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담의 그림창고


         내 예술의 최고 스승은 현실이다
     -우리 시대의 최고 리얼리즘 화가 홍성담-


김규항의 소개와 전적인 도움으로 5월의 화가 홍성담 선생을 만났다. 지난 6월 9일 일산의 한 카페였다. 인터뷰를 풀면서 새삼스럽게 놀랬던 그의 웃음이었다. 아직도 나는 왜 그의 웃음 언저리를 돌고 있는지를 명료하게 쓸 수는 없다. 참 오랜만에 누워 본 푹신한 솜이불처럼 따뜻하고 평온한 웃음이었다고 써 본다. 그의 깊은 사유와, 순결한 열정, 그리고 인간의 존엄과 생명에 대한 옹호를 이렇게 뿐이 담아낼 수밖에 없는 한계가 우울할 따름이다.


                  대모산 자락에 신청한 민주열사묘역

-민주열사묘역 조성을 위해 팔을 걷어붙인 것으로 안다.

민주 열사들은 마석이나 광주에만 80, 30 여 분씩 집단적으로 누워 계실 뿐, 250 여 분은 그 묘가 전국으로 산재해 있다. 이소선 여사를 비롯한 유가족들의 대부분은 연로해서 열사의 추모기 때면 찾아다니기 힘들어하고 있다. 열사들과 함께 민주화 운동에 헌신했던 분들도 1년에 한 번씩 그분들을 찾아다니기가 쉽지 않다. 한 군데 모아 놓자는 소박한 꿈이 유가족들에게 있었다. 살아 생전에 열사인 자식들을 한 자리에 모아 놓겠다는 심정으로 1천 평이나 2천 평 쯤 되는 조그만 동산이라도 좋으니 조성해 달라고 정부에 요구했다. 국회 의사당 앞에서 그렇게 천막 쳐 놓고 400일 동안 농성한 결과가 민주화 보상 법안의 제정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정치권으로 가면서 보상 문제가 커져서 행자부 산하에 보상 지원단이 생겼고, 명예회복 분과 위원회, 진상 규명 분과 위원회, 심의 위원회, 그리고 기념 사업 분과 위원회 등 4개 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유가족들의 400일 동안 힘겨운 농성의 결과가 민주화보상법안의 제정으로 나타났는 데, 누구든 묘역에 신경을 써주어야 하는 데 그렇지 못한 실정이었다. 가관은 명예 회복을 위해 이 사람이 정말 민주화 운동을 한 사람인지 아닌 사람인 지를 심의하고 있다는 점이다. 누가 그 심사를 하는 지 잘 모르겠다. 나는 아직 신청을 안 했으니까. 창피하다. 그들이 어떻게 나를 심사하겠는가. 나라의 최고 통치자인 대통령에 의해 사면 복권이 되었는 데 무슨 또 명예 회복을 위한 심사가 필요한가. 보상 문제도 그렇다. 고문 후유증으로 지금도 병석에 누워있거나 매일 또는 정기적으로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는 사람들, 또 고문의 결과로 정신적인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은 충분히 보상을 받아야겠지만 우리 같이 징역 한 3-4년 살고 나와 이렇게 잘 살고 있는 사람에게 무슨 보상이 필요한가. 20년 징역을 살았든 30년 징역을 살았든 우리는 지금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운 일 아닌가.  



-민주열사 묘역을 서초구 대모산 자락에 신청한 곳은 몰랐다.

장례 장묘 문제는 유가족의 의견이 절대적이다. 광주를 비롯한 8곳의 후보지를 모두 돌아보시고 대모산 산자락, 그러니까 헌인능의 오른편쪽(왼쪽엔 안기부가 자리잡고 있다)을 유가족들이 원하고 계신다. 대모산은 젊은 풍수 학인들도 인정하는 곳이다. 그분들은 풍수학자라고 해서 옛날 지관들의 모습이 아니다. 사회과학적으로 또는 인문 지리학적으로 땅을 고찰하면서 우리 옛 풍수의 전통도 반영하며 땅을 평가한다. 나도 풍수를 좀 안다. 대모산은 큰 어머니의 품이다. 거기서 자식들의 뼈를 태운다? 별로 좋지 않다. 그런데 이미 우리를 고문하고, 탄압하고, 국가 반란죄라든가 간첩으로 조작하여 때로는 죽이고 때로는 고문을 해서 지금까지도 휴유증에 시달리게 한 국정원은 어머니 품으로 들어갔다. 어머니의 품은 나쁜 자식도 품고 좋은 자식도 품어서 좋게 상생시킨다. 두 아들이 그 품 안에서 용서와 관용으로 그리고 새로운 세계에서 자기의 할 일을 올바르게 인식하며 미래를 준비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국정원 관계자들도 열사 묘역을 바라보면서 자기 선배들이 저질렀던 범죄들을 되풀이하지 않고, 더 이상 독재 정권에 봉사하길 거부, 정말 바른 정보화의 사회를 위한 역할을 숙고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서초구 구민들이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서초구는 서울시 화장터를 받는가 아니면 민주열사묘역을 받든가 해야 할 것이다. 국정원하고 화장터가 나란히 있으면 서초구민들이 보기가 좋을까. 그러나 화장터도 싫다, 묘역도 싫다고 하면 나는 이런 운동을 전개할 것이다. 거기가 문화재 보호구역이라는 데 국정원은 어떻게 그곳으로 들어갈 수 있었는 지 서초구청과 국정원은 소상히 밝혀야 한다. 계발이 가능하도록 평가를 해 준 당시의 전문위원들의 명단을 내 놓아야 한다. 학자 요놈의 새끼들! 우리는 서초구민들의 딱지가 붙어있는 시신은 전국 어느 묘지에도 못 받게 만들 것이다. 화장도 못하게 할 것이다. 자기 어미나 아비가 죽으면 금딱지를 붙이든 은딱지를 붙이든 자기 집에다 호화 분묘를 하든 맘대로 해야 할 것이다. 화장을 하려면 자기 집 가스렌지를 이용해야 할 것이다.  



- 민주열사묘역의 그림이 독특하다고 들었다

지금까지 독재 정권과 개발 독재가 한 일을 보면 뭐든지 평지 풍파를 일으켜서 땅도 판판하게 깍고, 거기다가 먹출 탕탕튕겨서 건물 세우고 묘지 만들고 숲 만들고, 중앙에 통로를 만들어서 보기 흉한 높은 기념탑을 세우는 식이었다. 그런 것만을 봐온 진보 진영 사람들도 민주열사묘역을 그렇게만 생각하는 걸 보았다. 좋은 것, 정말 민주적인 문화의 형태를 안 봐서 그렇다. 추모비도 세우지도 말자고 했다. 우리 열사들이 진보적으로 살아갔으니 그 땅도 진보적으로 써야 옳다. 절대 주워진 공간을 해치지 말고, 불도자도 못 들어가게 하고, 추모비, 멋진 건물 세울 돈으로 멋진 느티나무 사다가 거기 오솔길 만들어서 정말 한 뼘의 땅이라도 국민들, 시민들에게 명상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들게 하자고 했다. 이미 유가족 지도부의 양해를 얻어 일을 추진하고 있다.
    


- 진보 진영까지도 파시즘적인 발상으로 민주 열사의 묘역을 일상의 삶으로부터 격리시키려한다는 선생의 지적에 충격을 받는다

그리스 신화에 괴물과 오래 동안 싸우다 괴물을 닮아버리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명상을 통하여 자기 모순과 대면하지 않는 한 자기 모순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 남의 모순만 보일 뿐. 지치고 병들고 정말한 민중과 시민들이 열사묘역의 오솔길을 걸으면서 그 분들로분터 세상을 살아나갈 수 있는 힘을 얻고, 삶의 한 복판으로 걸어 들어오는 그런 묘역을 꼭 만들어야 한다. 사실 열사들이야 어디에 누워 계시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우리 산 자들이 문제지.



- 격리된 공간이 아니라 우리 삶의 공간 속에 열사의 묘역이 있어야 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세계의 여러 곳을 여행해 본 사람들은 한국의 산천이 얼마나 귀한 지를 안다. 짐짓 여기에만 있던 사람은 캐나다나 스위스의 산천들이 아름답게 보이겠지만, 천만에다. 못 오를 만큼 높은 산이 아름답겠는가? 못 오를 산은 절대 아름답지 않다. 한국에 못 오를 산은 없다. 그냥 원시림이어서 아름다운 게 아니다. 사람의 손 떼가 묻어 있고 사람과 더불어 완성되어 있는 풍경이 아름다운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일과 놀이가 있는 풍광이 아름다운 것이다. 사람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다. 사람의 생활과 채취가 묻어 있어서 더욱 더 빛나는 아름다움. 이렇게 사람이 와서 자기의 채취를 남길 수 있도록 한국의 자연은 여백을 제공한다. 그 여백에는 공식이 있다. 그렇게 해서 자연이 남겨놓은 그 여백에 우리의 것을 잘 채우는 것이 우리의 아름다움이다. 그걸 어떻게 가져 갈 것인가가 숙제겠지만.



- 민주열사묘역엔 민주도 예술도 다 들어 있는 것 같다

예술적 형상화란, 산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학습의 장이 되게 하기 위함이다. 3.1운동부터 6월 항쟁까지의 역사를 나열해 놓는다고 학습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예술이란, 특히 리얼리즘이란 그대로 재현한다고 되지 않는다. 어떻게 자연의 여백 속에서 예술적 형상화를 이뤄내느냐가 중요하다. 그래서 구체적 형상이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느끼게 해 주는 것이 리얼리즘이다. 구체적으로 느끼게 해주고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주는 것은 학문이나 사진이지 리얼리즘은 아니다. 예술적 형상화는 절대 강제하지 않는다. 역사성과 예술성과 개인의 개성, 그리고 개인이 체험한 개인사가 더불어 어떻게 잘 뒤섞여져서 새로운 감동을 만들어 낼 것인가. 바로 이것이 예술적 형상화의 관건인 것이다. 기념비적인 것들을 통해 강제하고 억지로 주입시키는 것은 그것 자체가 파시즘의 원리에 다름 아니다. 열사묘역에 와서 역사의 감동만 느끼면 되겠는가. 사랑하는 연인들이 왔다면 그곳을 통해 자신들의 사랑이 더욱 깊어짐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민주화 투쟁이 돌맹이나 화영병을 던지는 투쟁만 있었던 것은 아니지 않는가.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사랑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그 운동에 우리는 감동을 받는 것이다. 그 사랑이 구구절절하게 표현되는 형상적 시스템을 가져야 한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개될 지는 나도 모르겠다. 의견을 모으고 시뮬레이션을 해 가면서 근접해 가려고 한다.



                                운동과 역사 속에서의 예술의 역할

- 운동과 역사 속에서 예술의 역할은 무엇인가

학문적으로 혁명사를 읽어 가지고는 당대의 호흡을 느낄 수가 없다. 결국은 우리가 에밀 졸라나 빅토르 위고, 솔로 호프와 막심 고리끼, 레핀의 그림이나 소설 속에서 그 시대의 민중들이 어떤 삶을 살면서 혁명을 전개해 나갔는 지에 대한 감동을 경험한다. 러시아 혁명과 프랑스 혁명은 몇 개의 뛰어난 예술 작품을 남겨 놓았다. 굉장히 귀중한 것이다. 잘 쓰여진 보고서나 연구 논문 한 편 보다 한 장의 그림이 그 시대를 더 잘 표현할 수가 있다.  



- 광주를 주제로 지금까지 나온 예술에 대한 평가는 어떤가

소설로 잘 형상화 된 것은 홍희담의 단편 <깃발>이다. 가장 빨리 나온 게 시였지만 결실을 거두지 못하고 흩어진 감이 있다. 5월 시 동인이다 뭐다 하면서 한 동안 설쳤는데 나는 그들이 지금 어디서 무얼 하는 지 모른다. 영화는 <꽃잎>이라든가 하는 한 두 편의 영화가 있는 데, 전혀 아니다. 볼 것이 없다. 그림으로는 5월을 연작으로 연작 판화 <새벽>이 유일하다. 작년에 연극으로 <봄날>과  <오월의 신부>가 나왔는 데, 엉망 부루스였다. 관에서 돈 받아 가지고 돈 잔치로 하는 요런 짓거리는 절대 성공하지 못한다. 80년대 중반, 5월의 진상을 규명하는 차원에서, 그리고 학살자를 고발하는 차원에서 목숨을 걸고, 한 번 공연하고 감옥 갈 각오를 하고 올린 작품 중에 마당극 <일어서는 사람들>과 무대극 <금이의 오월>을 능가할 수 있는 작품이 살아 생전 나올 수 있을까 싶다. 그 두 작품에는 가쁜 호흡이 묻어 있다. 내가 이 작품을 올리고 감옥에 잡혀 갈 것이라는!  



홍성담은 예술가를 한 시대의 예민한 성감대에 비유한다. 그는 자본주의의 시류에 영합하여 앞서가는 예술가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을 통한 유익이 전혀 없지 않음을 말했다. 서태지는 상업적이었으나 그의 교실이데아와 같은 노래가 우리 교육에 끼친 영향을 예로 들면서 그들의 존재의 필요성을 인정했다. 그러나 패션도 없고 민족의 역사와 약자의 고통에 무관심한, 고상하게 제 골방에 틀어박혀 예술을 논하는 아카데미 중심의 미술가들에 대해서는 죽일 놈들이라 목청을 높였다. 전인권의 음악을 신중현 이후를 대변하는 한국적 락(rock)이라 평가를 했고 빅토르 최의 음악이 얼마나 훌륭한 리얼리즘인지에 대해서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젊은이들이 총체성을 결여하고 한 스타에 기대서 자신의 정서를 무절제하게 방출하고 있다는 지, 어떠한 사안이나 사물을 총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오이의 단면을 경험하고는 그게 오이의 전부라 단정하는 주체의식의 결여도 아쉬워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그가 요즘 세대를 보며 가장 불만을 느끼는 대목은 죽음을 담보로 한 자기 모순과의 싸움이 없다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는 바하의 음반을 거의 다 가지고 있을 정도로 좋아하고, 장사익이나 안치환의 팬이라는 사실도 숨기지 않았다.
  
- 이 마당극과 무대극이 아직도 공연되는가

그렇다. 해마다 5월이면 광주에서 공연을 한다. 이런 정도가 우리에게 남아 있다.



                            잊을 수 없는 광주 체험

- 잊을 수 없는 광주 체험은 무엇인가

첫 발포가 있었던 5월 21일 오전 10시 경이었다. 금남로에 시위대가 빡빡하게 들어 차 있었다. 계엄령 철폐 등의 구호를 외치고 있을 때 갑자기 아득한 곳에서 들렸다. 연발 사격이 짧은 간격으로, 그러나 작게 들렸다. 얼마 후 사람들이 밀물처럼 도망갔다. 나도 금남로의 광주은행 구 본점이 있었던 골목 뒤 어디엔가 시민들과 함께 숨었다. 우리가 숨은 곳에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총 맞은 사람이 있었다. 꿈틀거리고 있어 계엄군에 빼앗기기 전에 데려가려고 두 사람이 낮은 포복으로 그를 데려 왔다. 뻘건 핏덩어리가 함께 끌려 오고 있었다. 와서 몸을 바로 눕히니 배에서 피가 콸콸 쏫아지고 있었다. 관통을 한 것이다. 끌려오던 것은 창자였다. 목의 동맥을 만져보니 뛰지가 않았다. 절명을 했던 것이다. 그 전에 비가 온 후였기 때문에 유난히 햇빛이 찬란했다. 나는 작렬하는 태양 빛 속에서 반짝거리는 물체를 발견했다. 아직 삭지 않은 보리알이었다. 절대 부자집 자식은 아니었다. 어디 변두리 사람이었을 것이다. 아침에 어머니가 해 준 밥을 먹고 그래도 민주화를 만들겠다고 나왔다가 분절한 것이다. 광주 항쟁하면 나는 정말 그 보리 밥알뿐이 생각나지 않는다. 보석처럼 빛나던 보리 밥알 하나! 광주 항쟁에 대한 내 모든 기억은 그 핏덩어리 속에 채 삭지 안고 보석처럼 빛나던 그 보리 밥알 하나다. 난 그 때 비겁했다. 그러나 너무 무서워 뒤돌아 집으로 향하면서도 맹세를 했다. 보리 밥알을 심고, 저 시신이 거름이 되어 훌륭한 보리를 키워 황금 들녘을 이루고, 그걸 먹고 우리 후세들이 5월의 진실을 전국화해야 한다고 말이다. 한반도를 저 보리알로,  출렁이는 6월의 황금 들판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87년의 6월 항쟁을 80년 5월 항쟁의 일정한 완성으로 본다. 나는 그 보리밥알 하나에서 정말 절대 고독하면서도 절대적으로 함께 해야만 하는 인간 존재에 대한 존엄성, 그리고 그 생명의 사슬이 끊임없이 순환된다는 것, 죽는 것도 살아있는 것도 없다는, 오직 살아서 우리 안에 떠돈다는 것을 경험했다. 이 밥알은 끊임없이 내 그림의 주제가 되었다. 그래서 혹자는 나의 밥 시리즈를 김지하의 밥으로 이해하기도 하는 데 천만의 말씀이다! 나의 밥은 절대 절명의 그 순간이 있다. 김지하의 밥은 요설, 먹지 못하는 밥이다. 내 밥은 피로 지어진 밥이고.


                                  25일 동안 받은 물고문

- 안기부에 정확히 얼마나 수감되었나

정확히 25일이었다. 안기부 보기에 미운 짓거리를 많이 했다. 광주 재야 운동권의 어른들과 젊은이들과의 허리 역할을 하면서 자금이라든가 하는 것들을 관리했다. 광주에서 내가 시작한 문화운동은 전국화가 되었다. 얼마나 신경이 거슬렸겠는가. 그러던 차에 걸려들었던 것이다. 원수를 갚아야하지 않았겠나. 나는 섬에서 태어났다. 학교를 가려면 바닷가를 걸어서 십리를 갔다. 아침저녁으로 바다를 바라보면서. 내 생활 터전은 바다였다. 어디 갔다오다가 배가 고프면 뻘에 들어가 구멍 몇 개 쑤시면 낙지라든가 방둥이라든가 조개 같은 것을 잡아먹고 배부르게 걸을 수 있었다. 객지 생활을 하다 고향을 가려면 하면 바다를 건너야 했다. 바다라는 물의 이미지는 내게 여러 가지 귀향 본능을 느끼게 한다. 객지 생활 중 어렵거나 유혹을 받을 때 나는 고향 바다를 생각하며 자책했고, 되돌아가던 고향 바다를 생각하면서 힘을 얻었다. 바다는 그렇게 내 본성으로서의 이미지였다. 그런 바다가 내 고문의 도구가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 처음부터 물고문이었나

25일 동안 팬티를 걸쳐 보지 못했다. 알몸으로 25일 동안 물고문을 당했던 것이다. 물고문은 절묘한 기술을 요한다. 박종철 사건에서 보는 것처럼 기술이 없는 것들이 동료 고문 기술자 흉내를 내다가 사람을 죽인다. 이미 고통을 넘어서 생명을 포기하고, "이젠 내가 죽는구나, 가는 구나" 하는 순간 딱 건져 놓는다. 절묘하다. 그 기술을 나도 배워야 겠다.(웃음) 어느 순간, 동료들을 다 불어야 하는 절박한 순간이 왔다. 어김없이 그들은 고문 욕조에 나를 담궜고, 고통을 넘어 모든 것을 포기하는 순간, 고향의 푸른 바다가 쫙 펼쳐졌다. 처음엔 죽어서 고향 바다에 온 것으로 착각을 했다. 이게 꿈인가. 죽어서 내 혼이 고향에 온 것인가. 그렇지만 내가 살아 있다는 걸 느꼈다. 고향의 바다를 한 번 보고 나니까 힘이 났고, 그래서 또 "죽이라"고 악을 써댔다.  



- 끝까지 고문을 견뎌 내면서 의리를 지킨 선생 일화가 안기부에 전설로 남아 있다고 들었다

난 민족이라든가 조국이라든가 국가라든가 하는 것은 좆도 아니라 했다. 언제라도 배반 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내 친구를  배반할 수는 없다고 했다. 내 혀를 자르더라도 못 분다고 했다. 그 한마디가 전설이 되었다.(웃음) 지금까지 조국의 이름으로, 민족의 이름으로 고문을 참고 견디는 사람은 보았어도 친구의 이름으로 고문을 참고 견디는 사람은 처음이었다고 했다. "이 새끼가 깡패야 뭐야! 이런 놈이 어떻게 민주화 인사야"(웃음)라며 고문을 했었다. 감옥을 나와서는 물만 보면 두려웠다. 물은 만물의 기본이 아닌가. 나를 물고문했던 사람들을 일단 내가 용서와 관용으로 설득해야 하고, 그런 기본 전제 아래서 캠퍼스와 붓으로 물을 치받아서 내 관념을 회복시켜야겠다고 결심했다. 이를 회복시키지 않으면 예술가로서 나의 상상력은 결정적인 흠을 갖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한 산고 끝에 나온 게 물 속에서의 스무날 연작이다. 일단 그림으로 우선 나를 회복하고 저들을 용서하고 관용의 차원에서 그렇게 끌어갔다. 그러나 만약 이 땅에서 또 파시즘의 권력을 옹호하기 위해서 또 다시 고문이 자행된다면 '물 속에서의 스무날' 차원으로 물을 해석하진 않을 것이다. 내가 어떻게 당했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 줄 것이다. 내가 어떻게 짐승이 되어가고 삶과 죽음을 넘나들었는지, 그리고 나를 도살하는 자들의 행위가 어떠했는 지를 사실적인 표현으로 그대로 보여 줄 것이다. 저 사람들의 고문을 나는 그때는 거침없이, 그리고 낱낱이 연작으로 보여줄 것이다. 국내에서만 보여주는 게 아니라 유럽 의회와 유엔 본부 앞에서 야외 전시회를 강행할 것이다. 분명하게 경고해 둔다. 다같이 짐승이 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왜 자기들만 짐승이 되지 나까지 짐승이 되어야 하는가.



                                  민주화와 통일

- 우리의 민주화를 어떻게 보고 있나

파시즘의 어두운 그늘은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다. 엊그제 울산에서도 노동자들의 엄청난 시위가 있었고 바로 두 달 전에는 부평에서 대우 자동차 노동자들을 경찰들이 무참하게 팼다. 거 참, 실없는 경찰들이다. 일자리를 잃지 않겠다고 시위를 하는 노동자들을 그렇게 두들겨 팰 수 있나. 아직도 IMF는 계속 되고 있고, 이로 인해 파괴된 가정은 얼마며, 빈익빈부익부의 현상은 또 얼마가 골이 깊어졌는가. 우리 사회로부터 경제적이든 정치적이든 또는 문화적이든 일정한 기득권을 누리는 자들이 빈익빈부익부가 이토록 심화되는 사회를 어떻게 감당하려고 하는 지 이해가 안 될 정도다. 조짐이 영 안 좋다. 정말 안 좋다. 그러나 나는 좋다. 왜냐! 전라도 말로, 누룽지는 누를수록 좋다. 상처는 곪을수록 좋다. 언젠가 이것이 혁명적인 열정으로 터지게 될 테니까. 가진 자들의 목을 전부 자르게 될 테니까. 이처럼  빈익빈부익부 사회가 계속되면, 정말 빈곤하고 우리 사회 속에서 소외받는 자들의 덩치가 점점 커지면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자들의 목이 과연 온전할 수 있겠는가. 호텔이나 좋은 콘도에서 인생을 즐길 뿐, 인위적으로 꾸며진 정원들을 바라보면서 아름다운 세상을 노래할 뿐, 빈한 자들이 어떤 생활을 하는 지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다. 요즘도 굶는 사람이 있느냐 반문한다. 최고급 자가용과 훌륭한 아파트와 콘도 열쇠 때문에 아무 것도 보지를 못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소외 받는 사람들이 자기 지위를 상승할 수 있는 기회가 갈수록 박탈당하고 있다. 옛날에는 교육이 지위 상승의 기회를 보장했었지만 지금은 돈이 그걸 대신한다. 어느 신문의 통계는 강남이란 한 지역의 서울대 입학률이 40%가 넘는다고 말해 준다. 이 비율이 점점 상승추세라는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 서울대학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학문? 천만의 말씀이다. 출세의 지름길이다. 그래서 서울대폐지론이 나오는 게 아닌가. 서울대의 경쟁력은 세계 100대 대학 안에도 못 들어가는 형편이다. 그 좆같은 대학이, 아무 실력도 없는 대학이 우리 사회의 모든 기득권을 가지고 출세의 온상과 지름길이 되어 있다. 얼마나 한심한 사회인가. 그런 놈의 대학을 나온 사람들이 모든 기득권을 다 좌지우지하고 있다.  



- 5월 뿐 아니라 통일 화가로 알려졌는 데 현시점에서 보는 통일은

통일은 매우 중요하다. 앞으로 지난한 세월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마음놓고 통일을 말하고 연구할 수 있는 때가 되었다는 점에서 통일이 멀지는 않았다. 문제는 세계 여러 나라 가운데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이 나라의 천민자본주의다. 김대중 정부가 시행한 가장 획기적이고 가장 혁명적인 정책으로 나는 의료보험과, 국민연금 정책을 꼽는다. 그러나 이 두 정책 때문에 DJ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큰 타격을 받았다. 무슨 이유 때문이었나. 나라의 세금 문제가 맑고 명확해지지 않는 상태에서는 어떤 사회 복지정책도 공허한 망상일 뿐이다. 세수가 맑고 투명해서 돈을 많이 번 사람이 의료보험도 세금도 많이 내야 한다. 그걸 투명하게 하자는 데 반대한 놈들이 누구인가. 정치인들에게 뒷돈을 댄 대기업가들이 아닌가. 복지정책은 나랏돈으로, 국민의 세금으로 펴는 게 아닌가. 그럴려면 국민의 수입 지출이 맑고 투명해야 평등이 실현된다. GNP가 1만 달러가 넘었다느니, 선진 OECD에 가입했다느니 하는 나라에서 세수하나 정확하게 산출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지 못했다는 게 말이 되나. 이렇게 미천하고 천박한 자본주의 사회가 대한 민국이다. 자본주의의 모든 쓰레기가 다 모인 쓰레기통과 같은 사회가 우리 나라다. 이런 천박한 정신구조로는 통일이 되어도 문제다. 50년 동안 완벽하게 단절되어 있던 두 사회를 어떻게 이 천박한 시스템으로 통합하겠는갸. 안 된다. 그러면 혼란이다. 그런 놈의 통일이라면 반대한다.  



-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배워야 하겠는가.

80년대다. 우리의 전 역사 속에서 80년대의 그 10년간만큼 모두가 함께 더불어 살아갈 사회를 염원했던 시대가 있었던가. 국민적 합의가 그만큼 일치되었던 적이 있었던가. 개인들이 역사에 대한 진정성과 헌신성을 그토록 뜨겁게 가졌던 적이 있었는가. 없었다. 80년대라는 역사에 대한 진정성과 헌신성을 회복하거나 키워내지 않는다면 정말 통일은 혼란이다. 그러나 이 말이 80년대로 돌아가자는 의미는 아니다. 어떻게 새로운 세기에 맞게 그 때 우리가 진정으로 바쳤던 인간에 대한 사랑, 역사에 대한 진정성과 역사에 대한 헌신성의 기운을 다시 회복시키느냐가 문제다. 이것이 첫 번째 통일 운동이라 생각한다. 그러한 도정의 한 가운데서 민주화 열사 묘역 사업은 사업으로서가 운동으로서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민주열사묘역 사업은 장례 투쟁이다.  



- 감옥 연작이 3월에 마쳤다고 들었다. 많이 힘들었다고 들었다.

기본적으로 작업 자체를 지옥처럼 보는 경향이 있다. 작업장 문으로 들어갈 때면 꼭 지옥으로 들어가는 것 같다. 대 여섯 잔의 커피를 마시며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한다. 작업실 들어가기를 즐거워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러나 이번 '감옥 연작'을 그리면서는 마음이 편했다. 감옥을 낙관적으로 그렸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과의 교통, 외부와의 접촉을 철저히 단절시키는 곳이 감옥이다. 그러나 실제의 감옥은 독방에 갇혔으나 끊임없이 교통을 하고, 악 써가며 자기의 의견을 주장하고, 정성스레 귀를 기울여 듣는다. 해체 직전의 감옥을 그렸던 것이다.



- 광주를 떠나면서 광주의 명예가 멍에가 되었다는 점을 아프게 이야기했었다. 어떤 의미인가.

5월 항쟁 당사자의 시대는 지났다. 당사자들이 아직까지 좌지우지했기 때문에 부패와 타락은 불가피했다. 회사도 그렇지 않는가. 창립을 해서 회사가 정상적으로 돌아가면 전문경영인을 들여와야 한다. 그런데 회사를 만들었다고 해서 아들, 며느리, 사촌까지 끌어다가 패밀리의 마피아로 만드는 회사는 새로운 시대에 맞서 항해를 못한다. 파도 앞에서 부서진다. 5월 항쟁 당사자들은 제 역할을 멋지게 했다. 당대에 명예 회복도 하고 보상도 받은 경우는 세계 어느 나라의 역사에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아직도 많은 점에서 미약하다. 학살 책임자가 가려지지 않았고,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다. 그러나 세대교체를 준비해야 한다. 우리 구세대는 '광주의 5월' 앞에서 저항의 정신은 길렀지만 영성의 문제로까지 확대하진 못했다. 다음 세대는 '5월의 정신'을 확대시켜 나가되, 그것이 생활 속에서 우리 민족의 영성으로 자리 잡게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확대되었을 때 올바른 진상규명도 되고, 그런 도덕성과 영성이 충만할 때 당연히 가해자도 그 앞에서 참회하고 징벌받게 될 것이다. 새 세대는 우리와는 다른 경로를 통해서 그들의 정서 속으로 압박해 들어가야 한다.


                                                            광주의 정신

- 광주의 정신은 한마디로 무엇인가

별 게 아니다. 간단하게 생각했으면 좋겠다. 죽지 말고 함께 살자. 우리가 힘을 합쳐서 총맞은 사람을 지키고 우리 사는 공간을 지키자. 이게 5월 정신의 핵심이다.  



- '광주 항쟁 10일간의 경험'을 온 세상에 이루는 것이 꿈이라 했다.

사람을 만나는 일이 얼마나 아름다운 지를 보여준 세상이었다. 평상시 이유 없이 누가 쳐다본다 싶으면 "뭘 봐" 하며 시비가 붙지 않나. 툭 어깨를 건드리고 가면 싸움이 벌어지지 않나. 그 때는 달랐다. 보는 사람마다 웃어 주었고, 어깨를 툭툭 치며 지나갔다. 무언이었지만 , '우리 살아서 여기를 지키자. 아직도 살아 있으니 즐겁다. 이 즐거움을 죽지 말고 살아서 지키자'는 의미였다. 가진자들은, "이 고생이 한 달 가겠느냐. 우리 식구 한 달 먹을 것 내놓고 가져왔다"고 했다. 돈 있는 사람들은 돈을 내 놓았다. 그러니까 광주 시내의 거렁뱅이들이 어딜 가든 밥을 주니 얼마나 좋았겠는가. 돈 달라 하면 찡그리고 가던 잘난 사람들이 거렁뱅이를 보면 밥을 퍼 주며 얼른 와서 먹으라 했다. 이를테면 그것이 예수가 이야기한 낙원이 아니겠나. 우리는 그렇게 10일을 보냈다. 1980년 5월 27일의 캄캄한 새벽 4시부터 작전을 펼치며 물밀 듯이 밀려드는 계엄군과 저들의 탱크와 헬기, 총소리와 군홧발 소리에 우리가 잠시 절망을 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동터오는 새벽을 보면서 즉시 절망에서 벗어났다. 그 핏빛 새벽도 절망으로 우릴 덮치지는 못했다. 그 아름답고 소중한 '10일간의 경험' 때문이었다. 그 기억만으로도 우리는 평생을 살아 갈 수 있을 것이다. 명예회복, 진상규명, 보상이 안 되어도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존엄하고, 사람이 사람에게 대접받고 섬김 받는 사회를 나는 만들어갈 것이다. 80년의 광주가 보여 준 인간에 대한 대접과 인간에 대한 섬김은 통일 이후까지 계속되고 확장되어야 한다. 광주 항쟁은 거기다.  



                                  권태로운 일상 속에 있는 진리

- 대형 교회의 세습을 어떻게 보나

교회가 지 것인가, 예수 것이지. 신의 것이고 신의 아들의 것이지. 교회를 소유의 개념으로 보기 때문이지. 한국 교회는 성장한 만큼 타락했다.  교회는 하나님의 처소이고 그분과 만나는 자리 아니가. 은밀하게 하나님과 대화하는 자리가 아닌다. 그런 교회가 어떻게 개인의 재산이 될 수가 있나. 이런 환장할 노릇이 어디 있는가. 대형 교회의 세습을 보며 가슴이 찢어진다. 한국 기독교가 이 땅에 손님으로 들어와서 못된 짓거리를 많이 했다. 기독교의 덩치가 엄청나게 커져 이젠 정치도 어찌 못 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렇다고 기독교를 놓고 국민운동을 전개할 수 도 없는 노릇 아닌가. 한국 기독교가 살려면 스스로가 자성하여 이 땅에서 저질렀던 해악들을 반성하지 않는다면 앞으로는 설자리가 없다. 갈수록 그럴 것이다.    



- 신앙이 있는가

없다. 그래서 굉장히 자유스럽다.



- 여기까지 살아오는 동안 기억에 남는 만남은

중국의 도라든가 한시를 읽으며 많은 성찰을 얻었다. 대학 3학년을 마치고 폐병이 들어 1년 반을 요양원에서 보낸 적이 있다. 절망에 시간들이었다. 요양원에는 우리 사회의 밑바닥 인생을 살다가 병을 얻어 요양원에 들어 온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과의 은밀한 대화를 나누며 역시 성서가 거짓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했던 것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신을 자기 모 안에 모시고 있다. 그래서 어떤 놈이 못된 짓거리를 하면, 그 못된 짓거리만이 미운 게 아니라 그 사람 안에 모셔 놓은 영성이나 신까지도 저 놈이 더럽혔다는 생각 때문에 밉다. 그 불쌍한 민중들과의 대화는 몸 안에 있는 신의 고귀한 모습을 발견하는 시간이었다. 이것이 내 평생 살아가야 할 방향을 정하게 했다. 절대로 신과 진리를 먼 곳에 있지 않는 것을 배운 것이다. 자기 옆사람에게서 신성을 느껴야 자기 몸 안에 신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그래야 자기 몸을 함부로 할 수 없다. 진리는 자기가 발붙이고 있는 상황, 그 권태로운 일상 속에 있다. 그 일상 안에서 진리와 신성을 느끼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스스로 예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비하지 않고서는 만날 수 없다. 항상 긴장해야 한다.


- 그 10일간의 경험은 통일 이후까지 심화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 때까지 선생의 예술은 무엇을 할 것인가

나는 그렇다. 기본적으로,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그 어떤 것도 내 그림의 적이다. 그림에서 적으로 떠 오릴 것이다. 그것들이 사라질 때까지 끊임없이 내 그림을 통하여 공격할 것이다. 나는 또한 광주민주화 항쟁의 그 10일간 맛보고 경험했던, 인간으로 대접받았던 그 낙관을 내 그림의 토대로 하겠다.  혹자들은 요즘의 내 그림을 놓고 나이가 들면서 투쟁의 의지를 접었다느니, 보다 깊어지고 심화되었다느니 하는 데, 웃기는 이야기다. 그건 내 문제의 해결을 위한 불가피한 조처였다. 아직도 내 문제는 물론 우리 사회도 해결해야 할 꼴 보기 싫은 문제가 너무 많다. 그림으로 그것들을 쳐부수기 위해 나는 날이 잘 서 있는 칼을 벼른다. 성서가 말한,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거하며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는' 시대가 오는 순간까지 나는 내 칼을 벼를 것이다. 다시는 예수처럼 외로운 사람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가 얼마나 외롭게 죽었는가. 제자들마저도 다 도망쳤지 않았나. 예수는 그렇게 사람꼴을 못보고 죽었다. 끝까지 비겁하게 놀림을 당하다 죽었다. 짐승같이 죽은 것이다.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곳에서. 인간의 죽음이 그렇게 돼서는 안 된다. 그런데 아직도 그런 죽음이 계속 되고 있다. 아무도 몰래 끌려가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수 없이 죽어간다. 더 이상 예수와 같은 이런 외로운 죽음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이들이 어떻게 죽어가는 지를 보아야 한다.  


세 시간이 넘는 인터뷰에 평심을 잃은 것은 나였다. 홍성담 선생은 흔들림이 없이 친절했고 평온했다. 인간의 존엄에 대한 따스함과 인간의 생명을 지키고자 하는 어미의 강인함의 동거가 그에겐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왜 우리는 복음 안에 있다 하면서도 그처럼 따듯하지도, 그처럼 반생명적인 것들과의 싸움을 위해 날카로운 칼을 못 벼르지도 못하는 것일까.  "오소서, 살아계시는 기독교의 삼위일체 하나님이시여, …세상을 다시 한번 흔드소서." 프란시스 쉐퍼의 말이다. 홍성담 선생과 함께 이사야가 노래했던 그 세상을 바라본다.    


추신: 사진을 제공해 준 김규항 선생께 감사드린다



홍성담 연보

1955    전남 신안 출생
1979. 2 조선대학교 졸업
1980. 7 5월 진혼제를 위한 야외전(나주 남평읍 드들 강변)
1980. 11 제1회 작품전(광주 전일 미술관)
1984.8 해방 40년 역사전(서울, 광주, 대구, 전주)
1987. 5 반(反) 고문전(광주 가톨릭 미술관)
1987. 6 한국민중판화 독일 순회전
1987.8 통일전(서울 그림마당 '민')
1988.6 홍성담 판화전(독일 HENKE 갤러리)
1989.6 걸개그림 민족해방운동사
1990. 3 홍성담 판화전(미국 LA홍성담 구명위원회)
1990.11 홍성담 판화전(양심수를 위한 독일 HAMBURG재단)
1994. 3. 민중미술 15년전(국립현대미술관)
1994.5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전(서울 예술의 전당)
1995. 5. 씻김굿전(광주백년갤러리)
1995.8 전쟁과 미술전(일본오사카 국제 평화 재단)
1996.7 한국근대인물사전(서울 노화랑)
1996. 7 영국 GLASGOW 국립 현대 미술관 개관 기념전
1996. 8 홍성담 판화전(영국 EDINBURGH)
1998. 5 새로운 천년 앞에서 전(광주 시립 미술관)
        세계 인권선언 50주년 기념, 홍성담-도미야마 다에꼬 2인전(광주, 부천, 가와사키)
        판화로 읽는 우리 시대의 詩전(학고재 화랑)
1998.9 세계 인권 선언 50주년 기념 홍성담 판화전(엠네스티 영국 런던지부)
1998.12 세계 인권 50주년 기념 미술관(예술의 전당)
1999.8 개인전(가나아트센터)
2000.3 제3회 광주 비엔날레 한국 대표작가



지유철:

총신대에서 종교음악을 전공하고 여러 교회에서 오케스트라와 성가대를 지휘하면서 고등부, 청년부를 맡아 지도하였다. 97년부터 본지에 <요셉의 회상>과 <데오빌로의 로마통신>을 절찬리에 연재한 바 있으며, 현재 산정현교회 청년부를 지도하면서, 기윤실 건강교회운동본부 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이메일 주소는 j33luke@kornet.net이다.

*위 글은 지유철 님의 홈페이지에서 카피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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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내 예술의 최고 스승은 현실이다 - 홍성담 인터뷰 / 지유철
이름: damibox


등록일: 2006-10-18 19:40
조회수: 3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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