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담의 그림창고



                                                                                                                                         30 x 45 cm /종이에 먹과 수채/08.11. 04
['木魚' 98 - 경계에 서다]

머릿속이 온통 하얗다.
내 발바닥으로 느껴지는 갯뻘의 부드러운 감촉이 온몸을 슬픔에 젖게 했다. 모진 목숨이었다.
오히려 부드러움은 나를 절망과 희망이 괴이하게 교차하는 비애 속으로 끌고 갔다. 모두 죽었다.
나 혼자 살아서 세상 속으로 귀환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도 반가워 할 사람도 없는 귀환이었다.
어떻게 해야 될지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동료들을 물속 도시에게 모두 빼앗기고 나 혼자 살아남아서  세상의 문을 두드리고 있는 것이다.
세상의 문 앞에 선 나의 모진 목숨은 한없이 누추할 뿐이었다.
그들의 죽음보다 홀로 살아남아서 세상의 문을 두드리는 내 누추한 모습이 더욱 슬펐다. 목어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밖으로 나가는 통로는 들어오는 과정의 역순이라고 그가 말했다.

나는 먼저 오른쪽으로 몸을 돌려서 아홉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동료들의 죽음을 뒤로 하고 혼자 살아남아 바깥으로 나가려는 나는 너무 비겁한 존재였다.
아홉걸음을 걸은 다음에 다시 오른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아흔 걸음을 걸었다.
지금이라도 뒤돌아서서 차라리 그들의 죽음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생각에 잠시 망설였다.
어둠을 덮은 각질같은 검은 색이 벗겨지면서 질끈 감은 내 망막의 중심에 보라색 작은 점이 자라나고 있다.
망막 안에서 붉은 색과 푸른색이 서로 영역을 다투며 번져갔다. 그러나 한 걸음씩 걸을 때 마다 다툼은 혼융이 되어 보라색의 부피는
자꾸만 커지더니 아흔 걸음을 다 걸었을 땐 내 망막은 온통 보라색 뿐이었다.

나는 입술을 딸싹이며 아흔 번을 세고 주춤거리다가 오른쪽으로 몸을 돌려 다시 아홉 걸음을 걸었다.
살기 위해서 다시 세상으로 들어가는 이 걸음걸이는 누추할 뿐이었다.
이 아홉 걸음이 구천 구백 아흔 아홉 걸음 보다도 더 길게 느껴졌다.
보라색 속에서 거대한 눈이 번뜩이며 지나갔다. 금빛 삼지창을 겨누며 하얀사람이 뒤를 쫓아 망막에서 사라졌다.
모두 삶과 죽음의 경계를 다투고 있었다. 붉은 뿌리들이 망막안에서 푸른 바다를 가르며 날아왔다.
뿌리가 올무를 치면서 바다의 푸른색을 한웅큼 베어 먹었다. 뿌리가 꿈틀대며 점점 보라색으로 변해 사라졌다.
아니 본디 보라색에서 파랑과 빨강이 분리되었을 수도 있다. 모든 것이 불확실했다.
다시 새로운 붉은 뿌리들이 자꾸만 밑에서 솟아올랐다. 붉은 뿌리와  파란 바다가 서로 다투면서 경계가 불확실해졌다.
인간의 미래가 새겨졌다는 별똥별은 결국 우리들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았다.
인간세상의 미래를 보아야겠다는 내 생각 자체가 불확실한 경계를 의미했다.
별똥별의 너울대는 빨간 불꽃 속에 누군가가 반듯이 누워있었다. 빨간 불꽃과 파란 바다가 서로 뒤섞이면서 보라색 얼굴을 만들었다.
그 보라색 얼굴이 내 망막에 꽂혔을 때 붉은 뿌리에 가슴을 강하게 얻어맞고 나는 잠시 정신을 잃었던 것이다.
악마를 닮은 불안은 이 불확실한 경계에 아가리를 벌리고 날카로운 이빨을 번쩍였다.

나의 걸음은 불확실한 곳만 따라 밟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내 삶 자체가 불확실했다.
이곳 시화바다가 호수인지 바다인지 불확실했다. 그리고 이곳엔 생명의 물이 담겨있는지 죽음의 물이 담겨있는지 불확실했다.
물속도시가 시화바다 안에 있는지 물속도시 안에 시화바다가 있는 것인지 도무지 불확실했다.
물속도시가 인간의 것인지 거대한 눈의 소유인지 불확실했다.
내 걸음이 닿는 곳이 어디인들 어떠랴. 모두 죽고 어차피 혼자서 귀환하는 걸음이다.
아홉 걸음을 걷고 다시 오른쪽으로 방향을 돌릴 때 언뜻 고소한 냄새 같은 것이 코끝을 스쳤다.
누룽지나 혹은 커피냄새? 나는 멍청하게 서서 코를 벌름거리며 그 냄새를 찾았다. 아니다. 손톱이나 머리카락이 타는 냄새 같았다.
온 몸이 갈기갈기 찢겨져 어두운 물속을 떠다니던 청둥이의 하얀 날개가 거대한 눈의 아가리 속에 들어가 불에 타고 있는 것인가.
인간이 버린 쓰레기 욕망들과 함께 그의 순결한 하얀 날개깃이 한가닥의 연기로 변했는가.
그러나 누린 냄새는 어디로 가버리고 대신에 푹 삭은 홍어냄새가 났다. 예전에 삼류 영화관 화장실의 코를 찌르는 암모니아 냄새였다.
갑자기 바깥세상이 그리웠다.
아득한 곳에서 누군가 먹을 것을 끓이려는지 냄비 뚜껑을 여는 소리도 들리고 냄비에 수돗물을 받는 소리도 들렸다.
쌀을 씻는 소리가 들렸다. 쌀 알갱이가 망막 안으로 가득 쏟아졌다. 하얀 쌀이 보라색으로 물들었다.
아흔걸음을 시작했다. 몸은 자꾸만 위를 향해 걸었다. 한걸음 한걸음이 벼랑을 기어 오르듯이 힘겹고 숨이 차다.
부드러운 갯뻘은 어느새 진득진득한 접착제 같은 바닥으로 변했다. 바닥이 나의 발목을 잡아당겼다.
나는 손을 헤적이면서 걷고 또 걸었다. 자꾸만 바닥은 더 진득진득하게 변했다.

걸음걸이도 불확실하고  걸음을 헤는 숫자도 불확실했다. 질끈 감은 눈 속엔 온통 보라색 천지였다.
몸이 휘청거리면서 나의 망막도 흔들렸다.
보라색 아래쪽에서 검은 오니들이 피어올랐다.
경계만이 갖는 애매한 힘을 자랑하듯이 찬란하던 보라색은 금방 추접한 색깔로 변했다.
불확실한 경계는 항상 오염에 약했다. 오니가 더욱 시커멓게 피어오르면서 나의 망막은 모두 검은 어둠이 장악했다.
나의 걸음이 여든 둘인지 여든 세번째인지 불확실했다. 일곱걸음을 더 걸었다.
여전히 진득진득한 어둠이 내 발바닥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여든 아홉인지 아흔인지 불확실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반듯이 서서 망막 속 먼 곳을 주시했다. 질끈 감은 눈은 아직 뜰 수가 없었다.
내가 발을 딛고 서있는 여기가 아흔걸음을 다 걸은 것인지 아니면 한걸음을 더 뗄 것인지 나는 여전히 불확실한 경계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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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Day by Day]-143 / '木魚' 98 - 경계에 서다
이름: damibox


등록일: 2008-11-04 13:21
조회수: 26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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