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x 45 cm /종이에 먹과 수채/08.10.14
['木魚' 85 - 어둠속에 들다]
우리는 다시 줄을 맞추어 서서 출발할 준비를 했다.
‘모두 눈을 꼭 감고.... 청둥이도 눈을 감았겠지? 내가 셋을 세면 발을 떼기 시작한다.
자! 하나... 둘...‘
‘잠깐! 괙괙괙 잠시만 기둘려!’
내 뒤에 바짝 붙어 있던 청둥이가 날개를 휘젓더니 소리를 쳤다.
그리고 나서 목을 길게 쏙 빼어서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것이 마지막일지 모르니 다시 한번만 더 둘러봐야지! 괙괙
늘 더럽기만 하다고 느끼던 시화바다 속이 지금 이 순간엔 왜 이렇게도 아름답지?
아항! 내가 요 풍경을 또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몰라‘
맨 뒤에서 하얀사람이 넋두리를 했다.
‘흐흐흥 나도 예전에 목숨을 끊을 때 바로 죽기 직전에 봤던 세상이 가장 아름다웠다.
그런데 지금 보이는 바다 속은 그 때 보다 더 아름다운 것 같다.
죄다 썩은 이 시화바다 굽이굽이 마다 인간들이 버린 쓰레기가 첩첩해도 내가 숨 쉬는 곳이니 정말 아름답구나 흐흐흑.
산과 물이 아름다우면 바다 것도 풍년이라는데 이 텅 빈 몸은 입 다실 것도 몸 둘 곳도 없으니... 좋다 좋아
모든 것이 요렇게도 좋아 뵈이는데 왜 내 눈은 이리도 시릴까응 흐흐잉’
꽃지도 긴장한 탓에 어금니를 앙당 물었는지 목소리가 훨씬 또렷했다.
‘청둥아! 우리는 살아서 돌아올 것이야!
하얀 귀신 아저씨! 곡할 일 없어요. 우리는 살아 돌아와서 다시 이 시화바다의 품에 안기게 될 거예요.
염려하지 말고 편안한 마음으로 문을 통과 합시다’
모두들 긴장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우리는 다시 출발했다. 처음 보다는 훨씬 더 수월한 걸음걸이가 되었다.
나는 눈을 감고 입술만 딸싹이면서 걸음숫자를 세어 나갔다. 숫자가 올라 갈수록 어둠은 깊어졌다.
한걸음씩 내디딜 때 마다 발바닥에 닿는 촉감으로 우리들의 길 위에 내리는 어둠의 질을 대중했다.
첫 아흔 걸음 도중에 내 몸의 균형이 어그러지면서 두어 번 비틀거렸으나 금방 눈을 감고 걷는 걸음에 익숙해졌다.
눈을 꼭 감아서 얻어진 어둠을 마음의 문을 열어 받아들였다. 그러면 어둠 속에서 걸어가는 내 모습이 멀리서 보였다.
마음의 문을 조금씩 더 크게 열수록 마음속에서 걷고 있는 내 모습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바로 내가 마음으로 들여다보는 내 모습이 발자국을 내 디딜 때 마다 입술을 딸싹이면서 정확하게 걸음 숫자를 셌다.
아흔 걸음에서 내 모습은 정지를 했고 왼쪽으로 방향을 전환하여 다시 새롭게 아홉 걸음을 시작했다. 다섯 걸음 째에
아까 처음 출발할 때 바닥에 나뒹굴었던 생각이 나서 마음속의 내 모습을 잠깐 놓쳤다.
순간적으로 내 몸이 균형을 잃고 흔들거렸다. 어둠속에서 걷고 있는 내 모습을 되찾자 금방 몸의 균형을 바로 잡을 수 있었다.
아홉 걸음을 모두 걷고 나서 다시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새롭게 아흔 걸음을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걷고 있는 나는 점점 조금씩 아래로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완만하다고 느낀 경사가 걸음을 더 할수록
점점 그 각도가 가파르게 내려가고 있었다. 이젠 맨살 피부로도 어둠의 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목덜미를 스치는 어둠의 농도가 아주 진했다. 말 그대로 끈적끈적한 어둠이었다. 걸음은 점점 더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귀가 먹먹해지면서 물소리도 점점 멀어지고 우리들 발걸음 소리도 너무 먼 곳으로 가버렸는지 겨우 느낌으로 전달되었다.
아무도 없었다. 분명히 내 뒤를 열심히 따라오고 있을 청둥이도 목어도 꽃지도 하얀사람도 그들의 존재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곳 외로운 바다 속에서 그들과 우연히 만난 인연의 끈마저 스르르 풀려버렸다.
이 어둠속에 나만 홀로 남겨두고 그들도 떠나버린 것이다. 외롭고 불쌍한 그들과 맺어진 인연, 그 인연의 가느다란 끈은
이 어둠 앞에서 너무나 약한 매듭일 뿐이었다. 몸이 너무 크고 무거워서 항상 고단한 목어와
한쪽 날개 없이도 언제나 씩씩한 청둥이와 구멍 난 등깍지에 피고름을 안고 날마다 죽음을 직면하며
딱딱한 껍질에 쌓인 채 고독했을 꽃지 그녀와 아직까지도 이승에 대한 원한을 온 영혼에 가득 담고 있는 하얀사람이
자유스럽게 떠난 것이다. 꽉 감고 있는 내 눈 속에 뜨거운 김이 돌더니 눈꼬리 쪽으로 눈물 몇 방울이 흘러갔다.
그들이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에 마음 한 구석이 허물어진 듯 했으나 그들 모두 ‘나’라는 존재로부터 자유스럽게 되었다는 것이
훨씬 더 내 마음을 안온하게 해 주었다. 달아나고 사라지고 지워지고 없어지는 것에 대해서 나도 이제 자유스럽게 될 때가 온 것이다.
그들도 나도 모두 이 어둠의 한 부분일 뿐이었다.
내가 아는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나 홀로 깊고도 깊은 어둠 속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마음속에 들여다보이는 내 모습이 그저 어둡고 캄캄한 곳을, 길도 아닌 곳을 따라 한없이 밑으로 내려갔다.
어둠의 일부분이 되어버린 내 입술은 여전히 딸싹이며 발걸음의 숫자를 세고 있었다.
여든 하나, 여든 둘....어떠한 색깔이든 그것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한다. 어둠도 일정하게 자신의 색깔을 갖고 있다.
자신의 색깔이 아니라도 어둠과 어둠사이 그 틈새엔 반드시 색깔이 존재한다.
이젠 그 색깔조차도 날아가 버리고 어둠 그 자체만 남았다. 나의 몸이 만난 이 어둠은 어떠한 수식도 거부하고 있었다.
내가 정작 살아있다는 생각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냥 ‘나’만 존재했다. 아니, ‘나‘ 라는 존재에 대해 책임질 어떤것 마저도
사라져 버렸다. 이렇게 마음껏 사라지는 것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까울 것이 없었다.
여든 넷, 여든 다섯....여든 아홉....그리고 아흔. 그렇게 아흔 걸음에 도착했다. 아흔번째 발끝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내 발끝의 행방을 잃어버렸는지 혹은 발끝에 닿아야 할 바닥을 잃어버렸는지는 나도 모를 일이다.
그것이 어떻든 아무 상관도 없었다. 다시 나는 왼쪽으로 방향을 전환해서 마지막 아홉 걸음을 놓아야 한다.
생각은 그렇게 가졌으나 몸은 이미 내 의지를 벗어나 있었다. 이젠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너무 깊이 어둠 속에 들어와 버렸던 것이다. 마지막 아홉 걸음을 걸어야 한다는 생각마저 떠나보내야 했다.
습관처럼 입술이 딸싹거리면서 걸음수를 셌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마음에 들여다보이는 어둠속을 걷던 내 모습마저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두려울 것도 없었다.
비로소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외롭지도 두려울 것도 없었다. 그냥 아무것도 없으므로
걸음의 숫자를 셀 필요도 걸음을 뗄 필요도 없었다. ’나‘도 없고 시간도 사라졌다. 세상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냥 언뜻 불었던 한 점의 바람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없어졌다. 아니, 없어질 것 조차도 없다. 그냥 없었다. 애초부터 없었던 것이다.......
그때 멀리서 한줄기의 소리가 아련하게 들렸다. 목어의 목소리였다... 잠시 그대로 기다려... 아직 눈을 뜨지 말고 꼭 감은 채
...너는 바닥에서 발을 떼어서 몸을 수평으로 띄워 헤어갈 준비를 하고... 청둥이는 천천히 뒤로 물러서면서...
내 등위로 올라타라....아직 눈은 뜨지 말고... 그래... 하얀사람은 내 꼬리 쪽으로 올라와서 내 등지느러미를 붙들어라
...청둥이도.... 그렇지...눈을 감은 채... 조금 더... 그대로 기다려...
‘됐어. 이제 모두 눈을 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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