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담의 그림창고



                                                                                                                                          30 x 45 cm /종이에 먹과 수채/08.10.07
[木魚' 80 - 찢어지다]

‘가슴이 아프다. 그러나 너처럼 억울한 죽음이 어디 한 둘뿐이겠는가’

‘그래? 이런 억울한 죽음이 한 둘이 아닌 세상이 될 때까지 산자들은 뭘 하고 있었는가’

‘어찌 그것이 모두 살아있는 사람들만의 탓이겠는가’

‘세상은 산자들이 만들어가는 것 아닌가’

‘글쎄, 당신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세상살이란 것이 어차피 모두 그런 것 아니겠는가’

‘흐흐흐 세상살이가 그런 것이니 나의 억울한 죽엄도 어차피 마땅하다는 말인가’

하얀사람과 나의 대화는 서로 시작도 끝도 없고 앞도 뒤도 없이 마치 혼잣말처럼 계속되었다.
아니, 대화라기보다는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질문을 나열하고 중첩시키기만 했다.
나의 가슴은 그런 원한들의 절규가 두려워 도둑처럼 슬슬 도망갈 준비만 해 왔던 것이다.
이런 텅 빈 가슴을 맡길 만한 곳도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삶의 도처에서 만나야 하는 이런 원한을 풀어주기는 커녕
들어줄 사람조차 없었다. 살아있는 사람들끼리도 단절되어 있는 세월에 저 죽은 자와 나 사이에 넓고도 깊은 이 단절을
채워줄 어떤 것도 기대 할 수가 없었다. 우리들의 대화를 듣던 청둥이가 뒤돌아보며 말했다.

‘괙괙 인간들의 말은 때때로 너무 어려워서 도통 알아먹을 수가 없어.  
인간들의 대화란 서로 주장과 설득을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아. 또는 상대방의 말에
동문서답하는 것을 뭔가 멋진 화술인 것으로 착각하거든’

나는 슬그머니 하얀사람의 옆얼굴을 훔쳐보았다. 얼굴 가득히 얼기설기 성긴 백태들 사이로 투명하게 속이 비쳐 보였다.
어두운 눈 속에 하얀 눈동자가 어스름하게 드러났다. 오히려 그 하얀 눈동자에서 얼핏 순수한 감정이 엿보였다.
원한을 비껴 서서 자꾸만 자의식을 보호하려는 나 보다는 오히려 그 원한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그의 얼굴이 훨씬 더 순수해 보였다.
그가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내 시선을 분명히 느꼈음에도 얼굴을 외로 돌리진 않았다.
죽은자의 영혼뿐이지만 역시 사람임에 분명했다. 살아있는 나와 아무런 차이를 느낄 수 없었다.
그가 저승에 올라가기를 거부하는 그 분노와 원한에 대해 나는 충분히 공감을 할 수 있었다.
그의 원한은 그의 한 사람 것이기 보다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땅 전체가 갖고 있는 분노이기도 했다.
어쩌면 내가 갖고 있는 분노를 저 하얀사람이 대신 짊어진 것이기도 했다.
양손을 앞으로 내밀고 물을 더듬으면서 걸어가던 그가 나에게 문득 물었다.

‘내가 두렵지 않은가?’

‘이승에서 물러서 있는 죽은자가 왜 두렵겠는가. 살아있는 사람에겐 오히려 산자가 더욱 두렵고 무섭다’

‘맞다! 죽은자인 나도 산자가 두렵고 무섭다. 세상에서 가장 두렵고 무서운 것은 하늘도 땅도 아니고 물도 불도 아니다.
살아있는 자가 이 세상에서 가장 두렵고 무서운 존재다’

청둥이가 멈칫하더니 하얀사람과 내 틈 사이로 끼어들었다.

‘괙괙괙 오랜만에 이 인간들이 옳은 소리를 하는군! 아니지, 하나는 인간이고 너 하얀사람은 영혼뿐이지.
그렇지만.... 아무렴 영혼뿐이지만 인간은 인간이지. 그래! 나는 널 사람으로 인정한다. 어? 내 말이 어쩐지 이상해 졌어.
인간들과 이야기 하다보면 나도 이상해져 버리거든’

그리고 하얀사람과 나를 몇 번이고 번갈아 보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묘해! 둘의 얼굴이 너무 비슷해.
얼굴에 몇 개의 그림자만 지우거나 칠하면 둘의 얼굴이 똑 닮았어. 아주 묘하다구!’

청둥이의 중얼거리는 말을 들었는지 그도 역시 혼잣말처럼 긴 한숨을 내쉬듯이 중얼거렸다.
뒤쪽에서 묵묵히 따라오던 목어가 하얀사람의 긴 한숨처럼 내쉬는 말을 옮기는 것인지 아니면 목어 자신의 말을
하는 것인지 모를 이야기를 문득 던졌다.

‘살아있다, 그건 고정된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움직일 수 있는 것이라서.... 죽음, 그것은 정말 가까운 거리에 있다.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죽어있다, 이것도 이미 자신의 육신을 둘러싼 낡은 경계가 허물어진 것이라서 언제든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저 두 사람이 서로 똑 닮았다고 보는 청둥이의 눈이 옳다’

목어의 말에 청둥이는 신이 났다.
목을 구부려서 하얀사람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 보기도하고, 긴 부리를 그의 등에 맨 삼지창에 대보기도 하면서
오두방정을 떨다가 그에게 물었다.

‘도구란 그저 살아있는 사람들에게나 필요하지.
그런데 너와 도무지 어울리지 않을 그 삼지창은 왜 등에 맸는가. 무슨 새로운 패션은 아닐거구’

‘너도 저 불손하고 위험한 쇠사슬 고리 하나를 왼발목에 발찌처럼 차고 있질 않나?
그 덕에 왼쪽 날개 하나 만으로도 몸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헤어가는 방향을 바르게 잡아주고 있지. 그와 마찬가지다.
이 분노의 상징인 삼지창이 그나마 내 원한을 다스려주고 있다. 그리고 언젠가 내 원한을 실현시켜서 결국 해원해줄 것이다’

‘너의 등에 맨 삼지창이 분노의 상징이라구?’

청둥이가 목을 쏙 빼어 그의 등에 맨 노란빛 삼지창을 요리저리 살피면서 물었다.

그렇다. 분노의 상징이다. 이 삼지창엔 남이장군의 양쪽 팔이 들어가 계신다.
육백년 전 17세에 무과에 장원급제한 남이가 여러 무공을 세워 27세의 젊은 나이에 국방을 책임지는 병조판서에 올랐다.
이듬해 이것을 시기하던 간신배들이 참소하여 역모죄로 모함을 받아 장살을 당해 죽었다. 바로 그 시각에
이곳 해망산 서편 자락 화수개 마을에 살던 어느 화렴쟁이 소금장수 막내딸이 그 날 밤새 내내 몸을 뒤틀어
팔뼈 허리뼈 다리뼈 갈비뼈가 툭툭 부러지며 죽는다고 악을 써대더니 눈을 하얗게 뒤집어 까고 숨이 끊어졌다가
새벽 찬이슬을 받아먹고 겨우 살아났다.

다음날 남이의 출세를 질시하던 유자광과 간신배들이 모든 역모를 확실하게 뒤집어 쒸우기 위해 남이의 시신을
새남터에 끌어내 거열육시형에 처했다. 팔과 다리 그리고 목을 묶어서 각각 수레로 끌어당겨 몸둥이를 여섯 조각으로 찢는
가장 잔인한 짓이었다. 수레가 서로 끌어당기는 밧줄이 팽팽해지다가 그 우람한 남이의 시신이 쩌억 찢어지는 바로 그 시각에
소금장수 막내딸의 양 팔과 양 다리죽지에 불에 달군 부젓가락이 쑤욱 박힌 듯 그 둘레가 온통 불에 데인 것처럼
인육이 타는 냄새가 나더니 그녀의 연약한 팔과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참나무 기둥 같은 새로운 팔과 다리가 붙어 한동안 불끈 거렸다.
그녀의 목에도 날이 넓은 시퍼런 장도가 휙 떨어지더니 본디 머리가 잘라져 어디로 날아가고
대신에 다른 머리가 붙은 듯 노루같이 순한 그녀의 눈망울은 호랑이의 눈처럼 불을 훤하게 켜고
그녀의 가냘픈 목소리가 황소의 울음소리를 내며 울부짖었다.
그 후 하루 밤낮 동안 양쪽 어깨죽지와 다리죽지 그리고 목둘레가 몹시도 가려웠다.

‘괙괙괙 인간들의 세상이란 서로간에 얼마나 잔인한지 경주를 하는것 같아. 우우우
너도 나를 바라보면서 오리탕이나 오리바베큐나 오리백숙만 떠올리지? 엉!
나를 바라보는 너의 눈길이 항상 심상치 않았어. 꽤액 꽥!’

청둥이가 갈고리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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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Day by Day]-125 / '木魚' 80 - 찢어지다
이름: damibox


등록일: 2008-10-08 12:16
조회수: 26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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