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담의 그림창고



                                                                                                                                    칠겹살/ 30 x 45 cm/ 종이에 먹과 수채/ 2012.6.23

[칠겹살]

작은 배는 캄캄한 하늘 서쪽으로 미끄러지듯이 달려갔다
폭풍우가 지나간 바다는
갑자기 숨이 멎은 듯 고요했다
숨을 끊어진 바다는 이미 바다가 아니다

배 뒤쪽 고물간에 앉아있던 그가 '바리'에게 물었다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바리'가 저고리 고름을 풀어서 하얀 가슴을 드러내고
긴 손톱으로 명치끝을 깊이 찔러 아래로 그었다
살이 쩍 벌어지더니 겹겹이 층을 이룬 살이 부채살처럼 펴졌다

'여기를 보아라!
첫겹살은 해가 만들어준 청대살이요
두겹째 살은 바람이 내려주신 홍대살이다
세겹째 살은 물이 건네주신 황대살이고
네겹째 살은 달이 내려주신 녹대살이다
다섯겹째 살은 흙이 보내주신 백대살이고
여섯겹째 살은 소리가 던져주신 흑대살이요
일곱겹째 살은 무주님이 나를 세상에 내놓을 때 빚어놓은 자대살이구나
우리는 이제부터 이 일곱겹 살을 순서대로 지나서
내 몸 깊은 곳까지 들어간다'

그가 다시 물었다

‘우리는 그곳에 들어가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저들은 그이의 살 한조각과 피 한모금을 일주일마다 마시며
새롭게 태어났다고 자랑한다
그러나 살아있는 그이가 자신들의 곁에 있어도 저들은 알아보지 못한다
오히려 세상의 모든 죄를 그이에게 뒤집어 씌워 죽여 버린다
정치가 잘못되고 경제가 침체되는 이유도 모두 그이 탓이다
아파트 가격이 너무 오르고 너무 내리는 것도 그이 탓이다
내가 병든 것도 그이 탓이며 자동차 사고 난 것도 그이 탓이다
심지어 라면이 설익거나 또는 너무 맵거나 너무 짠 것도 그이 탓이다
세상의 모든 잘못된 일은 모두 그이 탓이다
그이를 죽이기 위해서 탓 하는 이유를 저들은 수천 수만 수억가지를 만들어 낼 수 있다
2천 년 전에 태어나 죽었던 그이는 다른 얼굴과 다른 이름으로
항상 저들의 곁에 존재하지만 아무도 그이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이는 날마다 마찬가지로 저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다
어제와 오늘도 죽었고 내일도 역시 그이는 죽을 것이다
그래도 그이는 언제나 저들의 가장 가까운 곳에 서 있다
그이의 죽음은 날마다 영원히 계속 될 것이다
저들이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서 주일마다 그이의 살 한조각과 피 한모금을 마시는 일도
역시 영원히 계속 될 것이다
그러나 그이와 저들이 죽임과 죽음으로 간신히 엮어져 있는 관계가
단절되는 시각이 점점 다가오는구나
그이가 죽음으로부터 진정으로 해방되는 시각이 이제 다가 왔구나‘

그녀의 치마 섶에 피가 배었다
'바리'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저고리를 여미어 옷고름을 묶었다
그녀의 검지 손톱 끝에 맑은 피 한 방울이 맺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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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바리 - 08 [칠겹살]
이름: damibox


등록일: 2012-06-23 15:12
조회수: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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