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담의 그림창고



                                                                                                                                         30 x 45 cm /종이에 먹과 수채/08.11. 03
['木魚' 99 - 경계를 넘다]

아흔 걸음을 다 걸었는지, 혹은 여든 아홉 걸음인지 일단 걸음을 멈추고 마음 속으로 헤아리며 한참을 서 있었다.
내 망막을 덮고 있는 어둠은 점점 새벽 여명을 닮아갔다. 퍼런 여명 속에서 나의 몸은 점점 하얗게 변했다.
손바닥을 들어 올려 앞을 더듬어 보았다. 퍼런 빛깔이 손에 묻었다.
손에 묻은 여명을 손가락으로 비벼보았다. 차겁고 까칠한 질감이었다. 나는 몸속까지 새하얗게 변했다.
하얀 손에 묻은 퍼런 빛깔은 미세한 얼음가루 같았다. 한걸음을 더 걸어야 될 것인지 말 것인지 이 경계는 더욱 불확실했다.
삶과 죽음이 이 한걸음에 엉켜있는 셈이다.

이때 무엇인가가 내 엉덩이를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나는 깜짝 놀랐다.
붉은 뿌리가 이곳까지 따라와 내 뒤를 노리는 것일까? 나의 몸이 돌처럼 굳었다.
그러나 촉감이 낯익었다. 청둥이의 노란 부리였다.
얼마나 반가웠던지 큰소리를 지를 뻔 했다. 붉은 뿌리에 휘감겨 갈기갈기 찢겨져서 물속도시에 떠돌고 있을 청둥이가
나의 엉덩이에 자기의 존재를 표시했다. 청둥이도 죽음을 통과하여 나와 함께 나란히 세상의 문 앞에 서있었던 것이다.
나는 엉덩이를 흔들어 꽃지의 안부를 물었다.
청둥이가 나의 엉덩이를 톡톡 쪼았다. 청둥이의 등에 업힌 꽃지도 무사하다는 표현이었다.
또 잠시 후에 내 엉덩이 다른 쪽을 쪼았다. 뒤 따라오는 목어도 무사하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엉덩이를 위아래로 흔들어서 나도 역시 무사하다는 표현을 했다.
그리고 잠시 후에 또 엉덩이를 흔들어서 눈물 나게 반갑다는 말을 전했다.
청둥이도 나의 엉덩이를 쪼아 목어와 너 그리고 꽃지도 모두 죽은 줄 알았다는 말을 했다.
자기의 등에 업힌 꽃지를 붉은 뿌리가 휘감아서 산산조각 내는 것을 분명히 보았는데 지금 꽃지는 살아서 등에 업힌 채
양쪽 집게발로 자신의 목을 꽉 두르고 있다는 말을 전했다. 그리고 목어도 붉은 뿌리들에 휘감겨 육중한 몸이
힘 한번 쓰지 못한 채 두 쪽으로 쩍 갈라져서 물속은 온통 목어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로 빨갛게 물들었으며
자기는 그 핏속을 엉엉 울면서 걸어왔다고 말했다. 그런데 지금 목어는 살아서 청둥이의 꼬리깃에 그 큰 입을 대고 있다고 전했다.
나는 엉덩이를 앞뒤로 흔들어서 지금 나는 너무 기뻐서 울고 있다고 전했다.
청둥이가 내 엉덩이를 마구 쪼았다. 자기가 더 눈물이 난다는 말이었다.
가슴이 뛰었다. 다시 만나게 된 동료들이 너무 고마웠다.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고마웠다.
조금 후에 청둥이가 내 엉덩이를 강하게 쪼았다. 빨리 남은 한걸음을 떼라는 말이었다.
나는 이 경계에서 청둥이의 말을 믿기로 했다. 발을 높이 올려 크게 한 걸음을 걸으면서 이 불확실한 두려움에 가슴이 진저리를 쳤다.
결국 경계를 넘은 것이다. 동료들이 모두 살아있는 것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었다.
그러나 이 한걸음에 또 천지가 뒤바뀌는 거대한 사건이 생길 것 같았다.
나는 크게 한걸음을 찍으면서 ‘아흔!’ 이라고 입술을 달싹여 셈을 마쳤다.
이 한 걸음이 또 무슨 큰일을 불러올 것 같았는데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예의 똑 같은 걸음이었다.
경계를 넘어서서 바라다보는 경계는 이처럼 무의미했다.
우리는 이제 물속 도시에서 세상의 일상으로 귀환한 것이다.
그러나 눈을 뜨기 싫었다. 눈을 떠서 새롭게 변해 있는 세상을 보기가 두려웠다.
세상은 그동안 너무 많이 새롭게 변해 있을 것 같았다. 내 눈꺼풀 밖의 세상은 한없이 낯설 것이다.
눈을 떠서 이 낯선 세상과 갑자기 맞닥뜨리는 것이 너무 민망할 것 같았다.

내 엉덩이에 댄 청둥이의 부리가 따뜻했다.
청둥이가 부리를 내 엉덩이에 부볐다. 자기도 지금 급하게 눈을 뜨기 싫다는 말이었다.
나도 엉덩이를 청둥이의 부리에 문질러서 우리는 이제 세상으로 무사히 귀환했다는 말을 전했다.
청둥이가 머리를 내 엉덩이에 가볍게 찍으면서 하얀사람을 잃어버린 것이 너무 슬프다고 말했다.
그리고 너, 가여운 인간이 붉은 뿌리에 휘감겨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몸둥이는 몸둥이대로 산산조각이 나서
검은 물속에 둥둥 떠내려가고 너의 머리가 펄쩍펄쩍 뛰면서 나를 부르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는데도
자기는 아무것도 도와줄 수 없어서 너무 괴로웠다고 말했다.
그가 흘린 눈물과 콧물이 뒤범벅이 되어 내 엉덩이가 축축하게 젖었다.
나도 하얀사람을 구하지 못해서 너무 미안하다고 엉덩이를 좌우로 흔들어서 말했다.
잠시 후에 청둥이의 부리가 내 엉덩이를 아프도록 마구 물어뜯었다.
왜 너 인간은 내 몸을 거꾸로 들고 꽃지를 낚는 도구로 사용했냐는 말이었다.
나는 엉덩이로 청둥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것은 꽃지를 구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지 않냐고 전했다. 그 덕분에
청둥이와 꽃지는 죽음과 삶을 넘나드는 환상적인 입맞춤을 했지 않냐고 말했다.
청둥이가 부끄러운지 내 엉덩이에 자기의 얼굴을 부비며 주둥이를 쩝쩝거리면서
그건 분명히 낚시질이지 입맞춤은 절대 아니라고 전했다.
이때 꽃지가 집게발로 바닥을 톡톡 치면서 의아심에 가득찬 목소리로 말했다.

‘목어 아저씨! 이 둘이 지금 뭐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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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Day by Day]-144 / '木魚' 99 - 경계를 넘다
이름: damibox


등록일: 2008-11-05 13:44
조회수: 27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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