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담은 1955년에 태어나 조선대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했다. 1979년〈광주자유미술인회〉조직에 참여했고,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 선전 요원으로 활동했다. 같은 해 11월 첫 개인전을 가졌고, 1983년에는〈시민미술학교〉를 개설해 미술 대중화운동에 힘써왔다. 1988년에 독일 행체 화랑 초대전을 출발로 수차례 해외전을 가졌으며, 1989년 평양축전에〈민족민중 미술인 전국연합〉이 공동 제작한〈민족해방운동사〉사진을 북한에 보냈다는 이유로 구속되었다. 구속 이후 독일, 영국, 미국 등지에서 그의 석방을 요구하는 판화전이 있었고, 1990년 국제 엠네스티 본부에서는 '올해의 양심수 3인' 중 한 명으로 선정하였다. '젊은 의식전', '삶의 미술전', '오월미술전', '민중미술 15년전' 등 각종 단체전에 참가했다.
"홍성담씨요? 아, 그 판화가요? 광주에서 민중미술 하는 분!"
나의 인터뷰 예정 이야기를 듣고, 뜻밖에도 마포의 내 사무실 앞에 있는 탁구장 관장이 반색을 한다.(그는 강원도 평창 출신이다.) 아는 이들이 많다. 정말 '민중미술가'인 모양이다.
"3호선 대화역 와서 전화하세요. 여긴 그냥 찾아오기 어렵습니다."
광주 화가로 알려진 홍성담. 그는 현재 경기도 외진 곳에 스스로를 유폐시킨 채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지금 준비하고 계신 것은?"
"10월 5일부터 두 달 간 뉴욕 퀸즈 뮤지엄에서 'The Wave of East'라는 이름으로 개관 전시회가 열립니다."
홍성담의 작품은 1. 새벽, 2. 저항과 명상, 3. 아바타(avatar, 花), 4. 회복, 이렇게 네 섹션으로 나뉘어 전시될 예정이다.
역사를 건너 - 저항과 명상
그는 누구보다도 역사의 현장을 뜨겁게 지킨 화가로 알려져 있다. 5월 기록 연작 판화인〈새벽〉이 전두환 신군부 정권에게 최고의 불온물로 낙인찍히면서 고초를 겪었고, 89년에는 평양축전 걸개그림〈민족해방운동사〉사건으로 3년 6개월간 감옥 생활을 했다. 그때 악명 높은 물고문도 받았다.
"감옥은 파시즘의 상징이지요. 파시즘이 뭡니까. 나와 같지 않은 놈들은 없애거나 격리시켜야 된다는 것 아닙니까? 감옥 안에는 원이 없어요. 다 사각형입니다. 외부의 물건들이 들어오는 유일한 통로인 식구통(食口通) 역시 작은 사각형이지요. 유일하게 동그란 것이 밥그릇인데 네모진 식구통을 통과해 들어오면, 밥도 책도 그 맛이 싹 사라집니다. 내게 밥이 어떤 밥인데... '전투적 신명'인데..."
"'전투적 신명'을 조금 더 풀어주신다면..."
"제가 오월 세대예요. 시민군이었지요. 이제 계엄군이 오늘 들어올지 내일 들어올지 모릅니다. 아마 대부분 죽겠지요. 시민들이 모여서 밥을 지어줍니다. 총 들고 섰는데... 우린 그거 제대로 못 먹어요. 하지만 시민들은 못 먹을지라도 밥을 짓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어요. 또 우리는, 밥알이 몸으로 들어가지 않을지라도 먹은 것과 똑 같습니다. 정말 든든해요. 피로 맺어진 공동체적 힘입니다. 신명이지요."
"아, 성찬식(聖餐式)이군요!"
그가 나를 순식간에 80년 광주의 어느 날로 데려가자 나도 모르게 신음하듯 한 마디가 터져 나왔다. 그 밥이 파시즘의 사각형으로 인해 거부의 대상이 되려 하는 위기를 그는 스스로 넘어서야 했다.
"물은 더 황당하지요. 제 고향이 하의도 섬입니다. 바다... 아십니까? 어릴 적 바다... 말썽 피우고 엄마한테 쥐어 박혀도 바다에만 가서 첨벙 안기면 다 회복되는 거 아닙니까? 그 바다. '물'은 언제나 날 안아주고 회복시켜주는 존재인데, 그 물이 날 고문해버릴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렇게 처참하게 당하게 하고, 물 때문에 내 동지 이름까지 다 불게 될 줄 어찌 상상이나 했겠냐는 말입니다."
"......"
기막힌 상황. 고향이, 바다가, 어머니가, 가장 믿을 존재가 나를 파괴한다.
"인제 물만 보면 싫은 거지요. 세상을 이루는 원 개념이 물, 불, 흙일진대, 그걸 거부해 버리면 예술가로서 끝장 아닙니까? 미칠 노릇이지요."
그는 이후,〈식구통 연작〉,〈밥 연작〉,〈물 연작〉 등을 낳았다. 단순한 사실 묘사가 아니라, 화두에 대한 천착이 무구한 명상의 경지를 구현하고 있는 작품들이다.
〈물 속에서 스무날〉은 원형 속의 두 마리 물고기로 대미를 이루고 있다. 그 도해는 마치 티베트 만다라를 연상시키듯 우주의 철리가 스며있는 것 같다. 명상의 결론이다. 아니 작가는 결론으로 으레 그의 습관처럼 이번에도 부적 작업으로 끝맺음을 했다. 부적은 자유와 정의를 위해서 싸웠던 정신의 모습이며 그 상처의 흔적이다. 하나의 원형이다. 이 같은 물 시리즈는 참으로 역설적이다. 물고문에서 출발했지만 물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모습을 담았기 때문이다. 고문은 인간 파괴 작업이다. 그러나 물의 변화가 중요하지는 않은 것이다. 아무리 억압을 당해도 변치 않는 인간상, 그것이 중요하다. 여기서 상생의 사상이 부각된다. 또한 범신론적 세계관이 대두된다. 내가 물고기가 되고 물고기가 내가 되는 범 생명적 세계관, 그것은 매우 소중하다. - 윤범모, 1999년 "脫獄-홍성담의 개인전에 부쳐" 중에서
흘러서 강, 모여서 바다
한편 그의 대작 유화들은 탄성을 자아낼 만큼 강렬한 내용과 오방색의 화려한 색채가 주조를 이루고 있다.
"제 그림의 형상성의 근원은 샤머니즘인 것 같습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후, 해남 대흥사에서 불화를 전수받은 일이 있다. 그래서일까. 그의 화려한 색조를 보며 탱화를 떠올리는 이들이 많지만, 그는 인류 초기 종교가 갖고 있는 문화적 원형으로 거슬러 올라가기를 청한다. 당대성에서 영원성을 꿰뚫는 신명의 세계로의 초대. 동시대 열사와 미륵의 세계가 하나인 것이다.
"자신이 예술가라고 생각하시나요?"
"전 원래 예술 합네 하는 사람들이 싫었어요. 그런데, 제가 감옥에 가 있는 동안 밖에서 구명 운동 하는 사람들에 의해 예술가가 되어 있는 거요. 외국에서 더 유명해지고. 그러다 보니 민중미술에 대해 사람들이 갖고 있는 고정관념을 넘어서야겠다는 사명감도 생겼지요. 우리 옛날 얘기 '호랑이와 곶감'에 나오는 도둑처럼 어쩌다 호랑이 등짝에 올라앉게 된 거요. 어떡해요? 예술 해야제."
함께 있으면 그는 편하다. 현실과 동떨어진 미사여구가 없고, 거친 욕, 사투리를 섞어가며 촌부처럼 말한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옹골찬 미학적 세계가 용해되어 있는 자로서의 소박함이다. 그는 예술가로서 자신에게 행운이었던 점을 두 가지 꼽는다. 하나는 섬에서 자랐다는 것. 또 하나는 고등학교 시절, 사서 장학생으로 도서관 일을 하면서 책을 많이 읽었다는 것이다.
그래서였구나. 그가 감옥에 있을 때, 친지들에 의해 출판된 문집〈오월에서 통일로〉는, '문학적 소양과 설득력 있는 이론체계, 진보적 예술가로서의 투철한 세계관'으로 인해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그의 그림의 내용이나 제목에서도 그의 문학적 취향이 드러난다.〈달빛에 바랜 눈물〉,〈흘러서 강, 모여서 바다〉,〈담 위에 달, 달 밑에 담〉....
아시아의 화가들 앞에 놓여진 그림에는 죽음에서 삶으로 나아가는 처연한 아름다움이 만개하고 있다. 형태를 갖고 있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언젠가는 사라지기 마련이다. 인간도 그렇다. 인간의 형태인 육신은 결국 사라지고 그 인간이 미래 세상을 위해 추구했던 영혼의 행적만이 남아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주위를 떠돌아다닐 뿐이다. 뼈는 썩어 흙이 되고 살은 썩어 물이 되어 대지에 스며든다. 이 거름으로 알곡식이 맺어져 미래 세상을 열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의 식량이 될 것이다. 우리 아시아인들은 인간 삶의 순환과정을 이렇게 보편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내가 살아온 땅, 그리고 내가 살아온 그리 짧지도 길지도 않은 세월은 '삶' 보다도 '죽음'을 강요했다. 동티모르도 그렇고, 방글라데시도 이와 같다.
... 언제부터일까. 나의 그림은 그들의 영혼을 씻겨주는 일이 되어버렸다. 죽은 자들의 원한과 설움을 씻겨서 피안의 세계로 올려 보내는 일이다. 억울한 영혼의 한을 풀어주어 저승에 들 수 있는 존재로 만드는 일이다. 더불어 함께 살아가야 할 미래 세상을 위해 죽어간 넋들의 혼을 진혼하고 위로하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
... 나 뿐 아니라 아시아의 화가들은 아직까지도 제의의 그림 그리기를 멈추지 않고 있다. - 홍성담,〈동아시아 문화연대 포럼〉발표 원고 중에서
한국 기독교에 대한 인상을 물으니, 당연한 수순으로 따끔한 얘기가 쏟아진다.
"기독교는 한국문화의 원형을 깨부순 원흉입니다. 우리 할머니들의 비손, 부지깽이로 박자나 맞추면서 오늘 밥 먹고 먼 길 떠나는 아들 손자 무사함 비는 것, 동짓날 팥죽 쑤어서 벽에다 뿌리는 우리의 문화체계를 이단이다, 악마적 근원이다 매도하며 말살했어요. 기독교가 구원의 종교가 되려면 바로 이 땅의 문화적 가치를 파괴한 사실을 반드시 사죄해야 한다고 봅니다."
예수 이야기를 언급하면서는 애정을 숨기지 않는다.
"공관복음은 정말 쿨한 작품 같아요. 개인의 일대기를 헤밍웨이 저리 가라로, 하드보일드 체로 썼어요. 단순 무식해 보이지만, 행간과 행간 사이엔 어마어마하게 조직화된 내용이 숨어 있고요. 저로서는 예수의 연약한 부분이 가장 감동적입니다. 예수가 외롭게 나오잖아요. 고향에 가서도 맞아죽을 뻔 하고,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어째 내 인생이 이렇게 추잡해질까'하고 슬피 기도하는데 똘마니들은 퍼질러 잠이나 자고... 죽을 때도 읽다보면 애가 터져요. 여자들도 보고 있는데 그냥 딱 영웅적으로 죽지 왜 그리도 약하게 목이 마르다고 해서 백정 놈들이 창끝에다 묻혀주는 신포도주를 쪽쪽 빨고... 그래도 난 그런 부분에 천착해야 한다고 봐요. 바로 그런 나약한 분이었기에 대단한 거죠. 또 그래야, 예수를 경배하는 사람이 겸허해지죠. 아, 예수는 정말 멋쟁이에요. 2천년 간 목숨 내놓고 따를 만 해요."
"예로부터, 인간으로부터 신이 멀리 있을 때, 꼭 헛짓거리, 타락상이 만연했습니다. 요즘 이상한 집회하는 기독교인들, 명상을 조금만 제대로 하면 화이트 그리스도가 끼친 죄악을 알 텐데."
아바타(avatar), 그리고 살림의 회복을 위해
그가 최근에 천착하고 있는 소재는 '아바타'다. 아바타? 통신상에 뜨는 우스꽝스러운 캐릭터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상징, 화신 아닌가? 그렇다면 그는 사이버 시대를 이겨낼 강력한 문화 도구로서 아바타를 꿈꾸는 것인가?
"저는 오랜 동안 '오월 화가', '통일 화가'로 불렸습니다. 하지만, 세상 돌아가는 걸 보면, 이산의 눈물이나 뿌리고, 민족이 합친다는 의미만으로는 안 되죠. 어떤 형태로든 한반도 통일이 된다 해도, 대륙간의 루트를 어떻게 할 거냐 하는 문제가 큽니다. 6·15 정상회담 때 일본 반응 보셨어요? 다른 나라들이 공식 성명 내고 염원을 보내고 있을 때 일본만 미적거렸어요. 이거 조심해야 합니다. 일본의 신보수주의의 물결도 우경화와 더불어 군사대국화의 길로 치닫고 있습니다. 유럽, 아프리카, 아메리카 대륙들이 어쩔 수 없이 블록화 되고 있는 이 무시무시한 시장터에서 동아시아가 갖고 있는 문화적 상상력, 사이버 공간에서의 망상까지도 현재화할 수 있도록 그 지평을 넓혀야 합니다."
실제로 그는 전방위로 활동하는 예술가다. 80년대에도 문화운동 판에서 음악, 연극, 영화 등 다양한 장르에 참여해 왔거니와, 90년대에는 컴퓨터 애니메이션을 하면서 동영상이 갖는 대중적 호소력을 깨달았고, 현재 인터넷 홈페이지(http://www.humani.org)를 사이버 전초기지로 삼아 '이 거짓의 시대, 글로벌한 사기행각의 시대에 도전하는' 진보적인 시각예술 활동을 동지들과 함께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다. 그의 사이버 작업실에는 그림 혹은 설치작품 뿐 아니라 한 작품을 완성하기까지의 과정, 디지털 사진 작품들, 당대의 화두에 관한 짧은 동영상 작품 등이 올려져 있다. 그는 미술이라는 자신의 무기로 벼르고 있는 것이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어떻게 하면 화해할 것인가?"
치열한 그의 성찰과 탐구는 계속된다. 찬탄할 부분은 그의 '실천'이다. 지난 해에 나는 화가 홍성담에 관한 이야기를 두 군데서 들었다. 한 번은 내가 디아코니아 자매회의 한산 요양소를 방문했을 때, 그곳에서 오래 전에 결핵을 치료했던 홍성담이라는 화가가 내 인터뷰를 끝내 거부했던 여성숙 선생의 자서전(비매품인) 표지 그림을 그려주었다는 것.(푸른 빛 그림이 인상적이어서, 여 선생님 대신 홍성담의 증언 인터뷰로 대신할 생각도 했으나 일정이 맞지 않아 무산되었다.)
그 우연이 있기 몇 주 전에는 한 믿을 만한 기자가 내게 화가 홍성담을 꼭 한번 만나보라고 권유하며 두 가지 얘기를 했었다. 그는 광주를 처절하게 겪었으면서 그 상처를 다 껴안으려 하는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남자지만 살림을 야무지게 잘 하는 주부라는 것.
"살림꾼이시라면서요?"
"처음엔 작업 시간도 줄일 겸 그냥 사먹으려 했어요. 그런데 도무지 사람이 붕 떠 있는 것 같고 안정이 안 됩디다. 그러다가 요것저것 장도 보고, 해먹다 보니 안정이 오더라고요. 작업도 더 잘 되고."
실은 물을 필요가 없었다. 그의 부엌 앞에 앉아 차 한 잔만 얻어 마셔도, 그의 주부스러움을 단박에 눈치 챌 수 있다.
"황새기 젖 있죠. 작년 6월엔 파시 때 영광 법성포에 가서 새벽에 받아다가 선어를 담갔는데 올해는 놓쳤어요."
그의 여행기 도처에서 마초 문화에 대한 질타와 우려가 발견되지만 일상 속에서 내재적으로 실천한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인류는 20세기 벽두부터 전쟁으로 인해 인류 보편적인 삶의 가치를 빼앗기고 있지 않습니까? 어떻게든 회복하려고 노력을 해야 하는데..."
그는 쉽게 낙관할 만큼 감상적이지 않았다. 그의 글이나 그림 곳곳에 비관과 한숨, 제의가 꿈틀거린다. 그러나 또한 쉽게 비관할 만큼 무책임할 수도 없어 보인다. 그래서 그는 오늘도 연약한 손으로 '이 시대의 천박성을 향해 총을 겨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