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담의 그림창고


[환경의 위기와 평화의 위기, 그 대안으로써 농경문화]


1. 환경의 위기인가.
한반도의 기후변화와 가장 관련이 많은 오츠크해 기단의 냉각현상은 일시적이 아니라
항속적 변괘라는 것이 이미 주지의 사실이 되었다.
오츠크해 기단의 냉각현상은 한반도 동해안에 상당한 기후변화를 가져온다.
즉, 여름엔 동해안에 저온현상이 나타나고 겨울엔 오히려 고온현상이 나타난다.
우리는 지난 십수년간 지구상에 나타나는 이런 현상을 단지 온난화 현상이라고 단정했으나
기후과학자들은 비로소 ‘기후변화’로 정리했다.

사과재배의 환경이나 감귤재배의 환경이 한참 북쪽으로 이동했다는 것을 두고
우리는 환경의 위기라고 쉽게 단정지울 순 없다.
환경의 위기가 아니라 새로운 환경이 생성되는 것일 뿐이다.
그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여러 생명들이 스스로 살길을 찾아 이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간혹 이상한 현상들을 목격하고 있다.
스페인 해변의 죽지 않는 풀
죽지 않는 해파리
죽지 않는 균
죽지 않는 바이러스 등등에서 보다시피, 태어나면 죽어야 하는 것이 생명의 본질이라고 한다면,
이런 생명의 기본적 본질과 다른 현상들이 우리들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이렇듯 환경의 위기는 항상 우리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회절 시켜버린다.
죽을 때를 찾아 죽어야 하는 생명이 죽음 없는 생명으로 나타나는 것이나,
혹은 이 땅에서 벌어지는 4대강 죽이기가 ‘4대강 살리기’라는 언어로 회절 되는 일은
결국 인간이 자연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조차 거두어 버리는 일이다.
그래서 ‘기후변화’는 환경의 위기가 아니라 지구 스스로 자신을 가다듬고 살아 버티려고 하는 몸부림이다.
그 몸부림을 무시하고 인간만이 홀로 그 삶을 영속적으로 유지하려는 그 자체가 바로 환경의 위기를 불러오고 있다.
즉, 인간의 삶을 둘러싼 뭇 생명들과의 총체적 관계 속에서 ‘환경’을 파악하려는 노력이 더욱 필요한 때다.

오로지 인간을 위해 ‘소’에게 ‘소’를 먹이다가 광우병을 만나게 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고전이 되었다.
오로지 인간을 위해 산을 황폐화하고 강을 병들게 하고 바다를 오염시키다가
결국은 그 모든 재앙을 인간이 받게 된다는 이야기도 이젠 이미 누구나 아는 사실이 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오로지 인간을 위해 환경도 평화도 생명도 모두 인간에게 종속되어야 하는 삶을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계속해서 살아갈 태세다.
지금 우리에게 닥친 위기는 환경의 위기를 넘어서서 이미 인간 생명의 위기가 되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마지막 일은 급하게 죽는냐 아니면 천천히 죽는냐는 선택만 남아있는지도 모른다.

2. 평화는 어디에 있는가.
인간들이 지금까지 삶을 영위하기 위해 구성한 모든 공동체는 파괴되었다.
가족공동체, 마을공동체, 직장공동체, 도시공동체... 모든 공동체의 잿더미 위에
거대한 자본만이 버티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강고한 분단체제 때문에 공동체의 파괴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북한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서울은 말 그대로 아파트 공화국이다.
고층 아파트 사이에 거무스레한 매연이 자욱한 광경은 마치 인류의 명망을 그리는 SF영화를 보는듯 하다.
한강대교에서 바라보는 한강변은 어떤가. 고층 아파트로 이미 높다란 둑을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아파트 공화국’이라는 저서를 낸바 있는 발레리 줄레조(프랑스)는 이 광경을
그야말로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문명중에서 가장 ‘환타지’라고 했다.
이런 환타스틱한 풍경이 어디 서울뿐인가. 한국의 어디를 가나 사람이 사는 곳은 모두 아파트 천지가 되었다.
이 극심하게 파편화된 아파트의 일상적 삶은 도대체 이 나라의 미래를 어디로 끌어갈 것인가.
인간 삶이 갖는 크고 작은 모든 공동체의 철저한 파탄이다.
개인은 끝없이 파편화된다. 파편화된 개인과 개인의 틈새로 공장식 자본주의가 만개한다.
파편화된 이 틈새가 넓을수록 신자유주의의 개입이 더욱 강해진다.

여기에서 어느 누구도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 주목하기는커녕 일말의 관심조차도 없다.
평화란 궁극적으로 ‘타인의 고통에 대한 응답’이다. OECD가입 국가중 한국이 자살율 1위라는 명예(?)를 얻었다.
자살은 자신의 고통에 대한 타인의 응답이 철저하게 닫혀 있을 때 택하는 마지막 수단이다.
이것이 곧 인류의 미래다. 더 정확하게는 한국의 미래는 더욱 절망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 절망적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최소한의 대안이 바로 ‘농경문화’에 잠재되어 있다.
여기서 농경문화를 ‘농사제일주의’로 오역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 농사제일주의는 편협한 근시안적인 사고에 불과하다.
농경문화에 잠재되어 있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 우주와 인간의 관계, 산과 들판의 관계, 하늘과 땅의 관계,
곡식과 잡초의 관계, 밥과 똥과의 관계, 바다와 강의 관계, 일과 놀이의 관계, 남자와 여자의 관계, 사랑과 미움의 관계,
여름과 겨울의 관계, 봄과 가을의 관계, 어른과 어린이의 관계, 낮과 밤의 관계등등 인간 삶을 둘러싼 총체적인 관계들에 관하여
다시 새롭게 해석해 내야 비로소 평화를 우리의 일상 속으로 끌어당길 수 있다.


3. 농업이 환경과 공동체를 살려낼 것인가.
소비자의 요구에 따라 겨울에도 딸기를 생산하기 위해 방부제와 성장촉진제를
사용해야하는 현대 농업의 불합리한 현실이 있다.
어떤 유기농 생활 조합에서는 판교에 거대 집하장을 만들어 국내에서 재배된 모든 유기농산물을 그곳에 모았다가
소비자에게 배달한다.
유기농이란 무농약과 퇴비로 재배된 농산물을 뜻하지 않는다.
생산과 소비가 서로 유기적인 네트워크로 해결될 수 있을 때 본디 ‘유기농’이라는 단어를 붙일 수 있다.
거대 집하장에 모았다가 소비자에게 각각 배달되는 농산물은 운반된 거리계산만 다를 뿐이지 캘리포니아 농산물이
우리들의 식탁위에 오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흔히 말하는 ‘신토불이’란 풍수지리학의 이론을 빌리자면 내가 사는 곳 1백리 안팎에서 나는 농산물을 말한다.
이 주장에서 우리는 토지의 개체성을 발견할 수 있다.
사람에게도 사주팔자가 있듯이 땅에도 사주팔자가 있다. 각 토지마다 서로 다른 성격과 맥이 흐른다.
이 문제는 다른 기회에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기로 한다.

그렇다면, 환경과 공동체를 다시 살려내기 위해서 현대인들이 농업으로 모두 다 돌아가야 할까.
이런 ‘농업제일주의’식 사고로는 우리 현대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절대 풀어나갈 수 없다.
현대가 안고 있는 생태적 생명적 위기는 새로운 평화적 위기를 만들어 냈고
이런 다양한 복합적 위기는 다시 새로운 생산양식을 필요로 하고 있다.

그 대안으로써 우리들에게 강력하게 떠오르고 있는 것이 ‘도시농업’이다.

핸드폰과 인터넷등등으로 무장한 도시지향은 ‘유목지향’이다.
이러한 유목지향에 맞추어 햇빛이 비추고 빗물이 고이는 곳이면 어디든지 ‘도시농업’이 가능하다.
직장  때문에, 투자한 아파트 때문에, 자식들 교육 때문에 언제든지 도시를 떠돌아야 하는 유목적 삶과 농경적 삶이
교차하는 도시농업은 분명히 새로운 문명의 생산양식이다.

거대 공장일수록 사람이 기계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기계가 사람을 움직인다.
사람은 기계의 또 다른 부속품 일 뿐이다.
이제 앞으로 도시의 유목적 삶은 지독한 분업체계에 의해 똑같은 짓을 되풀이하는 거대 공장의 분업적 노동을 견디지 못한다.
향후 미래의 거대 공장은 결국 노동자들이 모두 떠나게 될 상황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개체성(아이덴티티)을 전제한 분권적(극소수)융합, 개체의 자유를 내세우면서 분권적 융합에 의해
‘내부공생’하는 새로운 양식의 공동체만이 앞에서 말한 고층 아파트의 그늘에서 만들어 낼 수 있는 새로운 평화 공동체다.
개체는 끊임없이 자기해방을 전제로 삶을 꾸려나간다.
해방된 개체가 그 해방을 유지 지속하기 위해 스스로 ‘내부공생’을 조직한다.
그리고 이 내부공생 안에서 개체는 ‘먼지 한 톨 안에도 우주가 깃들어 있다’는 진리를 깨달아 간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그것이 하잖은 미물이라도 인격과 비인격을 떠나서 생물과 무생물을 떠나서
나름대로 세상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진리, 쓰레기과 똥도 다시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내는 거름이 되는 진리,
세상의 모든 이치는 이러한 순환의 과정을 통해서 지탱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 이는 곧 생명에 대한 존엄과,
그들 생명과 생명이 서로 씨와 날줄로 엮어 짜내는 ‘평화’를 경험하고 학습하게 된다.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워야 한다는 너무나 간단명료한 사실이 우리들 삶에서 왜 엄청난 진리가 되는지를 깨달아 가는 것,
이러한 경험은 바로 ‘농경문화’에서만 가능하다.

4. 평화는 ‘시장’이다.
도시농업은 대부분 ‘도시텃밭’에서 이루어진다.
주택과 주택사이의 조그만 공터, 혹은 아파트 베란다, 빌딩 옥상등등 대도시의 높다란 빌딩들이 드리운 그늘을 피해
한줌의 햇빛만 비추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능하다.

씨를 뿌려야 할 땅이 넓은가 좁은가의 의미를 이미 초월한 새로운 생산양식이다.
여기에서 생산된 농산물은 즉시 시장을 만들어 유통되어야한다.
유통이라는 단어보다는 ‘소통’이라는 단어가 훨씬 더 어울린다.
물물교환의 형태든, 우리식 새로운 지역 또는 공동체 화폐로 교환이 되든, 좌우지간 교환되지 않는 생산물은
더 이상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낼 수 없다.

시장은 그만큼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아득한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져 가는 우리들의 현실을 조금이라도 더 살만한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
모든 생산양식과 소비양식은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생산과 소비가 만나는 ‘시장’이 바로 문화를 만들어내는 마당이다.
또한 시장은 생산과 소비의 방식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마당이다.

공장이나 다름없는 통제가격으로 무장한 마트형 시장은 대자본이 만든 시스템이다.
도시텃밭에서 만들어내는 생산물은 그런 마트와 대척점에 서있는 시장을 형성해야 한다.
우리의 전통 시장의 부활이다. 별장이나 5일장, 7일장등등 그러한 전통 시장의 형식에 기본을 둔 새로운 시장의 부활이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서로 얼굴을 맞대야 세상의 모든 오염과 부패가 사라진다.

생산물 생김새에 따라, 생산한 사람의 모습에 따라, 사가는 사람의 얼굴과 사정에 따라 다양한 가격이 흥정되는
들숨과 날숨을 쉬는 시장은 교환뿐만 아니라 재분배의 역할까지 담당한다.
시장의 자율에 맡기는 ‘섬세한 재분배’가 이루어진다.
가격을 흥정하는 시장은 따뜻하다.
흥정하면서 인사와 감성이 교차한다.
해월 최시형 선생은 이미 이러한 장을 ‘비단 깔린 장바닥’이라고 표현했다.

세계 자본주의의 성채인 월가는 냉엄하고 냉정한 자본주의의 얼굴로 숫자 사기놀음에 미쳐서 이미 3년전 박살났다.
월가에서 불어닥친 금융위기 이후 일본의 경제학자 <오사노 가오루>는 ‘따뜻한 자본주의’를 역설했다.
그러나 ‘섬세한 재분배’로 수놓은 ‘비단 깔린 장바닥’과 같은 시장이 없이는 공염불에 불과하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서로 얼굴을 대면하고 기쁨과 슬픔이 넘나들면서 만들어내는 ‘서기’어린 시장이 없이는
현대 자본주의는 절대 따뜻하고 자상한 애정을 담아낼 수 없다.
따뜻한 자본주의를 부르짖던 <오사노 가오루>는 결국 일본 자민당 극우파의 <신타로>의 품으로 기어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가격 다양성이 기본인 우리의 ‘장’에는 삶의 슬픔과 기쁨이 서로 넘나들면서 상서로운 서기(瑞氣)를 만들어 낸다.
이 ‘서기’가 곧 ‘평화’다. 시
장에서 서기를 만들어 낼 줄 아는 사람들만이 평화를 창조하고 유지할 수 있다.
이런 가격 다양성의 시장은 어떠한 문제점에 마주친다 하더라도 ‘구분’은 하되 ‘갈등’으로 비약하지 않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즉, 갈등 앞에서 평화롭게 넘어가려는 자세 혹은 남에게 평화를 만들어주려고 애쓰는 자세
또는 매사에 아름답게 살려는 자세를 가르쳐 준다.
그러다 보면 어느날 문득 우리들이 살아가는 목표가 무엇인지 혹은 우리들 삶의 진실이 무엇인지 스스로 깨닫게 된다.

그래서 평화의 최종적 목표는 슬픔과 기쁨이 서로 어우러져 빛나는 상서로운 서기가 넘치는 시장의 형성이다.
이렇게 살맛나는 민중경제를 되살려 내는 것도 역시 도시농업이 임무이며 의무이다.
상서로운 서기로 이루어진 시장은 평화의 ‘소통구조’로써 상처받은 영혼들을 치유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새 시대의 문화는 ‘영혼을 치유할 수 있는 힘’이 되어야 한다.

열고 닫고, 여자와 남자, 아이와 어른, 일과 놀이, 도시와 농촌이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방법이 농경문화의 잠재적 힘이다.
빌딩의 메마른 옥상에서, 주택 앞 골목 모퉁이 손바닥만한 그늘진 땅에서,
아파트 베란다 타일바닥에서 피어 올리는 솜털 파란 새싹으로부터 그리운 얼굴들을 생각하며 미움과 증오를 해소하고
그 파란 싹에 내려앉은 달빛과 별빛 한쪼각 그 싹을 어루만지는 바람 한줄기에서 인류의 미래를 생각하는
‘자연과의 소통’은 곧 인간 생명과의 소통이다.

이 소통을 통해서 평화의 텃밭을 만드는 소박한 사람들이 병든 지구를 살리는 거룩한 일을 맡게 될 것이다.
(安山 도시농부학교 / 2011. 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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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환경의 위기와 평화의 위기, 그 대안으로써 농경문화 / 홍성담
이름: damibox


등록일: 2011-05-26 09:56
조회수: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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