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x 45 cm /종이에 먹과 수채/08.10.21
['木魚' 90 - 거대한 눈]
물속 도시를 만들어내는 거대한 눈이 하얀 맨살을 뽀얗게 드러내 넓은 광장을 만들었고 광장 위로 붉은 뿌리들이 꿈틀대었다.
그의 하얀 속살 한 가운데 떨어져 박힌 별똥별이 아직도 작은 불꽃을 달고 있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별똥별을 거대한 눈이 자신의 뽀얀 속살로 받았던 것이다.
거대한 눈 바로 아래에서 뻗힌 붉은 뿌리가 두 개로 갈라져서 별똥별을 보듬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뿌리들도
모두 붉은 기운을 뿜어내면서 맨 살 위에 드러내어 낯선 방문객들을 경계하며 긴장을 하고 있었다.
눈동자가 움직이자 눈 아래 붉은 뿌리도 조금씩 꿈틀대었다.
거대한 눈이 숨 쉴 때 마다 뽀얗게 흰 맨살이 천천히 부풀어 올랐다가 내려앉았다.
‘끌끌끌 살아있는 것들의 방문은 처음 보는구나. 그동안 고장난 것과 닳아빠진 것과 버림받은 것과 썩은 것과
던적스러운 것을 흘려보내는 것도 부족해서 살아있는 것들이 직접 몸소 흘러 오다니... 끌끌끌 반갑다’
그의 목소리는 여러 겹으로 중첩되면서 메아리처럼 물속을 울렸다.
목어가 거대한 눈에게 말했다.
‘우리는 별똥별을 보려고 스스로 이곳까지 왔다. 허락해라’
‘끌끌끌 난 내 의지대로 움직이는 것이 단 하나도 없다. 괴기스러운 이 몸도 바깥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고
내 스스로 목숨을 끊어 죽고 싶어도 너희가 보았듯이 날마다 인간들이 여러 영양분을 거름으로 흘려 보내주는구나.
죽을래야 죽을 수도 없다. 끌끌끌 하릴없이 물속도시를 키우는 일도 내 맘대로 그칠 수가 없다.
내가 왜 이렇게 괴기스럽게 살아있어야 하는지 이래저래 나도 원한만 남았다. 너희가 별똥별을 본다고? 끌끌끌
허락하고 싶지만 인간들이란 원래 미래의 진실을 감추고 싶어 하더구나. 내 의지와 상관없이 허락을 할 수가 없다‘
꽃지가 집게발을 들어 올리며 앙칼진 목소리로 외쳤다.
‘그래도 우리는 봐야 겠다’
‘미친 녀석들. 끌끌끌 다시 한번 충고한다. 이 물속도시에서 탈출하기도 쉽지 않다.
뒤돌아서 나갈 생각이나 하는 것이 조금이라도 너희의 목숨을 보전하는 길이다’
잔뜩 겁이 난 나도 목어에게 몸을 밀착시키며 말했다.
‘거대한 눈! 여기까지 오는 것도 목숨을 걸고 왔다. 우리는 별똥별을 꼭 봐야 겠다’
‘끌끌끌 인간이로군! 이곳 까지 목숨을 걸고 왔다구? 인간들이란 서로 아귀다툼을 할 때나 목숨을 걸지.
이곳까지 들어와서 거짓말을 잘도 하는구나. 끌끌끌 저 위선으로 뭉쳐진 입 주둥아리. 별똥별에 새겨진 미래를 보고 싶다구.
가증스러운 것!. 너희들 세상의 미래란 지금까지 너희들이 살아온 것을 되돌아보면 뻔히 알 수 있는 것 아니더냐.
끌끌끌 살아있는 인간을 보니 아아! 갑자기 내 원한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너의 냄새가 낯설지 않아. 네가 그동안 버렸던 물건들과 허위로 가득 찬 말과 글들도 이미 내 살과 뼈가 되어 있지.
너의 그 주둥아리로 속삭였던 달콤한 사랑의 말들도, 그리고 그 사랑을 배신하며 이렇게 저렇게 만든 거짓 변명 찌꺼리들도
내 몸 어딘가에 박혀 있지. 이 괴기스러운 내 몸을 만들어내는 것에 너도 많은 거름을 흘려보냈다.
크흐흐흑 지금도 내 몸 어디엔 달콤한 사랑의 말이 중얼대고 또 어딘가에선 그 사랑을 증오하는 외마디가
송곳처럼 내 몸을 쑤셔대고 크흐흐악 나는... 난 너무 괴로워서 날마다 미치고 있다구! 아아.
살아있는 인간! 내가 가장 증오하면서도 그들이 흘려보내준 것을 받아 마셔야 하는 내 추악한 몰골을 보니 기분이 좋은가.
끌끌끌 그래 오랜만에 살아있는 싱싱한 것을 빨아 마셔보자. 용기를 내어 이쪽으로 건너 와 봐라.
끌끌끌 마른 내 입에 벌써 군침이 도는구나.
아하! 곧 바로 너의 몸을 쭈욱 빨아서 오늘 새롭게 올라가는 건물 화장실의 양변기로나 만들어 주겠다‘
그가 부르르 떨며 붉은 뿌리 두어 개를 휙 들어 올렸다가 자신의 하얀 살을 내리쳤다.
물속은 큰 폭탄을 맞은 듯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주변 빌딩들이 크게 흔들렸다.
목어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위험하다. 이제 너도 내 등위로 올라가라’
내가 목어의 등위로 올라가 청둥이 뒤에 자리를 잡아 앉자
청둥이가 엉덩이를 자꾸만 뒤쪽으로 빼며 말했다.
‘이건 인간들 끼리 문제니 내가 낄 자리가 아닌 것 같아.
나와 꽃지는 이쯤에서 내려 기다릴테니 너희들 끼리만 별똥별을 보고 오면 안될까?’
‘흐흐흐 저 겁쟁이. 너 혼자 여기서 기다리다가 저 붉은 뿌리들 중에 제일 두껍고 긴 놈이
맨 먼저 너를 칭칭 감아서 한 입에 쪽 빨아 마셔 버릴꺼야. 흐흐흐 그러면 넌 쪼글쪼글한 껍데기만 남아서
이 물속도시를 풍선처럼 둥둥 떠다니겠지’
꽃지가 하얀사람에게 눈치를 힐끗 주면서 덜덜 떨고 있는 청둥이에게 옆걸음으로 다가가
집게발로 그의 물갈퀴를 곱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넌 강한 사나이야! 너의 단단한 노란 부리와 이 물갈퀴가 우리를 보호해 줄거야’
청둥이가 가슴에 묻었던 머리를 들더니 눈을 몇 번 더 꿈쩍이다가
나의 얼굴과 꽃지를 번갈아 보면서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저 거대한 눈이 너 인간 땜에 분노한다. 너만 아니었으면 우리끼리 안전하게 별똥별을 살짝 볼 수 있었을 텐데....
괙괙 좌우지간 이놈의 인간들이 문제야. 그런데 넌 무섭지 않니?’
‘나도 무섭다. 그런데 어찌해볼 도리가 없으니 이런저런 것 다 포기하고 닥치는 대로 해봐야지 뭐’
‘포기? 닥치는 대로.....맞아. 이럴 땐 먼저 목소리 큰 놈이 이긴다.
저 거대한 눈도 내 부리와 물갈퀴를 보면 겁에 질릴거야. 괙괙괙’
청둥이가 숨을 크게 들이키더니 갑자기 목을 앞으로 길게 빼어 거대한 눈을 향해서 소리쳤다.
‘괴기스러운 거대한 눈아! 괙괙괙
네놈이 도시 만드는 짓 땜에 내가 여기 시화바다에서 단 하루도 편하게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글구 너의 징그런 붉은 뿌리로 자꾸 우리를 겁주려고 하는데 쇠보다 단단한 나의 부리로
모조리 면도하듯 싹뚝 잘라버리겠다. 네가 만들어대는 이 헛깨비 같은 도시를 내 물갈퀴로 죄다 뜯어내
원상복구 시켜놓고 말테야. 괙괙괙
인간이 버린 것들만 받아쳐먹고 살아가는 너의 인생이 불쌍하구나‘
‘끌클큭흑.. 불쌍하다구? 그래 살아있는 너희들이 쏴대는 똥과 오줌만 먹고 자란 내가 불쌍하지. 불쌍하다.
인간의 손에 아직 오리백숙이 되지 못한 채 용케 살아남은 귀여운 오리새끼야!
불쌍한 내가 오늘 너희들에게 무서운 노여움을 보여주마. 크흐흐으악!’
그가 외쳐대는 목소리가 우리들 살 속까지 파고들어 뼈를 갉는 듯이 울려 퍼졌다.
갑자기 거대한 눈 주위의 어둠이 붉게 변하면서 가늘고 하얀 털들이 가시처럼 꼿꼿하게 세워져 흔들렸다.
거대한 눈이 동굴의 입구처럼 깊고 투명한 어두움에 잠겼다.
텅 빈듯한 그의 눈엔 분노를 넘어선 어떤 이상한 비애가 스쳐 지나갔다.
목어가 잠시 멈칫하며 주저하는 사이에 맨 뒤에 앉아있던 하얀사람이
삼지창으로 목어의 꼬리를 강하게 내리쳤다.
‘이젠 우리가 물러설 곳도 도망갈 곳도 숨을 곳도 없다. 무조건 앞으로 나가자! 흐흐흐’
목어가 엉겁결에 꼬리를 세차게 흔들며 육중한 몸을 급하게 앞으로 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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