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x 45 cm /종이에 먹과 수채/09.02.03
['木魚' 115 - 잠들다]
꽃지의 눈은 금방 바다 밑 어둠에 익숙해졌다.
아까 청둥이의 등에 업혀서 바로 이곳까지 들어왔었다.
강한 수압이 온 몸을 압박했다. 숨을 잔뜩 들이 쉬어서 몸 바깥에서 압박하는
수압을 이겨내야 한다. 내 쉴 때는 수압의 강도를 감지하면서 천천히 내쉬다가
더 이상 못견딜 것 같으면 그땐 즉시 숨을 들이켜 몸 밖에서 압박하는 수압에
대응해야 한다.
어두운 계곡 아래로 내려가기 전에 눈을 들어 위를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목어의 큰 그림자가 어렴풋이 보였다. 그리고 청둥이가 ‘열불이’라고 이름 붙여준
인간의 모습이 희미하다. 바로 그 옆에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던 청둥이가
뭐라고 큰소리로 외쳤지만 급한 해류와 파도소리 때문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발의 마디마디가 강한 수압에 해체되어 버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발로 밑바닥을 꽉 움켜쥐면서 계곡 아래로 천천히 내려갔다.
처음엔 바로 눈앞에 손에 잡힐 듯이 깃털말풀이 보였다.
그러나 한참을 아래로 기어가야 했다. 바닥에 하얀 곳이 군데군데 보였다.
온전하게만 보이던 이 서해 바닷속에도 이미 석회산호가 돋아있었고
여기저기 백화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조간대에서 떨어져 나와 나뒹굴고 있는 성게나 불가사리의 마지막 생존본능이 애처롭다.
다른 해초들과 마찬가지로 모자반은 한겨울에 가장 우거져서 바다숲을 만들고
따뜻한 봄을 거쳐 사월 말쯤이면 스스로 밑둥을 끊고 바다위로 떠오른다.
그러나 초가을로 접어든 지금까지도 모자반은 뿌리를 바닥에 박은 채
이곳저곳이 썩어가면서 희끗희끗하게 변한 이파리를 달고 거대한 해중림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스스로 밑둥을 끊지 못하는 이유가 그들 나름대로 분명히 있을 것이다.
육지가 괴상하게 변하듯이 바다도 점점 괴이하게 변하고 있었다.
깃털말풀이 돋아있는 곳에 도착했을 땐 발 마디에 모두 힘이 빠졌는지
자꾸만 허방을 짚었다. 손발이 마음먹은 대로 움직여주질 않았다.
몇 그루의 깃털말풀이 돋아있는 곳은 신비할 정도로 고요했다.
큰 바구니처럼 움푹한 바닥에 깃털을 닮은 섬세한 갈색 이파리가 반짝거렸다.
깃털말풀 줄기 밑둥 하나를 집게발로 물고 천천히 힘을 주었다.
뚝 소리가 나며 잘려지자 준비한 망태 속에 재빨리 집어넣었다.
세 줄기째 자르려고 집게발에 힘을 주자 등깍지의 구멍을 막은 빨강 프라스틱 주변의
깍지가 삐끗하면서 이상 신호를 보냈다.
곪고 썩어 있었던 곳이라 상태가 다른 곳 보다 헐했던 곳이다.
노란 비닐끈이 감긴 오른쪽 집게발로 방금 자르고 남아있는 깃털말풀의 밑둥을 쥐어
몸의 균형을 유지하고 다른 집게발로 다시 힘을 불끈 주어 줄기를 잘랐다.
잘려진 깃털말풀을 망태에 담았다.
이제.... 저것 한 줄기만 더 자르면 된다.
몸을 납작 엎드려 그 쪽으로 기어갔다. 네 걸음 째에 아까 이상신호를 보냈던 곳에서
찢어지는 소리가 나더니 물이 거센 압력으로 휘파람소리를 내며 몸 안에 쏟아져 들어왔다.
한줄기만 더.... 한줄기만 더... 그러나 도저히 몸이 중심을 잡기 어려울 정도로 뒤뚱거렸다.
마지막 한줄기만 더 자르면.... 그러나 기어갈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수압이 온몸을 눌렀다.
다시 몸의 중심을 잡기 위해서 깃털의 밑둥을 물고 있는 오른쪽 집게발에 힘을 주었다.
지난번 물속도시에서 거대한 눈의 신경줄을 끊다가 실금이 가서 붕대 대신에
노란 비닐끈으로 감아두었던 집게발이었다.
그 때 물속도시를 빠져나와 금이 간 집게발에 이 노란 비닐끈을 감고 남은 것을
철사를 돌돌 말아 만든 청둥이의 발찌에 감아주었던 것이다.
꽃지는 노란 비닐끈으로 감은 철사발찌를 청둥이의 왼쪽 발목에 채워주면서
처음으로 인연이라는 것을 생각했다.
그리고 오른쪽 집게발에 감긴 노란 비닐끈을 볼 때마다 청둥이의 왼쪽 발목에 찬
노란 발찌를 생각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뛰곤 했다.
집게발에 간 금이 작은 파열음을 냈다.
단단한 껍질이 으깨지며 내려앉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 물이 들어와 집게발 속에 가득 찼다. 집게발의 감각이 상실되었는지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 몸이 몇 번이나 어디론가 튕겨져 나가려고 기우뚱 했다.
금간 집게발에 감아둔 노란 비닐끈의 끝을 풀어서 길털말풀 밑둥에 단단하게 홀쳤다.
이렇게라도 해서 몸의 중심을 잡아야 마지막 줄기를 왼쪽 집게발로 자를 수 있다.
무아지경 속에서 앞을 더듬거리며 마지막 줄기를 찾아 왼쪽 집게발로 물었다.
이제 이 정도 분량의 깃털말풀이면 청둥이의 오른쪽 날개를 만들기에
충분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줄기를 문 집게발에 힘을 주려고 하지만 이미 이 집게발도
감각을 상실했는지 그냥 바르르 떨기만 할 뿐이었다.
시화바다에서 청둥이를 처음 만났던 때의 광경이 꽃지의 기억 속에 뚜렷이 떠올랐다.
꽃지의 집을 뭉개고 앉아있던 청둥이의 사타구니를 물어뜯자 그가 소리를 지르며
길길이 날뛰던 광경이 바로 엊그제 같았다.
꽃지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목어아저씨와 그녀의 등깍지를 치료해 주었던 사람 ‘열불이’의
따뜻한 마음이 다시 그리울 것 같았다.
이마에 쏟아지는 별을 보며 청둥이가 날개를 펴서 자신의 등을 따뜻하게 덮어 주었던
그날 밤이 생각났다.
꽃지의 까만 눈에 눈물이 어렸다.
거대한 눈의 붉은 뿌리에서 탈출하면서 청둥이의 노란 부리를 집게발로 물고
아슬아슬하게 도망 나오던 때도 꽃지는 전혀 두렵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오히려 가슴이 콩당콩당 뛰었다.
그리고 청둥이가 불렀던 노래들을 기억했다.
꽃지는 자꾸만 희미해져가는 정신을 다시 가다듬었다.
마지막 온 힘을 집게발 끝에 집중을 했다. 다른 모든 발로 바닥을 강하게 움켜쥐고
속으로 하나, 둘, 셋을 셌다.
‘셋!’을 외치면서 집게발에 마지막 힘을 주었다.
줄기가 잘라지는 뚝 소리와 함께 등깍지가 터지는 소리에 꽃지의 작은 몸이
잠깐 불쑥 솟으면서 크게 진동을 했다.
앙당 문 아가미도 힘이 풀렸는지 강한 물줄기가 거세게 밀려들어서
더 이상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잘라진 마지막 줄기를 겨우 망태에 담았다. 몸이 굳어졌다. 갑자기 무력감이 찾아왔다.
이제 아득해져가는 정신을 다시 찾을 힘이 없었다.
터진 구멍을 통해 몸 안에 물이 가득차자 오히려 마음도 몸도 편안했다.
그녀의 의식이 어디론가 점점 빠져나갔다.
줄기 밑둥과 오른쪽 집게발에 홀쳐매진 노란 비닐끈을 어떻게든 풀어서
망태를 붙잡고 청둥이 곁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다가 그만 두었다.
그렇게 하기엔 이미 늦었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눈앞이 흐릿해졌다.
바르르 떨고 있는 집게발로 겨우 바닥을 짚고
흐릿해져가는 눈을 들어 망태를 보았다.
망태 속에 가득 찬 깃털풀말에 입을 맞추었다.
난생 처음 누군가에게 건네는 입맞춤이었다.
저 위에서 청둥이가 이 입맞춤을 느끼리라 믿었다.
그리고 망태에 묶인 줄에 자신의 몸무게를 실어서 끌어당기며 신호를 보냈다.
등깍지에 가득찬 물이 다리로 내려가려고 압박을 하는지 팔다리가
모두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갑자기 추워졌다.
온몸이 파르르 떨렸다.
청둥이의 포근한 날개 밑을 생각했다.
어둡던 바다 밑이 점점 환하게 밝아졌다. 여기저기 녹색 이파리가 돋더니
벌써 줄기 끝마다 하얀 꽃을 벙긋벙긋 피웠다. 온통 하얀 꽃 천지가 되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수많은 꽃게들이 등깍지를 반짝이며 꽃줄기에 대롱대롱 매달려
서로 그네를 타고 있었다. 어떤 게들은 함께 무리를 지어 빙빙 돌며 양쪽 집게발을
하늘 높이 들어 올리고 딱딱 마주치며 춤을 추기도 했다.
무리들 속에서 하얀 꽃으로 만든 화관을 쓴 엄마가 손짓을 하며 꽃지를 불렀다.
잃어버린 날개를 찾아서 등에 단 청둥이가 늠름한 모습으로 꽃 속에서 걸어 나왔다.
청둥이의 목에 하얀 띠가 눈부시다. 청둥이가 하얗게 빛나는 새로운 오른쪽 날개깃을
넓게 펴서 꽃지의 몸을 감싸 안았다.
한없이 따뜻했다.
오른쪽 집게발이 깃털말풀 밑둥에 노란 비닐끈으로 홀쳐진 채
꽃지는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편안한 잠에 들었다.
아직 눈물이 마르지 않은 까만 눈에 그윽한 미소가 담겼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싱그러운 파래 향기가 꽃지의 몸을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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