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담의 그림창고



                                                                                                                                         30 x 45 cm /종이에 먹과 수채/08.12. 04

['木魚' 102 - 다시 아침이 오다]

내가 일어났을 땐 벌써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밤새 뒤척이다가 새벽 여명을 보고 잠이 들었던 탓에 오랜만에 늦잠을 잔 것이다.
어제 하루 동안 우리는 너무 많은 경험을 했다. 그러나 도무지 나는 모르겠다.
어제 물속도시에서 하루를 있었는지 열흘을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시간에 대한 감각이 사라졌다. 이곳 물속은 시간을 계산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물속에 들어온 이후 얼마 되지 않아 처음엔 방향감각이 사라져서 자유스러웠다.
그리고 이젠 시간감각 마저 사라지니 내 몸의 존재를 가끔 느끼지 못할 때가 있다.
자신의 위치와 존재를 잊어버릴 때를 우리는 ‘환상’이라고 한다.
나는 목을 굽혀 내 몸의 이곳저곳을 살피며 얼른 내 몸의 수치들을 떠 올렸다.
‘키 일백칠십이, 몸무게 육십이, 허리둘레 삼십이, 눈밝기 양쪽 영점구, 발크기 이십육점오’
내 몸의 수치는 아직도 이렇게 여전하므로 나는 확실하게 현실에 존재한다.
지금 내가 앉아있는 이곳 물속 바닥은 ‘현실’임이 분명하다.

일어나 정신을 차려서 둘러보았다.
목어는 어제 밤 잠들었던 자리에 그대로 턱을 바닥에 바짝 괸 채
꼼짝도 하지 않고 눈만 껌벅이고 있었다.

목어 옆에서 자던 청둥이와 꽃지는 벌써 일어나 쌀섬 바다 밑 흰바위들 사이에서
무엇을 찾는지 구석구석 살펴보고 있었다.
물속에 찾아든 햇빛은 어제의 것과 똑 같았다. 검은 물빛과 퀴퀴한 냄새, 그리고
여기저기 작은 부유물질들이 떠다니는 것도 똑 같았다.
물속은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이다.
어제 우리들이 물속도시에서 겪었던 그런 세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이 시화바다는 여전히 조용했다.
우리도 이런 시화바다처럼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목어의 몸은 좀처럼 회복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많이 상했다.
어제 물속도시의 붉은 뿌리에 휘감겨 끌려 다녔던 탓에 여러 곳이 망가졌다.
상처를 입은 순한 짐승이 상처가 아물 때까지 조용하게 웅크리고 있듯이
그의 둔중한 큰 몸은 조금도 미동을 하지 않고 엎드려 있었다.
목어의 큰 눈망울이 슬프게 보였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고 오겠다고 눈짓으로 말했다.
목어 역시 잠깐 입가에 억지 미소를 띠면서 눈짓으로 다녀오라는 표시를 했다.
나는 여기저기 쑤시고 저리는 몸을 일으켜 청둥이와 꽃지가 돌아보고 있는
흰바위들 밑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붉은 뿌리에게 얻어맞은 가슴의 통증이 이젠 옆구리와 허리까지 내려왔다.
숨을 들이키면 예리한 칼끝이 가슴을 베는 것 같은 아픔이 느껴졌다.
발바닥을 땅에 디딜 때 마다 허리와 옆구리에 쇠막대가 박힌 것처럼
통증을 건드렸다.
청둥이가 나를 보자마자 반가운 소리로 맞았다.

‘캬! 살아나셨구먼. 저 인간은 중요한 때면 항상 늦잠을 잔단 말이야!
그런데 왜 절뚝이며 걷지?‘

‘응. 어제 붉은 뿌리에게 얻어맞았던 것이 허리 쪽 까지 통증이 내려왔는가 봐.
그런데 지금 뭣들 하고 있어?‘

‘목어 아저씨의 망가진 몸을 어떻게 고쳐봐야지.
나무로 깎아진 몸이니까 이런 것으로 박아서 고정하면 안될까?‘

청둥이가 바위밑을 뒤져 주은 물건들을 보여주었다.
붉은 녹이 덕지덕지 붙은 채 구부러진 대 못처럼 생긴 것 여나무개,
녹이 잔뜩 슬어 반 뼘이 채 되지 않는 작은 못 열댓개, 그리고 서너뼘 되어 보이는 녹슨 철사 대여섯개,
폐그물에서 풀어낸 나이롱끈 한 뭉치 등이었다.
바위 틈새에서 집게발에 가는 끈 뭉치를 물고 어렵사리 빠져 나오는 꽃지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아! 일어나셨네. 아저씨도 많이 상했구나. 가슴에 시퍼런 멍이 앉았어!’

나는 손을 내밀어 꽃지가 주워온 노르스름한 비닐끈 뭉치를 받았다.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다. 우선 이것으로 목어의 몸을 수리해 본 후에
부족한 것이 있다면 나서서 또 구해보자‘

우리는 바위틈을 뒤져 주은 것들을 주섬주섬 챙겨서 목어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목어는 우리를 여전히 엎드린 채 눈짓으로 반갑게 맞았다.
목어의 낯빛이 아까보다 더 어두워졌다.
청둥이가 목어의 얼굴에 노란부리를 부비며 말했다.

‘아저씨! 지금 열반할 때가 아니라구!
아저씨도 없이 나 혼자서 오른쪽 날개를 찾으러 어떻게 서해 바다를 건너냐구? 괙괙괙
우리가 아저씨 나무 몸을 예전보다 훨씬 더 튼튼하게 수리할 거야.
조금만 참아봐! 이 청둥이가 항상 곁에 있으니까 염려말라구‘

목어가 눈으로 나를 넌지시 가리키자 청둥이가 목을 홱 틀면서 말했다.

‘으헹! 저 인간과 함께 서해 큰 바다 한 가운데 떠있는 백아섬까지 가라구?
저 인간 땜에 괜히 물속도시에 따라갔다가 겨우 살아서 돌아왔는데
또 함께 나섰다간 백아섬에 도착하기도 전에 내 몸이 탕국으로 변해
용왕님 수라상에 오르게 될 거야‘

‘으흐흣 고것 참! 맛있겠다. 으흐’

나는 가슴과 옆구리 통증 때문에 크게 웃지도 못하고 잦아든 소리로 말했다.
청둥이가 꽥꽥 소리를 질러대면서 덤벼들었다.

‘왜들 그래? 몸들도 성치 않으면서!’

꽃지가 끼어들어 말리자 청둥이가 오목한 눈에 화를 낸 척하면서
나에게 큰소리로 퍼부었다.

‘내 그럴 줄 알았어! 이 인간이 나를 바라보는 눈이 그동안 항상 수상했다구.
인간들의 눈엔 모든것이 먹을 것으로 보이는가봐. 그래서 인간은 믿을게 못 돼.
여태 조용하던 시화바다가 이 인간이 나타나면서부터 여기저기가 시끄럽게 변했다구.
하여튼 인간이 있는 한 세상은 조용할 날이 없어! 암! 그렇고 말구.
인간은 모든 불화의 근원이야!‘

목어는 우리들의 댓거리를 지켜보면서 희미하게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리고 다시 물속 먼 끝으로 시선을 돌렸다.
목어의 까만 큰 눈은 이미 이곳 물속을 건너서 멀고 먼 곳에 닿아 있었다.
그의 눈은 꿈을 꾸고 있는 듯 보였다.
분명히 그는  파란 물이 출렁이는 곳에 파도꽃이 하얗게 피어나는 넓은 바다를
마음껏 헤어가고 있는 꿈을 꾸고 있었다.

나는 헐거워서 금방이라도 내려앉을 것 같은 목어의 왼쪽 아가미와
찢어져 너덜대는 턱밑 지느러미, 그리고 몸통에 길게 간 금을
번갈아가며 유심히 살펴보았다.

‘주워온 이것들을 내가 추리고 있을 테니
청둥이와 꽃지는 망치 대신에 사용할 수 있는 단단한 돌멩이 두 개만 구해다 줘.
이제 목어의 몸을 수리할 준비를 하자‘

꽃지가 앞장을 서자 청둥이가 뒤를 따르면서 투덜댔다.

‘흥! 인간들은 꼭 남에게 명령하기를 좋아한단 말이지.
자기가 뭐나 된 것처럼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는 것이 아주 습관이 되었어!
조만간에 지구상의 모든 인간은 이놈 저놈 할 것 없이
모조리 서로 명령하는 사람이 되어 있을거야. 괙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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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Day by Day]-179 / '木魚' 102 - 다시 아침이 오다
이름: damibox


등록일: 2009-01-12 12:30
조회수: 2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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