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담의 그림창고



                                                                                                                                          30 x 45 cm /종이에 먹과 수채/08.10.16
['木魚' 87 - 아래를 보다]

우리는 여전히 물속에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 본 우리는 질겁 했다. 강도 아니고 하천도 아닌 뭔가가 꾸역꾸역 길게 흐르고 있었고
우리는 그 위에 떠 있었던 것이다. 정신을 차려 주변을 둘러보니 강 주변엔 플라스틱으로 만든 분홍색 조화들이 지천에 꽂혀 있고
강은 저 멀리 큰 성벽 같은 곳을 향해 흐르고 있었다.
목어가 주변을 둘러보고 나서 놀란 기색을 감추고 조용히 말했다.

‘지난밤에 인간들이 버린 모든 것들이 정오를 기해 이곳으로 흘러들어 온다.
저기 강이 흘러들어가는 석벽에 둥글게 터진 곳이  물속도시로 들어가는 문이다.
우리들 밑에 흐르는 이 검은 강은 무엇이든지 빨아들이는 흡인력이 강해서 강과 적당한 높이를 유지해라.
그리고 강에 흘러가는 것들이 어떤 말을 걸더라도 절대 대꾸하지 마라‘

강에는 온갖 것들이 뒤섞여 흘러가고 있었다. 굳이 낯선 풍경도 아니었다. 내가 이곳 시화바다 물속에 처음 들어와
이 새로운 물속도시가 자라나기 이전에 존재했던 물속 빌딩숲 폐허 시가지를 지나면서
아무렇게나 버려져 쌓인 쓰레기 더미들 속에서도 이런 광경을 목격하고 놀랬던 적이 있었다.
그때도 이런 쓰레기들이 큰 길마다 골목마다 산을 이루었다.
오늘은 그런 쓰레기 더미들이 강을 이루어 서로 떠밀려 흐르고 있었다.
바깥 땅위에서 사는 인간들의 욕망이 만들어 낸 거대한 강이었다.
인간들이 꼭 만들어 냈다기 보다는 사람에게 쓸모가 다 했거나 그 수명이 다해서 버려진 것들과
주인을 잃고 떠도는 것들, 그것들이 밤새 내내 시화바다에 버려졌다가 물속 도시의 문이 열리는 시각인 정오에
일제히 강을 이루어 떠밀려 오고 있었다.
그 속엔 비단 폐기된 물건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버린 말과 글, 생각들도 뒤섞여 있었다.
진실이라고 믿었던 혹은 믿고 싶었던 언어들이 폐기되어 한갓 쓰레기로 흐르고
여지껏 보물처럼 생각하며 애지중지 했던 물건들이 주인에게 버림받아 버려진 채 흐르고...
사랑스러운 것들이 가장 먼저 썩는다고 했다. 한때 자신의 목숨처럼 여겼던 사랑하는 연인의 아리따운 입술이
쓰레기처럼 버려져 흐르고 항상 밤하늘 별빛 같던 연인의 눈구멍도 떠밀려오고
날마다 비밀도 아닌 말을 비밀스럽게 속삭이며 빨아대던 귀볼과 사랑을 말하던 입술들이 여기저기에 떠밀려 오고 있었다.
내 가슴을 더듬었던 그녀의 하얗고 긴 손가락도 떠밀려 오고 있었다.

시커먼 핏빛 물속에 떠밀려 가던 요염한 입술 하나가 립스틱을 진하게 바르며 오똑 서서 말했다.

‘청둥아! 너의 노란부리가 나의 가슴에 불을 확 당기는구나. 너무 멋지다.
너의 강한 부리가 내 입술 속으로 들어오면 내 혀로 돌돌 말아서 오뉴월 땡볕아래 아이스크림처럼 녹여 줄께.
그 강렬한 입맞춤을.... 지금이야. 오직 이 순간이 중요해’

청둥이가 슬쩍 꽃지의 눈치를 보고나서 그 요염한 입술로부터 고개를 휙 돌리며 완강한 표정을 지었다.

‘진덕표! 내가 널 잘 알지! 법은 만인을 위해서 존재한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흘린 피로 민주화를 이루어서 이제 우리 사회는 법치가 제대로 선 나라가 되었다. 늦지 않았다.
법으로 소송을 걸면 빼앗긴 너의 땅을 백퍼센트 되찾을 수 있다. 난 너처럼 억울한 사람을 돕는 걸 사명으로 여기는 양심 변호사야.
소송비용은 후차의 문제이니 일단 일루 와봐’

하얀사람의 꽉 다문 입이 쇳소리를 내며 이를 갈다가 저 살찐 입술을 향해 주먹을 들어 올려 부르르 떨더니 목어의 등을 때렸다.
목어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자 하얀사람은 그냥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떠내려가던 액정 모니터에 불이 켜지면서 화면이 멋진 캐주얼을 입은 청둥이가
빤스와 브라자만 걸친 두명의 미녀들에 둘러싸여 대가리가 뭣처럼 보이는 승용차 앞에서 한껏 폼을 잡더니
차 속에 들어가 핸들을 잡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동시에 스피커에서 웅장한 배경음악을 두르고 목소리가 들렸다.

‘브르르릉! 네가 원하는 대로 움직인다. 이 속도 앞에선 스텔스기도 엉엉 울고 간다.
터프남의 황태자 청둥이. 이걸 타면 백마를 탄 왕자가 되지. 악셀에 발을 디딘후 10초만에 시속 300 킬로의 속도를 즐겨라.
봐라! 세상의 모든 여자들이 너를 우러러 보고 있다. 5년 무이자 할부다.
오늘 신청하면 계약금은 100퍼센트 보조를 해 준다. 그러니까 그저 공짜나 다름없다’

청둥이가 갑자가 날개를 들어 올리면서 뭐라고 말을 하려 주둥이를 열려는 순간에
내가 오른손으로 막 벌리려는 그의 주둥이를 마치 펜치 손잡이를 잡듯이 꽉 쥐었다.
청둥이가 삼킨 말이 크게 꿀꺼덕거리며 그의 긴 목을 굽이쳐 넘어갔다.

‘괘이익 저어그 머엇찐...차는...내....가 사안다 꼬옹짜....’

떠밀려 내려가던 하얀 손 하나가 내 앞에서 돌연 일어서더니 불끈 쥐어 보이면서 외쳤다.

‘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을 위해 산자여 따르라!’

뒤를 따라 밀려가던 깃발하나가 저 손이 외치는 소리에 응답을 하듯 발끈 세우더니 힘차게 나부꼈다.
깃발에 그려진 그림과 글씨가 눈에 익었다. 허리를 낮추어서 자세히 보니 오래전에 내가 흔들었던 깃발 같았다.
이미 색깔이 바랜 그림은 꼬질꼬질하고  몇개의 획이 떨어져 나간 글씨가 웃기는 글자를 만들었다.
내가 습관처럼 손을 뻗어 그것을 집어 올리려 하자
청둥이가 목을 길게 빼어 주둥이로 나의 엉덩이를 힘껏 쪼았다.

신문 한 장이 떠내려 가다가 우리들 밑에서 좍 펴지면서 행복한 빛을 발했다.
검은 글씨가 또렷했다.

‘국민소득 4만달러, 서민이 주인 되는 세상이 온다’

낯익은 여자 모델이 거의 활딱 벗은 채 자기 손으로 제 몸을 애무하듯 쓰다듬더니 몸을 배배 꼬며
가슴츠레하게 뜬 눈은 이미 헤로인을 두어 근 먹은 표정이 되어  말했다.

‘예쁜 꽃지! 이젠 사랑의 트랜드는 몸이다. 몸으로 말해야 한다.
이 크림 한갑이 솜처럼 부드럽고 메뚜기 이마처럼 매끄러운 몸매를 만들어 준다.
여자는 여자가 되는 것에 투자하는 것을 아껴하지 말아라.
이 크림 한갑이면 세상의 모든 남자가 너의 품안에 모여들 것이다’

저 모델의 말을 유심히 듣고 있던 꽃지의 등깍지가 몰래 붉어지는 것을 하얀사람이 보았다.
티브이 모니터 위에 부처 머리 하나가 뉘어져 떠밀려 가고 있다.
모니터는 고장난 척 연신 지지직 거리면서 남대문과 어떤 여인의 입술을 번갈아서 클로즈업 했다.
서울의 거리가 보이다가 파리의 거리가 되었다가 뉴욕의 거리가 펼쳐지다가 도쿄의 거리가 나타났다.
세계가 한 지붕 아래 있다는 말을 저렇게 어려운 화법으로 하면  마치 깊은 뜻이 있는 것 처럼 특별하게 보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이 강위에 떠서 거슬러 올라가는 우리들의 모습으로 화면이 바뀌었다.
여전히 모니터는 고장난 척 지지직 거리고, 모니터 위에 뉘어진 부처의 입이 중얼거렸다.

‘지지직... 가나다라마바사...지지지지직 아자차카타파하... 지지직’

핏빛 물속에 잠겨서 큰 십자가 하나가 떠밀려 왔다.
십자가 아래쪽에 왠일인지 작은 바퀴 하나가 달려 있었다. 우리들 앞에서 십자가가 불끈 솟더니
어디선가 메시아송의 그 대단한 합창소리가 들리다가 뚝 멎었다.
그리고 어떤 얇다란 입술하나가 약간 쉰 듯 탁한 소리로 고래고래 악을 썼다.

‘옛쑤 천꾹 뿔씬 찌옥 옛쑤 천꾹 뿔씬 찌옥’

흐르고 있다. 떠밀려 가고 있다.
우리들이 뭍에서 미련 없이 버렸거나 혹은 고통스럽게 이별했던 모든 것들이 오늘 이곳에서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거대한 강을 이루어 흐르고 있다.
생명이 붙어 아직 살았있는 것은 절반쯤 죽었거나, 죽어있던 것은 절반쯤 살아나서
또는 죽은 것은  겨우 살아있는 척 빌빌대거나 살아있는 것은 죽은 척 꼼지락도 하지 않고
미묘한 표정으로 오묘한 소리를 중얼대면서 흐르고 있었다.

‘어쩌구 저쩌구 사랑이 안타거나 홈런이... 가나다... 레닌이 어쩌구 에세닌이 뭐라구 소통... 다라마...
전쟁이 어쩌구 자본이 평화가... 마바사...오린지 촤크릿 생태적 삶이... 사아자...줄기세포가 거너더러머버서...
주체가 뭐 사상이 뭐  자차카... 주식이 뭐 아파트가 카타파... 환경이 차파하...’

쉬지 않고 중얼중얼대며 끈적끈적하게 떠밀려가는 저 모습들이 지겨운지 하얀사람이 눈을 질끈 감고
손으로 양쪽 귀를 꽉 막은 채 소리쳤다.

‘아아 징그러워! 우리 인간들이 어제 밤새 내내 버린 이 물건들과 욕망들... 흐흐흥.
그리고 아아 저 기름진 말과 글과 생각들이 떠밀려 들어가 물속도시를 건설하는 거름이 된다.
그래 맞아! 끈적끈적하게 보이는 저것들은 아마 온갖 영양분이 가득할게야. 푹 삭으면 훌륭한 거름이 될거야.
물속도시는 이것들을 빨아 마시면서 날마다 쑥쑥 커가고 있어.흐흐흐’

우리는 온갖 욕망이 꾸역꾸역 흐르는 강을 따라 물속 도시로 들어가는 문을 통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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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Day by Day]-132 / '木魚' 87 - 아래를 보다
이름: damibox


등록일: 2008-10-17 15:20
조회수: 27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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