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담의 그림창고



                                                                                                                                          30 x 45 cm /종이에 먹과 수채/09.01.24

['木魚' 111 - 달빛 바닷길]

이작도 아래 작은 섬들을 벗어나 큰 바다로 들어서자 물속은 갑자기
검푸른 색깔로 변했다. 바닥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깊어졌다.
우리들이 지금까지 지나왔던 바다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우리의 몸에 부딪치는 물결이 훨씬 더 묵직하게 느껴졌다.
바다 빛이 푸르다 못해 짙푸른 검은 색이었다.
이 드넓은 바다 속에서 우리들만 외롭게 헤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아무도 서로 먼저 말하려 하지 않았다. 이 넓고 깊은 바다에 압도당해
모두 긴장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누군가가 높은 곳에서 보는 눈이 있어서 우리의 항해를 내려다 본 다면
온통 짙푸른 바다 속에서 목어와 청둥이와 꽃지 그리고 나.
이렇게 네 개의 작은 점, 티끌보다도 더 작은 네 개의 점으로 보일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점’이다. 넓이도 부피도 크기도 갖지 않는 작은 ‘점’이다.
단지 위치만을 표시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점’이다.
그러나 내가 물에 들어온 이후로는 이 ‘위치’마저도 잃어버렸다.
나의 존재는 물속에 녹아버렸을까. 물속에서 흩어져 버렸을까.
아니, 물속에서 지워져 버렸을까.
갑자기 찾아든 외로움 때문에 가슴이 서늘했다.
바다는 온통 외로움으로 꽉 찼다.
외로움이 흘린 눈물이 차곡차곡 고여서 바다를 만들었다.

수평선이 가깝게 다가왔다.
서쪽 바다 끝으로 해가 들어왔다.
바다 색깔이 진한 자주색으로 변하는 것 같더니 금방 어두워졌다.
바다 물이 검게 변했다.
앞도 뒤도 옆도 위도 아래도 모두 까맣게 어둡다.
엊그제 물속도시에서 빠져나올 때도 이런 어둠이었다.
그러나 그것의 어둠이 죽음 같은 검은 색이었다면
지금 우리가 헤어가고 있는 이 어둠은 모든 것이 살아 숨쉬는 검은 색이다.
그것이 절대 변하지 않을 어둠이라면 지금 나의 몸을 담고 있는 어둠은
언제든지 새로운 것으로 변할 수 있는 어둠이었다.
목어가 입을 열었다.

‘지금이 가장 어두울 때다. 이제 곧 별이 뜨면 눈에서 어둠이 벗겨질 게야.
어차피 늦은 밤에 도착할 것이니 이럴 땐 한층 여유 있는 마음으로 천천히 가자구!‘

내 곁에서 헤어가던 청둥이가 목어의 말에 안심이 되었는지
다시 앞장을 서며 혼자서 중얼거리듯 노래를 불렀다.

어둠이 내 눈을 가렸지만
나는 마음으로 보고 있다네
어둠이 나를 둘둘 감고 있지만
어둠 저 너머에 별이 뜬다네

내 스승 김무장님도 어둠 속에서 싸웠지
어제는 그의 칼이 햇빛을 자르더니
오늘 밤엔 이 두꺼운 어둠을 자르네
그는 칼에 몸을 실어
저 먼 바다 끝으로 날아갔다네

스승님께서 나에게 말씀 하셨지
이젠 네가 어둠을 자르게 될 거야
이젠 네가 햇빛 보다 더 번쩍이는
칼을 쥐게 될 거야
그리고 너는 번개보다 빠르고
차돌보다 더 강한 무사가 될거야
바다 끝으로 떠나신 날
스승님께서 내게 남기신 말씀이었네

나 청둥이가 오른쪽 날개를 찾고
번쩍이는 칼을 허리에 차면
우리 그녀가 가장 놀라겠지

아항! 청둥이가 사랑에 빠졌다네
자꾸만 그녀의 얼굴이 보고 싶고
그녀가 바로 옆에 있어도
또 보고 싶고
보고 나서도 금방 또 보고 싶다네
사나이 청둥이가 사랑에 빠졌는가봐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네
그녀의 목소리만 들리면
이 청둥이의 가슴에 봄비가 내리네
그녀의 목소리만 들리면
나의 가슴에서 대포소리가 난다네
그녀의 눈길만 느껴도
내 가슴엔 덤프트럭이 지나간다네

초저녁 별빛이 하나 둘 물속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별빛은 달빛보다 훨씬 더 섬세하다.
달빛이 더 훤하기는 하지만 달빛을 받은 사물의 윤곽은 뭉개져 보인다.
그러나 별빛은 각각의 윤곽을 뚜렷하게 만들어 사물의 표정을
훨씬 더 섬세하게 읽게 한다.
청둥이의 노래 끝에 목어의 등위에 앉아있던 꽃지가 부끄러운듯 홍조를 띠었다.
목어도 빙긋 웃었다.
내가 청둥이에게 바짝 다가가서 속삭이듯이 말했다.

‘뭐? 덤프트럭이 너의 가슴 위로 지나간다구?’

‘엥! 내가 덤프트럭이라구 말했남?’

청둥이가 깜짝 놀라며 얼른 고개를 뒤로 돌려 목어의 등위에 앉아있는
꽃지를 바라보았다. 꽃지가 재빨리 까만 눈을 등깍지 속으로 쏙 집어넣었다.
청둥이가 날개깃으로 내 손을 가져다가 자신의 가슴에 얹어주며
부리를 내 귀에 대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래! 지금 내 가슴 속엔 덤프트럭이 아니라 기차가 지나가고 있어’

‘이크, 기차바퀴가 내 손을 짓뭉게고 굴러가는 것 같다!’

높은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섬 하나가 멀리 시커멓게 형체를 드러냈다.
마치 바다 속에서 급히 올라왔다가 다시 하늘로 솟기 위해서
힘을 모으려고 잠시 웅크린 모습이었다.
뒤에서 목어의 목소리가 들렸다.

‘휴! 저곳이다. 이제야 선갑도가 보인다.
우리가 이 컴컴한 밤바다에서 헤매지 않고 제대로 찾아왔어.
이제 다 왔다‘

‘하얀 이빨섬 백아도까지 가야 한다고 그랬는데...’

‘이곳 모두가 백아도의 지경이다.
저 선갑도는 백아도 앞마당에 들어서는 솟을대문이나 다름없다.
옛날에는 신선의 세계와 접해있는 섬이라고 해서 선접도라 부르기도 했지.
청둥이의 잃어버린 오른쪽 날개는 저 선갑도와 울도 사이에 있는
작은 돌섬 바다 밑에 있을 것이야.
오래전에 내가 청도요새에게 들었던 기억이 틀림없다‘

그 말을 들은 청둥이가 눈앞에 보이는 선갑도를 향해
더욱 힘차게 물을 끌어 당겼다. 짙푸른 바다위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선갑도의 검은 밤하늘에서 별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물속에 들어와서 더욱 반짝이는 별들이 물결과 함께 출렁대며
우리를 반갑게 맞이했다.
별빛이 선갑도 바다의 어둠을 말끔하게 쓸어내며
우리에게 바닷길을 내주었다.
우리는 절대 외롭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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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Day by Day]-189 / '木魚' 111 - 달빛 바닷길
이름: damibox


등록일: 2009-01-24 16:08
조회수: 2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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