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담의 그림창고


2006 열린사회 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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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사회의 종교 배타성, 비판적 전망을 향하여

                                   황경훈 | 아시아신학연대센터 실장,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실장


1. 팔은 안으로 굽는다?

1980년대 한국에 해방신학 서적을 번역, 소개했던 진보적 신학자이던 한 대선배가 교회쇄신, 교단자정 모임에 다녀오더니 이렇게 말했다. “우리끼리(천주교인) 주교고 신부고 다 도마에 올려놓고 씹어도 괜찮았는데 말야, 다른 종교인들 앞에서 그런 말을 하려니까 말이 잘 안 나와. 못 볼 것을 보여주는 것 같고, 기분이 그렇더라고. 팔이 안으로 굽는 것인지....아니면 내가 보수적이라서 그런 건가?” 슬며시 후배들의 눈치를 둘러보다가 이내 다른 주제로 말을 넘긴 그 선배는, 지금 노무현 정부에서 제법 굵직한 자리를 맡아서 일하고 있다. 자기 집 얘기, 그것도 허물을 남에게 하기란 쉬운 법이 아닌데, 이 선배도 아마 그런 마음이 아니었겠는가 싶다. 그 선배의 말꼬리를 잡아 무슨 진보니, 보수니 따지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천주교를 다른 종교인들이 제대로 이해하도록 돕는다는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 사실 그대로 얘기할 필요가 있고, 비판받아야 할 일이 있으면 마땅히 그래야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도 자신의 자리를 다시 한 번 더 돌아보게 되지 않겠는가? 종교간 대화가 해야 할 일도, 또 다뤄야 할 주제도 많지만 교회갱신과 자정의 문제를 터놓고 얘기하는 것이야말로 종교간 만남에서 꼭 해야 할일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마음으로 이글을 쓴다.

2. ‘건전한 신앙생활을 해치는 운동과 흐름 I, II’

1997년과 2003년 두 번에 걸쳐서 같은 제목으로 한국천주교주교회의가 발간한 소책자 제목이다. 여기서는 신흥종교, 뉴에이지와 종교다원주의 등을 겨누어 신자들의 “건전한 신앙생활을 해치는” 것으로 소개하고, 2003년 판에서는 한발 더 나아가 기공, 단전호흡, 초월명상, 염력, 요가, 마인드 컨트롤도 “신영성 운동”으로 싸잡아매어 신자들이 접해서는 안 되거나 주의를 요하는 것으로 소개한다(그러나 신자들은 말을 잘 안 듣는 것 같다. 최근 통계를 보면, “구원”보다는 마음의 평화를 위해 천주교를 택하는 사람이 부쩍 많아졌고, 이에 따라 불교식 좌선수련이나 호흡법, 요가에 높은 관심을 보이고 많은 참가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 책의 한 구절을 인용해본다. “신영성 운동에서 말하는 ‘하느님’ 또는 ‘신’은 자연과 인간을 초월한 존재가 아니다. 이 운동에서 주목하는 것은 자연과 인간 안에 내재하는 신성(神性)이다. 이 운동에서는 자연과 인간 안에는 우주 전체에 흐르는 생명의 에너지가 있으며, 이 에너지가 바로 ‘신’이라고 간주한다. 따라서 ‘신’은 그리스도교에서 가르치는 것과 같은 인격신이 아니다.”(10쪽) 그렇다면 한국천주교 주교회의에서 말하는 “인격신”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 소책자는 어떠한 “인격신”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설명없이, 이 신영성 운동은 그리스도교의 신론을 부정하니 “건전한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은 이를 절대로 따라서도 안 되고 관심을 가져서도 안 되는 피해야 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한 구절 더 인용해 본다. “신영성 운동의 기본 노선은 모든 것을 하나로 보는 ‘일원론’이다. 이들은 일원론에 따라 ‘신은 만물 안에 존재하고 따라서 만물이 곧 신’이라고 설명한다. .....이와 같은 범재신론은 그리스도교에서 가르치는 유일신이나 인격신의 개념을 근원적으로 부정하게 된다.”(14-15쪽) 여기서 논쟁적이고 복잡한 신론에 관한 논의는 피하자. 대신 부끄럽지만, 범신론(pantheism)을 만유재신론 또는 범재신론(panentheism)과 혼동해 쓰는 주교회의의 신학적 수준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무지함을 드러내는 무모함을 무릅쓰면서까지 그 인격신에 매달려서 나오는 결과는 무엇일까? 오직 이런 인격신을 믿어야 한다는 신학적 독단과, 다른 하느님 체험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신학적 배타성이 한국교회에 굳건하게 자리 잡고 있다. 여기에서 한국주교들은 한발자국의 양보도 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에서 인격신이 절대타자로서 “저 바깥에” 서양인의 얼굴을 한 흰 수염의 할아버지 모습이 아니라고 존 로빈슨이 󰡔신에게 솔직히󰡕(현영학 역, 기독교서회 1968)에서 그토록 강조한지도 벌써 40년이 가까워 온다. 저 바깥에 있는 거룩한 인격신은 여기 인간 삶의 세속성(profane)과는 같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성속의 철저한 분리를 통한 제도교회의 유지, 밥그릇 챙기기는 신학적 배타성의 내용으로 솔직한 자기고백이다. 평신도는 늘 성직자를 하늘로, 하느님처럼 모셔야, 그렇게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한국천주교회는 이 책이 나온 40여 년 전보다도 더 후퇴했다. 적어도 신관에서 만큼은 말이다.

3. <주님이신 예수님(Dominus Iesus)>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유일성과 구원의 보편성에 관한 선언

‘로마보다 더 로마적인 한국교회’가 1997년과 2003년에 앞의 소책자를 발간하는 사이, 전 교황청신앙교리성 장관 라칭거 추기경은 2000년 8월에 그리스도와 교회의 유일성과 단일성에 대한 선언문을 발표한다. 앞의 로마보다 더 로마적이라고 했던 것은 한국천주교회에 대한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바티칸의 흐름을 보면 마치 우리교회를 보고있는 느낌이 들 정도로 닮아 있거나, 아니면 그것에서 한발 더 나가 있다.
이 선언은 “완전하고 결정적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제목 아래 5항에서 “전에 없이 더욱 유포되어 가는 이러한 상대주의적 사고방식을 치유하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결정적이며 완전하다는 것을 무엇보다도 강조하여야 한다”고 새삼 강조한다. 다른 종교를 의식해서인지 15항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때로 유일성 보편성, 절대성과 같은 용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의 의미와 가치를 타종교들에 대하여 지나치게 강조하는 인상을 주기 때문에 신학은 이러한 용어들의 사용을 피하여야 한다는 제안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언어는 사실 계시에 충실한 것 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앙의 원천들 자체에서 발전된 것을 표한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근본주의적 신도들이 들으면 아주 자연스러운 말일지는 모르겠지만 이 선언이 발표됐을 때 가장 비판적인 목소리를 낸 것은 인도 신학자들이었다. 인도까지 가지 않아도, 공산국가인 베트남의 한 가톨릭 신부는 “그리스도의 유일성”(once and for all)을 (그것을 선언하는) “때와 장소의 문제”라고 지적함으로써, 그리스도론에 있어서도 일방적인 보편성의 배타적 강조는 지역성(local Church)과의 조화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주지시켰다.
이 선언은 앞서도 말했지만 그리스도론뿐만 아니라 교회론에 대한 “절대적” 믿음을 확인한다. 16항에서는 “예수님께서는 유일한 구세주로서 단지 제자들의 공동체만 설립하신 것이 아니라 구원의 신비인 교회를 제정하셨다. ...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구원신비의 완성은 또한 그 주님이신 분과 불가분하게 결합되어 있는 교회에 달려 있다.”고 천명한다. 교회를 통하지 않고는 구원을 이룰 수 없다는 칼 바르트의 교회론을 보는 듯하다. 1962-65년까지 진행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이브 꽁가르나 칼 라너가 공들여 만든 “익명의 그리스도인”보다도 더 과거로 돌아가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사실 이런 느낌은 그저 “감”이 아니라 현실로 나타났다. 인도 신학교에서 가르치며 오랫동안 힌두이즘과 가톨릭 신학을 토착화하려 했던 자크 뒤피 신부는 그의 책 󰡔종교 다원주의의 그리스도교 신학을 향하여󰡕 때문에 교황청 그레고리오 대학교 교의 신학부 교수의 마지막 한 학기를 자신이 가톨릭 전통신학에서 벗어나지 않았음을 해명하는 데에 썼다. 그는 명예롭게 은퇴하지 못하고 몇 해뒤 세상을 떠났다. 당시 라칭거 추기경은 공지문을 통해 “그의 저서에 표현된 일부 사상과 신학적 입장이 가톨릭 신앙과 교리의 몇몇 중심 진리를 흐려놓기 때문”이라고 그의 사상 전반을 “검증”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명예로운 은퇴대신 뒤피 신부가 바티칸에게서 받은 공지의 핵심은 “모호함”(ambiguity)이라는 한 단어였다. 17개 주가 달린 이 공지문에서 11개 주가 󰡔주님이신 예수님󰡕을 인용했다(이런 점이 인도 신학자들로 하여금 󰡔주님이신 예수님󰡕이 자기들을 겨냥해 나온 것이라고 생각을 굳히는 계기가 됐다). 한국교회는 자크 뒤피 신부보다 앞서, 정양모, 서공석, 이제민 신부에 대한 바티칸의 제재(신학교나 가톨릭계 대학교에서 가르치지 못한다는)를 겪어야 했다.

4. 사학법과 꽃동네

2004년 10월 14일 주교회의 사회주교위원회 위원장 정명조 주교와 6명의 주교는 “사학법 개정을 매우 우려하며”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나는 학생운동을 가톨릭 교회 안팎에서 했지만, 이렇게 기민하게 주교들이 성명서를 발표한 적을 보지 못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주교회의 사회주교위원회는 2005년 12월 14일 가톨릭학교법인연합회와 공동으로 “개정된 사립학교법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라는, 낯익은 성명서의 톤으로 제목을 달고 다음과 같은 사항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우리는 대통령이 이 법안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하기를 촉구한다. ... 우리는 위의 사항이 실현되지 않을 경우, 법률불복종운동을 전개할 것이다.” (평소에는 절차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주교들이, 오직 이 문제만큼은 주교회의의 상임위원회에 상정/의결 과정 없이 일사천리로 진행된 기민성에 참으로 놀랐다. 역시 가톨릭은 무서운 조직이다!)
IMF, WTO, FTA로 농민이 농약을 마시든, 분신을 하든 또 가톨릭적 신념으로 병역을 거부한 청년이 옥살이를 하든 말든 이들의 생명에 대한 아무런 얘기도 없는 한국주교회의가 목숨을 걸고 하겠다는 것이 “태아 생명” 운동이요 사학법 개정 운동이다. 이런 운동의 정당성을 어디서 찾아야 할지, 이성이 제대로 박힌 사람에게 어떻게 이해시킬 수 있을지 가톨릭 신자로서 참 난감하다. 문제는 이런 정치적인 편향에서 그치지 않는다.
아시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막사이사이 상’을 탄 꽃동네 오웅진 신부가 구속 수감되자 주교회의는 2003년 6월 16일 입장을 발표하고 “국법을 위반한 혐의로 검찰이 조사를 하고 있는 꽃동네는 한 젊은 사제가 길거리에 버려진 노인 한 분을 집에 모심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그러나 불행히도 꽃동네 운영에 비리가 있다는 의혹이 대중매체를 통하여 충격적이 논조로 전해지고, 천주교회마저 불신과 의혹의 대상이” 되었다고 주장하면서 “법은 누구에게나 공정히 적용되어야 하고, 검찰은 바로 이를 위해 노고를 아끼지 않고 있는 것으로 믿고 싶습니다.....나아가 천주교회의 꽃동네가 불의를 자행했다는 오명이 한시 바삐 씻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라고 끝까지 그를 옹호하고 있다. 그러나 검찰은 오웅진 신부에게 2005년 10월 15일 징역 1년에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의 유죄를 확정했다. 예부터 어른들이 집 안팎에 싸움이 나면 자신의 식솔부터 잘못을 헤아렸다. 이런 일을 당해서 국민들에게 죄송하다고, 용서를 청하자고 말하는 추기경이나 주교가 단 한명이라도 있으면 좋겠다. 천주교회에는 이런 어른이 없다. 어른 없는 집안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제대로 클 수 있을지 걱정이다. 결국 걸인의 생명을 담보로 다른 몹쓸 사람들의 배만 불려주는 어리석음을 어떻게 생명을 수호하는 종교라고 말할 수 있을지 참으로 난감하다.

5. 홍성담과 교회 민주주의

지난해 광주대교구에서는 광주항쟁 25주년을 기념하면서 남동성당을 5.18기념 성당으로 정했고, 그 이름에 맞게 십사처(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에서 십자가처형을 받아 죽은 뒤 내려지는 장면을 그림이나 조각으로 형상화해 각 성당벽에 걸어 둔 것으로 천주교인들은 사순절 동안 예수의 고난을 생각하며 “십자가의 길”이라는 기도를 드린다) 제작을 홍성담 화백에게 부탁했다.
“오월 화가”요 “광주 화가”인 홍성담은 14처 14개 가운데 4개째(예수의 어머니가 등장하는 부분)를 작업하면서 “그림이 될 것 같다”는 확신을 얻어 광주대교구에 작업을 하마고 알리고 거의 1년을 작업해서 올해 5월 12일 남동성당에 설치를 했다.
완성된 것을 디지털 파일로 광주대교구장 앞으로도 보냈고 설치한 날인 5월 12일에는 남동 성당 신부에게서 “훌륭하다”는 칭찬을 듣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 다음날 점심때쯤 남동성당 신부는 홍 화백에게 전화를 걸어 광주대교구장이 이 작품이 “보편성”이 떨어진다며 “신자 한명이라도 더 보기 전에 철거하라”고 했다고 한다.
남동성당 주임신부는 현 광주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으로 관록 있는 신부요 그의 관점에서 “훌륭한” 것이 대주교 눈에는 어찌하여 “보편성이 없는” 것인지 참으로 궁금하지만, 가톨릭 내부사정을 잘 아는 홍화백 자신은 담담하다.
전통적으로 그려지는 성화, 예수의 묘사와 다르게 예수를 광주에서 희생된 자로 그렸기 때문일 것이라고 판단한다.
그의 말대로 한국천주교는 시대정신을 잃었다.
예수가 광주항쟁에 있었다면 당연히 민중과 같이 피흘렸을 것이고 그 안에서 예수를 보지 못하는 교회는 이미 예수의 교회가 아니라는 것이다. 어쨌든 설치하기 위해 세팅하는 데만 2~3천만 원이 들었고 민중화가로서 예술계의 거장이 1년 동안 매달려 작업한 예술품이 대주교의 한마디로 빛을 잃게 됐다.
성당의 왕은 신부요 교구의 왕은 주교이며 전체 가톨릭의 왕은 교황이다.
아무런 견제기구가 없는 가톨릭 조직은 민주주의와 정면 배치되고 이를 너무 잘 아는 가톨릭은 민주주의를 허락하지 않는다.
합리성을 가진 신도가 가톨릭을 저버리는 이유가운데, 이렇듯 잘못된 지도자를 두고도 그대로 볼 수밖에 없는 무기력한 종교에 애면글면 남아 있을 필요가 없는 데서도 찾아진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쇄신, 종교자정은 내부민주주의를 이룩하는 데에 있다.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그러기에 꿈꾸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남아있는 자의 슬픔이요 또 기쁨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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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국사회의 종교배타성(천주교 사례) - 홍성담과 교회 민주주의 / 황경훈(우리신학연구소 연구실장)
이름: damibox


등록일: 2006-10-18 21:03
조회수: 3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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