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담의 그림창고



                                                                                                                                          30 x 45 cm /종이에 먹과 수채/08.07.30
['木魚' 44 - 보게 되다 _ 목어내력 02]

내 나이 백 살이 되었을 때, 동쪽 땅 끝에 해가 뜨는 모습도 내가 제일 먼저 볼 수 있었고
달이 뜨면 그 하얀 얼굴이 땅위의 다른 무엇보다 먼저 나의 모습을 찾아 내려다보았어.

나이 이백 살이 넘자, 눈을 감고도 인근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알 수 있게 되었어.
어느 집에 새로운 아기가 태어났는지, 오늘 저녁은 어느 집이 굶주린 밤을 보내고 있는지 나는 다 알 수 있었지.

이제 삼백 살을 넘어서자, 몇 굽이 산 너머의 일들도 알 수 있었고 멀리 큰 바다건너 생면부지의 땅에서 벌어진 일들도 볼 수 있게 되었지.
세상의 모든 일들이 내 손금처럼 훤하게 보여서, 눈을 감아도 잘 보이고
바람에 실어 온 소리만 듣고도 잘 볼 수 있게 되었어.

연평 바다에서 건너온 조깃배들의 돛대가 나람 엮어 놓은 듯 줄지어 서 있는 조구나루의 풍경은 장관이었다.
햇빛 밝은 5월이 되면 사리포구에서 풍겨대는 새우젓의 짜고 고소한 냄새가
정왕산과 구봉산에 핀 밤꽃 향기와 뒤섞여서 이곳 쌍섬 앞 바다 군자만에 가득하여 사람들의 가슴을 날마다 설레게 했다.
수리산에서 발원하여 광덕산을 옆구리에 끼고 하얀 비단을 풀어놓은 듯 안산천이 바다와 합수하는 곳에
봉긋 솟은 붉은섬은 마치 물에 떠 있는 한 송이 연꽃처럼 보였다.

이마를 들면 바로 바다건너 그림처럼 펼쳐진 원당포구와 사리포구 뒤로 광덕산과 수리산이 눈앞에 다가오고
왼쪽으로 설핏 고개를 들면 대부 황금산의 시루봉이 반짝였다.
뒤쪽으로는 골짜기 끝에 납작하게 엎드린 작은 절을 지나 해망산 등성이를 넘으면
은회색 빛 남양 바다의 진득한 끝자락이 나의 목덜미 위에 놓여 있었다.

어느 해 몹시도 추운 겨울날이었어.
세찬 갯바람에 날리어 튀는 바닷 짠물방울이 살 속으로 파고드는 추운 겨울밤이었지.
해안가를 휘돌아 하얀 포말을 만들어 해망산 좁은 골짜기를 타고 올라와 내 몸을 자꾸 흔드는 겨울 갯바람이
오늘 밤 따라 심상치 않았다.
이태 전 영풍지역을 휩쓴 민란의 뒷소문이 아직까지도 사람들 마음속을 뒤숭숭하게 헤집고 있을 때였다.

바다 건너편 별망성 수군만호에서 호각소리가 바람을 타고 몇 번 울리더니
이내 횃불들이 급하게 켜지며 움직이고 병장기 부딪치는 금속성 소리들이 바람소리를 뚦고 들렸다.
호각소리로 봐서는 분명히 차가운 겨울바람 속에 군선을 띄우는 모양이었다.
겨울밤 언 땅을 차는 먼 발자국 소리들도 잘 훈련된 수군들의 품새였다.

그러자, 이 쪽 해망산 아래 바닷가 갯뻘을 급하게 건너는 두 사람의 검은 그림자가
겨울 갯바람에 서걱대며 흔들리는 갈대숲 사이로 어렴풋이 보였다.
그들은 허벅지까지 빠지는 신외리 수로를 지나 유포 쪽을 향해 갯뻘을 건너오고 있었다.
공기마저 얼어붙을 것 같은 진한 감청색 겨울밤 하늘엔 별들만 파랗게 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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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Day by Day]-140 / '木魚' 44 - 보게 되다 _ 목어내력 02
이름: damibox


등록일: 2008-08-06 17:04
조회수: 2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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