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담의 그림창고


[저 침묵의 끝은 어디인가]
                              

침묵이다.
하늘도 땅도 그리고 사람들도 모두 침묵이다.

고요하다.
길도 자동차도 집도 모두 쓰나미에 떠내려가 엎어지고 뒤집어져
한순간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쓰레기 속에서 시신들이 썩어가고 있어도
그냥 조용할 뿐이다.

후쿠시마 해변에서 핵발전소가 폭발 하고 방사능이 날아다녀도
푸른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빛에 반사되는 모든 일상의 모습들이
침묵과 침묵의 강력한 사슬로 꽁꽁 묶여있다.

후쿠시마 핵발전소는 쓰나미에 폭발을 한 후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유령’이다.
저 유령이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아니, 아무도, 누구도, 절대 그 누구도 저 ‘유령’의 모습과 정체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

후쿠시마는 침묵이다.

나의 이웃 일본은 눈물도 슬픔도 분노도 저항도 아무런 일도 없이 고요하다.
한반도 아래쪽 바다에 시신처럼 길게 누워있는 일본 열도는 오로지 침묵할 뿐이다.

마찬가지다.
대륙에 위태롭게 매달렸다가 금방 똑 떨어져 바다 한가운데로 떠내려갈 것 같은
한반도도 역시 침묵이다.
‘기준치 이하’ 혹은 ‘허용치 이하’라는 말에 모두 침묵이다.

핵은 보이지 않는 유령이다.
핵을 보유한 나라는 그것에 관한한 모든 것이 국가적인 비밀이다.
핵이 있다는 것은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힘의 유령을 갖고 있는 것으로
자타가 생각한다.
가끔 단단하게 밀봉된 관 속에 누워있던 유령은 인간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 속으로 외출한다.
그러나 유령의 존재에 관해서는 모두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일찍이 스리마일도 침묵했고
비키니도 침묵했고
체르노빌도 침묵했다.

히로시마에서 매년 8월7일 ‘평화의 날’은 반백년 동안 계속되어 왔다.
그러나 히로시마는 정작 그 유령에 관해서 침묵하고 있다.

군인이 아닌 양민을 원폭으로 대량 학살한 미국의 전쟁범죄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다.
물론 일본의 전쟁범죄에 대해서도 침묵하고 있다.
그 유령과 관련한 모든 과정과 결론은 오로지 침묵일 뿐이다.

유령은 ‘거짓말’로 만들어 준 옷을 입는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유령’의 패션도 핵과학자들에 의해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는다.
체르노빌 핵발전소 폭발사건의 결과는 관련 정부와 국제기구 UN 까지 나서서 ‘거짓말’로 지은 옷을 입혀 주었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사건도 마찬가지다.
핵 관련 학자들과 정부와 도쿄전력은 처음부터 지금 이 시각까지 거짓말로 일관하고 있다.
물론 앞으로도 계속 거짓말로 버티어 나갈 것이다.
어쩌면 그 거짓말은 영원히 지속될 수도 있다.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유령의 기본적 조건이다.
냄새도 없고, 색깔도 없고, 모양도 없고, 손으로 만져볼 수도 없다.
그것은 우리들 일반인뿐만 아니라, 정부도 핵과학자도 자본가도 역시 그것의 존재를 만져 볼 수도 없고
냄새를 맡을 수도 없고 눈으로 볼 수도 없다.
그러나 그들은 유령을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다고 거짓말을 한다.
그래서 그 유령을 자기들 마음먹은 대로 컨트롤 할 수 있다며 자랑 한다.
그렇게 자랑하는 사람만이 권력과 부가 유지된다.

체르노빌에서 후쿠시마까지 저들이 자랑했던 대로 그 유령이 자기들의 손에 의해 콘트롤이 되었던가?

그러나 ‘노예근성’으로 길들여진 사람은 저들의 자랑과 능력을 확고하게 믿는다.
자기 눈에 보이지 않는 유령의 모습을 저들은 볼 수 있고 컨트롤 할 수 있다고 맹신한다.
‘노예’들은 유령의 외출로 인하여 일정 지역이 인간이 살아갈 수 없는 동토의 땅으로 변하는 것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면서도 전지전능한 능력이 있는 저들이 반드시 이 문제를 해결해 줄 것으로 믿는다.

체르노빌 사고가 거대한 은폐공작으로 마무리되었듯이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사고도 이미 쓰나미 이전부터 거짓말더미로 포장되어 있었다.
‘여태 안전했고, 지금도 여전히 안전하고, 향후 역시 안전하다’라는
이 거대한 은폐행위가 거짓말로 드러나도 다시 새로울 것이 없는 ‘거짓말’로 그 순간을 모면한다.
사람이란 거짓말을 자꾸 반복하다보면 그 ‘거짓말’이 ‘진실’로 변하는 착각을 겪는다.
거짓말을 듣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거짓말을 반복해서 듣다보면 그 ‘거짓말’이 이번엔 결코 ‘진실’일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와 함께,
그것이 ‘거짓말’임을 혹시 인지했더라도 저 거짓을 덮고 있는 암막을 찢어버리고 진실을 보여줄 사람은
역시 ‘거짓말’을 만든 사람들만이 해줄 수 있을 것이라며 절대 그 기대를 버리지 않는다.  
이런 지랄 같은 ‘노예근성’이 ‘核 幽靈’의 신화를 더욱 공고하게 만들어간다.


나는 2011년 일본 동북지역 대지진이 지나간 3월, 그로부터 보름 후에  후쿠시마를 향해 달려갔다.
케센누마에서 마쯔시마를 거쳐 센다이, 그리고 이와누마를 지나서 후쿠시마까지 그 유령의 모습을 찾으러 떠나는 여행이었다.

그러나 그곳엔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건너편 언덕 너머로 후쿠시마 핵발전소의 거대한 몸짓이 흐릿하게 보이고
하얀 연기가 스물스물 피어나는 것 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온통 불길한 예감뿐이었다.
간혹 라디오나 TV에 이런저런 사람들이 관련 전문가처럼 얼굴을 내밀고 해대는 소리는(나는 일본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한다)
하나같이 거짓말이라는 예감이,
그리고 이미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사고는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해 볼 수 없다는 예감이,
그리고 이 폭발사고는 이미 쓰나미 이전부터 준비되어 있었다는 예감이,
아니, 인류 최초이자 마지막이 되어야 할 1945년 8월 7일 ‘원자폭탄’의
쓰라린 상처를 앓고 있는 일본국민 스스로 이 유령을 키워 왔다는 예감이,
다시 원자력발전소 안전 신화에 아직도 기대를 모으며 정부권력의 지도지침을 기다리는
노예근성에 찌든 국민이 바로 여기에 있다는 예감이,
그리고 한국 국민도 절대 일본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이런 경우에 중국 인민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어쩔 수 없이 동아시아 인민들은 전근대적 봉건주의 잔재에서 절대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이......
수없이 불길한 예감이 나의 뒷머리채를 세차게 잡아 뜯었다.

내가 지나온 그 길들의 풍경은 묵시록의 세계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 묵시록의 상황을 숙명처럼 받아들였다.
사람과 사람사이를 배회하는 유령의 모습을 굳이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지금 당장 눈에 보이지 않으므로 그것은 ‘없는 것’ 또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사람들은 생각했다.
그것을 보지 않으려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정부, 또는 도쿄전력이, 혹은 과학자들이 모든 고통을 해결해 주리라고 믿었다.
태평양 전쟁시절의 大本營放送을 확신하듯이 사람들은 다시 거짓말투성이 방송을 믿었다.
아니, 믿으려고 애를 썼다.

내 앞에 펼쳐지는 풍경은 모두 현실을 떠나 있었다.
지붕위에 커다란 배가 놓여있고 창문에서 고목나무의 커다란 뿌리가 돋아나와 하늘을 향해 구불구불한 다리를 쩍 벌리고 있었다.
냉장고가 담요를 외투처럼 입고 하얀 얼굴로 나를 보며 무심한 표정을 지었다. 모두 초현실이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광경이다. 살바도르 달리? 막스 에른스트?  르네 마그리트....
그렇다. 초현실의 가장 큰 특징은 ‘침묵’이다.

여기를 가든 저기를 가든 침묵이었다.
어디를 가도 줄을 서서 자기 순서를 조용히 기다렸다.
어디에서도 큰소리는 없고 서로 작은 소리로 은밀하게 속삭이듯 말했다.
누군가가 감시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몰래 까만 눈을 굴려 이야기하며 입은 침묵했다.
이 묵시록의 세계에서 침묵으로 ‘인간의 질서’를 지키고 있었다.
아니, ‘질서’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핵’이 유령이 아니라 바로 그 ‘침묵’이 유령처럼 보였다.
造作되고 加工된 이 ‘침묵’이 내가 찾아 나섰던 ‘유령’이었을까.

나는 후쿠시마의 가엾은 땅에 서서 이제야 그 ‘침묵’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야스쿠니 신사의 저 끝 모를 어둠 속의 질곡이 강요하는 ‘침묵’의 시스템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니쩨와 키엘케고르를 읽었던 그들이 ‘덴노 헤이카 반자이’를 외치며 카미카제로 출격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베토벤과 모차르트를 들었던 그들이 적군의 포로의 목을 누가 더 많이 벨 수 있는가 시합 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데미안과 베르테르와 로미오를 알았던 그들이 왜 지금 ‘일본군 위안부’할머니들의 외침에 침묵하는지 나는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일본국민들이 일본과 아시아를 송두리째 고통과 불행에 빠뜨린 전쟁범죄, 즉 태평양 전쟁을 선포했던
당시 군통수권자인 천황의 목을 치지 못했는지 나는 후쿠시마에 서서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양민을 원폭으로 대량학살 했던 미국을 향해 히로시마 ‘평화의 날’이 미국의 그 중대한 전쟁범죄를 왜 묻지 못하고 침묵하는지
나는 저 후쿠시마의 ‘침묵’을 보면서 이해할 수 있었다.
왜 저들이 유구왕국 오끼나와에서 집단 학살을 하고 집단 자결을 했는지,
그리고 가고시마 치란의 카미카제 특공대 박물관은 왜 ‘평화 박물관’이라는 이름이 붙여 있는지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저 ‘침묵’속에는 수천년의 전통과 사상마저도 造作하고 加工하는 강위력한 힘이 은밀하게 존재했다.

센다이에서 후쿠시마까지 모든 길이 뒤집어지고 모든 집이 파괴되어 단지 문명의 쓰레기로,
그 유령의 힘으로 만든 인간의 거대한 욕망의 쓰레기가 언덕과 평야를 이루었다.
따사로운 봄볕에 마치 내 살이 썩는 냄새도 함께 풍겼다.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 전쟁의 끝을 마무리했던 핵폭탄이 옷을 새롭게 갈아입고 일본의 경제를 부흥시키는 원동력으로 나서도
사람들은 ‘침묵’했다.
그 ‘침묵’은 인간이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자존심마저도 휴지처럼 만들어버렸다.
8월7일 히로시마 ‘평화의 날’은 정작 ‘核’에 대한 분노가 실종되었다.
인류 앞에 최초로 핵의 판도라 상자를 열었던 ‘미국’에 대한 분노도 없다.
단지..... 핵에 의한 흉터만 남아서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 ‘평화의 날’이 매년 거듭될수록
그 흉터마저도 천정에 오랫동안 매달아 놓은 종이학처럼 색이 바랬다.
경제부흥을 위해 원자력이라는 '유령‘을 ’선택‘한 것에 모두 침묵했던 것이다.
목숨까지 바쳐 결코 관능의 끝을 봐야하는 일본의 문화적 미학의 요소도 저 ‘침묵’과 ‘선택’에 대해서 일조했다.
생산력과 多産의 상징이던 사쿠라꽃이 천황을 위해 몸을 던진 병사들의 영혼으로 바꿔치기한
일본의 독특한 ‘허무와 죽음의 미학’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다.
加工된 관능과 造作된 허무의 끝자락은 결국 죽음이다.

외로운 땅 후쿠시마, 묵시록의 풍경이 바로 그들 발밑에서 끝없이 펼쳐져도
아무도 울부짖지 않는다.
사람들은 오로지 침묵하고 있다.
아우성도 없고 신음소리도 없고 절규하는 소리도 없고 분노도 없다.
그곳은 슬픔도 눈물도 없다.
그곳은 고요하다.
체계적, 단계적, 합리적, 이성적이라는 말 앞에서 다만 침묵할 수밖에 없다.
이 침묵의 시간동안에 저들은 체계적으로 단계적으로 이성적으로 유령의 존재에 대해서
은폐를 서두른다.
유령의 분노에 바닷물을 뿌려 달래보기도 하고, 유령의 입김이 새나가지 않도록 위장막을 쳐보기도 했다.
저런 멍청한 짓은 단지 정부가 애를 써서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 뿐,
사실상 저 유령의 사악한 입김은 우리 세대 내내 지울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침묵’한다.
사실은.... 더 답답한 사실은  너도 알고 나도 알고 하늘도 알고 땅도 알고 있는 이 당연한 진실 앞에서 그냥 모른 채 서로 침묵하고 있다.

고통스럽고 슬퍼서 울어야 할 때는 실컷 울어야 한다.
분노해야 할 때 분노를 참으면 생명의 역동성을 상실한다.
분노의 반대는 平靜, 合理, 理性이 아니고 無關心이다.
무관심이 국가주의를 만든다.

핵의 모태는 국가주의다.
국가주의는 저 ‘침묵’을 자양분으로 악마의 힘을 키운다.

동아시아의 현실은 중국의 ‘富興’과 한국의 ‘先進化’와 북조선의 ‘遺訓’과 일본의 ‘復興’이 서로 충돌하고 있다.
여기에 미국의 극동아시아 군사전략이 다시 새로운 판을 짜고 있다.

지난 역사가 증명하듯이 국가란 스스로 극복할 수 없는 재해가 겹치면 반드시 군사적 힘을 외부로 돌린다.
한 개인도 똑같은 실수를 두 번 거듭하지 않는다면 성공한 인생을 산다고 했다. 그만큼 사람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는 뜻이다.
개인을 떠나서 집단과 사회도 그렇다. 국가도 역시 그렇다. 한 번의 실수는 반드시 반복되어 나타난다.

우리 동아시아는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 전쟁으로 큰 고통을 당했다. 또다시 그것이 반복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후쿠시마의 저 ‘침묵’이 나에게 가르쳐 준 진리다.
국가의 이름으로 이들을 호명하면 저 ‘침묵’은 거절할 줄 모른다. 아니, 마음과 생각은 거절할 지라도
몸은 이미 국가가 부르는 곳으로 달려가고 있다. 침묵으로 일관했던 선량하기만 한 이들은
국가의 이름으로 그것이 전쟁이든 학살이든 폭력이든 그 어떤 야만이라도 주저하지 않고 저지를 것이다.

쓰나미와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사고가 일어 난지 약 1년 만에 나는 다시 일본을 방문했다.
2012년 1월 27일 도쿄에 도착하여 값싼 비즈니스호텔에서 잠을 자고 그 다음날 호텔식당에서 아침을 먹는데 갑자기 건물이 흔들렸다.
10층도 훨씬 넘는 호텔이었다. 테이블위에 놓인 그릇이 떨고 벽에 붙어있던 액자도 흔들거렸다.
어떤 손님들은 밥 먹다 말고 테이블 밑으로 몸을 숨기거나 복도로 뛰어나간 사람도 있었다.
내 앞에 놓여 있는 유리컵에 담긴 물이 동심원을 그리며 바르르 떨었다. 호텔건물이 흔들거리자 갑자기 멀미가 일어났다.
TV에서 긴급뉴스를 내보낸다. 후지산 아래 호수를 진앙지로 진도 5.5의 지진이 방금 일어났다고 멘트가 나왔다.

그날 오전 11시에 무사시세키 전철역에서 일본의 친구들을 만났다.
도쿄에서 3월 말쯤에 여는 나의 전시회를 기획하고 만드는 친구들이다.
그들 모두 전철역 주변에서 상인들과 행인들을 붙들고 핵발전소 존폐를 결정하는 도민투표를 위한 서명을 받고 있었다.
나의 친구와 전철역 근처 상점 주인과의 대화내용이다.

유카: 핵발전소는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상인: 맞아! 정말 위험하지.
유카: 핵발전소의 존폐를 묻는 도민투표 청원서에 서명해 주세요.
상인: 그렇지만........핵발전소는 필요하지 않을까.

이미 핵발전 비용과 재생가능 발전 비용을 비교하여 2010년부터 재생가능 발전 비용이
핵발전 비용보다 낮아졌다는 통계와 보고서가 수없이 쏟아졌지만, 사람들은 ‘유령’을 필요악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아무튼 ‘유령’을 자기들 편이라고 믿고 있었다.
‘유령’에 대한 믿음은 즉시 ‘침묵’으로 이어졌다.

한국의 상황이라고 다를 바 없다.
경주(慶州)가 어떤 땅인가?
한반도 고대문화의 유적이 산처럼 쌓여있는 곳이다.
이를테면 보물과 역사와 유적의 땅이다.
그 지역은 주민투표를 통해서 ‘핵폐기물 처리장’이 들어오기로 결정되었고
지금도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2005년 주민투표에서 90%에 가까운 찬성표를 얻은 경주는 결국 ‘핵쓰레기장’의 운명이 되어버렸다.
정부 관련자와 그들 밑에서 기생하는 부역자들이 ‘핵쓰레기장’ 경주 유치를
경축하는 프라카드를 경주 시내 여기저기에 내걸었다.
경주는 이 핵쓰레기들을 향후 1만년 동안 아무런 탈 없이 부둥켜안고 있어야 한다.
인간의 세상에서 1만년 동안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며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이 있을까. 그것은 그야말로 神의 영역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핵폐기물은 고준위든 저준위든 인체에 해로운 방사능을 뿜어낸다.
사람들은 ‘기준치 이하’라는 말에 ‘침묵’하고 안도의 숨을 내쉰다.
아니, 심지어 어떤 얼치기 전문가는 ‘적당한 방사능은 오히려 인체에 좋다’고 말한다.
너무 뻔뻔스런 세치 혓바닥이다.
‘방사능은 山蔘補藥이나 Vitamin이다’라고 말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스럽다.

현생인류의 미래는 절망스럽다.
저 침묵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아니 이제금 저 침묵의 장벽을 혹시 깨부순다 한들
이미 현생인류가 우주자연에 끼친 죄는 너무 크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죽음’뿐이다.
단지 ‘급작스럽게 죽을 것인가’ 혹은 ‘천천히 죽어갈 것인가’ 이 두 가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의무가 강요된다. 이제 누구도 이 선택을 비껴갈 수 없다.

센다이에서 후쿠시마를 거쳐 도쿄까지, 그리고 현해탄을 건너 서울과 경주에 이르기까지
하염없이 서로 엮어져서 꼬여가는 저 침묵의 단단한 사슬이
일본열도에 잦은 지진과 함께 존재하는 저 어두운 침묵이
국민과 국민 사이를 가득 메운 끈적끈적한 침묵이
국가와 국민 사이에 교교하게 흐르는 저 침묵의 카르텔이 언제쯤 깨질까.

국가주의의 원대한 꿈인 ‘핵’이라는 유령은 ‘침묵’을 먹고 자란다.

인민들이 스스로 저 유령의 멱살을 붙들고 ‘광장’에 끌고 나와야 한다.
그리고 유령이 뒤집어쓰고 있는 ‘침묵’의 가면을 벗겨내어
유령의 민낯을 밝은 햇살아래 까놓아야 한다.
대부분 저 유령들은 밝은 햇살과 인민들의 ‘분노’ 앞에 서면 눈 녹듯이 사라져버리는
지극히 단순하고 지극히 연약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저 ‘침묵’의 깊은 어둠과 절망, 시커먼 고통을 깨부수어야 ‘핵’이 사라지고
‘거짓과 기만’이 사라지고 국가주의가 사라지고 유형무형의 국가폭력이 사라지고
‘전쟁’이 사라진다.

2012년 3월 합천 비핵평화대회 발제문 / 홍성담 (화가) / 20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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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후쿠시마, 그 침묵의 끝은 어디인가 / 홍성담
이름: damibox


등록일: 2012-11-16 11:52
조회수: 8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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