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담의 그림창고



                                                                                                                               파도에 떠다니는 입술/ 30 x 45 cm/ 종이에 먹과 수채/ 2012.6.14


[파도에 떠다니는 입술]

소리를 내는 입술들이 파도 포말 하얀꽃에 매달려서
망망대해 입엽편주 떠있는 배를 향해 달려왔다

입술은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사람의 살을 거침없이 뜯어 먹는다고 그가 말했다

그는 돛대 꼭대기를 향해 기어 올라갔다
입술 하나가 풀쩍 뛰어 올라 금방이라도 그의 발뒤꿈치를 베어 물것 같았다
집 채 만큼 큰 파도에 작은 배는 기우뚱 거푸 뒤집어질 뻔했다
그는 돛대에 자신의 발목과 팔을 든든한 끈으로 묶었다

'바리'가 붉은 입술을 향해 얼러대기도 하고, 다시 꾸짖기도 했다
그때마다 입술은 쩍쩍 벌리고 딱딱 닫히면서 소리를 냈다

한 입술이 소리를 냈다
'그래 그래'

또, 한 입술이 소리를 냈다
'탕! 내 입은 단 한발의 총소리다'

또, 한 입술이 말했다
'아항! 누구든 옳다. 틀린 사람은 없다'

한 입술이 파도 하얀 포말위에 올라서서 소리를 냈다
'무례하다. 우리의 허락도 없이 어찌 이 바다를 지나가느냐'

한 입술이 부끄러운 듯이 말했다
'흐흥! 너희들의 부끄러운 소리가 내 입 속에 모두 담겨있다'

또, 암수 한 쌍과 새끼 뱀을 물고 있는 입술이 말했다
'아니야, 아니야! 이 뱀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아무도 이 바다를 지나갈 수 없어'

또, 한 입술이 소리를 질렀다
'여기 내 입속에 뛰어 들어라! 그러면 이 바다의 끝을 만나게 될 것이다'

'바리'는 손을 휘저으며 열심히 뭐라고 중얼거렸다
저들의 립서비스에 속아 아까운 시간을 지체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돛대에 묶여있는 그는 애가 탔다

먼 옛날에 내가
물속에서의 길고 긴 삶을 마치고 뭍으로 올라올 때
떼 내어버렸던 나의 아가미와 지느러미는 지금도 이 바다 밑 어디에서
떠돌고 있을 것이다
이번 기회에 나는 기필코 그것을 되찾아야 한다고 다짐했다

또 한 입술이 그녀를 달래듯이 말했다

‘우리가 이런 장사를 한두 번 해 본 것이 아니잖아
너의 출생내력과 신분을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너야말로 이런 어두운 곳에서 평생 고생할 사람이 아니다
애비의 제안대로 너는 세상의 반쪽을 차지하는 것에 만족하고
알은 이제 그만 우리에게 넘겨라‘

멀리서 칠흑 같은 어둠이 밀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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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바리 - 05 [파도에 떠다니는 입술]
이름: damibox


등록일: 2012-06-14 15:44
조회수: 1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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