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담의 그림창고




                                                                                                                           30 x 45 cm /종이에 먹과 수채/08.11.13 , 08.11.12
['목어' 03 - 쌍섬의 무지개]

나는 퇴근길에 진한 안개 속을 걷고 있었다.
해안도로 사거리에서 정확하게 다섯 번째 전봇대를 왼쪽에 두고 둑방을 지나 바다 쪽을 향해 내려간다.
이렇게 삼백 걸음쯤 걸어가다 안개 속에서 낚싯대를 매고 돌아오는 한 노인과 마주쳤다.
나는 매일 똑 같은 곳에서 똑같은 시간에 똑 같아 보이는 노인을 만났다.
내가 먼저 눈인사를 하면 노인은 나를 머리꼭대기부터 아래로 주욱 훑어보다가 나의 엄지손가락에 시선을 고정하고
매번 똑 같은 표정으로 똑 같은 말을 했다.

‘호! 젊은이는 원래 여그 사람이 아니제?
여긴 시화바다가 아니라 쌍섬 앞바다라구. 쌍섬 앞바다! 나 젊었을 적엔 여기를 시화바다라고 부르지 않았어.
시방 젊은이가 발딛고 서 있는 여그는 사리포구가 있던 자리야!
내가...쌍섬 앞바다에 고기 한 사발 물 한 사발일 때 이곳 사리포구에서 야거리 고깃배를 저어 바다 한 가운데로 나가는데
저그 저쪽 잿머리에서 커다란 물고기 같은 뱀이 구불거리며 하늘로 솟아오르다가 힘이 부쳤는지
건너편 갯벌위에 뚝 떨어지는 것을 보았지.
그 물건이 불쌍하게 생각되어 그쪽으로 노를 저어가 삿대를 그 짐승 앞에 대 주었더니
그녀석이 삿대를 돌돌 감고 올라와 배 이물칸 덕판위에 또아리를 딱 틀고 앉아서 나를 바라보았지.
머리 양쪽에 큰 귀가 달린 물고기처럼 생긴 뱀이였어. 그 놈이 자꾸만 저울섬 형도를 향해 머리짓을 하는거야.
그걸 보고 내가 머리를 끄덕이며 저울섬 형도에 배를 대어주었더니
나에게 고맙다는 듯이 인사를 꾸벅 하고 내려가 저 형도 숲속으로 기어 올라갔어.
그날 고기를 한배 가득 잡아 돌아오는데 큰가리섬과 작은가리섬, 이 두 개의 쌍섬에 안개가 자욱하고 위로 무지개가 둥글게 솟았어.
그날은 쌍섬에 용마루가 하늘로 날아갈 듯한 기와집이 보이드라구... 몇일전엔 둥근 초가집이 보이더니...‘

말을 마친 노인은 잿머리쪽을 바라보면서 낚시대를 왼쪽 어깨에 옮겨 매고 내 어깨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나는 내 걸음 숫자를 세면서 안개를 밟았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걸음에서 어김없이 노인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손짓을 하며 다시 나를 불렀다.

‘어이! 젊은이!’

내가 뒤돌아서면 노인은 방금했던 똑 같은 말을 반복하고 나서 안개 속으로 걸어갔다.
오늘도 안개는 유난히 낮게 깔려 있었다.
허벅지 아래로 낮게 깔린 안개가 어디론가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도시의 안개에 쫓겨 시화바다로 왔는지 아니면 바다의 안개가 나를 불러 왔는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안개는 길과 돌멩이와 풀과 도시와 바다를 구분할 수 없게 하듯이 안개 속에 몸이 깃들게 되면
마음속에 품었던 생각조차도 안개에 가려 경계가 없어져 버린다.

도시와 시화바다 사이 완충지대엔 원추리 꽃이 지천이었다.
도시에서 내려온 안개와 시화바다가 뿜어낸 안개가 서로 부딪쳐 밀고 당기는 곳에
노란 원추리 꽃봉오리가 둥둥 떠서 흘러가고 있었다.
도시의 안개는 약간 끈끈했고 시화바다의 안개는 조개껍질을 곱게 갈은 가루처럼 버슬버슬했다.
낮게 깔린 안개 때문에 이파리는 전혀 보이지 않고 꽃대만 안개위로 쏙 내밀고 피어 있는 원추리 꽃봉오리들만
마치 안개바다에 둥둥 떠내려가고 있는 것 같았다.
원추리 꽃의 향기를 머금은 안개를 오래 들이키게 되면 정신이 야릇하면서 혼미해졌다.
도시의 진한 안개가 나의 등을 바다 쪽으로 떠밀었다.

서른 걸음을 걷고 나서 나는 방독면을 벗어 녹슨 철조망에 걸었다.
또 서른 걸음을 걷고 나서 윗옷을 벗어 마른 갯벌에 박혀있던 목책에 걸었다.
다시 서른 걸음을 걷고서 바지를 벗어 허물어진 블럭 담 모서리에 걸어 표시를 해 두었다.
안개 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돌아오기 위해서는 이렇게 무엇인가 표식을 해 두어야 했다.
다시 서른 걸음을 걷고 나서 런닝셔츠를 벗어 고사한 나뭇가지에 걸어 두었다.
창고지기인 나는 숫자 밖엔 믿을 것이 없었다.
창고에 들고나는 물품 숫자를 세고 또 그 물품들이 창고 속에 보관되는 날수를 셈했다.
그 숫자들을 씨와 날줄로 엮으면 요즘의 경기지표는 물론 내일의 날씨까지도 기상청 보다 훨씬 더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또한 특정한 날의 주가지수나 환율을 미리 알아 맞추는 것도 식은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두 달후의 시의원 선거에서 누가 당선될 것인지도 이 숫자를 통해서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무엇이든 숫자로 기억하고 숫자로 판단했다. 그 판단은 항상 정확했다.
또 서른 걸음을 걷고 나서 팬티를 벗어 누군가가 박아놓은 나무 막대기에 걸쳐 놓았다.
이제 나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다. 자유스러웠다. 안개는 배꼽부근까지 차올랐다.
더 아래로 걸어 내려갔다.
안개가 가슴까지 차올랐다. 조금 더 걸어 내려가자 나의 몸은 완전하게 안개 속에 숨겨졌다.
안개가 눈꺼풀 속으로 들어왔다. 입속으로 들어온 안개가 내 목젓을 짓눌렀다. 숨이 막혔다.
내 코로 들어가 폐부에 가득찬 안개가 가슴을 짓눌렀다. 가슴이 막혔다.
그러나 이 정도의 가벼운 고통은 나에게 오히려 안도감과 즐거움을 주었다.

조금 더 걸어 내려가자 나의 발등에 부드러운 갯뻘이 포근하게 감겼다.
발이 촉촉하게 젓은것을 느끼자마자 그 다음 발걸음에서 찰랑 물소리가 났다.
내 한쪽 발이 드디어 물에 닿은 것이다. 그러나 안개 때문에 물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허리를 굽혀서 손을 물속에 넣고 저어보았다. 분명히 물이었다. 손가락을 혀에 대 보았다.
약간 시금한 냄새에 짭조름한 맛이었다.
이것은 분명히 시화바다라고 부르는 쌍섬 앞바다의 물이었다.
바다의 안개가 내 손을 슬그머니 잡아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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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Day by Day]-149 / '목어' 03 - 쌍섬의 무지개
이름: damibox


등록일: 2008-11-14 11:28
조회수: 2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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