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담의 그림창고



                                                                                                                                         30 x 45 cm /종이에 먹과 수채/08.11. 02
['木魚' 97 - 모두 죽다]

붉은 뿌리가 끝을 세우고 쫓아왔다. 온 힘을 다해 위로 솟아오르는 목어의 몸 구석구석에서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벌써 우리 뒤에 바짝 쫓아온 뿌리 끝이 꽃지를 휘감으려고 등깍지 위로 뻗어 세웠다.
청둥이가 목을 움츠리며 꽃지가 매달린 주둥이를 오른쪽으로 틀자 뿌리가 허공을 후볐다가 다시 끝을 세우며 솟아올랐다.
뿌리의 뻗는 속도가 목어보다 빨랐다. 나는 비어있는 오른손으로 청둥이의 왼쪽 발목에 채워진 사슬고리를 빼냈다.
그리고 다시 꽃지를 휘감으려고 덮치는 뿌리 끝을 보고 힘껏 던졌다.

‘이것은 포악한 영흥도 독갑이를 천년 동안 묶어두었던 선재도 선인 어부의 쇠사슬이다!'

둥근 사슬고리를 날카로운 뿌리 끝에 쒸우려고 던졌지만 뿌리 끝에 맞아 튀면서 아래로 떨어졌다.
뿌리가 흠칫 놀라며 멈추어 서서 몇 번 더 구불거리다가 뻣뻣이 선 채 모든 동작을 순간 정지했다.
저 아래 거대한 눈의 동공 속으로 이제 막 하얀사람의 발바닥이 마지막으로 빨려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거대한 눈이 잠깐 멈칫하다가 좌우로 크게 흔들어 동공에서 쏟아냈던 퍼런 피를 털어냈다.
금빛 삼지창과 하얀사람을 빨아들인 동공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원래의 검은 빛으로 아물었다.
거대한 눈의 반대편에 있던 뿌리 하나가 몸을 일으켜 우리들 앞을 가로막고 공격해 왔다.
목어가 힘겹게 방향을 틀면서 뿌리의 공격을 옆으로 흘려보냈다.
목어의 입에 매달려 있던 나는 허리를 굽어서 꽃지와 청둥이를 목어의 등에 올려준 뒤에
나도 턱밑 지느러미를 잡고 목어의 등으로 기어 올라갔다.
광장의 가장자리에 돋아있던 붉은 뿌리들이 일제히 일어서서 우리를 향해 날아왔다.
아래쪽은 온통 우리를 향해 솟아오르는 붉은 뿌리들로 가득했다.
목어가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나에게 말했다.

‘이쯤에서 우리는 밖으로 나가는 통로에 들 수 있다. 눈을 꼭 감고 네가 먼저 뛰어내려라.
그 다음에 청둥이가 꽃지를 등에 업고 뛰어 내려라. 지금부터 무슨 일이 있어도 눈을 뜨면 안된다.
물론 말을 해도 안된다. 나가는 통로는 아까 들어왔던 역순이다’  

‘아니? 지금 모든 뿌리들이 저렇게 물밀듯이 쫓아 올라오는데 밑으로 뛰어내리라니?

‘그렇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빨리! 모두 눈을 꼭 감고!’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양팔을 한껏 벌려서 붉은 뿌리들이 솟아오르는 곳으로 뛰어내렸다.
몸이 밑으로 곤두박질을 하듯이 급하게 떨어졌다. 한참을 그렇게 급하게 밑으로 떨어지다가
어느 만큼에서 점점 떨어지는 속도가 줄어들었다. 귀를 스쳐지나가는 물소리가 들렸다.
어디에서 나를 향해 쫓아오는 뿌리가 물을 가르는 소리도 들렸다. 마음이 바뻤다.
바로 내 뒤쪽에서 뿌리가 무엇인가를 휘감는 소리와 함께 날개를 퍼득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발로 물을 차는 소리가 들리더니 청둥이의 마지막 비명소리도 들렸다.
청둥이의 날개에서 빠진 깃털 하나가 나의 뺨을 스쳤다. 잠잠해졌다.
아아! 내 뒤를 따라 뛰어내린 청둥이가 쫓아오던 뿌리에 휘감겨 몸부림치다가 갈기갈기 찢어진 채 어두운 물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청둥이를 부르려고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눈을 떠서도 말을 해서도 안된다.
그의 몸에서 찢겨진 하얀 날개가 칠흑 같은 물속을 둥둥 떠내려갔다.
사방에서 물을 가르며 뻗어오는 뿌리들의 굉음이 고막을 때렸다. 목어가 꼬리를 강하게 흔드는지 거센 파동이 내 등을 덮쳤다.
뿌리가 목어를 비끌어 감는 소리가 들렸다. 목어를 휘감은 뿌리들이 힘껏 비틀어 조였다.  
잠시 후에 목어의 몸이 우지끈 부서지는 소리도 들렸다. 더 강한 파동이 내 등허리를 치더니 와지끈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목어의 육중한 몸이 쩍 벌어지면서 뿌리들끼리 서로 엉키는 쇳소리가 들렸다.
아아아! 목어가 완전히 부수어 지는가 보다. 목어의 몸이 산산조각으로 깨져 사방으로 튀던 나무 조각 하나가 내 어깨를 스쳐지나갔다.
나는 고개를 돌려 눈을 떠서 확인하려다가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나의 몸은 아직도 밑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다시 물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굵은 뿌리가 내 머리카락을 스치며 뒤쪽 바닥을 향해 내리쳤다.
꽃지의 몸이 깨져서 뭉개지는 소리가 들렸다. 바닥에 짓뭉개진 꽃지가 마디발을 바르작거리면서 가냘픈 비명을 질렀다.
꽃지의 단단한 등깍지와 함께 내가 붙여주었던 빨간 프라스틱 조각이 바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꽃지의 죽음을 확인하려는 듯이 붉은 뿌리가 다시한번 잔인하게 내리쳤다.
사방으로 튀는 꽃지의 말간 살 조각 한 점이 날아와서 내 목덜미에 붙었다. 꽃지의 살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안돼! 안된다구! 무심결에 악을 쓰려다가 목젓으로 눌러 꿀꺽 삼켰다. 눈을 떠서도 안되고 소리를 질러서도 안된다.
나는 그들의 죽음 앞에서 무력한 존재일 뿐이었다. 이것은 다름아닌 지옥이었다.
이들의 죽음 앞에서 뒤돌아 설 수도 없고 눈을 뜰 수도 없었다. 질끈 감은 눈엔 불안한 어둠만 가득했다.
잔인한 붉은 뿌리들이 나의 영혼을 잠식해 들어오고 있었다. 아아 모두 이렇게 죽어가는구나. 이제 내 차례다.
청둥이와 목어와 꽃지를 휘감아 삼켜버린 붉은 뿌리들은 이제 나를 향하여 일제히 공격할 것이다.
어차피 죽는 것이라면 차라리 눈을 크게 뜨고 저 붉은 뿌리들과 이판사판 싸워야 한다. 이대로 죽은 듯이 있다가 당할 순 없다.
아직도 나의 몸은 밑을 향해 천천히 내려가고 있었다.
양쪽으로 벌린 팔을 가슴 쪽으로 잡아당겨 불시에 닥칠 뿌리의 공격에 대비했다.
그리고 모든 촉각을 곤두세우고 눈을 뜰 시각을 헤아렸다. 여기저기서 나를 향해 공격을 해 오는 붉은 뿌리들이
물을 가르는 소리가 어지럽게 들렸다. 그 중 가장 날카롭게 생겼을 뿌리가 내 정수리를 향해 끝을 곧추세우고 날아왔다.
이대로 당할 순 없었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앞으로 뻗으며 눈을 막 뜨려고 하는 순간에 무엇인가가 발바닥에 살푸시 닿았다.
붉은 뿌리가 바로 밑에서 나를 휘감으려 했다. 눈을 질끈 감은 채 허공을 향해 주먹을 내리치던 나는 앞으로 엎어 질 뻔 하다가
반사적으로 오른발로 들어 올려 나의 발을 공격하는 붉은 뿌리를 강하게 걷어찼다.
그러나 내 발바닥에 닿은 것은 부드러운 맨살 같았다. 그렇다. 맨살이 내 발등을 부드럽게 덮었다.
나는 거대한 눈의 뽀얀 속살을 생각했다. 그렇지. 우리는 거대한 눈의 속살 광장 위에서 눈만 질끈 감은 채 뛰어내렸던 것이다.
이제 나의 몸은 발바닥부터 서서히 녹아 거대한 눈의 몸속 어딘가로 흡수되어 버릴 것이다.
나에게 생명이 있다는 것이 두려웠다. 우리는 모두 이렇게 죽어서 물속 도시의 어느 부품으로 영원히 가두어질 것이다.
이렇게 죽을 바엔 차라리 죽음과 무관한 생명이 없는 것들이 부러웠다. 내 무릎 아래쪽이 갑자기 힘이 빠지면서 휘청거렸다.
발바닥을 지그시 눌러서 바닥을 비벼 보았다.
내 발바닥이 녹아내리는 것도 아니고 거대한 속살 바닥이 꿈틀거리는 느낌도 없었다.
틀림없는 갯뻘 바닥이었다. 여인의 가슴처럼 매끄럽고 부드러운 갯펄 바닥이었다.

  -목록보기  
제목: [Day by Day]-142 / '木魚' 97 - 모두 죽다
이름: damibox


등록일: 2008-11-03 11:52
조회수: 2635


day_081103_1.jpg (200.1 KB)
Copyright 1999-2022 Zeroboard / skin by DQ'Sty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