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x 45 cm /종이에 먹과 수채/09.02.04
['木魚' 116 - 울부짖다]
우리는 꽃지가 어두컴컴한 계곡 아래로 기어가는 것을 내려다 보았다.
청둥이와 내가 그만 돌아오라고 악을 써댔지만 그녀에겐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녀가 계곡의 어둠속으로 빨려들어 가듯이 사라져버리자 우리는 갑자기 초조해졌다.
청둥이와 나는 꽃지가 모자반 줄기 끝에 묶어놓았던 끈을 조심스럽게 풀어서 움켜쥐었다.
강한 해류에 쓸려 주황색 나일론끈이 팽팽하게 포물선을 그으며 꽃지가 사라진
컴컴한 계곡 너머로 이어졌다.
이젠 꽃지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오로지 이 나일론 끈으로만 그녀를 느낄 뿐이다.
우리는 숨을 죽이고 나일론 끈을 쥔 손에 모든 촉감을 곤두세웠다.
아스라이 바다 밑까지 보일듯 말듯 이어진 주황색 나일론 끈이 유일한 소통수단이었다.
청둥이는 눈을 질끈 감은 채 귀를 끈에 바짝 대고 숨조차 쉬지 않았다.
바닥에 끌리는 듯한 감이 느껴지더니 한참 지나서 뭔가를 자르는 소리가 뚝 하면서
전달이 되었다. 간격을 두고 두 번 더 그 소리가 실려 왔다.
그리고 다시 초조한 시간이 흘러갔다. 나일론 끈에 해류가 스쳐지나가는 소리는
마치 거센 바람에 뒤엉킨 잡음 같았다. 무엇인가가 슬피 우는 소리도 섞였다.
그동안 우리들이 잠시 잊고 있었던 세상의 모든 소리가 들렸다. 길게 내쉬는 숨 끝에
휘파람 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거대한 바다가 숨을 쉬는 소리 같기도 했다.
그러다가 문득 뭔가가 퍽하며 터지는 소리가 강하게 느껴졌다.
나의 손에 쥐어진 끈을 둔기로 강하고 짧게 후려치는 것 같았다.
목어와 나는 그 소리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꽃지의 구멍난 등깍지를 막아 놓았던
빨간 프라스틱 조각이 내 머릿속에 불현듯 스쳐지나갔다. 청둥이도 바짝 긴장을 했다.
잠시 후에 끈을 잡은 우리의 손이 따라갈 정도로 계곡 쪽에서 강하게 몇 번 끌어 당겼다.
그리고 내내 기다려도 아무런 미동이 없었다.
나일론 끈에 스치는 해류 소리만 감지될 뿐이었다.
청둥이와 내가 목어를 바라보았다.
‘아까 아무래도 몇 번 강하게 흔들었던 것은 잡아당기라는 신호 같지?’
나의 말에 목어와 청둥이가 수긍을 했다. 내가 나일론 끈을 천천히 끌어 당겼다.
뭔가가 끈에 매달려 계곡에서 끌려 나오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처음엔 꽃지일 것이라고 생각하여 우리는 서로 환호성을 질렀다.
모자반 해중림 아래까지 끌려 나오자 그것이 우리들 눈에 희미하게 들어왔다.
깃털풀말이 들어있는 작은 망태뿐이었다. 꽃지는 보이지 않았다.
깜짝 놀란 내가 끈을 급히 끌어당기려 하자 청둥이가 내 손을 막았다.
‘꽃지가 계곡에서 아직 빠져나오지 못했어!
꽃지가 기어 나와서 저 망태를 붙잡을 때 까지 기다려야 돼!’
한참을 지나도 꽃지는 나타나지 않았다. 청둥이가 울먹이기 시작했다.
‘왜 꽃지가 못나오지? 꽃지가 왜 안보이지? 헝!’
목어와 나는 방금 줄을 타고 들렸던 퍽 소리는 꽃지의 등깍지가
강한 수압을 견디지 못하고 깨지는 소리였던 것을 이제야 짐작했다.
목어도 나도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이에 청둥이가 뛰어 내렸다.
목어가 청둥이를 가리키며 외쳤다.
‘안돼! 청둥이가 위험하다.
지금 밀물이 거세게 밀려오고 있어‘
나는 청둥이의 뒤를 쫓아내려가 막무가내로 내려가려는 청둥이를 보듬어
옆구리에 끼고 올라왔다. 청둥이가 발악을 하며 악을 썼다.
그가 물갈퀴 발로 내 가슴을 차면서 발버둥을 쳤다.
‘꽃지를 데리고 와야 돼! 내가 꽃지를 데리러 가야 한다구. 어허헝!’
‘청둥아! 마음을 진정하고 정신을 차려야 한다. 밀물이 밀려오고 있어.
바깥엔 폭풍이 거세게 불고 곧 바다 속도 뒤엎어 질 거야.
이러다간 우리 모두 이곳에서 살아 나갈 수가 없어.
해가 지기 전에 다시 선갑도에 도착하지 않으면 우리는 모두 죽게 된다구‘
‘아니야! 아니야!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꽃지를 데리고 가야해!
놔! 내 몸을 놔! 꽃지를 내가 살려야 해!‘
목어가 나일론 끈을 추스렸다.
끈 끝에 깃털풀말이 든 작은 망태와 길쭉한 자갈 추가 묶여 있었다.
그것을 본 청둥이가 거의 미친듯이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
‘왜 꽃지가 없어. 여기 저 끈에 매달려 있어야 할 꽃지가 어디로 갔냐구!
꽃지가 없잖아! 으엉헝’
‘청둥아! 꽃지는 절대 죽지 않아! 매사에 조신한 꽃지는 이 들물에 실린
거센 해류를 피하기 위해 계곡 밑 바위틈에 기어들어가 숨어있을 거야.
꽃지는 분명히 살아 있어‘
‘어헝! 아니야! 꽃지는 나 때문에 죽었어! 내 날개 때문에 죽었어.
꽃지는 저 아래 캄캄한 바다계곡에서 혼자 외롭게 죽었다구!
나는 그 소릴 들었어...꽃지의 구멍 난 등깍지가 깨지는 소리를 나는 들었어...
나는 꽃지를 찾아야 해. 꽃지를 데리러 가야한다구! 으허헝‘
우리는 거세게 밀려오는 들물에 쫓기다시피 선갑도를 향해 죽을힘을 다해서
헤어가기 시작했다.
목어의 예상대로 바다엔 강한 폭풍우가 시작되었다.
아까 청둥이가 했던 모양으로 나는 목어의 왼쪽 턱 밑에 바짝 몸을 밀착시켰다.
그리고 지느러미가 뜯겨져 나간 자리에 박혀 있던 몇 개의 못대가리에
주황색 나일론 끈으로 내 몸을 단단하게 얽어맸다.
발버둥 치며 울고 있는 청둥이를 오른손에 꽉 껴안은 채 왼손과 왼발만으로
목어의 잃어버린 지느러미를 대신했다.
선갑도로 향하는 내내 청둥이는 내 가슴에 머리를 찧으며 슬프게 울었다.
바다는 표변했다.
거대한 파도가 머리 위에서 하얀 혀를 길게 빼물며 우리를 덮치듯이 날름거렸다.
청둥이의 울부짖는 소리가 폭풍우 몰아치는 서해바다에 낭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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