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담의 그림창고




                                                                                                                             30 x 45 cm /종이에 먹과 수채/08.7.22 , 08.11.11
['목어' 04 -물속에 들다]

나는 바다안개가 내 손목을 쥐고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바닷물 속에 발등이 잠겼다. 찰랑거리는 물소리가 내 발걸음을 따라 왔다.
더위에 온종일 데워진 바닷물은 따뜻했다. 걸음마다 찰랑거리는 물소리를 농밀한 안개가 더욱 선명하게 내 귀에 전달했다.
한 걸음씩 뗄 때마다 찰랑거리는 물소리는 점점 금속성에 가까운 맑은 소리를 냈다.
오늘도 하루내내 뜨거운 햇빛을 받은 물은 발과 무릎과 배 그리고 가슴을 올라오면서 마치 부드러운 양털 담요처럼
내 몸을 천천히 휘감아 주었다. 따뜻한 물이 내 가슴을 쓸어주었다.

바다의 수면이 나의 눈과 거의 수평에 머물렀다.
수면은 피어나는 안개들의 꼬리로 이루어진 하얀 숲과 같았다.
물은 소리를 낸다. 물과 물이 서로 부비면서 만들어내는 소리와 물이 바닥이나 다른 물체와 부딪쳐서 만들어내는 소리가
함께 어우러지면 매우 복잡한 음표를 갖는 음악이 된다. 이 음악에 맞추어 안개의 꼬리들이 물위에서 어지럽게 춤을 춘다.
안개가 물위에 미끄러져 지나가듯이 보이도록 물은 몰래몰래 안개를 그렇게 피어 올리고 있었다.

나는 습관대로 물위에서 미끄러지는 안개의 꼬리 숫자를 세다가 그만 두었다.
죽어있는 것이나 움직이지 않는 것을 셈하기는 쉬워도 살아 움직이는 것을 헤아리기는 어렵다.
창고 앞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풀포기를 세다가 나는 몇 번이나 내 머리를 쥐어뜯은 적이 있었다.
한참 숫자를 세다 보면 저 앞에서 땅을 뚫고 올라오는 새로운 싹이 뒤늦게 보인다. 그것을 셈에 포함한다.
그리고 금방 발밑에 말라 시들어 죽은 풀 한포기를 보고 여지껏 세던 셈에서 한 개를 덜어 낸다.
포함하다가 덜어내기를 몇 번이고 반복하다보면 머릿속이 아주 복잡하게 되어 멀미를 했다.
나의 셈에는 0.5 나 2분지1 혹은 프러스마이너스 1 같은 숫자는 애시당초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들은 숫자가 아니었다. 숫자는 무엇보다도 확실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이 턱밑까지 차오르자 실크머플러를 두른 듯이 목이 따뜻했다.

나는 망설였다. 물에 빠져 익사할 수 있다는 불안 때문은 아니었다.
이미 한 달 전부터 창고 안에 들고나는 물품숫자와 각각의 물품들이 보관된 날수를 나만의 일정한 공식에 넣어 셈을 했었는데
오늘 내가 물에 빠져 죽을 확률은 방안에서 낙뢰를 맞아 죽을 확률보다도 더 낮았다.
내가 망설였던 이유는 물류창고 문을 잠그는 다섯 개의 자물쇠 중에 네 번째 자물쇠통이 헐거워서 아무래도 내 마음이 산란했다.
나머지 네 개의 자물쇠가 단단하게 잠겼다고 해서 헐거운 한 개를 무시하는 것은 곧 숫자를 무시하는 일이다.
내일은 꼭 열쇠집에 들려서 수리를 해야겠다.
허리를 약간 굽혀서 얼굴을 물속에 쳐 박아 천천히 눈을 떠 보았다. 물속도 바깥과 똑 같았다. 안개가 자욱했다.
바다 속 어디선가 이 안개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바다 속이라고 뭐 특별할 것이 없었다.
어차피 이곳이나 저곳이나 안개뿐이었다.

바다의 안개가 더 강하게 내 손목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나는 결심한 듯이 눈을 꼭 감고 안개가 이끄는 방향으로 손을 길게 뻗어서 몸을 엎드렸다.
몸이 천천히 밑으로 가라앉았다가 안개가 끌어당기는 쪽을 향해 미끄러져 나아갔다.
물이 만들어내는 음악이 갑자기 빨라졌다.
나의 귀와 물이 서로 직접 부비면서 만들어내는 음악의 박자를 나는 결국 놓치고 말았다.
물에 직접 닿은 귀가 소리에 적응하지 못했다. 내가 헤어가는 속도와 음악의 속도가 서로 엇박자가 되었다.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다.

손으로 물을 헤치고 발로는 물을 밀면서 발생하는 이 두 가지 물소리도 이미 엇박자를 만들었다.
손으로 물을 한번 헤저을 때 발은 물을 두 번 혹은 세 번 때렸다. 그러나 이것이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았다.
나의 셈법이 엉망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걱정하지 않았다.
이럴 땐 내 머릿속에 설치된 셈법을 과감하게 포기해 버리면 모든 일이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해결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여간 약삭빠른 창고지기가 분명하다.

자! 모든 것을 버리자. 둘 더하기 둘은 반드시 넷이 아니고 때로는 셋이 될 수도 있고 다섯이 될 수도 있다.
이 약삭빠른 창고지기는 숱한 셈을 했던 그동안의 경험 때문에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살아있는 것은 천변만화한다. 나는 살아 숨 쉬는 물속에 들어 온 것이다.
가끔 콧속을 자극하는 물속의 시금한 악취도 모두 살아있는 것만이 낼 수 있는 냄새다.
썩는 것도 살아있는 것의 일부분이다.
살아있기 때문에 썩을 수도 있고 썩는다는 것은 곧 살아 있는 것들이 몇 번이고 반복해서 겪어야 하는 성장통이다.
내 몸을 온통 감싸고 있는 것은 살아있는 물이다.
살아있는 것과 아무런 탈 없이 만나기 위해서는 나의 피곤한 셈법을 버려야 한다.
자! 버리자! 버린 척이라도 해야 한다.

하얀 안개가 좀 더 강하게 내 손목을 잡아 당겼다. 안개와 안개가, 물과 물이, 안개와 물이, 내 몸과 안개가, 내몸과 물이
서로 보듬고 쓰다듬으면서 섬세한 음악을 만들어 냈다. 그 소리가 나를 반기고 있었다.
이제 나는 안심하고 물속을 유영했다. 물속을 꽉 채운 하얀 안개가 나를 천연덕스럽게 빨아들이고 있었다.
내가 안심하자 물속도 안심했다. 물이 만들어내는 음악의 소리결도 모두 하얗다.
물속은 하얗게, 하얀 안개를 뿜어내어 나의 몸을 받아들였다.

나는 그렇게 시화바다 물속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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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Day by Day]-150 / '목어' 04 -물속에 들다
이름: damibox


등록일: 2008-11-15 11:37
조회수: 26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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