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담의 그림창고


서승, 그이와 함께한 장면 몇 개
                                                            
*장면_01

10년도 훨씬 지난 장면이다.
(참고로 나는 숫자에 약하다. 시간이나 날자등등 이런 숫자를 잘 기억하지 못한다.
그 덕에 나는 이 복잡한 세상을 그럭저럭 편하게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업차 타이페이에 갔던 친구 녀석이 오전에 시간 여유가 있어서 자신이 묵었던 호텔 부근 공원을 산책하던 중에
무슨 박물관 같은 건물에 들어갔다고 했다. 2층 전시장에서
큰 벽면을 가득 메운 내 판화 한 점을 보고 깜짝 놀랐다는 것이다.
그가 귀국하자마자 나에게 전화를 했다. 야! 담이 자네가 이렇게 유명할 줄 몰랐네.
자네 오월판화 중에 ‘대동세상’인지 ‘대동세계’인지, 암튼 너의 판화가 크게 확대되어 벽면 하나를 가득 메꾸고 있드라구!
캬하! 카메라가 있었으면 내가 찍어왔을 텐데 말이야. 나는 뜸을 들이다가 의아해서 물었다. 글먼 그게 뭔 전시장이라든가?
녀석이 잠깐 우물쭈물하더니 대뜸 이렇게 말했다. 젠장, 나 같은 문외한이 그걸 으띃게 알것는가. 좌우지간 시내 한 가운데
큰 공원 안에 있는 멋진 전시장이었네. 내가 보기엔 뭔 역사물을 전시하는 것 같드라구.
그건 그렇고, 나에게도 그 판화나 한 장 주게나. 그거 한장 갖고 있으면 곧 물건 되겠던데 뭘!
어렸을 적에 대만은 장제스의 ‘자유중국’이라는 이름으로 기억되다가 내 나이가 들어서는  
영화 ‘동방불패’의 임청하와 왕조현의 고향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친구의 전화를 받은 이후엔 타이페이 어딘가에 나의 판화가 전시되어 있다는 것으로 타이완은 나에게 다가왔다.

*장면_02

이것은 약 30년 전의 장면이다.
1980년 광주항쟁 직후 여름 어느날, 나는 난생처음 제주도에 날아갔다.(물론 이것도 1980년인지, 1981년인지 기억이 어둡다)
제주도에서 소극장운동을 하고 있던 그림친구 김후림과 함께 한달여를 머물면서
제주도 문화운동에 관한 여러 가지 일들을 배우고 돕던 시기였다. 그에게 제주 4.3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러나 내 귀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바로 엊그제 광주학살을 직접 겪은 나에겐 제주 4.3은 그저 빛바랜 역사의 한 조각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리고 좌익의 활동이라고 주지되었던 제주 4.3과 독재 타도를 부르짖었던 광주오월을 함께 톺아보기란
당시 나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내 고향 하의도의 7.7 항쟁과 더불어 제주 4.3을 이해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역사적 사실보다는 내 고향 하의도에서 보았던 여러 풍광을 제주도에서 발견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구
멍이 숭숭 뚫린 돌담이나 헛간에서 내 똥을 받아먹는 검정돼지나  갈치속젓을 얹은 보리밥을
비릿한 생콩잎에 싸서 먹는 그 맛이나, 가자미와 서대를 넣어 끓인 미역국이나,
돼지뼈를 고은 물에 함께 넣은 모자반과 파래 국물맛이나
그런저런 모든 습속이 영락없는 내 고향 하의도와 너무 똑 같았다.
제주도의 밤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호젓한 술집에서 나는 어떤 재일교포로부터
대전에 수감되어 있는 서승 형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내 마음은 슬펐다. 이 땅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곧 서승 형제와 같은 경우가 언제든지 나에게도 닥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당시 나는 광주의 이런저런 일로 수배 중이었고 제주도에서 한 달도 넘게 잠수함을 타고 있었던 터였다.

*장면_03

나는 전주 감옥에서 92년 8월에 3년 만기 출소했다. 교도관이 큰 종이박스 하나를 내주길래 내가 뭐냐고 물었다.
그가 그동안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이거 외국에서 온 우편물입니다. 아다시피 홍선생은 특찰대상이라
외국에서 온 우편물은 보여줄 수 없어서 이대로 보관했던 것입니다. 교도관의 구차한 말에 나는 그냥 웃고 말았다.
나는 출소한 후에도 그 종이박스를 열어볼 염두가 나지 않았다. 저것들을 보지 않고도 지긋지긋한 감옥살이를
별 탈 없이 잘 살았는데 굳이 한참 세월이 지난 지금에 와서 먼 이국땅에서 온 소식을
내가 꼭 봐야할 필요가 있을까 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지난 감옥생활을 떠올리기 두려워서 그냥 창고 안에 쳐 박아 넣어 두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1997년 서울로 이사를 하면서 어차피 짐을 정리하던 중에 종이박스를 밀봉한 비닐테이프를 뜯었다.
출소한지 5년만에 그 종이박스를 열었던 것이다. 대부분 영국과 독일과 일본 그리고 미국에서 날아온 편지들이었다.
그 중 독일에서 보내온 편지 하나가 눈에 띄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감옥에 든 나의 석방을 위한 판화전시회 소식이었다.
내 판화로 만든 포스터와 리플렛과 행사 소식을 세세하게 적어둔 편지였다.
깨알 같은 글씨가 가득한 편지 안에 칼라사진 2장이 들어있었다. 내 판화로 만든 포스터 앞에 서있는 사람들 중엔
내가 알만한 독일 지식인들과 한국교포들, 그리고 뜻밖에도 서승 그이의 얼굴이 보였다.
다른 한 사진에는 그이가 독일어로 된 피켓을 들고 서 있는데, 그 피켓에 적혀있는 글씨 중에
내 영문 이름자가 있는 것으로 보아서 아마도 나의 석방을 위한 구명운동모임에 참석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내가 그 사진에 보이는 얼굴이 ‘서승’이란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던 것은 그이의 얼굴 전면에
펼쳐져 있는 화상을 입은 흉터 때문이었다.

내 기억으론, 1990년 그이가 19년만에 가석방 출소했을 당시에 거꾸로 나는 감옥으로 들어갔다.
릴레이 달리기를 하는 선수들처럼 서로 징역이라는 바톤을 넘겨받았던 것이다.
19년 장기수가 3년 ‘갈보 징역’(‘갈보’라는 표현 때문에 페미니스트들이 또 분노하겠지만,
그러나 당시 우리들은 3년 이하의 감옥살이를 ‘갈보 징역’이라고 불렀다)을 사는 내 석방운동을 하다니
나는 뭔가 역사의 어지럼증을 느꼈다.
언젠가 만나게 되면 감사인사를 드리겠다는 생각만 했을 뿐이었다.
그때 까지도 나는 그이를 만난 적도 없었으며 그 이후로도 한참 세월이 지날 때 까지 만날 기회를 갖지 못했다.
내가 만나야 할, 혹은 만나게 되는 사람들 중엔 30년 장기수부터 6개월짜리 집행유예 수형자까지 다양하다.
특히 안기부나 남영동에서 혹독한 고문으로 정신과 몸이 망가진 분들도 부지기수다.
그러나 나는 가급이면 그들을 피하고 싶다.
나도 역시 안기부 남산 지하실에서 25일 동안 고문을 당하면서 그 개 같은 녀석들에게 당한 수모와 인간적 모멸감의
뒤끝이 아직까지도 남아있다. 징역살이도 마찬가지다. 굳게 닫혀진 0.75평 독방 안에서 숱한 세월을 살았던 회한이 있다.
나는 지난 고문의 모멸감과 징역의 회한을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또한 나 역시 그들의 모습에서 그러한 모멸감과 회한을 들여다보는 것이 두려워서 만남을 피하고 싶었다. 그
래서 나는 그이를 만나서 감사인사를 드려야 할 것이라고 생각만 했을 뿐,
정작 만날 수 있었던 자리는 요리조리 피해 다녔던 것이다.

*장면_04

2001년 인지, 혹은 2002년 인지.... 내가 그토록 생각하고 원했던 ‘동아시아문화연대’가 첫 행사를 했다.
이 연대모임을 조직했던 분은 누구나 알만한 중국학 전공의 교수였다.
그 교수는 지금까지도 내가 신뢰하고 개인적으로 워낙 좋아하는 사람들 중 한 분이다.
동아시아, 말 그대로 한국과 중국과 일본의 지식인들이 모여서 서로 무엇인가를 논의했다.
나에게 판화전시회와 짧은 발제강연이 맡겨졌다. 지식인들이 하는 짓이 모두 그렇듯이 서로 알만한 사람들 끼리
교류하는 정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것은 그냥 내 생각이다.
즉, 한 예술가의 동물적 본능이라 할 수도 있겠고, 아니면 산전 수전 공중전 우주전을 다 겪은
내 슬픈 감각의 끝자락이라고 해야 할까.
먼저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동아시아에 대한 이해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특히 우리 한국 쪽에서 중국과 일본에 대한 전문적 이해가 한참이나 부족했다.
전혀 그런 공부를 하지 못한 나 같은 예술가의 눈에도 그런 부족함이 느껴질 정도였으니
좀 안다는 사람의 눈엔 오죽했겠는가.
특히 일본은 일찍이 ‘아시아’라는 말에서 탈출하기 위해 근현대의 자기네 역사를
어떻게 모질게 꾸려왔는지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지 않는가.
그리고 중국은 말 그대로 ‘서아시아’‘남아시아’ ‘북아시아’ ‘중앙아시아’, 중국 어디든 뱅뱅 둘러 온통 아시아이지 않던가.
아니, 아시아가 곧 중국이며 중국이 아시아의 모든 것이라고 자부하지 않던가.
이 모임에 참석한 중국의 내노라(?)하는 몇 명의 학자들은
우리가 말하는 ‘동아시아’에 대한 소중함이나 위급함이 전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안하무인이었다. 나는 그 광경이 지금까지도 두고두고 찜찜하게 기억되었다.

‘동아시아’에 관한 나의 기억은 다시 약 40여년 전으로 거슬러가야 한다.
1970년대 중반, 어느 문학잡지에 마르께스의 소설 ‘백년동안의 고독’이 연재 되었다.
우리는 남미의 그런 소설 양식을 ‘환상적 리얼리즘’ 혹은 ‘마술적 리얼리즘’이라고 불렀다.
광주항쟁을 앞둔 70년대 말에 광주 문화운동 그룹은 샤마니즘의 주요 루트인 동아시아만의 그런 문화적 양식을
구축해나가야 한다는 데 모두 동의했다. 그때부터 동아시아의 문화적 아키타입을 찾아
현실의 여러 가지 이야기를 형상화하는 일이 우리들에게 중요한 화두가 되었다.
특히 당시 소설가 황석영이 그것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마당극이나 무대극
그리고 여러 예술장르에서 다양한 형태로 우리들과 함께 실험했다. 아니, 본디 우리의 마당극은 동아시아의 문화적 원형을
오롯이 갖고 있는 특별한 연희형태다. 아마 현대에서 우리가 구축한 예술 양식 중에 가장 세계적이고 진보적인 것이
바로 마당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에 우리 스스로 마당극을 폄하하는 모자란 짓을 했던 까닭에 그것을 발전시키지 못하고
관속에 넣어 못박아버린 우를 범하고 말았다. 못난 우리들이 하는 짓이란 모두 이렇다.
조선시대를 살았던 선배들은 모두 새끼(小)중화주의자가 되어야 행세를 할 수 있었고,
지금은 서구에서 유행하는 사조에 목을 매달아야 서생 노릇이라도 할 수 있는가 보다.

*장면_05

2002년 여름이던가. 우연한 기회에 소설가 황석영의 집에서 서승 그이를 만났다.
당시 그이는 동아시아의 여러 문제에 대해서 뜻이 있는 학자들과 활동가들의 모임을 만들기 위해
그이가 거주하는 일본과 한국을 오가면서 많은 사람들을 단도리하고 있을 때였다.
나는 요즘 대학에 적을 둔 학자들을 아주 백안시하는 습관이 있다.
물론 적은 봉급에 자신의 아이들은 외국에 조기유학 보내서 항상 주머니가 비어있는 경우도 있겠지만
어디 외국의 학술대회니 뭐니 하는 것에 한번 참석하려면 학교에서 출장비나 혹은 정부기관으로부터 프로젝트를 받지 않고는
전혀 꿈쩍도 하지 않은 것이 그들이다. 다시 말해서 몸을 움직여 공부하기를 싫어하거나 자신의 돈을 투자해서
공부하는 것을 못난이나 하는 짓으로 치부되기도 했다. 지식인들이 공부하는 것을 포기한 나라는 미래가 없다.
그 결과가 현재 이명박 정권의 우리 현실에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어찌보면..... 지금 나는 이 후안무치한 이명박 정권으로부터 받는 스트레스를
죄 없는 우리 지식인들에게 뱉어내며 해소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워 얼굴이 뜨거워진다. 나는 그날 그이에게 ‘동아시아’, 한국 중국 일본이 어떻게 블록 공동체를
이룰 것인가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떠들었다. 그이는 아무 말도 없이 그냥 듣고만 있었다. 나는 더욱 신이 나서 떠들었다.
바이칼 호수에서 시작된 샤마니즘 루트는, 스키토 시베리안 루트가, 몰골리안 루트는 어떻게 한반도 동해와 서남해를 지나
일본열도까지 도착했는가를 말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날 내 이야기는 여기저기 쓰레기 속에서 주은 잡지식과 시인 김지하의
여러 가지 이야기를 설렁설렁 비벼서 오지랖 넓은 문화적 품에 담았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이에게 신나게 떠들어대던 나의 모습은 결국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은 꼴이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동아시아를 한중일의 주류역사의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장면_06

그이가 2005년 초에 내 ‘광주오월’판화들을 오끼나와의 사키마 미술관의 초대전시로 기획했다.
슬프도록 아름다운 섬나라 오끼나와를 나는 그때 처음 경험했다. 당시 오끼나와는 수많은 미군기지 가운데 하나인
후덴마 비행장을 평화롭기 그지없는 어촌 마을 헤노코(辺野古)에 옮기는 문제로 한참 시끄러운 시기였다.
오끼나와에는 그이와 함께 일을 하는 지인들이 많았다. 그들과 함께 밤새워 술을 마시며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이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그곳 사람들은 그이가 또 혹시 무슨 큰일거리를 들고 오지 않았냐는 생각으로 긴장하는 빛이 역력했다.

나에겐 전시회보다는 그곳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하고 술 마시는 일이 더 중요했다.
제주도 크기만큼 한 오끼나와 본섬에서 사는 사람들은 영락없이 제주도 사람들이었다.
생활습관이나 주택의 구조나 그리고 말하는 모습에서부터 웃는 모습까지 제주도와 너무 흡사했다.
나의 고향 하의도도 역시 똑 같았다. 밤에 모여서 술을 나누어 마시고 북장구를 두드리며 밤을 새워 노래와 춤을 추는 것을
내 어렸을 적엔 ‘산다이 판’ 이라고 했다. 아마 조선시대의 놀이판인 ‘산대’라는 말이 ‘산다이’로 변화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제는 내 고향 하의도에서도 그런 ‘산다이판’이 모두 사라져 버린지 오래다.
즉 지역과 마을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컴뮤니티가 되는 놀이판이 사라져 버리고 먹고살기 위한 지겨운 ‘일’만 남은 것이다.
‘놀이’를 잃은 ‘일’은 지겹도록 괴로울 뿐이다.
오끼나와 사람들은 중요한 이야기 거리가 대충 끝났다 싶으면 아무나 먼저 삼신 악기를 들고 나온다.
그곳의 사회운동가 치바나 쇼이치(知花昌一)의 삼신 연주와 노래소리는 일품이다.
오끼나와 전쟁의 대서사를 부조한 조각가 킨조 미노루(金城実)의 주물럭 춤이 놀이판의 흥을 돋운다.
이미 서승 그이는 놀이판 한 가운데서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다. 그이의 춤을 보자면, 팔놀림은 한국의 무동춤이지만
손놀림은 일본의 춤 노오(能)가 분명하다. 좀 더 자세히 보니 헤이안 시대에 유행하던 시라뵤시(白拍子)춤의 손놀림인 것 같다.
그래서 좌중은 더욱 신명이 오른다. 그이의 신명은 엉덩이가 꽤나 무거운 나까지도 벌떡 일어나 춤을 추게 만든다.
오끼나와의 시인 타까라 벤(高良勉)이 춤추고 있던 나를 저쪽 구석으로 데려가서 형제의 의를 맺는 노래를 즉흥으로 불러주었다.
바로 건너편 바닷가의 파도소리가 그의 노래에 박자를 맞추었다. 바람이 불면 나에게로 오라, 비가 내리면 너에게 가마,
세상은 외롭지 않네, 슬픔과 고통을 너와 내가 녹여버릴 수 있으니 세상은 즐거움뿐이네.

세 개의 줄이 달린 ‘삼신’(일본의 전통악기 사미센의 전신이라 할 수 있다)의 경쾌한 소리가 좌중을 이끌었다.
노래의 박자는 경쾌하지만 리듬은 애절하다. 바다에 외롭게 떠있는 섬의 공통적인 특색이다.
노래 가사에는 섬의 역사와 자연환경에 대한 이야기들이 남녀의 사랑과 이별로 은유되어 있었다.
오끼나와는 ‘일본’이 아닌 ‘유구왕국’이다. 그들만의 역사와 언어가 있다.
도요토미가 조선정벌을 위해 유구왕국에 군선을 내달라고 요구하자 유구왕은 이렇게 말했다.
형제의 나라 조선을 정벌하는 일에 단 한척의 군선도 내줄 수 없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오는 해상 실크로드의 교역 근거지인 오끼나와, 일본과 중국간에 조공무역의 중심인 오끼나와를
일본의 막부가 그대로 둘 이유가 없었다. 일본에 강제 병합된 오끼나와는 이후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군의 총알받이가 되는 비극을 한꺼번에 모두 떠안았다. 일본군의 옥쇄 작전으로 태평양 전쟁에서
가장 처참한 역사를 겪는 현장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이는 억지로 시간을 내어 내가 가장 관심이 있어 하는 오끼나와의 전통 샤마니즘의 역사가 살아 숨 쉬고 있는
여러 곳에 데려다 주었다.

우리는 세화우타키(斎場御嶽)에서 ‘신들의 섬’ 쿠다카지마(久高島)를 바라보았다.
성질이 쌈 싸먹게 급한 그이는 이런 경우엔 절대 먼저 말하는 법이 없다.
그이는 나를 일단 현장에 데려다 놓고 짐짓 모르는 채 나의 눈치를 살피며 무슨 말이 나오는지 슬며시 엿본다.
엄청나게 큰 바위들이 얽혀서 만들어진 동굴 같은 신의 처소 세화우타키에서 저 멀리 바다건너 ‘신들의 섬’ 쿠다카지마가
손에 닿을 듯이 보인다. 저곳에서 오끼나와 섬을 만들었다는 창조신이 용을 타고 건너온다. 용두관음(龍頭觀音)이다.
말 그대로 용의 머리를 딛고 서있는 관음이다.

북방 샤마니즘이 동진하면서 한반도의 동해안을 따라 내려왔다.
동해안 별신굿에 오방색 철릭을 입고 푸너리 장단에 맞춘 ‘꽃춤’에서 만개하는 생명의 약동과 화사함을 볼 수 있다.
이것이 서라벌로 내려와서 신라문명을 이루고, 남해안을 휘돌아 진도 씻김굿에서
샤마니즘이 예술적으로 완성되어 일상의 문화가 되었다.
이것이 다시 바다를 건너 일본열도에 들어가 세계에서 유래가 없는 가장 양식화된 신도문화를 이루었다.
신도문화는 샤마니즘과 에니미즘을 정형화의 극한까지 밀어붙여 미니멀한 양식으로 만들어 버렸다.
참고로 베링해를 건너 동진했던 북방샤마니즘은 아메리카 인디언 문화의 근간을 이루었다.
그러나 신대륙을 찾았던 서구 백인들에 의해 인디언 문화는 남김없이 잔인하게 파괴되어버렸다.
최근에 우리나라에서도 회자되었던 영화 ‘아바타’에는 아메리카 백인들의 잔인성에 대한 콤프렉스가 오롯이 남아있다.
아무튼 동아시아에서도 샤만의 원래 모습을 읽기는 어렵다.
그러나 오끼나와의 세화우타키에서 동아시아의 샤마니즘과 에니미즘의 소박하고 청아한 당초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제 그런 모습은 우리나라에서도 제주도에만 몇 장면이 남아 있을 뿐이다.

*장면_07

나는 이 용두관음에 관한 어릴 때의 추억이 있다. 바다가 환하게 바라보이는 동네 뒷산에 ‘마을 당’이 있었다.
정초에 당제를 하는 우두머리 외엔 아무도 들어갈 수 없다. 그 근처의 나무는 벨 수도 없을 뿐 아니라
바닷바람에 넘어진 나무조차도 함부로 손을 대서는 안되는 금기지역이다.
어린 우리는 당 안엔 용두아씨가 모셔졌다는 말만 어른들로부터 들었다.

어른들 몰래 또래 아이들과 함께 그 용두아씨를 만나기 위해 우거진 숲을 헤치고 당으로 접근했다.
마치 우물 같은 작은 돌담이 둘러있고 위에는 갈대잎으로 곱게 엮은 지붕이 덮여 있었다.
바다쪽을 향해 작은 입구가 열려있고 그 앞엔 정초에 당제를 지낸 흔적들인가 싶은 촛농자국이며 작은 술잔과
마른 명태를 묶어두었던 실타래 같은 것이 놓여있었다.
우리는 호기심과 기대감으로 어두운 입구를 통해 좁은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몸짓이 큰 어른 한 사람도 앉아있기 버거울 정도로 좁은 공간이었다.
그 안에는 소나무 뿌리를 다듬어 하얗게 퇴색한 구불구불한 나무가 놓여있었다.
그것의 한 부분이 입구쪽을 향해 대가리처럼 생긴 나무가 삐죽 고개를 내밀듯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리고 대가리 같은 나무 위에 바닷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검은 자갈 두 개가 포개져 있었다.
어린 우리들은 저걸 두고 매년 정초만 되면 당제를 하느라고 온 마을이 떠들썩했던가 라며 크게 실망했다.

다음날 그이는 나를 데리고 오끼나와 현립 박물관으로 향했다.
나는 그곳 전시장 한 귀퉁이에 외롭게 전시되어 있는 작은 용두관음상을 본 것이다.
금니로 깔끔하게 입혀진 것으로 보아서 아마 최근에 제작된 것이 분명했다.
이후 나는 40년도 넘은 세월이 흘러 머리 허연 중년이 되어 오끼나와의 끝자락 세화후타키에서
우리 동네 뒷산 당에 모셔진 용두아씨의 그 비밀을 알게 되었다.
당 안에 구불구불한 허연 나무뿌리, 이것이 어른들이 말하는 용(龍)이었다.
입구를 향하고 있는 그 용두위에 포개어진 검은 자갈 두 개는, 아래 큰 자갈은 아씨의 몸이고
위에 작은 자갈은 아씨의 머리인 셈이다.
용두관음이었다. 용신은 바다신이다. 즉, 용왕님이다. 그가 바다의 모든 날씨와 바람을 관장한다.
그를 부리는 사람이 용두아씨다. 또한 용은 남근을 은유하기도 한다.
그 남근의 머리꼭대기를 밟고 서있는 모습은 세상천지의 울퉁불퉁한 기운을 육보시로 다스리는 것이니
바닷가 포구에서 몸을 팔아서 끼니를 잇는 여인들의 수호신이기도 했다.
나는 그렇게 그이를 따라가며 오끼나와를 통해서 제주도를 보았고 내 고향 하의도의 숨겨진 맨살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장면_08

1998년쯤에 나는 일본의 화가 도미야마 다에코 선생과 함께 광주, 부천, 일본 가와사키에서 2인전을 했다.
도미야마 선생은 1080년 당시 광주학살을 뉴스에서 보고 즉시 판화 작업을 했다.
선생의 연작판화는 일본 전역에서 그리고 프랑스와 독일 미국 등지에서 전시되었고
그것은 광주학살의 진상규명 운동에 많은 역할을 했다.
선생은 바다건너 일본에서 광주를 그렸고 나는 광주오월의 당사자로써 광주를 그렸다.
그러나 함께 하는 전시 전까지는 서로 이름과 그림만 알았을 뿐이고 단 한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도미야마 선생의 그림 중에는 오월연작 판화뿐만 아니라 일본군 조선위안부와 관련된 천황제에 대한 비판적인 그림도 있었다.

그 때 나는 처음으로 도쿄 구단거리에 있는 야스쿠니를 구경했다.
야스쿠니 경내에서 나는 천천히 걸음을 떼며 ‘국가’라는 것이 우리에게 과연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소리 없는 소란스러움과 일본의 전형적인 양식화로 이루어진 깔끔함 속에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속내를 알 수 없는
음습한 어둠이 야스쿠니 신사의 지붕 속에 깃들어 있었다.
나는 저 야스쿠니에서 일본의 남근주의를, 그리고 이웃나라들 즉 중국과 한국의 구석구석에 똬리를 틀고 있는
국가주의의 음침한 모습을 읽었다. 나는 언젠가는 저 야스쿠니를 통해서 한국의 곳곳에 죽은 듯이 살아 숨 쉬고 있는
국가주의의 모습을 그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항상 그이가 먼저였다.
그이는 이미 몇 해 전에 한국과 대만과 일본의 활동가와 지식인들을 연결하여 안티야스쿠니 공동행동을 조직했다.
매년 8월 15일, 한국에서는 그날을 ‘광복절’이라고 하고 일본에서는 ‘종전일’이라고 한다.
그들은 공식적으로 절대 ‘패전일’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렇다, 우리가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일본은 절대 패전한 것이 아니었다.
태평양전쟁을 향해서 선전포고를 했던 천황조차도 전범으로 처단되지 않았고,
당시 일본군부의 개노릇을 했던 대일본제국 육군사관학교 출신 박정희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써 18년간이나
온갖 전횡을 일삼았으니 일본은 패전한 것이 아니었다.
과거사의 그 음습한 그림자는 일본과 한국에 고스란히 남아서 지금까지도 우리를 옥죄이는 무엇인가가 되어 있었다.

그이가 야스쿠니 공동행동 모임이 타이페이에서 있으니 함께 가자고했다.
나는 주저없이 타이페이로 날아갔다. 나는 여행을 앞두고 그 나라나 지역에 대한 정보를 미리서 알아보지 않는다.
공부에 게으른 탓도 있겠으나 몇 가지 설익은 지식들이 오히려 나의 감각을 마비시키는 것을 종종 경험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국내 출판계에 상종가를 올렸던 문화 답사기의 책에 마치 판매전략으로 사용하고 있는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 중 하나이다. 그러나 타이완의 복잡한 역사를 얼마간 알아야 했기에 서점에서 얇고 두터운 책 세권이나
구입하여 읽었다. 역시 머릿속이 더욱 복잡해졌다. 한반도의 현대사중에 해방공간의 신탁 반탁을 열 번도 더 겹쳐놓은 듯한
타이완의 현대사는 너무도 복잡했다. 세상의 온갖 너절한 지식 중에 가장 간단명료한 것이 역사책일 진대 타이완의 현대사는
그야말로 내 머릿속을 너무 시끄럽게 만들었다. 돈이 아까워서 겨우 한권을 읽고 나머지 두권은 그냥 책더미 속에 던져버렸다.
지금도 타이완을 생각하는 나의 머릿속엔 문득 헝클어진 실타래 하나가 큼직하게 놓여 있는 것 같다.

타이페이에서 약 일주일을 머물면서 그곳의 훌륭한 활동가들과 다큐작가들을 많이 만났다.
그들에게서 또 타이완의 현대사를 많이 들었다. 그러나 내 멍청한 머릿속엔 하나도 남은 것이 없었다.
그런 나를 금방 눈치 챈 그이가 말했다. 홍선생! 타이완의 현대사는 2.28사건에 모두 담겨있소. 일단 2.28 기념관으로 갑시다.

*장면_09

이 글에서 내가 2.28사건에 대해서 역사적으로 나열하는 것은 새삼스럽고 부질없는 일이다.
굳이 간단하게 말하자면 1947년 미국의 엄청난 지원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농민군대에게 패해
위기에 몰렸던 부패한 장제스 국민당 정권이 타이완 본성인(1945년 이전부터 대만에 거주한 漢人)을 대량 학살한 사건이다.
약 3만여명의 본성인이 현장에서 피살되었거나 요식적인 재판절차도 없이 총살을 당했거나 실종되었다.
나는 제주의 4.3항쟁과 광주의 오월항쟁을 떠올렸다.

그이의 간단한 설명을 들으며 함께 전시장을 둘러보았다.
2층 어떤 전시장에서 큰 벽면을 온통 차지하고 있는 목판화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물론 작은 목판화를 크게 인쇄하여 벽에 아로새겨놓은 것이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내 판화그림 ‘대동세상-1’ 이었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내 그림은 아니었다.
원래 내 그림엔 무장한 시민군이 탄 트럭 앞에 김밥을 나누어주는 아줌마가 그려져 있었고,
지금 전시관 벽면을 장식한 판화 그림엔 담배를 파는 노점 할머니를 학살하는 국민당 부패한 관리들이 트럭에 타고 있었다.
내용은 정반대였으나 그림의 구성이 너무 닮아있었다.
십여 년 전에 타이페이에 사업차 왔던 내 친구 녀석이 저 그림을 얼른 보고 내 그림으로 착각을 했던 것이다.
타이페이 시내 한 중심에 있는 공원의 전시장에 내 그림이 분명히 있다던 친구 녀석이 했던 말의 비밀이 이제야 풀린 것이다.
한동안 멍한 시선으로 그 그림을 바라보고 있는 나에게 그이가 말했다.
황영찬 선생의 판화네. 사천출신인 그는 노신에게 판화운동을 배웠어.
그리고 일제가 패망하던 해에 타이페이 대학 앞에 서점을 내고 그곳에서 캐테 콜비츠 판화 전시도 하고,
사람들을 모아 판화운동도 했다네. 마치 한국의 1980년대 대학가 앞에 한두개씩 있었던 사회과학서점들을 생각하면 되네.
황영찬은 2.28때 담배노점상 할머니가 국민당 정부 관료에게 학살당하자 그 상황을 저렇게 판화로 그려서
타이완 섬 여기저기에 뿌렸네.
그이의 말에 나는 1980년대 광주오월 판화를 제작했던 시기를 떠 올렸다.
황영찬은 나보다 40여년 전에 내가 했던 것과 똑같은 일을 했던 것이다.
아니, 내가 황영찬으로부터 40년 후에 그와 똑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던가.
나는 그 세월의 무상함에 치를 떨었다.
그이가 내 소매를 끌었다. 황영찬은 홍선생의 스승이네. 이제 그만 선생의 묘소에 가보세.
도시 외곽의 공원묘지 한쪽에 자리를 잡은 2,28 희생자 묘역으로 향하는 미니버스 안에서 그이가 설명했다.

2.28사건 직후에 황영찬은 그의 애인과 함께 국민당 정부에 체포되어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었다.
유치장엔 여기저기서 끌려온 사람들로 발 디딜 틈도 없이 빼곡했다. 재판의 요식절차도 없이 몇사람씩 차례로 불려나가 총살되었다.
여자들만 수감해 놓은 감방에서 황영찬의 애인이 먼저 끌려 나갔다.
여인이 끌려가면서 어두운 복도에서 소리를 쳤다. 내가 먼저 갑니다. 당신은 어떻게든 꼭 살아야 합니다. 황영찬이 서럽게 울었다.
다음날 새벽에 황영찬과 열댓명이 함께 끌려 나갔다. 타이페이 중심을 통과하는 작은 강가의 마장터가 총살 장소였다.
총살이 끝나면 시체들은 달구지에 실려서 당시 시외곽의 공동묘지로 향했다.
총살터엔 그들이 흘린 피를 덮기 위해 흙이 뿌려졌다. 학살이 몇 달 동안 계속되면서 그렇게 뿌려진 흙이 작은 언덕을 이루었다.
타이페이 강가의 마장터엔 그 흙 언덕이 지금까지도 잘 보존되어 있다. 그렇게 죽은 시신들이 묻혔던 곳이 바로 몇 년 전에 발견되었다.
당시 그들 시신을 공동묘지 계곡에 대충 묻었고, 다행히 꼬리표가 달린 시신은 시멘트로 버물어 만든 작은 묘비에
이름을 새겨 땅에 박아두었다. 공동묘지에서 묘비를 만들어 입에 풀칠하던 한 사람의 배려 덕분에
황영찬과 십수명의 사람들의 시신이 묻힌 곳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을 묻었던 곳이 묘역에서도 한참 떨어져 있는 좁은 계곡인데다가 몰래 만든 묘비가 손바닥만큼 작아서
항상 풀숲에 덮여 있던 터라 그동안 사람들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다.

*장면_10

나는 [黃榮燦]이라고 새겨진 작은 시멘트 묘비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황영찬 보다도 먼저 끌려 나가 총살당한 여인이 생각났다. 애인을 따라 불원천리 타이완 섬나라까지 달려온 여인이었다.
그리고 처형장으로 끌려가며 어두운 복도에서 그녀가 외쳤던 외마디 소리가 생각났다.
그 소리를 들으며 감방 벽에 머리를 짓찧으며 서럽게 울었을 황영찬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담배 한 개피에 불을 붙여서 작은 묘비 앞에 놓았다. 자꾸만 담배연기가 눈에 들어왔다.
뒤에 서서 지켜보고만 있던 그이가 대만소주를 종이컵에 그득하게 따라서 나에게 내밀었다.
나는 그 잔을 받아서 묘비 앞에 단정하게 내려놓았다.

바다에 외롭게 떠있는 섬은 항상 바람이 많이 불었다.
바람은 동서남북과 좌우가 따로 없이 일년내내 분다. 그 바람과 싸우는 것이 섬 생활의 가장 중요한 일중 하나였다.
섬에 불현듯 나타나는 손님은 바다건너 육지에서도 주류 권력이 아니었다.
항상 육지의 권력 싸움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패자부활전의 힘을 축적하기 위해서 섬을 선택했다.
그래서 섬은 언제나 과도한 공물을 생산해야 했다.
바다로 가두어진 섬이기 때문에 모든 생산물은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의 식량으로도 부족했다.
섬은 항상 육지에서 들어온 손님과 외지인들이 주인행세를 했다. 그들이 부당한 권력을 행사하며 섬의 운명을 좌우했다.
섬은 바로 그런 부당한 것들과 싸우는 역사였다. 내 고향 하의도가 그랬고, 제주도가 그랬고, 오끼나와가 그랬고, 타이완이 그랬다.
전라도 광주도 육지 안에서 지역감정이라는 바다위에 떠있는 섬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들이 학살당한 역사의 뒤안에는 일본의 식민지를 경험한 후에 나타난 부패한 국가주의 권력이 앞장 서있고
그 뒤엔 미국이라는 거대한 나라가 웅크리고 있었다.

동아시아에 대한 관점은 여러 가지 시각이 존재한다. 나는 그 어떤 것도 존중하고 지지한다.
그러나 한중일이라는 국가적 관점에서 동아시아를 해석할 때 우리의 노력은 동아시아에
다시 새로운 국가주의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이용당할 수도 있다.
아니 이미 경제블록으로 만들어진 국가주의라는 불길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될 수도 있다.
광주오월을 직접 온몸으로 경험한 민중화가인 나는 절대 그 부분을 용인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주류 역사에서 밀려나 있는 변방의 역사를 본다. 타이완과 오끼나와, 그리고 제주도에서 동아시아의 미래를 본다.
그이가 나에게 가르쳐준 특별한 선물이었다.

*장면_11

2006년부터 약 4년여에 걸쳐서 나는 ‘야스쿠니의 미망’ 연작을 그렸다.
야스쿠니 그 음습하고 답답한 어둠을 통해서 동아시아의 미래를 바라보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나의 ‘야스쿠니의 미망’ 연작은 그이가 몸담고 있는 동아시아 모임인 ‘안티야스쿠니 공동행동’과 그 궤적을 함께 하고 있다.
내 그림의 영역은 ‘안티야스쿠니 공동행동’의 호흡을 따라서 더도 덜도 아닌 꼭 그만큼씩 진전되어 갈 것이다.
그 해 가을에 도쿄에 있는 작은 화랑 마끼 갤러리에서 ‘야스쿠니의 미망’ 연작 전시를 시작으로 2008년 8월에는
제주시 아트 스페이스 화랑에서, 그리고 2009년 7월에는 서울 인사동 평화박물관 갤러리에서, 또 2010년 5월에는
광주 시립미술관 상록분관에서 열렸다. 이 전시회의 한 쪽에는 항상 그이의 숨결이 따라왔다.
그이는 전시회 일자와 맞추어서 다양한 행사들을 조직했다.
나는 아직도 1980년대 한국 민주화 운동의 꼭지가 확실히 덜 떨어진 애석한 한 명의 예술가일 뿐이다.
그래서 지금도 사회운동과 연결되지 않는 예술은 굳이 내가 하지 않아도 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무슨 ‘공공미술이 어쩌네 저쩌네’ 라고 하지 않고 이런 식으로 사회운동의 한 영역으로써 예술을 이야기하면
요즘 누구나 촌스러운 짓이라고 힐난하겠지만 내 예술의 태생이 그렇게 촌스러운 곳에서 태어난 것이니
그런 정도의 비판은 받아도 마땅하다.
그러나 나보다 앞서서 꼭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그이의 빛나는 삶이 있어서 나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그이에겐 행동하지 못하는 학술은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몰래 그이에게 붙여둔 별명이 있다. ‘
행동하는 원고지’가 그것이다. 언젠가 누군가는 그이가 분주하게 발로 쓴 동아시아의 역사를 원고지로 옮겨낼 것이다.
꼭 문자로 정리되어야 학술인가. 이미 그이의 얼굴에 화상의 상처로 아로새겨진 동아시아의 지도와 역사가 있다.
동아시아의 국가주의가 토해내는 고문에 항거했던 표적이다. 암만 내가 동아시아의 모습을 내밀하게 그려낸다 하더라도
그만큼 더 잘 그려낼 수 없는 동아시아의 그림을 그이는 이미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이가 오끼나와에서 가장 아름다운 청년 사끼마 준(佐喜眞淳)을 나에게 보냈다.
내 작업장이 있는 경기도 안산에서 그 청년과 함께 이틀을 지냈다. 청년이 썩어가는 시화호를 꼭 보고 싶다고 하길래
왜 하필 썩어가는 인공호수가 보고 싶은가를 물었다. 청년이 삼신 악기가 든 가방을 품에 안으면서 말했다.
예술은 즐거움과 기쁨만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고 고통과 슬픔도 노래해야 합니다. 예술은 생명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도 이야기해야 합니다. 우리 둘은 육지와 연결된 조가비 같은 작은 섬에 도착했다. 바닷가엔 인간들이 버린 쓰레기 천지였다.
파도에 밀려온 과자 껍데기와 스치로폼 박스들과 음료수 병들 그리고 냉장고 선풍기 컴퓨터 각종 전자제품까지
여기저기에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청년이 삼신악기를 손에 들고 온통 쓰레기더미에 둘러싸인 작은 바위에 서서 시화호를 바라보며 노래를 불렀다.
청년의 가슴에 안긴 삼신 악기가 먼저 맑은 소리를 냈다.
하얀 물고기가 떠났네, 그 자리엔 우리가 버린 음료수 병이 떠 있네, 파란 물고기도 떠났네,
그 자리엔 내가 버린 텔레비젼 모니터가 켜져 있네, 물고기가 싫다고 하네, 우리는 인간들이 버린 음료수를 먹지도 못해요,
인간들이 버린 텔레비전 모니터도 보지 않아요, 다만 당신들이 사랑했던 것들을 왜 이렇게 버리는지 이해할 수 없어요,
불쌍해요, 슬퍼요, 당신들의 애정이 깃든 쓰레기들이, 당신들이 애지중지하다가 버린 저 물건들이 슬퍼서 울고 있어요,
당신들의 사랑을 빼앗겨 버린 채 산처럼 쌓인 저 물건들이.
오끼나와에서 온 청년 사키마 준의 노래는 인간들로부터 버림받은 쓰레기들과
그리고 썩어가는 시화호의 영혼에게 보내는 사랑의 메시지였다.

*장면_12

2007년 가을에 그이는 일본평화학회 학술회의를 제주도로 끌고 왔다.
일본의 평화학 관련 학자들과 활동가들 200여명이 제주도로 몰려왔다. 학술회의 주제는 ‘동아시아의 평화’였다.
그이와 나는 뉴욕의 안티야스쿠니 공동행동 대회를 채 끝내지도 못하고 대회 도중에 인천공항을 거쳐 즉시 제주도로 날아갔다.
학술회장은 온통 일본평화학회 회원들뿐이었다. 그곳에서 발제나 토론자로 참석하는 한국의 몇몇 학자들 외에는
도무지 한국인들을 발견할 수 없었다. 이틀 후의 최종 발표회에서 나는 한 사람의 발제자로서 연단에 섰다.
나의 원고는 아주 짧은 글이었다.
그동안 길지도 않은 세월이지만 그이의 안내로 발걸음을 했던 ‘동아시아’를 예술가의 시선으로 정리했다.
물론 그 짧은 원고는 평화학회의 학술회의 최종발제를 위해 작성된 것이지만,
사실은 진정한 의미의 ‘동아시아’를 나에게 가르쳐 준 그이에게 헌사하는 글이기도 했다.
짧은 글을 보완하기 위해서 제주도 화가들이 4.3항쟁 진상규명을 위해 수년 동안 그렸던 그림 26점을
연단 벽면의 큰 화면을 통해 차례로 보여주었다.
다음이 그이에게 헌사 했던 원고다.

[‘4.3의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제주도 畵家들]

(1)
우리 동아시아의 푸른 바다위엔 근현대사의 모든 질곡과 고통을 보듬고 있는 3개의 섬이 떠다니고 있다.
‘타이완’과 ‘오끼나와’ 그리고 ‘제주도’가 오늘날 동아시아 역사의 모든 것을 상징하는 맨얼굴이다.
이 3개의 섬은 동아시아 現代史의 ‘무의식’과 ‘잠재의식’ 그리고 ‘현실’ 사이를 서로 겹치기도 하고 엇갈리기도 하며
우리들에게 그 서러운 얼굴을 내밀고 있다.
하지만, 도대체 우리들은 마치 몽환 속에서나 본 듯한 얼굴로 착각하거나 혹은 보지 않았던 것으로 치부해 버린다.
기억은 되돌아서면서 희미해지고 이 섬을 떠나면 송두리째 잊어버린다.

‘제주도’를 말하면 그것이 ‘오끼나와’의 역사인것 같고, ‘오끼나와’를 말하다보면‘타이완’의 이야기로 들리고,
‘타이완’을 말하다 보면 어느덧 나는 푸른 바다가 四方을 벽처럼 둘러쳐 있는 제주도의 어느 해안가에서 하얗게 울고 있는
파도소리를 듣고 있다.

(2)
설룬어멍 날 설아올 적
어느바당 메역국 먹곡
보름불적 절일적마다
궁들리멍 못나는구나

세상에서 가장 서글프고 애를 끓는 노래들이 제주도에 있다.
함지박 물위에 엎어놓은 바가지를 두드려 장단 소리를 낸다.
한반도의 굴곡진 역사 속에서 무참하게 흘려야 했던 제주도민들의 눈물,
세상의 모든 빗물 보다 더 많이 흘렸던 그들의 눈물바다를 때리는 소리와 같다.
어둡고 습기 찬 세월의 공간속에서 끊이질 않는 恨의 웅얼거리는 소리, 이 노래는 바람이나 물결이 칠적마다
흔들리며 살아가는 해초 미역에 자신의 험난한 인생을 비유하면서 미역의 생리를 닮아 잇따르는 고초를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감내해야 함을 노래하고 있다.

이 서글픈 민요를 통과한 제주도의 한 시인은
오늘 다시 아시아에 횡횡하는 국가폭력들 앞에서 이렇게 외치고 있다.

한 끼니 밥도 아닌 네가/ 한 방울의 물도/ 한 방울의 피도 아닌 네가/
저 절절한 죽음 앞에서/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Your life is important/ My life is important, too/
Really, I don't want to die, please!”//
꽃다운 젊음 하나 지켜주지 못하는 조국에서/ 더 많은 젊음을 조공하려 혈안이 된 조국에서/
너를 부여안고 눈물 흘린들 풀 한 포기 키워내겠느냐/
꽃 한 송이 피어나겠느냐//
그러니, 시여/ 차라리 죽어버려라   -- 김수열「시여, 차라리 죽어버려라」전문

이제 더 이상 혼자서 그림자처럼 웅얼거렸던 노래를 멈추고 우리 다함께 이 못난 역사를 성찰해 보자며 절규하듯 노래하고 있다.
시인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인 詩 조차도 포기하고 새로운 시각으로 우리들의 현실을 바라보자고 외치고 있다.

근세기에 벌어진 국가폭력중 가장 잔혹한 상처를 남겼던 제주 4.3 은 미군정 아래에서 한민족이 안고 있던 모순이
집약되어 나타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제주 인구의 1/10 에 해당하는 3만여 명 이상이 목숨을 잃어야 했다. 이후 약 반세기 동안 4.3은 누구도 말해선 안되는 사건이었다.
군부독재정권은 4.3을 은폐 왜곡했고 철저히 금기시했다.
그에 따라 오랜 기간 제주도민들은 4.3을 입에 담지도 못했고 심한 허무주의와 레드콤프렉스에 시달려야만 했다.
국민들조차 고립무원의 섬에서 발생한 이 처절한 학살극에 대해 사건 당시는 물론이고 그 이후에도 제대로 알지도 못했다.
교과서는 왜곡된 내용만을 전달하고 있을 뿐이며 언론도 오랫동안 침묵으로 일관해왔을 뿐이다.
제주도는 더 이상 대한민국이 아니었다.
제주도민은 더 이상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었다.

(3)
가장 먼저 문학이 제주 4.3의 진실이 은폐된 지하의 빗장을 열었다.
제주 4.3을 직접 경험했던 老작가 부터 바람에 묻어온 진실을 귓전에 담았던 젊은 작가들까지 김석범, 현기영, 한림화등의 소설과
이산하와 김수열의 시가 반세기 동안 감추어진 4.3의 상처를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여주었다.

80년 ‘탐라민속연구회’의 출발은 제주도의 서글프고 애잔한 노래들 속에 가득찬 제주도민들이 오랫동안 가슴에
품고 살아야 했던 恨에서 거대한 낙관의 뿌리와 긍정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81년 극단 ‘수눌음’의 ‘항파두리’ 마당극은 위 문학적 성과들을 한꺼번에 모아 대동굿판으로 끌고 나왔다.
혼자서 물박을 두드리며 웅얼거림으로 풀어야 했던 恨을 드넓은 광장으로 끌고 나와 탐라도의 자기 정체성에 대해
성찰하는 대동굿이었다.

(4)
인간은 모두 자신의 경험을 설명하는 서사를 가지고 있다. 때문에 트라우마로 산산조각 난 세계를 다시 맞추기 위해서는,
개인이 주체가 되어 자신의 이야기를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타의에 의해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강요당한 피해자들이 자신의 경험을 반복해서 말하고, 자신의 두려움과 고통,
분노와 대면하는 과정이 중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트라우마는 결코 사라지지 않지만, 개인은 그 기억을 견디면서 새로운 자아로 살아갈 수 있다.
치유는 상처를 가슴에 보듬은 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획득하는 것이다.

굿은 視知覺 이미지와 소리다.
굿을 베푸는 司祭는 시각이미지로써 세상에 現象을 알리고 ‘소리’를 통해 치유를 한다.
司祭로써 화가들은 그림을 통해 그동안 사람들이 애써서 외면해 왔던 4.3의 실제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사람들은 지난 상처와 현실을 보게 되고, 극복의 대안을 구상한다.

평론가의 평론이 회화나 소설, 시를 대변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론이 필요하듯, 증언이 아닌 생존자가 만들어내는 이야기는 계속되어야 하는데,
이야기를 함으로써 개인은 자신을 주체로 세우고 기억을 제어하는 연습을 통해 자신에게 강요되는 상처의 기억을
치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나쁜 기억은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표현해 배출해 버려야 한다.

五感은 視知覺으로 부터 열린다.
회화가 敍事性을 획득할 때 그 논리적 구조의 형상화에 의해서 ‘이미지’와 ‘소리’를 함께 갖는다.
그림에 나타난 각종 형상들은 각기 그 나름의 미학적 원리에 의해 사람의 정서를 움직인다.
정서적인 것은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에 강한 힘으로 작동한다.
정서의 움직임은  대개 무의식중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더욱 강력한 힘을 갖는다.
그들 화가들의 4.3을 그린 화폭에는 제주도만이 갖는 풍광의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았다.
그것이 단순한 풍광이라면, ‘순수한 자연’은 얼핏 악의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국가에 의해 사건을 은폐하는
중요한 정책의 도구가 되어버린다.
그러나 그들은 제주도의 '순수한 자연' 속에 감추어진 역사의 진실을 그려 넣었다.
한없이 아름다운 이 섬의 풍광과 이곳에서 벌어진 잔혹한 국가폭력 사이에 미학적 긴장이 형성된다.
이 긴장관계가 생명을 위협하는 모든 유형무형의 것들에 대하여 저항의 상징으로 작동한다.
그러므로 視知覺은 일종의 상징이다.
굿판에서 모두 함께 나누어 먹는 음식과도 같다.
제주도의 화가들은 4.3의 트라우마를 치료하는 司祭로써 자신들의 그림을 통해
국가폭력에 저항하는 상징을 만들어 냈고 그리고 그 그림들을 젯상에 음식으로 올려 제주는 물론 한반도의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어 음복(飮福)하게 했다.

‘4.3 주제 미술’은 1994년부터 2003년까지 10년 동안 제주 ‘화가 司祭’들에 의해서 줄기차게 ‘그림굿판’이 이루어졌다.
이 굿판에 의해서 이 땅의 근현대사에서 국가폭력에 의해 감추어진 상처와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80년 광주, 여순, 지난 조국전쟁때 무참하게 저질러진 여러 유형의 집단 학살들,
그리고 일제에 의한 학살과 군위안부 문제들도 수십년만에 수면위로 떠올랐다.
모두 이곳 제주도 화가들이 자신들의 그림을 역사의 젯상에 올려 우리 모두에게 음복(飮福)을 베풀었던 결과들이다.
이 제주도 司祭 화가들의 굳건하고 아름다운 이름을 일일이 거론하는 것 조차 외경스럽다.
강요배,고길천, 김영훈, 박경훈, 오윤선, 오석훈, 이원우, 현경화등 총 26명의 화가들이다.

(5)
제주의 서글픈 저 민요처럼 가슴속 한가운데 모과 덩어리같은 恨을 안고 살았던 사람들이 이제부터 그 상처를 회복하고
새로운 대안을 찾아 나서고 있다.
국가는 항상 이런 새로운 대안을 자신들이 도맡아서 해야 한다는 실적주의에 매몰되어 있다.
인간 삶의 보편적 권리인 환경과 생명 그리고 평화에 관한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낸 국가 권력은
인류역사상 단 한 번도 출현한 적이 없다.
그러기엔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기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국가란 ‘파괴’와 ‘은폐’와 ‘죽임’으로 권력을 지탱하는 것이 그 속성이기 때문이다.

이젠 4.3의 굿판과 제사를 국가가 빼앗으려 하고 있다.
어떤 의미로든 제사를 지내는 국가는 건전하지 못하다.
새로운 전쟁을 만들기 위해서 국가는 제사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저지른 죽엄의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서도 제사를 필요로 한다.
국가의 제사는 다시 4.3의 상처를 덧나게 할 뿐이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지척에 공존해야하는 제주도민들은 이제 새로운 화해와 화합의 철학을 만들어 가야 할 때다.
불행한 과거를 청산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망각하느냐, 기억하느냐. 선택은 하나다.
‘이제는 잊고 화해하자’는 망각의 해법은 ‘그만하면 됐다’는 가해자 입장의 선택이다.
하지만 진실과 정의를 외면한 과거사 청산은 사죄와 용서를 전제로 한 화해가 아니라 단지 야합일 뿐이다.
손에 피를 묻힌 그들도, 수 십명 아니 수 백명 수 천명의 인간 생명을 절단시킨 저 피묻은 손들이 겪는
트라우마도 역시 자손들에게 그대로 되물림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가해자들 스스로 세상의 살아있는 모든 ‘생명의 가치’에 대한 깊이 있는 자기 성찰이 없는 한 진정한 화해와 평화는 깃들지 않는다.

이제 이 민요는 어둡고 습기찬 세월 속에서 그림자처럼 웅얼거릴 때가 아니라, 가해자들의 깊이 있는 자기 성찰을 위해
이 가을 환한 햇빛아래서 우리 모두 함께 큰소리로 외쳐 불러야 할 때가 지금쯤인 것 같다.

설룬어멍 날 설아올 적
어느바당 메역국 먹곡
보름불적 절일적마다
궁들리멍 못나는구나                                          

*장면_13

평화학회 학술회의 마지막 날 우리는 ‘제주 4.3연구소’ 이은주 소장의 안내로 제주공항 활주로 4.3 희생자 유골 발굴 현장을 답사했다.
집채보다 더 큰 비행기가 이륙하고 착륙하기 위해서 활주로는 불도저를 이용해 단단하게 다지고 또 다져야 한다.
활주로 밑에는 4.3 당시에 학살당했던 사람들의 하얀 유골이 여러 겹으로 압착되어 마치 시루떡처럼 켜켜이 눌러 붙어 있었다.
학생제복에나 달렸을 구리단추도 몇 개 보였다. 검은 전선줄에 묶인 손목뼈도 여기저기에 드러났다.
숫자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하얀 유골들이 근 60여년 만에 제주도의 파란 하늘 아래 그 서러운 모습을 펼쳐 보였다.

그 하얀 유골들을 보면서 나는 오끼나와 요미탄 마을(読谷村)의 '치비치리가마‘ 동굴 속에서 집단 자살을 한 유골들이 생각났다.
오끼나와 사람들이 총알받이의 두려움을 견디다 못해 실성한 채 몸을 던진 캰 곶(喜屋武岬)이 생각났다.
절벽에서 떨어지는 무수한 사람들 모습이 마치 하얀 나비떼 같았다. 나는 그 절벽 앞에서 억장이 무너졌다.
세상의 어떤 지식도 예술도 저 절벽 앞에서는 한갓 주접스러울 뿐이었다.
타이페이 강가의 마장터에 총살의 핏자국을 지우기 위해 흙을 뿌리고, 그 위에서 또 학살이 이루어지고
또 흙으로 핏자국을 덮어서 쌓은 작은 언덕이 생각났다.
그 언덕의 모습이 우리들 동아시아의 역사책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화가 황영찬의 작은 시멘트 묘비가 생각났다. 황영찬 보다 하루 먼저 처형장으로 끌려가면서
당신만큼은 꼭 살아남아야 한다고 부르짖던 그의 연인의 목소리가 제주도 바닷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그리고 광주오월 마지막 밤에 도청을 사수하던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이 어린 학생들의 등을 떠밀어
각자 집으로 돌려보내면서 말했다.
너희들은 결코 살아남아서 이 상황을 증언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27일 새벽에 도청 시민군 본부를 둘러싸고
난사를 퍼붓던 계엄군의 총소리가 들렸다.

그렇다. 우리는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우리는 아직도 예전과 별 다름없는 비루한 세상을 또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장면_14

일에 대한 그이의 추진력은 마치 쟁기를 끄는 힘 좋은 황소와 같다.
추진력이 너무 강해서 논만 갈아엎는 것이 아니라 가끔 논두렁까지 깎아먹는 경우도 있다.
3년전 가을에 뉴욕에서 안티야스쿠니 공동행동 집회를 하고나서, 그이는 향후 베를린 집회를 주장했다.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군국주의와 독일의 나찌즘, 이탈리아의 파시즘이 ‘삼국동맹’을 맺었던 사실을 누구나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전쟁 중에 일본 천황은 히틀러에게 우정의 뜻으로 큰 선물을 보냈고 독일은 나찌 장교들을 보내 야스쿠니에 참배를 했다.
당시 일본의 황태자가 독일을 방문했다. 일본 황태자의 환영식에서 연주되었던 심포니를 안익태가 작곡했다.
그 심포니 악보 중에 중요한 테마가 대한민국 ‘애국가’의 멜로디로 둔갑했다는 것은 이제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아무튼 일본의 역사적 과오에 대한 책임문제에서 독일도 비껴 갈 수 없는 부분이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했다.
일본의 교수 두 분과 그이와 내가 안티야스쿠니 공동행동 행사의 사전 모심기를 위해서 베를린으로 날아갔다.
야스쿠니에 관한한 독일의 현지 사정은 백수년 전에 아시아의 생산양식에 관해 마르크스가 이해하는 만큼도 되지 않았다.
사실은 일제 침략의 직접 피해당사자인 한국에서도 야스쿠니를 이해하는 정도가 유럽과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베를린에서 뒤셀도르프로 돌아오는 승용차 안에서 피곤에 지쳐서 졸고 있는 그이의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깜짝 놀랐다.
차창으로 북독일 나른한 초여름의 벌판이 지나가고 있었다. 이제 그이도 벌써 예순을 넘었다는 생각이
그때야 나의 머릿속에 들어왔다.

내가 대학에 막 입학하던 어느 어간에 그이에 관한 이야길 처음 들었다.
그리고 재판정에 서있는 20대 중반의 청년이었던 그이의 흑백 사진을 보았다. 그 뒤로 숱한 세월이 지났지만
나의 마음엔 그이가 항상 20대 중반의 청년으로 남아있었던 것이다. 그이도 세월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그런데 아직도 그이가 우리를 향해 손짓하여 부르면, 나는 언제든지 지체 없이 달려갈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러나 이젠 우리가 그이를 불러야 할 때다.
우리가 언제든지 그이를 부르면 그이는 동아시아의 역사가 새겨진 얼굴에
동자 같은(소설 火山島의 작가 김석범 선생은 그이의 저런 모습을 일본말로 ‘보짱’이라고 했다) 천진한 미소를 환하게 머금고
부르는 곳이 어디든 언제든 금방 달려올 것이다.      -홍성담 / 화가-   (서승 정년퇴임 기념 산문집/2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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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서승, 그이와 함께한 장면 몇 개 / 홍성담
이름: damibox


등록일: 2011-05-20 15:11
조회수: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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