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담의 그림창고



                                                                                                                                          30 x 45 cm /종이에 먹과 수채/08.08.19
['木魚' 55 - 덤불속에 숨다_ 목어내력 13]

그날 밤 군자만 별망성 수군만호에서 이편 유포리 바닷가까지 눈에 보이지 않는 은밀한 소란들이 어둠속에서 숨가쁘게 벌어졌다.
아이를 안은 여인이 힘겹게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긴장한 탓도 있었겠지만 원래 천식기가 있었던지 언덕을 오를 땐 숨소리가 턱까지 차 심한 기침을 했다.
아래 갈대숲에서 언덕까지 이백보도 채 되지 않았지만 열 번도 넘게 잠깐씩 쉬기를 거듭하면서 겨우 내가 서있는 곳까지 와서는
나의 몸 뒤에 쓰러지듯이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면서 기침을 토해냈다.
그녀의 가냘픈 하얀 손에 쥐어진 손수건엔 기침 끝마다 한모금씩 토해낸 멀건 피가 번져있었다. 그녀가 숨을 내쉴 때는
목구멍에서 쉑쉑 바람 새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듯 상체를 일으켜 두리번거리더니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어둠 속이었지만 나는 곧 그녀를 금방 알아 볼 수 있었다.  그녀의 품속엔 아이가 곤히 자고 있었다.
그녀는 이곳 안산 화성 시흥 일대에서 가장 바느질 손재주가 뛰어난 침장 명우지였다.
아마 이곳 일대에 사는 돈푼깨나 있다는 사람들이나 수원 안양의 대갓집 혼인대사가 있을 땐
꼭 명우지가 만든 옷을 입어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의 바느질과 자수 솜씨는 일찍이 인정을 받고 있던 터였다.

그녀는 가쁜 숨을 진정시킨 후에 나의 뒤편에 있는 덤불을 헤치고 숨어들었다.
봄과 여름 가을엔 아래 유포리 신외리 반송리등에 사는 선남선녀들이 달 밝은 밤이면 서로 몰래 이곳에서 만나 뒷 덤불속에
숨어 들어가 사랑을 나누는 아름다운 모습을 자주 보았다.
그러나 오늘 같은 긴박한 경우는 처음인 것 같았다.
덤불 속에서도 연신 잦은 기침이 들렸다. 아이의 칭얼거리는 소리도 들렸다가 곧 잠잠해 지곤 했다.

횃불을 밝힌 군선이 유포리 모래밭 해안가에 도착하여 약간 소란스러운 소리들이 바람에 실려 왔으나 금방 조용해졌다.

건장한 사병들 넷이 나의 앞을 급히 지나 절 쪽으로 달려갔다.
모래밭의 싸움 뒤끝 수습을 마치고 김무석의 식솔들을 도추하는 살수들이었다.
사병들과 절집 사람들이 서로 댓거리하는 소리와 방마다 불이 켜지며 문을 여닫는 소리가 들렸다.
절집에서 소란을 피우던 사병들이 잠시후에 되돌아 내려오면서 내 앞을 지나갔다.
이때 덤불 속에서 그녀의 바튼 기침소리가 새어 나왔다.
사병중 하나가 걸음을 멈추고 나의 뒤편 덤불쪽을 바라보았다.

‘뭔 소리가 들렸는데....’

사병들이 허리를 낮추어 주위의 소리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면서 칼자루로 손을 가져갔다.
그 중 맨 앞장을 섰던 사병이 환도를 빼들며 나직한 소리로 말했다.

‘혹시 다른 칼잡이들이 함께 있을 수도 있다. 너희들은 뒤쪽을 경계하며 나를 보위하라. 내가 살피고 올 테다’

그가 조심스런 발걸음으로 나의 뒤로 돌아가서 덤불쪽에 접근했다.
나는 물론 주위의 모든 것들이 숨을 멈추고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그가 빼어든 환도가 어둠속에서 희번득 거렸다.
덤불 앞까지 다가간 그가 칼날로 덤불을 몇 곳 뒤져 보다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얼어 붙은듯 했다.
그 짧은 순간은 삼백살이 넘어 고목이 된 나의 딱딱한 몸도 사시나무 떨듯 했다.
그가 다시 태연하게 덤불 다른 곳을 칼로 뒤적이는 척 하다가 뒤돌아서서 긴장하고 있는 동료들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엥이! 갯바람에 밤짐승 소린가 보다. 저 자슥은 귓속에 말뚝질을 했나?
이 바쁜 시각에 정신을 내려놓아 헛소리나 듣고 놀래 자빠지니..... 김무장의 식솔들은 송산 사강을 거쳐
남양 용두리쪽으로 향했을 것이 분명하다.  어여 빨리 내려가자’

그가 거듭 다그치며 사병들의 발걸음을 재촉하자 그들은 쏟아 내리듯이 언덕 밑으로 달려갔다.
그는 대장장이 판술영감의 아들 강대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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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Day by Day]-151 / '木魚' 55 - 덤불속에 숨다_ 목어내력 13
이름: damibox


등록일: 2008-09-03 10:46
조회수: 2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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