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담의 그림창고



                                                                                                                                     후 - 3/ 30 x 45 cm/ 종이에 먹과 수채/ 2012.8.31

[ 후 - 3 ]

어느 날 내가 깊은 잠에 들었는데
어떤 날선 칼이 내 목을 댕강 잘라버린 일이 있었다

내 목은 침대위에서 통통 튀면서 잠시 잃었던 중심을 다시 잡았다
거실을 가로질러 주방 식탁위의 컵에 절반쯤 남은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즉시 창문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왔다
내 목이 캄캄한 밤하늘을 가로질러 한참을 날아가다가
나무 막대기 끝에 꽂혀지고 바로 목 아래쪽에 가로대가 묶여지더니
난데없는 헤진 군복이 입혀졌다

밤바다 하얀 파도에 출렁이는 작은 배였다
나는 갑자기 죽은 군인의 영혼이 되었다
하얀 옷을 입은 ‘바리’는 배 뒤쪽에 버티어 서서 바다를 바라보며
뭐라고 연신 중얼거리고 있었다

내가 평소에 상상했던 대로 바리는 피안의 강을 건너고 있었다
지난번 여행 때 바나나 잎과 갈대줄기로 엮어 만든 움막 앞에서
한도 끝도 없이 줄 서있던 녀석들의 모습도 보였다
그리고 움막 안에서 비명만 질러대던 맨몸 ‘바리’가
세상이 부끄러운지 얼굴에 물 바게쓰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바로 얼마 전 일이다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내 차례가 되자 움막 앞가리개를 열고 들어갔다
저 여인은 자신의 아랫도리를 덮고 있는 모포를 밀치고 양다리를 벌렸다
주머니에 남은 군표를 모두 여인에게 쥐어주고
그녀의 젖가슴과 자궁에 입술을 들이밀며 갓난아이처럼 무조건 빨았다
며칠 후에 나는 필리핀 레이테만의 해변 벙커에 남아서
전우들끼리 서로 발목을 묶고 옥쇄작전에 돌입했다

바리는 이 가엾은 영혼들을 데리고 피안의 강을 건너고 있는 장한 모습을
나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그런데 저 부끄러워하는 ‘바리’는 또 누군가

글쎄, 나는 ‘바리’에게 무엇인가 이야기 하고 싶었지만
내 목에 파고든 막대기의 날카로운 끝이 혀뿌리를 누르고 있는 바람에
어떤 소리도 전혀 낼 수 없었다

이때 받은 목의 극심한 통증 때문에 나는 두 달쯤 고생했다
처음 한 달은 통증이 스스로 낫기를 기다리다가 오히려 점점 고통이 심해졌다.
목을 위 아래로 좌우로 전혀 움직일 수 없게 되자 결국 병원을 찾았다
일주일에 두 번씩, 세 주일째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더니
통증은 겨우 가라앉았다

그러나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나는 또 다시 순식간에 목이 잘렸다
큰 칼이 휙 소리를 내면서 내 목을 관통하는 찰나에 나는 눈을 번쩍 떴다
두 번째 당하는 일이라서 순간적으로 눈을 뜰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긴 것이다
야차 얼굴을 한 ‘바리’가 작두칼을 들고 씩씩거리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 머리는 그날 밤도 어쩔 수없이 멀리 날아가서 또 군인 형용으로
그녀의 작은 배를 타고 하염없이 거친 밤바다를 헤매다가 돌아왔다
물론 목의 통증 때문에 병원 신세를 질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는 잠자리에 눕기 전에 한 자 남짓한 쇠막대를 베게 밑에 감추고
내 목을 향해 날아오는 작두칼을 재빨리 쇠막대로 막는 연습을 수차례 한 다음에
잠이 들었다
석 달쯤 연습 끝에 이제 나는 반듯이 누워있는 상태에서
왼손으로 베게 밑에 숨겨둔 쇠막대를 꺼내어
내 목을 커버하는 연속 동작을 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딱 0.5초 걸린다
그러나 아직도 부족하다  
무작정 날아오는 그녀의 작두칼을 완벽하게 막아내려면 0.3초 이내로 줄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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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바리 - 45 [ 후 - 3 ]
이름: damibox


등록일: 2012-08-31 10:56
조회수: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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