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담의 그림창고



                                                                                                                                          30 x 45 cm /종이에 먹과 수채/08.10.15
['木魚' 86 - 눈을 뜨다]

그러나 눈을 뜨기 싫었다.
눈을 뜨는 동시에 이 어둠이 사라져 버리고 다시 나의 일상을 내 눈으로 봐야 하는 것이 싫었다.
내가 다시 눈을 뜬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또 눈을 감고 이 어둠의 길을 통과해야만 할 것이다. 생명이 있는 것은
어차피 한번은 죽어야 하므로 나는 언젠가 이 어둠을 통과해서 죽음 속으로 내 몸을 밀어 넣어야 할 것이다.
차라리 나는 이 어둠이 훨씬 더 평온했다. 나를 감싸고 있는 어둠에서 조금이라도 더 오래 버티기 위해 눈에 더 힘을 주어 꽉 감았다.

‘괙괙괙 나 청둥이가 잠시 죽었다가 살아났네 분명히 여기가 극락 아닌가? 난 여태 살아오면서 죄지은 일이 없으니
여기가 바로 극락일시 분명해 잉잉잉 목어 아저씨! 다시 보니 반갑네요 난 모두 사라져 버린 줄 알았어 잉잉잉
모두 살아서 다시 만나 기쁜데 왜 이렇게 눈물 콧물이 자꾸만 쏟아지지 괙괙괙 눈치도 없는이눔의 눈물아  잉잉잉
이 어둠 속에 나만 홀로 두고 모두 떠나버린 줄 알았는데 이렇게 다 모여 있네요 잉잉잉 맨 뒤에 하얀사람도 살아있네요
반가와요 반가와 잉잉 저 백태 낀 하얀 얼굴도 이제 보니 세상에서 젤 미남인거 같아 마구마구 쪽쪽 뽀뽀해 주고 싶어 괙괙괙
글구 앞에 떠있는 저 재수 없는 인간도 잉잉잉 다시 보니 반갑네 괙괙 우리 이제 부텀 절대 헤어지지 말자구요 잉잉잉
의리 없이 먼저 달아나는 일이 없기로 하자구요 잉잉잉’

일상의 소리들이 조금씩 들리기 시작하자 어둠의 길에서 영원히 사라져버린줄 알았던 외로움이 문득 찾아왔다.
꼭 감은 내 눈의 어둠속으로 조금씩 어둠이 갖어야 할 색깔 같은 것이, 혹은 어둠이 변색되어 생기는 빛깔이 깃들기 시작했다.
반가운 이들의 목소리와 또 그들이 부산하게 움직이는 소리들, 이곳 물속에 들어온 이후 나의 일상이 되어버린 낯익은 소리들이 들리자
오히려 외로움이 내 마음을 일시에 장악했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 중에서 오직 나 홀로 외로움 속에 담궈진 느낌이 들었다.
외로움은 이런 일상들 속에서 힘을 발휘한다.
청둥이의 설레발 소리가 결국 꼭 감고 있던 내 눈을 뜨게 했다. 아니, 나도 이 반가운 화상들을 빨리 보고 싶었다.
지금 나에게 가장 귀한 존재들은 바로 내 옆에 있는 이들 밖에 없었다. 눈을 뜨자마자 고개를 뒤로 돌려 반가운 이들의 모습을 보았다.
목어의 등위에 올라 탄 청둥이가 앞뒤를 둘러보며 눈물을 뿌리고 있었다. 하얀사람이 나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목어도 일단 물속도시의 문을 통과했다는 것에 대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흐흐흥 내가 이토록 어렵게 어둠을 통과하는 것은 첨이다. 예전에 죽을 때도 이렇게 어둠이 깊지는 않았다.
너희 살아있는 자들이 죽은 나를 싫어해서 모두 떠나버린 줄 알았다. 모두 여기 그대로 있으니 고맙고 반갑다.
흐잉 청둥이도 무사하구나 흐흐흥’

‘괙괙괙 내가 누구요? 천하의 둘도 없는 청둥이 아니요! 이런 정도는 뭐 수백 번이라도 더 우리집 방문 드나들듯이 할 수 있겠네!
우리가 지나왔던 어둠속에서 나는 뭔가 큰 괴물이 나타날 줄 알았는데 너무 싱겁게 어둠을 건넜네.
아흐, 청룡이든 백룡이든 흑룡이든 핑크룡이든 금딱지룡이든 뭐든 나타났다면 내 실력발휘를 제대로 할 수 있었는데
이눔들이 천하의 청둥이님께서 오신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모두 꼬랑지를 내리고 도망갔는지 원! 괙괙괙
이 싱거운 괴물들아!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조선 최고의 검객 김무장의 수제자 청둥이가 여기에 왔다.
용기 있는 넘은 이 청둥이님 앞에 모두 나서봐라! 내가 단 한방에 몽땅 날려줄 테다. 썅!’

기가 살아난 청둥이가 목어의 등위에서 마구 날개짓을 해대며 떠들었다.
마치 말을 탄 장수가 칼을 휘두르며 적진으로 뛰어들듯이 거칠게 날개짓을 하며 엉덩이를 들썩댔다.
청둥이가 떠들어대는 시끄런 소리 사이로 가냘픈 소리 하나가 들렸다.

‘청둥아! 나 좀 살려줘.... 너의 엉덩이 좀 잠깐 치워봐...’

뒤에 있던 하얀사람이 청둥이의 엉덩이를 손으로 가리키면서 소리를 쳤다.

‘청둥이의 저 둔한 엉덩이가 꽃지를 깔고 앉았다아! 흐허허’

‘뭐라구! 이 곡선미가 철철 넘치는 내 엉덩이가 둔하다구! 괙괙!
나는 저 하얀 귀신이 살아있는 것을 보고 반가워서 눈물바람 했더니 겨우 한다는 소리가
내 엉덩이 타령이야? 꽥‘

‘깔렸어! 깔렸다구. 청둥이의 저 둔한 엉덩이에 꽃지가 깔려 으깨지고 있다구!’

‘엥! 이거 모야?  꼬꼬...꽃지가....’

청둥이의 엉덩이 밑에서 겨우 빠져 나온 꽃지가 막혔던 숨을 한꺼번에 내쉬며
집게발을 높이 쳐들어 불같이 화를 냈다.

‘청둥이 너가 또 나를 깔고 앉았어! 이 더러운 엉덩이로 나를 또 깔아 뭉겠어!’

‘으잉, 괙괙 너를 깔고 앉은걸 내가 왜 몰랐지? 괘액...’

목어가 배지느러미를 크게 휘저어 육중한 몸을 위쪽으로 끌어 올리면서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도 즉시 위로 몸을 올려라. 모두 밑을 봐라! 이제부터 시작이야. 이제부터 시작이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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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Day by Day]-131 / '木魚' 86 - 눈을 뜨다
이름: damibox


등록일: 2008-10-15 16:17
조회수: 2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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