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담의 그림창고



                                                                                                                                          30 x 45 cm /종이에 먹과 수채/08.10.01
['木魚' 82 - 돌탑을 쌓다]

그녀의 깊은 잠은 아홉낮 아홉밤 만에 다시 깨어났다. 한 밤중에 일어나 머리맡의 경대를 열고
머리에 물을 발라서 가지런히 빗어 쪽을 지었다. 윗목의 반닫이 속을 더듬어 다홍치마와 노랑 삼화장 저고리를 꺼내서 입었다.
이미 예전 그녀의 얼굴이 아니었다. 눈썹은 더욱 가늘게 양쪽으로 솟아 있었고 얼굴은 하얗게 빛나고 앙 문 입술이 붉었다.
쓰게 치마를 머리에 깊숙이 둘러쓰고 마당을 가로질러 뒷산으로 들어갔다. 깜깜한 야밤인데도 그녀의 걸음은 바람과 같았다.

남이의 머리가 든 무덤은 급하게 쓴 묘라서 마치 애기 묘처럼 작았다.
그녀가 애기묘 앞에 앉았다. 언덕아래 까지 차오르는 밀물이 찰랑대고 소나무 사이에 낮게 깔린 산죽 이파리의
서걱거리는 소리가 서늘했다. 바람 한줄기가 애기묘 위를 스치며 그녀의 귀밑에 흘러 내려온 머리카락 몇 올을 흔들었다.
어디서 소쩍새가 울었다. 애기묘 속에 누운 대장군이 웅얼거리듯 말했다.

내 딸이로구나. 네가 이 애비를 이곳 편안한 땅으로 불렀구나.
백두산 돌이 다하도록 칼을 갈고 두만강 물이 잦아지도록 말을 먹여
내 강산을 지켜 백성을 평안하게 하려했던 나의 뜻도 이제 저물었다.
죽고 사는 것이 무엇이더냐 살아서도 죽은 이가 있고 죽어서도 살아있는 이가 있느니라.
내 죽엄도 그와 같으니 단 한방울의 설운 눈물도 보이지 마라.
내 죽엄은 병든 세상 옛것이 사라지고 맑은 세상 새것이 나타날 징조다.
너에게 천리를 내다볼 수 있는 눈과 천인의 심중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눈을
남겨둘 것이니 너는 그 지혜로 백성과 조정의 명운을 이야기 하라.
그리고 금과 쇠로 삼지창을 만들어 내 양 팔을 싣고
또한 금과 쇠로 언월도를 만들어 내 양 발을 얹어라.
그것을 시화바다가 바라보이는 천등산 아래 돌대 언덕에 감추어 두어라.
삼지창과 언월도에 실린 내 발과 내 팔이 이 강토를 지켜낼 것이니라.
아가야. 너의 짧은 운명을 서러워 마라. 모두 하늘의 뜻이니라.

다음날 해가 중천에 솟은 뒤 애기묘 옆에 반듯이 누워 곤하게 잠든 그녀를 동네사람들이 발견했다.
집으로 옮겨와서도 그녀의 깊은 잠은 계속되다가 이틀 후에 깨어났다.
그녀가 다시 일어나 금을 섞은 쇠로 삼지창을 만들어 남이의 팔을 받고 언월도를 만들어 남이의 발을 받았다.
천등산 아래 돌대 언덕에서 바다가 바라보이는 곳을 잡아 삼지창과 언월도를 세우고
돌탑을 쌓아올려 그것들이 보이지 않도록 숨겼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남이 대장군이 내 몸을 빌려 말한다.
십년 후 조선천지에 역병이 돌아 병들어 죽은 시체로 산을 쌓는다. 들판엔 마을이 사라지고 하루 밤낮을 걸어도
살아있는 사람을 구경하기 힘들다. 그로부터 반백년 후에 벼슬아치들의 가렴주구로 배고픈 백성들이 난을 일으키니
그 함성이 팔도에 가득하다. 다시 반백년 후에 남쪽 바다건너 왜구들이 새까맣게 몰려와서 조선천지를 피로 물들인다.
그리고 다시 반백년 후에 북쪽에서 오랑캐들이 내려와 조선천지를 거듭 두 번이나 피로 물들인다. 임금과 벼슬아치들은
도망가기에 바쁘고 저들의 칼에 온 국토가 죄 없는 백성들의 피로 흥건하게 된다.
우선 역병으로부터 생명을 보전하려면 이 돌탑 아래서 솟는 샘물로 손을 씻고
돌탑을 향해 들이쉰 숨을 바다로 향해 내쉬기를 거듭하라.

그녀의 말은 입에 입을 건너 퍼져나가 백리 근방의 사람들이 너도나도 앞 다투어 몰려와
돌탑 아래 작은 샘물에 손을 씻고 가슴을 활짝 열어 숨을 쉬면서 자신들의 소원과 나라의 안위를 빌며 돌탑을 돌았다.
남이 대장군의 영혼이 깃든 돌탑이 영험하다는 소문이 꼬리를 물고 퍼져나갔다.
돌탑 아래서 솟는 맑은 샘물은 남이 대장군의 땀방울이라고도 했다. 어느 문둥이가 밤에만 몰래 와서 그 샘물로 몸을 씻어
한 달 만에 병이 나았다고도 했다. 혼인한지 십년이 지나도록 태기가 없던 어느 아낙이 그 돌탑에 등을 대고 숨을 쉬기를 보름 만에
애기가 생겼다고도 했다. 그 소문이 유자광의 귀에 까지 들렸다. 뒤가 구린 유자광과 간신배들이 자객을 보내 그녀의 목숨을 거두고
돌탑을 허물어 삼지창과 언월도를 꺼내 시화바다 깊은 곳에 던졌다.
자객들에 의해 난자당한 그녀의 시신이 마산리 앞 어섬 바닷가에 떠밀려 왔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뜬 채 붉은 입술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그녀의 시신을 해망산 함박골 애기묘에서 열두 걸음 아래쪽 고운 흙에 묻었다.

하얀사람이 어깨에 맨 삼지창을 흔들어 보이면서 청둥이와 나에게 말했다.

‘이것이 바로 대장군의 양 손이 담긴 삼지창이다.
내 살아생전 마른 갯벌을 농토로 만드는 것이 평생 일이었으니 죽어 혼백만 남아서도 그것이 버릇으로 남았던지
이 시화바다 바닥의 이쪽 흙을 저쪽으로 옮기고 저쪽 흙을 이쪽으로 옮기며 농토 만드는 것을 흉내 내다가
바닥에 박혀있던 이 삼지창을 우연히 발견했지’

그의 말을 목어가 거들었다.

‘너의 말이 맞다. 지금으로부터 오백년 전 내가 소나무로 돋아나서 육십 살이 되던 해에
대장군의 머리가 배에 실려 시화바다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날 밤 바람 한 점 없이 서해바다는 거센 파도를 만들어내 온통 하얀 상여꽃을 가득 피웠다.
그 소금장수 막내딸을 살해한 자객들이 돌탑을 허물고 언월도와 삼지창을 꺼내
배를 타고 시화바다를 건너면서 부적을 묶어 바다에 던지는 것도 보았다’

청둥이가 눈을 크게 뜨고 그의 등에 맨 삼지창을 자세히 살펴보면서 물었다.

‘참말 같기도 하고 꾸민 말 같기도 하군 괙괙괙. 아무튼 인간들은 참말 보다는 거짓말을 더 잘 믿거든.
그런데 내가 너의 이야길 그대로 믿고 싶으니  너의 말은 참말이 분명해.
그럼 이 삼지창에 남이장군의 양 팔이 들어가 있다는 말인가. 그러면 대장군의 발이 실린 언월도는?’

‘이곳 시화바다 속을 이 잡듯이 뒤졌는데도 언월도는 찾지 못했다’

‘아무도 언월도를 찾을 생각 말아라. 물속도시를 다녀온 후에
내가 시화바다를 거꾸로 뒤집어 탈탈 털어서라도 결코 찾아낼 것이야.
괙괙괙 너희들은 번쩍이는 언월도를 등에 맨 이 청둥이의 늠름한 모습을 곧 보게 될 거야’

하얀사람과 청둥이가 말하는 것을 듣고 목어가 그냥 빙그레 웃는 것을 꽃지의 반짝이는 눈이 놓치지 않고 보았다.
목어의 미소엔 어떤 의미가 숨어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벌써 외지섬을 지나가고 있었다. 멀리 물속도시가 둘러친 검은 장벽이 보이고 도시 안은 부지런히 꿈틀대고 있었다.
도시는 어제보다 훨씬 활기차게 움직이는 듯 더욱 넓고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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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Day by Day]-127 / '木魚' 82 - 돌탑을 쌓다
이름: damibox


등록일: 2008-10-10 13:29
조회수: 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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