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담의 그림창고



                                                                      흙 - 4/ 45 x 30 cm/ 종이에 먹과 수채/ 2012.8.18

[흙 - 4]

‘우리들이 이곳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지체했다
흙이 만든 백대살에서 벗어나야 할 시간이다‘

‘바리’의 말이 끝나자마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길을 막아섰다
그들 손에 든 병장기 들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내가 ‘바리’에게 칼을 받아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두려워 떨었지만 ‘바리’와 나에게 자신의 새로운 힘을 보여줄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어차피 한 번 죽지 두 번 죽지 않는다’

그는 무슨 까닭인지 이 칼이 낯설지 않았다
천년 전에 그가 후룬베이얼의 넓은 초원에서
사용했던 칼이었다

그가 떨리는 가슴을 억지로 진정시키면서 앞으로 나서자
‘바리’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저것들은 모두 흙속에 버렸던 쓰레기로 만들어진 인형이다
인간도 아니고 귀신도 아니다
저들의 어깨위에 너의 칼이 스치기만 해도 저들 존재는 사라진다
저들의 어깨만 보아라‘

그는 손바닥에 침을 한 번 더 바르고 칼자루를 틀어쥐면서 물었다

‘저들이 모두 몇 명이나 될까’

바리의 뒤를 따라가면서 나는 벌써 저들의 정확한 숫자를
파악하고 있었다

‘아흔 아홉’

그는 앞으로 뛰어 나가면서 칼을 무참하게 휘둘렀다
칼에서 휘파람 소리가 났다
천년 전에 초원을 떠돌아다닐 때 많이 들었던 소리였다
다섯 번 휘두르면 겨우 한 획만이
저들의 어깨를 내리쳤다
처음부터 무리한 짓이었다
그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아직 몇 명이나 남았는가’

‘아흔 여섯’

그의 등 뒤에 바짝 붙어서 따라가던 ‘바리’가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칼이 스스로 움직이도록 너의 팔과 손에서 힘을 빼라
그러면 저들의 어깨가 너의 칼날을 먼저 따라 온다‘

상황이 너무 다급했다
내가 한마디 거들었다

‘팔과 손에서 힘이 절로 빠지지 않으면
차라리 눈을 감아라
그리고 닫힌 눈이 칼끝에서 열리게 해라‘

그가 눈을 질끈 감아버리자
저들과 대치하고 있는 우리 일행의 모습이
어둠 속 아래쪽에 세밀하게 내려다 보였다

‘그래, 저들도 죽고 나도 죽자’

칼을 든 그의 등 뒤에 ‘바리’가 바짝 붙어 있고
바로 그 뒤에 내가 어정쩡한 자세로 따라가고 있었다

그는 빠른 장단에 춤추듯이
칼이 움직이는 대로 손과 팔을 맡겼다
그의 칼질은 거침이 없었다
단지 칼날이 저들 어깨를 스쳐지나가는 감촉으로
저들의 몸이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는지 짐작할 뿐이었다

칼날이 자동차 가솔린 엔진을 반조각 내면서 지나갔다
컴퓨터 내장 각종 보드에 붙어있는 콘덴서를 자르면서 지나갔다
차곡차곡 개어진 옷가지를 지나갔다
곡식자루를 지나갔다
산채로 매몰처리 했던 구제역 돼지의 썩은 내장을 갈랐다

그의 칼이 긋는 대로 저들의 어깨가 잘려나가면서
흙과 썩은 냄새와 피로 뒤엉킨 살점이
바짝 뒤를 따르는 내 얼굴에 마구 튀었다

‘바리’가 고개를 돌려 나에게 말했다

‘우리가 이렇게 시체들을 징검다리 삼아 백대살을 건너가고 있구나
칼에 맞아 죽은 저들의 시체가 산을 이룬다
내가 백대살을 건너는 방법이 꼭 이것 밖에는 없었던 것일까‘

나는 그런 ‘바리’의 얼굴이 가증스럽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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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바리 - 33 [흙 - 4]
이름: damibox


등록일: 2012-08-18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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