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담의 그림창고



                                                                     후 - 4/ 45 x 30 cm/ 종이에 먹과 수채/ 2012.9.1

[ 후 - 4 ]

그렇다
나는 지금도 ‘바리’와 가끔 마주치고 있다

전철 역사 에스컬레이터를 타거나,
울릉도를 항해하는 배의 갑판위에서,
잠수교나 한강대교 성수대교를 걷다가,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잠깐 멈춘 사이에,
백령도 연평도 덕적도를 향해 떠나는 여객선 선실에서,
또는 하의도나 장산도 비금도 도초도 흑산도 홍도행 배를 타는 목포 선착장에서,
인천공항 출국장 입구에서,
위도나 풍도 어청도로 떠나는 부두에서,
가파도 마라도를 가는 배 안에서
가끔 그녀를 마주치기도 한다
그 때 마다 우리는 서로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지나쳤다  
다음에 다시 만나게 되면 꼭 반갑게 인사라도 나누어야겠다고 다짐했지만
또 만날 때 마다 우리는 마주치기가 무섭게 서로 바쁜 척 하면서
그냥 썰렁하게 지나쳤다

한 번은
멀리 범섬이 보이는 제주도 강정 포구에서
그녀와 그를 만났다

이곳 바닷가를 지켜야 한다는 갖가지 구호가 박힌 울긋불긋한 만장과 깃발들이
포구를 가득 덮어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마침 젊은 무리들이 노래를 부르며 지나갔다
맨 앞줄에 프랑카드를 든 젊은이들 사이에 그의 모습이 보였다
그가 나를 보더니 반갑게 눈인사를 했다

장군복을 입고 남장한 그녀는 양쪽 손에 삼지창과 언월도를 들고
바닷가 구럼비 너럭바위 위에 서 있었다
나는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다가갔다

‘장군복이 썩 잘 어울린다’

그녀가 수줍게 웃어 보이면서 잠시 뜸을 들이다가 내게 물었다

‘너는 언제쯤에 저 물을 건널 것이냐’

그녀는 목소리를 억지로 굵게 내어 남자 행세를 했다
나는 또 별 의미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옆을 지나가는 관광객에게
내 카메라를 주면서 사진 한 장 박아달라고 부탁했다

바리와 나는 서로 정답게 어깨를 맞대고 ‘치즈~’라고 소리를 내면서
셔터가 눌러지기를 기다렸다

관광객에게 감사인사를 하고
그녀와 헤어지면서 나는 일곱 아이들의 안부를 묻고 싶었지만
부질없는 질문일 것 같아서 입술 밖까지 나온 말을 그만 거두었다

그런데 내가 만약 말을 참지 못하고 그 질문을 해버렸다면
아마 그녀는 분명히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일곱 중에 하나가 바로 내 앞에 서 있구나’

돌아서서 걸어가는 '바리'의 뒷모습을
나는 한 번 더 고개를 돌려 뒤돌아보았다
그녀가 양손에 들고 있는 삼지창과 언월도가 햇빛에 번쩍거렸다
그녀의 허리를 묶고 있는 하얀 천에
납작한 스마트폰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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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바리 - 46 [ 후 - 4 ]
이름: damibox


등록일: 2012-09-01 09:40
조회수: 2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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