확실하게 수정해 달라.

홍성담 - 당신들이 선택한 대로 고쳐주었는데 또 수정해달라는 당신의 말은 이해할 수 없다.

협력큐레이터 B씨는 다시 밖으로 나갔다가 약 20 여분 후에 들어와서 다음과 같이 요구했다.

B씨 - 만약 저 닭그림으로 완성하려거든, 박정희를 암시하는 사람의 모자에 붙어있는 별 2개의 계급장을 떼고, 검은 선글라스도 벗기고, 뒤에 있는 김기춘 비서실장을 지우고, 앞쪽에 있는 이건희 삼성회장의 얼굴도 지우라는 것이 광주시 고위행정관료의 요구다.

홍성담 - 장난 그만해라. 차라리 그 관료가 이 작업에 합류하여 우리와 함께 공동작업을 하라고 해라. 행정관료의 수정요구를 그대로 작가에게 전달하는 것이 큐레이터가 할 일인가? 내가 아까 설명했듯이 수정된 그림을 전체적으로 보면 저 닭은 박근혜를 비유한 것이 아니라 고난 받는 민중의 상징이 되었다.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라는 말도 있지 않는가. 저 그림의 내용은 유신독재 세력들이 새벽이 오지 못하도록 닭 모가지를 비트는 것이 되어버렸다. 원래 그림의 내용과는 정반대의 의미가 되어버린 셈이다. 더 이상의 수정 요구는 내가 들어줄 수가 없다.

당일 밤 12시경에 A씨와 B씨가 내 숙소에 찾아왔다.

A씨 - 협력큐레이터 B씨가 그림 사진을 책임큐레이터인 나에게 먼저 보여주고 논의를 했어야 하는데, 이런 통상적인 단계를 거치지 않고 직접 관료에게 보여주어서 일이 커졌다. 광주정신展 <달콤한 이슬>의 전시 취지는 광주정신의 ‘승화’와 ‘치유’다. 걸개그림<세월오월>의 일부내용은 이 취지와 부합되지 않는다. 그래서 수정해야한다.

홍성담 - 웃기지 마라! 五月光州精神의 진정한 의미는 오늘날 우리시대에 일어나는 국가폭력을 막아내고 폭력에 희생된 사람들을 치유하는 것에 있다. 걸개그림<세월오월>은 이 광주정신을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다. ‘승화’라는 말의 개념정의는 무엇인가. 무엇이 ‘승화’라는 말인가. 1980년 광주학살을 자행했던 학살자들도 채 1년이 지나지 않았던 1981년에 광주의 비극을 ‘승화’하라고 광주시민에게 강요했다. 광주학살은 아직도 책임자가 밝혀지지도 않았고 진실도 규명되지 않았다. 그래서 광주는 아직도 치유되지 않았다. 아직도 학살의 상처가 치유되지 않은 광주 희생자들이 오늘날 국가폭력으로 수장된 세월호를 바닷속에서 들어 올려 승객들을 구하는 장면이다. 유신독재의 망령이 만든 운명의 고리를 끊지 못하고 그들에게 사로잡혀 허수아비로 살아가는 박근혜가 자신을 향해 눈물을 흘리고 있다. 자신도 치유 받지 못한 오월시민군들이 다리를 절뚝이며 부러진 총을 목발삼아 달려가서 불쌍한 여인 박근혜를 위로하는 장면이다. 우리시대의 가장 암울한 갈등을 치유하는 그림이다. 나는 향후, 당신들의 어떠한 수정요구도 절대 들어줄 수 없다.

8월 5일,  오전 9시경 윤장현 시장이 사람을 보내 걸개그림 작업 멤버중의 한 후배를 작업장 근처로 불러내어 ‘윤장현 시장이 사전 선거운동 위반 혐의로 검찰의 내사를 받고 있으니, 걸개그림을 전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8월 6일, 광주시 행정부시장은 윤장현 시장과 의견 조율한 사항이라며 ‘<세월오월>걸개그림의 제작 및 전시, 게시 등과 관련하여 일련의 관련자에 대하여는 조사를 통해 엄중하게 그 책임을 물을 계획이며, <세월오월> 작품은 그림 일부내용이 광주비엔날레에서 당초 제시한 사업계획의 목적 및 취지에 부적합하다는 판단아래 세월오월을 공공청사인 시립미술관에 전시하는 것이나 건물 외벽에 게시하는 일체의 행위에 대해서는 불허한다’고 발표했다.
즉시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광주정신특별展에서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자 윤장현 시장은 ‘자신의 말이 와전 곡해되었다. 광주시는 문화에 관하여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겠다’라고 해명했다.

8월 6일, 오전 11시경에 책임큐레이터 A씨가 작업실을 방문하였다.

A씨 - 걸개그림은 결코 전시되어야 한다. 박근혜를 닭으로만 고쳐주면 내가 책임지고 전시를 하겠다

홍성담 - 좋다. 다시 닭그림으로 수정하겠다. 박정희의 모자에 있는 별 2개의 계급장도 다른 무엇으로 가려주겠다.

그러나 윤장현 시장은 나와 친한 지인들에게 ‘걸개그림은 전시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내용의 문자메시지를 몇 차례 보내서 나를 설득했다.

8월 8일, 오후 4시에 완성된 걸개그림을 작품운반전문 특송차량에 실려 비엔날레로 보냈으나,  광주정신展 시립미술관 전시장 대신에 시립미술관 지하 수장고로 들어갔다.
비엔날레 재단은 걸개그림을 수장고에 넣고, 책임큐레이터와 협력큐레이터 3명이 걸개그림 전시여부를 논의하도록 종용했다. 전시시스템에서 가장 중요한 책임큐레이터쉽을 비엔날레 스스로 포기하는 순간이었다.
협력큐레이터 D씨는 입장보류, 협력큐레이터 C씨는 전시찬성, 협력큐레이터 B씨는 전시절대반대, 책임큐레이터 A씨는 전시찬성.
책임큐레이터 A씨가 ‘자신의 전적인 책임하에 전시를 한다’고 결정하자, 비엔날레 행정주무직 공무원들 약 7명이 회의장소에 난입하여 ‘큐레이터들의 합의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전시를 강행할 수 없다. 절대로 전시를 못한다!’며 물리력을 행사했다.
책임큐레이터 A씨는 “책임큐레이터의 고유한 권한을 행사 못하게 하는 이런 상황에서 큐레이터직을 사퇴할 수밖에 없다”며 퇴장했다. 비엔날레 행정주무직 공무원들이 남은 협력큐레이터를 퇴실시키고 기자들에게 <걸개그림의 전시유보>를 발표했다.
이미 오후 6시부터 시립미술관의 수장고와 전시장 주변에 약 70 여명의 사복경찰과 용역경비가 동원되어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지키고 있었다. 1986년 전두환 신군부정권에 의해서 일어난 <힘展>사태 이후 약 30년만에 경찰병력이 동원되어 그림전시장을 지키는 살벌한 진풍경이 광주에서 발생했다.
오후 7시에 거행될 예정이던 개막식은 사실상 취소되고 말았다.

이후, 책임큐레이터 A씨는 광주시와 비엔날레를 비판하며 ‘행정관료로부터 겁박에 가까운 수정요구를 받았다’며 큐레이터직 사퇴를 발표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8월 13일, 광주민족예술단체총연합은 ‘광주정신특별展을 정상화 시켜 참여 작품 검열 중단 및 광주시는 국민 앞에 사과 할 것’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8월 13일, 광주시립미술관 황영성 관장은 기자회견을 열어 즉시 관장직을 사퇴할 것을 표명했다.

광주문화시민단체들이  즉각 <세월오월> 전시를 주장하며 사전검열에 대한 항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8월 14일 부산미술인 27인 <세월오월> 즉각 전시를 요구하는 성명서 발표했다. 광주정신특별展에 참여하는 한국작가 11명이 <세월오월>의 전시를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오끼나와의 참여작가들이 ‘표현의 자유를 탄압하는 광주비엔날레에 강력히 항의한다’는 서한을 발표했다.

8월 18일, 이용우 광주비엔날레 대표는 <세월오월> 전시유보 논란에 대해 책임지고 사퇴하는 기자회견에서 ‘비평가의 입장에서 홍화백의 <세월오월>은 전시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타이완의 화가와 문화관련 예술가들이 광주시와 비엔날레에 항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러나 광주시장은 비엔날레에 책임을 떠넘기고, 비엔날레는 광주시에 책임을 떠넘기는 핑퐁게임이 연일 벌어졌다.

8월 24일, 오후 4시에 광주비엔날레 브리핑룸에서 나는 기자회견을 통해 책임큐레이터 A씨의 복귀를 요구조건으로 내걸고 <세월오월>전시 자진철회를 발표했다. 9월 4일 비엔날레 본전시 개막식을 앞두고 본전시에 초대받은 동료화가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던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비엔날레와 광주시가 서로 책임을 떠넘기는 모습에 나의 가슴이 아픈 탓도 있었다. 윤장현 광주시장은 취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자신이 당연직 비엔날레재단 이사장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결국 자신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코미디를 연출했던 것이다.

9월 13일, 오전 10시에 광주정신특별展 참여작가 ‘오우라 노부유키’가 광주비엔날레에 도착했다. 전시되어있는 자신의 작품 12점의 액자를 해체하여 한·일·영문으로 작성된 ‘홍성담 작가의 작품 검열에 강력히 항의한다’라는 메시지를 그림에 직접 붙이는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그리고 오우라 노부유키 작가와 후루가와 미카(한국문화평론가, 제3회 광주비엔날레 ‘인권과 미술展’ 큐레이터), 오카모토 유카(문화기획가)는 광주정신특별展 책임큐레이터 A씨를 면담했다. 이나바 마이(한국 광운대 교수)의 통역으로 약 3시간 동안 진행된 면담에서 책임큐레이터 A씨는 시종일관 “자신은 아무런 책임이 없다. 홍성담 작가가 그린 걸개그림은 광주정신展 ‘달콤한 이슬’의 주제(오월정신의 승화와 치유)에 부합하지 않았으므로 작품 수정을 요구했다. 그리고 홍성담 작가는 큐레이터와 상의 없이 언론플레이를 하여 더욱 문제를 크게 만들었다. 이번 파동의 모든 책임은 홍성담 작가에게 있다”라고 강조했다.

9월 18일, 대만의 타이난 成功大學 문학부에서 <동아시아 민중믄화의 희망과 연대 - 홍성담 민중미술의 세계> 초청 전시에서 오월광주항쟁연작판화 <새벽> 50 여점과 걸개그림 <세월오월-현수막 프린트 본>을 전시했다. 걸개그림 <세월오월>이 한국에서 유배를 떠나 최초로 공식 전시회를 한 셈이다.

9월 22일~24일, 박근혜 방미 기간 동안 ‘세월호 특별법 제정 촉구 결의대회’를 하는 교포들은 걸개그림 <세월오월-프린트 본>을 선봉에 들고 토론토, 인디애나 폴리스, 로스엔젤러스, 시카고, 뉴욕 유엔본부 등 박근혜대통령의 일정을 따라다니며 시위를 했다. 미주 한인 교포들에 의해서 <세월오월>이 시위대와 함께 살아있는 그림으로써 걸개그림의 본래 목적을 되찾게 되었다.

걸개그림 <세월오월> 사태에서 보여준 그대로, 한국의 민주주의와 문화환경은 매우 절망적이다. 시민운동가이며 인권운동가 출신의 인사가 광주시장으로 취임하자마자 지난 유신독재의 트라우마에 다시 감금되어 오히려 먼저 중앙정부의 눈치를 보며 이번 사태를 만들었다. 모든 전시 예산을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지원금으로 운영하는 비엔날레 재단은 철저히 정치권력에 예속된 관행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작가를 선정하고 전시를 결정하는 큐레이터들도 자신들이 선정한 작가를 정치적 외압으로부터 지켜주지 못하고 오히려 사태의 모든 책임을 작가에게 전가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고 미술전문직인 큐레이터들이 사전검열을 주장하는 행정관료들의 손발 노릇을 먼저 자청하는 불쌍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런 비민주적인 단초들이 이미 지난 이명박 정권에서부터 보이기 시작하더니 현재 박근혜정권에서는 일상화되어버렸다. 부산비엔날레, 부산국제영화제, 인천평화예술축제, 대구미술관 등에서도 이미 타락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세월호 학살사건’으로 희생된 어린 학생들의 유가족들이 ‘수사권과 기소권이 포함된 세월호 특별법’을 요구하며 광화문 광장에서 단식투쟁을 하고 있다. 그들은 내 자식이 왜 죽었는가에 대한 명백한 진상규명에 이어 성역 없는 책임자 처벌과 향후 이 땅에 다시는 이런 떼죽음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국가시스템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1980년 광주학살’의 극복과 교훈이 한국의 민주주의를 발전시켰다면, 이번 ‘세월호 학살사건’은 지난 산업화시대를 급하게 달려온 한국인들에게 문명사적 전환의 계기가 되었어야 했다. 즉, 자기성찰을 통해 병든 현대사회에서 모두 함께 행복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목적과 방법을 탐색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권력과 일부 국민들이 이런 소중한 기회를 스스로 뒤집어 엎어버리는 결과를 자초하고 있다. 정신적인 광기를 보여서 우익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는 유저들의 모임 ‘일베’는 세월호 희생자 유족들의 40일을 넘도록 목숨을 건 단식 현장 바로 앞에서 ‘폭식 투쟁’을 전개했다. 수백개의 피자와 햄버거 등을 쌓아놓고 아귀처럼 게걸스럽게 퍼먹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날 수백개의 피자와 햄버거를 제공했던 사람은 집권여당의 ‘보수혁신위원회’에 등용되었다.
제주 4.3학살사건과 한국전쟁당시에 아무런 죄도 없는 수많은 국민들을 빨갱이라고 몰아세워 재산을 몰수하고 학살했던 반공깡패집단 ‘西北靑年團’재건 모임이 세월호 유족들의 시위현장에 나타나 물리력을 행사했다.
일본에 ‘재특회’가 존재한다면, 대한민국엔 ‘일베’와 같은 일련의 움직임이 존재한다.
그 두 개의 존재가 권력의 편에 기대어서 약자를 공격하는 모습에서 서로 닮았고, 저들의 몸속에 야스쿠니의 망령이 자라고 있다는 점도 너무나 비슷하다.

현대일본엔 아직도 군국주의 시절에 ‘大本營’이 준 트라우마의 문신이 지워지지 않은 채 마음 속 어딘가에 은밀하게 존재하듯이, 대한민국엔 아직도 ‘戒嚴令’의 트라우마가 생생하게 살아 활개 치고 있다. 그래서 일본과 한국의 국민들은 아무도 강요하지 않지만 어떤 일을 시작하기 전에 자기검열에 충실한 노예적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동경 구단거리 야스쿠니의 시커먼 어둠 속에 ‘大本營’의 망령이 살아 숨 쉬고 있다면, 대한민국엔 국가와 사회가 움직이는 시스템의 관절마다 야스쿠니의 끈끈한 어둠이 묻어 있다. 일제식민지 36년 동안 조선사회의 정치와 경제를 독식했던 親日 개(犬)들이 한국전쟁을 계기로 반공을 앞세워 다시 국가의 모든 시스템을 장악했다. 유신독재정권을 만든 박정희는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리고 전두환으로 이어진 군부독재 30년이 국민들의 뼈마디에 문신한 ‘戒嚴令’이 오늘 또다시 박근혜정권의 그늘에서 되살아나고 있다.

그렇다! 걸개그림 <世越五月> 사태가 오늘날 우리들 몸속에 은밀하게 새겨진 ‘戒嚴令’과 ‘야스쿠니’의 문신을 증명하고 있다.    (홍성담/화가.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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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걸개그림<세월오월>에 새겨진 文身 - ‘계엄령과 야스쿠니’ / 홍성담 / 2014.10
이름: damibox


등록일: 2014-10-18 12:02
조회수: 1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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