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담의 그림창고


* ‘홍성담 오월 판화전’(5월 1일~30일)이 5‧18기념문화관 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다. 80년대 민중민술을 대표했던 판화가로서 ‘다시 오월’로 대중과 함께 하게 된 소감을 듣고 싶다.

___ ‘다시 오월’이 아니라‘ 줄곧 ’지금까지 오월‘이다.
1992년 감옥에서 출소 이후, 해외 국내를 포함 매년 2-3회 씩 ‘오월판화’전시를 하고 있다.
그곳 현지에서 초대 전시가 대부분 이지만 어떤 경우엔 그곳의 처지와 조건에 따라 내 스스로 자비를 부담하여 전시를 하는 경우도 있다.
작년과 올해의 전시 일정을 보더라도,
작년 3월 오끼나와의 사끼마 미술관에서 오월판화 전시가 있었고
작년 5월에 wcc 세계 신학자 아테네 대회에서 ‘치유와 상생’이라는 주제로, 그리고 9월에 뒤셀도르프 미술애호가 협회의 초청으로  ‘저항과 명상’이라는 주제로 오월판화 전시가 있었다. 그리고 12월 교토 시립미술관에서 광주시각매체 연구회 회원들의 오월그림과 함께 나의 오월판화 전시가 있었다. 물론 국내에서도 미술관 2 곳에서 오월판화가 전시되었다.
2006년 올해의 오월판화 전시 일정도 이미 모두 확정된 상태다.
이번 오월 기념재단 전시를 시작으로 7월엔 일본 시가현의 미술관 2곳을 순회전시하고,
8월 도쿄에서 전시계획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10월에 일본 홋카이도와 타이페이의  시민단체 초청으로 전시 계획이 이루어지고 있다.

국내외에서 수 십 차례의 오월판화 전시 경험을 통해 ‘소감’을 굳이 이야기 한다면,
미술관에서 기획하는 오월판화 전시는 별로 흥미가 없다. 물론 내 개인적인 화가의 프로필에 신용 있는 경력을 한줄 채우는 의미는 있지만, 미술관의 유리벽에 갇혀 현대 미술사의 다양한 흐름들 중 하나의 자료로써 평가 분석 받는 자리라서 본디 ‘오월판화’가 갖는 의미는 그만큼 상실 되어 버린다.
그에 반해, 그곳 현지의 시민단체나 운동단체의 초청으로 하는 ‘오월판화’전시는 현지의 현장성과 오월의 역사성이 함께 만나면서 훨씬 더 역동성을 갖는다.
이를테면, 작년 3월 오끼나와의 사끼마 미술관에서 했던 ‘오월판화’ 전시는
오끼나와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미군기지 땅 반환소송 운동들과 어우러지면서 흥미있는 전시가 되었다.


* ‘흘러간 장르(?)가 되어버린 한국 목판화’를 역사적으로 재조명하는 작업들이 진행되고 있다. 지난 3월 서울 관훈동 공평아트센터에서 열린 ‘木印千江之曲’이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겠다. 관련하여 1980년대와 90년대 민중미술의 대표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한국 목판화의 쇄락과 현재에 대해 진단을 부탁한다.

____ 한국 현대 미술에서 ‘목판화’는 꼭 80년대 민중미술에만 국한 된 것은 아니다.
단지, 당시 민중미술가들이 ‘목판화’라는 매체가 갖는 특징들 속에서 몇 가지 민중성을 발견하여 그것을 ‘미술운동’의 매체로 적극 활용하였던 것이다.

민중미술이나 혹은 목판화등을 ‘흘러간 매체’라고 단순하게 이름하는 것은 상당한 모순이다.
일례로 80년대 민중미술운동은 민중들 속에서 부단하게 발전되고 있다.
몇 년전 붉은 악마들의 시각적 이미지에서부터, 그리고 인터넷 상에서 이루어지는 익명의 개인들이 헤아릴 수 없이 토해내는 디지털 이미지들은 물론, 전시장에서 보여지는 젊은 현대작가들의 작업 속에서 우리는 80년대 민중미술이 주장했던 현실주의의 리얼리즘적 중요한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매향리 사격장 반대 투쟁, 새만금 투쟁, 현대 진행되는 평택 미군기지 반대 투쟁 현장에서 우리는 80년대의 민중미술의 발전된 여러 경로를 만날 수 있다.

민중미술이 갖는 리얼리즘의 정신은 이미 새로운 매체들 속에 전이되고 있다.
리얼리즘은 한 시대를 유행하는 ‘패션’이 아니라
당대를 살아가는 민중들의 숨결과 걸음걸이를  따라 꼭 그만큼씩 발전되어 가는 것이다.

만약, 지금 민중미술의 쇄락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처지와 조건이 이미 현실이라는 ‘현장’을 떠나 있거나, 혹은 당대의 민중들의 호흡과 걸음걸이가 조금은 역동성을 상실해 더디게 가는 경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80년대 민중미술의 한 축을 이끌었던 ‘목판화’는 대중들 속에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이철수, 남궁산, 유연복, 홍선웅, 김봉준, 정비파 등의 목판화 작업은 이미 자신들만의 양식화에 일정하게 성공을 거두고 있고 또한 대중들이 편안하게 접할 수 있는 다양한 매체들을 통해 많은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다.

* 지난 2005년 말 일본에서 열린 ‘광주의 눈물’은 일본 현지에서 뜨거운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것으로 보도된 바 있다. 1980년 광주의 아픔을 되새기고자 하는 취지뿐만 아니라 광주의 문제를 아시아와 세계화의 문제로까지 확대하는 의미 있는 시도로 읽혀진다. 80년 5월 광주에 대해 이국인들의 눈으로 보는 시각은 어떤 것인가. 또한 예술가로서 5월과 관련한 국외사업의 활동방향에 대한 의견을 구하고 싶다.

___ 2005년 12월 교토 전시 제목은 ‘광주의 눈물’이 아니라 ‘광주의 기억에서 동아시아의 평화로’다.

그동안 ‘오월판화’전시 경험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하자면,
시대의 흐름에 따라 ‘오월판화’전시의 목적과 내용도 몇 가지 시기별로 나눌 수 있다.

제 1시기,
1980년대에 행하여 졌던 국내외의 오월판화 전시는
오월의 학살과 진상을 널리 알리려는 목적이었다.
당시의 오월판화 전시는 어느 곳에서 몇 차례나 전시가 있었는지 나도 감히 헤아릴 수 없다.
유럽에서는 독일과 영국에서 수차례 순회 전시가 있었고 물론 미국과 일본에서도 80년대 내내 순회전시가 이루어지면서 광주학살의 진상을 널리 알리는 것에 일조하였다.

제 2시기 는 1992년 나의 감옥 출소 이후부터 상정할 수 있다.
사건 당대에 이루어졌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물론 너무 미흡하지만, 2사람의 대통령을 법정에 세워 감옥에 넣었다는 것 자체는 대단한 역사적 사건이다.)을 토대로
아시아의 진정한 민주화를 위해 오월판화 전시가 부단하게 이루어졌다.

스리랑카, 태국, 필리핀, 동티모르, 대만 등등 이 시기에 이루어졌던 오월판화 전시는 마치 현지의 민주화 운동을 격려하고 민주화 운동에서 탄압받는 그들의 아픔을 위로하는 전시가 되었다. 또한 이 전시를 통해 현지의 양심적인 화가들을 만날 수 있었고, 그들과 연대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제 3시기는 2004년 이후부터 다시 새로운 계기를 얻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무차별적으로 진행된 결과가 아시아 내의 분쟁을 유발할 조짐을 보이고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오월판화의 중요한 내용 중 하나는 우리 역사의 정체성에 관한 스스로의 질문이 있다.
백주대낮에 군인에 의한 이러한 처참한 학살이 일어날 수 있었던 근본 원인 즉, 역사성과 우리 사회의 정체성에 관한 질문이다.
아시아의 거의 모든 나라는 우리나라가 갖는 정체성의 질곡을 서로 쌍둥이처럼 닮아 있다.
근대시기에 외세의 잔혹한 식민지 시절을 겪고, 해방과 독립이 이루어진 근세기엔 독재정권과 민족분쟁에 시달리며 대규모의 학살이 이루어 졌다.
이러한 모순을 극복하고 아시아의 평화를 만들어 내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묻는 전시가 바로 현재 진행되고 있는 대부분의 ‘오월판화’ 전시이다.


* 작품 가운데는 ‘투사 작가’로서의 면면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작품들과 더불어 유독 밥,나무,새,꽃이 빈번하게 작품 소재로 사용되어 온 것을 볼 수 있다. 이 같은 상징들을 통해 보여 주고 싶었던 세계는 무엇인가.

___ 이 질문은 오월판화 전시의 초점과 상관없이 말이 길어질 수 있으므로
다음 기회에 이야기 합시다.

* 최근 발표된 작품은 8-90년대에 보아왔던 작품과 사뭇 다른 재질로 새로운 시도를 꾀하고 있다. ‘컴바이러스 소멸부적’, ‘컴 폐인 구원 부적’ 등으로 대표되는 작품 세계는 보는 즐거움보다 읽는 즐거움이 더한 경향이 짙다. 디지털 시대와 부적의 만남은 현대에 대한 전통으로서의 ‘홍성담식 저항’으로 다가온다. 최근 작품이 보여 주는 독특한 세계에 대해 이해를 구한다.

___ 예술가는 항상 새로운 작품을 시도한다.
이러한 부단한 실험은 곧 예술가의 예술적 생명이다.
이 인터뷰의 주제인 ‘오월판화’도 역시 그 당시엔 목숨을 담보한 새로운 시도 였고,
약 70 여점 정도 남아 있는 오월판화 안에서도 부단하게 새로운 형식 실험들을 했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오월판화에 대한 기억만으로 사람들은 종종 나를 ‘판화가’라고 부른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 판화가라고 생각해 본적이 한번도 없다.
단지, 단순하게 화가일 뿐이다.
그리고 원래 나의 전공도 쉽게 말하자면 ‘서양화’다.
80년대의 어느 짧은 시기에 시대적 요구에 의해서 잠깐 판화를 했던 것이 전부다.

90년대의 작업시기엔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한 다양한 동영상들도 끊임없이 제작했고,
또한 수많은 설치작업들도 선을 뵈고 있다.
항상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하는 것은 곧 예술가의 운명이다.
진정한 예술가는 오늘 아침에 완성한 것을
오늘 밤 잠들기 전에 다시 해체하고 새로 시작하는 정신의 소유자다.

* 80년대1989년 안기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와 관련하여 검찰에 고소했지만 1995년에 무혐의처분 되었던 아픈 기억을 갖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다. 그 후로도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당시의 상황들에 대한 아픔은 이제 어떻게 자리 잡혀 있는가.
최근의 작품 활동과 관련해서 이야기 해달라

___ 이 질문도 예전에 여러 매체를 통해 답했던 것이므로 생략 합시다.


* 현재 광주를 떠나 살고 있다. 광주가 최근 아시아문화중심도시로의 탈바꿈을 꾀하고 있다. 아시아문화중심도시는 밖에서 보기에 무엇이어야 하며, 어디로 가야한다고 보는가. 무엇이 우선해야 하는가.

___ ‘이사아 문화 중심도시’라는 말 자체가 너무 불손하여 딱 실패하기 좋은 여러 요소들을 담고 있다.
일본이나 베트남, 캄보디아, 태국등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을 여행하면서 그들의 문화를 조금이라도 섬세하게 본 사람이라면 ‘문화중심도시’라는 말이 갖는 허황함과 불손함을 금방 알아 차릴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우리 한국인들은 ‘문화’를 말 할 자격이 없다.
문화를 가꾸고 육성하기 보다는 코딱지만한 경제적 이해를 앞세워 문화를 파괴하고 다양해야 할 문화적 맥락을 천편일률적인 한 가지 코드로 만들어 버렸던 과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북한’이라는 같은 민족의 삶이나 문화조차도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기는커녕 그것을 백안시하고 타부시하는 사람들이 저 다양하고 복잡한 아시아의 문화를 잘 이해하여 ‘아시아의 문화중심도시’를 만들 수 있겠는가.

아무튼 노무현 정권이 마치 동정심으로 내 던져준 ‘문화중심도시’라는 과제는
정책입안자들의 의도대로 손쉽게 곧바로 ‘산업’이 되지 않는다.
앞으로 우리세대는 물론 다음 세대까지 약 반세기 정도는 우리 살과 뼈를 깎는 투자가 기다리고 있다.
이 올바르고 엄청난 투자와 긴 세월의 기다림을 이겨낸다면 조금은 원래의 목표에 접근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당면의 과제는 여러 문화적 현상들에 ‘광주의 정체성’을 세우는 일이다.
하여, 벌써 10년 그리고 6회를 반복하는 광주비엔날레를 ‘광주의 정체성’위에 바로 세우는 일이 ‘문화중심도시’의 성공여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일 중 하나일 것이다.

* 지난 2005년 부산에 있는 민주항쟁기념관에 80년대 대표적인 민중미술 작품이 대거 기증된 사례가 있다. 항쟁의 도시 광주에서는 아직 이 같은 전례가 없다. 민중미술의 대표작가로서 특히 5월 판화의 목판을 광주에 기증하여 영구히 ‘우리 모두의 역사’, 즉 ‘광주의 영원한 오월’이게 할 계획은 없는가?

____ 아직도  ‘오월판화‘의 내용은 현재진행형이다.
나는 바로 이 ‘기증’이라는 단어 속에서 오만함과 불손함도 느끼지만
원판인 ‘목판’을 기증하라는 말이 갖은 의미에서 나에게 박물관의 유리로 만든 유물관 속에 들어가라는 말 같아서 헛구역질을 느낀다.
왜 그리도 오만불손하신가?
오월광주에 관한 모든 일들은 꼭 오월기념재단으로 귀결되라는 이야기 인가?
나는 이 말 속에서 ‘오월정신’의 박제화를 꾀하는 혐의를 읽는다.
나는 이러한 말 속에서 ‘민주’를 떠나 또 하나의 새로운 ‘파시즘’을 만들어 내고 있는 ‘오월’의 모습을 보고 있다.

수년전, 부산의 민주항쟁기념관이 개관할 당시 관계자로부터 작품의 기증을 요구 받았던 적이 있다.
나는 이렇게 말하면서 그 요구를 거부했다.
“민주 기념관이라는 대의도 좋지만 평생을 가난하게 살아가는 민중화가들에게도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시라.”

2005년 부산민주기념관에 대규모의 민중미술작품이 기증되었던 사례 속에서 우리는 몇가지 반성할 점이 있다.

그 작품들을 기증했던 분은 1980년 대부터 전주에서 작은 사업을 하면서 민중미술을 중심으로 전시하는 미술관을 운영해 왔다. 그의 미술관은 이곳 남녁 전라도의 민중미술의 중요한 전초 기지로써 역할을 했다. 그 때부터 그는 사업의 수익금 일부를 쪼개어 당대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작품들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그의 민중미술 컬렉션은 아마 국내에서 가장 중요한 수장고가 되었다. 2000년 이후 미술관 건립등등 지역사회의 조건이 수월치 않아서 결국 포기하고 그의 수장작품들이 부산민주기념관으로 기증된 것으로 알 고 있다.
그의 중요한 수장작품들이 이곳 우리들의 현장에 남지 못하고 부산으로 갈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수년전부터 어쩌다 운이 좋아서 가물에 콩 나듯이 나의 그림이 팔리게 되면 반드시 그림판매의 수입금 중 일부를 후배 민중화가들의 그림을 사 모으는 것에 사용하고 있다.
그들의 그림을 컬렉션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이기도 하지만 평생을 가난하게 살아가면서 올 곧게 민중미술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후배들에게 약간의 힘이라도 보태기 위해서 이다.

각종 기념관의 책임자와 실무자들은 아직도 그 지긋지긋한 구태의연함 속에 젖어 있는가?
그럴 듯하게 외관을 분칠하고 대의명분으로 치장하여 먼저 ‘하드웨어’만 갖추어 지면
속 알맹이는 그저 이런저런 기증을 통해 만들어 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번듯하고 그럴듯한 건물, 각종 기념관 건물, 각종 전시관 건물들.... 아직도 그러한 ‘하드웨어’가 그 속에 담기는 여러 소프트 웨어들 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가?

각종 기념관 건물들 혹은 전시장 건물들을 지을 수 있는 건축비의 단 10퍼센트만이라도 각종 문화의 아카이브에 투자했다면 지금쯤 광주는 뭇사람들이 이미 ‘문화중심도시’라고 목청껏 불러대며 부러워 할 것이다. (이상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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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五月'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 오월재단 기관지'주먹밥'과 인터뷰/2006.5
이름: damibox


등록일: 2006-10-22 08:39
조회수: 3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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