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담의 그림창고


[후쿠시마에서 ‘오월’을 보다]

2012년 4월 4일, 도쿄 무사시세키의 브레히트 소극장의 광주오월판화 전시회-‘사람이 사람을 부른다’가 모두 끝났다.
전시기간 일주일 내내 나의 가슴을 오려내는 고통스러운 시간이 모두 지나갔다.

아마 올해 5월에도 한국의 여기저기에서 나의 ‘광주오월’판화가 내 의도와 상관없이 전시될 것이다.
지난 30 여년 동안에 한국과 지구촌 곳곳에서 ‘광주오월’판화는 아마 1백여차례 이상 전시되었을 것이다.

그때마다 나는 1980년 5월 광주학살의 기억을 떠올리는 고통을 감내했다.
이런 비극적인 국가폭력을 기억해야 하는 것은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다. 가급이면 피하고 싶은 기억들이다.
가슴 아픈 기억을 또다시 되풀이해야 하는 것은 어쩌면 나에겐 ‘투쟁’이나 다를 바 없다.
그러므로 나는 국가폭력과 싸우는 일을 ‘기억투쟁’이라고 부른다.
‘고통의 원인’을 확실하게 제거하지 않으면 역사는 다시 반복되기 때문에 투쟁하듯이 기억을 해야 했다.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매번 감수하면서도 당시 쓰러져갔던 숱한 동지들과 시민들의 원통한 학살의 현장을 ‘기억’해야 했다.

나의 이름 앞에 붙는 ‘오월화가’라는 별칭은 ‘명예’라기 보다는 차라리 ‘멍에’에 가깝다.
그러나 이제 나는 이 ‘멍에’를 일종의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있다.
국가폭력을 기억하기 위한 고통스러운 나의 투쟁은 내 목숨이 붙어있는 한 계속될 것이다.
이러한 나의 ‘기억투쟁’이 우리 땅에서 국가폭력을 영원히 발붙이지 못하도록 할 수만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민중미술가인 나에게 얼마나 영광스러운 임무이겠는가.
그러나 국가폭력은 여러 가지 다양한 형태의 옷을 바꿔 입고 우리들 주변에서 날마다 그 엄청난 힘을 행사하고 있다.
우리에게 끊임없이 가해지는 국가폭력은 이제 경제라든가 혹은 문화, 또는 온갖 매스미디어들 속에 은밀하게 몸을 숨기고
우리들의 사고와 행동을 컨트롤하고 있다.

4월4일, 전시를 마무리한 날 밤에 나는 ‘기억투쟁’의 고통으로부터 잠시나마 해방감을 맞보았다.
그리고 다음날 4월5일 햇살 밝은 정오에 내 친구 <유카>와 함께 찾아간 곳이
신모지아이의 ‘목단꽃으로 유명한’ 어느 사찰 뒤편의 공동묘지 언덕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유골이 나름대로 특별한 사연을 간직한 채 묻혀있는 묘지는 항상 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공동묘지가 주는 독특한 풍경에는 ‘죽은 자’의 세상과 ‘산 자’의 세상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 죽어있거나 혹은, 모두 살아있다.
다종다양한 모양으로 나누어진 세상의 모든 벽은 사라지고 ‘시간’만이 존재한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것이 나에게 결코 두려운 세계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그 ‘시간’의 존재도 어느덧 사라져 버린다.

그날 오후 2시에 <고우케>와 <유카>에게 전시기간 동안 머물던 맨션의 열쇠를 돌려주고 나는 즉시 후쿠시마로 발길을 재촉했다.

작년 2011년 3.11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난 직후 나는 몇 명의 지인과 함께 후쿠시마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 당시 나는 자연의 엄청난 재앙 쓰나미 폭격을 받은 현장을 바라보면서 몹시 가슴 아팠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러나 허접한 나의 눈엔 시작도 끝도 없는 재해의 현장만 보였고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카메라의 셔터 찬스만 여기저기 수없이 존재할 뿐, 구체적인 인간의 삶이 나의 눈에선 실종이 되었다.
내 앞에 펼쳐진 아수라의 풍경이 너무나 초현실적이어서 그렇게 느꼈던 것일까. 그래서 일 년 뒤에 다시 올 것을 내 자신에게 약속했고,
오늘 나는 다시 후쿠시마에 발을 딛게 되었다.
이번 내 후쿠시마 여행을 그곳 지인들 몇 사람이 도와주기로 했다.
그러나 3.11 쓰나미에 행방불명이 되어버린 수많은 사람들처럼 나도 여행기간 동안 잠시 행방불명이 되고 싶었다.
후쿠시마 땅에 나 홀로 스며들 귀한 시간을 갖기 위해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는,
완벽하게 나를 위해 극히 ‘이기적인’ 여행을 하기로 결정했다.

동경 우에노 역에서 코리야마행 신칸센 표를 구입하는 것에서부터 여행의 어려움이 시작되었다.
나는 숫자나 지명, 그리고 사람 이름을 외우는 것에는 어렸을 때부터 아주 바보였다.

나 / ‘코리시마’ 표 하나 주세요!
승무원 / 코리시마?
나 / (당당하게) 예! 코리시마!

승무원이 한참 생각하더니 답답하다는 투로 뭐라고 설명하는데, 나는 일본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당황하는 승무원에게 그래서 전철 지도(地圖)를 잠깐 빌려달라고 했다.
나는 승무원이 건네준 지도에 손가락으로 <群山>을 의기양양하게 짚으면서 ‘코리시마!’라고 큰소리로 외쳤다.
내가 그나마 <群山>의 지명을 한자로 기억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의 전라북도 서해안에 ‘코리야마’와 한자이름이 똑같은 항구도시<群山>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이 도시는 일제강점기 때 전라북도 김제평야 만경평야의 쌀을 일본으로 공출하기 위해서 일본 총독부가 만든 항구 도시다.

승무원 / 아! 코리야마! (강조하듯이 ‘코’자에 힘을 주어서) 코~리야마!

나는 그때야 실수한 것을 알고 머리를 긁적이며 ‘오우! 예쓰! 코리야마!’를 외치며
승무원에게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코리야마行 출발시간이 약 30분쯤 남았다.  역 구내의 <다이소>매장에 들려서 은박지 깔게 1장과 이불을 담는 압축 비닐부대 2개,
그리고 약간의 초코렛과 컵라면과 맥주2캔, 양초 한갑과 포장테이프 1개와 비닐우비 1개, 속옷에 붙여서 사용하는 熱파스 1팩을  샀다.
압축 비닐부대 두 개를 잇대어 포장테이프로 고정하고 4귀에 작은 막대를 받치면 훌륭한 1인용 텐트가 된다.
등산용 고급 텐트는 누워서 밤하늘의 별과 달을 볼 수 없지만
이 비닐부대로 만든 임시 텐트는 밤하늘의 모든 동정을 바라보면서 잠을 이룰 수 있다.
그리고 은박지 깔게를 바닥에 깔고 윗옷에 우비를 덧입으면 등산용 침낭만큼은 아니지만
바깥에서 그런대로 찬 밤공기를 막아 하룻밤 정도는 충분하게 견딜 수 있다.
그리고 맥주캔은 맥주를 모두 마신 뒤에 물을 넣고 양초 두어 개를 켜서 데우면 뜨거운 커피를 마시거나 컵라면을 먹을 수 있는
1회용 포트로 사용할 수 있다.
후쿠시마 땅에 내 가여운 존재가 스며들어갈 것이라면 언제든지 야전(野戰)이 필요할 것 같아서 미리 준비를 해 두었다.
이제 천군만마를 얻은 듯이 내 마음이 든든해졌다.

<코리야마>에서 내려 전철을 바꿔 타고 <이와끼>로 향했지만, 이제부터 나의 기억은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어제와 같아서,
내 희미한 기억으로 날자와 시간을 언급하기엔 절대 무리이다.

후쿠시마 제 1 핵발전소로 향하기 위해 이와끼에서 다시 전철을 바꿔 탔으나 세 번째 역인 히로노에서 멈추었다.
여기부터 방사능 경계지역이라며 전철은 더 이상 운행되지 않았다.
택시기사를 붙잡고 손짓과 발짓으로 사정에 사정을 거듭하여 겨우 핵발전소가 멀리 보이는 지점까지 가서 눈으로만 휙 둘러본 다음에
그 택시를 타고 되돌아와 결국 히로노 역에서 내리고 말았다.

히로노 역에서 가까운 바닷가에 반파된 방파제가 보였다.
그 뒤로 태평양의 푸른 바다가 거대한 감옥의 벽처럼 버티어 서 있다. 나는 무거운 배낭을 맨 채로 느린 걸음으로 방파제까지 걸었다.
방파제 안쪽의 집들이 쓰나미에 모두 파괴되고 아랫도리 기초만 남았다.
쓰나미에 휩쓸린 가재도구나 건물 폐기물은 모두 말끔하게 청소 정리되었다.
집터마다 누군가가 꼽아놓은 붉고 흰 프라스틱 가화(假花) 다발이 외롭게 지키고 있었다.
나는 그중 양지바른 곳의 어느 빈 집터를 밟으며 생각했다. 여기 파랑색 작은 타일이 붙어 있는 바닥은 현관이고....
그리고 저쪽은 안방, 또 저기 타일바닥은 욕실, 수도관이 위쪽으로 솟은 이쪽은 주방....
좁은 마당 한켠에 촘촘히 박힌 자연석은 작은 정원이 있던 자리일 것이다.
저쪽 구석에 자그마한 석등에서 떨어져 나온 팔각 갓 지붕만 남겨져 나뒹굴고 있었다.
나는 이 빈터의 바깥주인이 되어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는 시늉을 했다. 주방에서 종종걸음으로 아내가 다가와 나를 반긴다.
안방에 있던 딸과 아들이 달려와 내 팔에 매달렸다. 아들 녀석은 벌써 나의 윗저고리 주머니에 손을 쑥 넣더니 초코렛을 빼내어
안방으로 달려갔다. 녀석의 뒤를 딸이 따라가며 소리를 지른다. 아내가 줄곧 미소를 띠며 시끄럽게 구는 아이들을 제지하려는 듯이
손을 가볍게 내저었다. 내가 아내의 손을 말리며 조용히 아내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아내가 부끄러운 듯이 내 품에서 빠져나가며 저녁식사 시간을 가리켰다.

갑자기 배고픈 생각에 문득 정신을 차렸다.
바다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바로 이맘때면 바닷가엔 바람이 연일 세차게 불 때다.
한국에서는 이것을 ‘영등바람’이라고 한다. 바닷가의 ‘봄맞이 바람’이다.
이 바람이 거세게 불어 겨우내내 말라버린 나뭇가지들을 흔들어놓아야 나무줄기의 체관부 수관부가 열리면서
가지 끝에 새로운 싹과 꽃망울을 터트린다.

늦은 오후 햇빛이 길게 사선을 그으며 내 그림자를 더욱 길게 만들었다.
쓰나미가 앗아간 이 빈 집터에 나의 긴 그림자가 목판화의 여느 선처럼 삐죽하게 솟아나와 외롭기 그지없다.
절반 이상이나 깎여나간 담장 앞에서 늦은 오후의 마지막 햇살을 온몸에 받으며 쪼그리고 앉아 담배 한 대를 피워 물었다.
까마귀 한마리가 내 머리위로 낮게 지나가면서 크게 소리를 내지른다. 낯 설은 이방인에 대한 경계의 몸짓인 것 같았다.

그때 빈 집터 서너 칸 너머에서 무슨 소리가 거센 바닷바람에 실려 왔다.
마른 나뭇가지가 거센 바람에 우는 소리이거나 혹은 아까 내 머리 위를 날아가던 까마귀 울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다시 귀를 기울여서 들어보니 아주 규칙적으로 그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그 소리엔 ‘살아 있는 것’의 온기와 습기가 서려있는 것으로 봐서 분명히 바람소리는 아닌듯했다.
사람의 소리였다. 이미 어둠이 밀려오는 저 구석에서 사람 하나가 빈 집터에 앉아 무슨 소리를 규칙적으로 내고 있었다.
나는 바닷바람소리 중에서 저 사람의 소리를 가려내기 위해 손을 동그랗게 오그려 귓바퀴에 댔다.
거리가 멀기도 하고 이미 사위가 어두워 그의 표정을 살필 수가 없지만 저 소리에 묻은 체온과 습기의 량을 얼추 생각하면
분명히 자기 자신을 질책하며 한탄하는 소리 같았다.
그가 간간히 규칙적으로 내뱉는 소리는 일본말이라서 당연히 내가 알아들을 수 없지만
그러나 그런저런 여러 가지 상황들을 짐작하면 한국말로 분명히 ‘제기 랄!’이라는 표현일 것 같았다.

그는 집터에 책상다리로 앉아서 바다 쪽으로 고개를 들어 ‘제 기랄!’하고 외친 다음에 고개를 한참동안 숙이고 있다가,
다시 고개를 이리저리 천천히 돌려 무엇인가를 찾는듯하다가 냉큼 머리를 들어서 바다 쪽을 향해 ‘제 기랄!’을 외쳤다.  
이 ‘제 기랄’ 혹은 ‘제길헐’이라는 한글단어는 ‘어떤 일이 그릇되었을 경우 그 어떤 원인보다도 자기 자신을 자책하는 한탄의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그릇된 어떤 일’을 다시 시작하여 새롭게 극복하자는 의미보다는 ‘그릇된 어떤 결과’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며
‘그 일에 대해서 포기’할 수밖에 없는 지극히 수동적인 불만과 불평의 의미를 갖고 있다.

나는 그런 그가 궁금해서 도대체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몇 번이나 주저하다가 냉큼 배낭을 어깨에 메고 서너 칸 빈터 너머 그가 앉아있는 집터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바로 그가 있는 옆 집터에 나도 조용히 앉았다. 인기척소리에 그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 빙긋이 웃었다.
나도 그를 향해 웃었다. 그는 ‘제 기랄!’ 소리를 멈추고 손끝으로 그의 무릎 앞에 놓인 큰 가방을 뒤적였다.
그의 뒤쪽엔 60리터를 넘는 큰 배낭과 작은 가방 한 개가 더 놓여있었다.
벌써 노숙을 한지 꽤나 오래된 듯이 얼굴은 부분적으로 검은 때가 끼어 있었고
뒤에 세워진 배낭의 꽉 쪼여진 덮개 아래엔 뭔가 넣어져 단단히 말은 비닐봉투가 여럿 삐죽 나와 있었다.
나이는 약 60대 후반쯤 보였고 맑은 금태 안경을 끼고 있었다. 대체로 인상이 아주 좋아 보였다.
현재 분위기로 봐서 그는 이곳에서 노숙을 할 생각인 것 같았다. 나는 슬그머니 일어나서 집터를 둘러보았다.
푸르스름한 타일이 붙어있는 욕조가 눈에 들어왔다.
욕조 머리에 조금 남아있는 벽면엔 하얀 샤워꼭지가 달려있는 짧은 호스가 아직까지도 붙어 있었다.
욕조로 다가가서 바닥을 손으로 쓸어보았다. 물기는 전혀 없었다. 오늘 하룻밤 한기를 피하는 잠자리로는 안성맞춤이었다.
나는 배낭에서 은박 깔개를 꺼내어 욕조 안에 깔고, 압축 비닐부대의 자크를 열어 욕조 위에 덮고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굵은 돌멩이로 비닐부대의 가장자리를 촘촘하게 눌러놓았다.
그리고 비닐 우의를 옷 위로 걸치고 욕조에 들어가 은박 깔게 위에 무릎을 오므리고 누워 보았다. 아항! 정말 아늑했다.
희뿌연 밤하늘과 밝은 금성이 바로 이마위에 떠 있었다.
이제 배고픔을 해결하고 이곳 욕조의 잠자리에 들기 전에 熱파스를 발등과 발바닥 그리고 허리와 등에 붙이면 만사가 오케이였다.

나는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비닐부대 한쪽을 걷고 욕조 바깥으로 나왔다.
내가 하는 짓을 유심히 지켜보던 그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일본말로 뭐라고 했다. 아마도 나쁜 소리는 절대 아닌 것 같았다.
이때 나의 의지를 분명히 밝혀둘 필요가 있었다. 나는 그를 향해 ‘쓰리마셍’이라고 먼저 운을 떼면서
손짓발짓 그리고 서투른 아시안 영어를 동원해서 쓰나미로 죽어나간 숱한 영혼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
오늘 하루 밤을 여기서 노숙하겠다고 말했다.
그가 자상한 표정을 보이며 뭐라고 설명을 하는데,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으니까 그냥 ‘베리 굳!’이라는 소리를 몇 번이나 나에게 반복했다.

나는 배낭에서 꺼낸 캔 맥주 빈 깡통에 물을 채워서 양초와 함께 들고 욕조로 들어갔다.
돌멩이를 바치고 깡통을 세웠다. 그리고 아래쪽 돌멩이 사이에 불을 붙인 양초를 여러 개 밀어 넣었다.
물이 대충 데워질 동안에 그에게 손짓발짓을 동원해서 대화를 시도했으나 그와 나는 서로의 말을 절반 정도만 알아들었다.
그는 깡통의 물이 양촛불에 의해서 끓을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표했다. 나는 ‘노 프로블렘’이라며 그를 안심시켰다.
한참 후에 물이 끓기 직전의 ‘쒸~익’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 정도면 컵라면을 먹을 수 있다는 판단을 하고 배낭에서 컵라면 두 개를 꺼내 비닐포장을 벗겨 뚜껑을 열고
스프봉지를 뜯어 라면발 위에 뿌렸다. 그리고 손에 수건을 감아 물이 끓고 있는 깡통을 들어 컵라면에 부었다.
그가 ‘스고이!’를 연속해서 외친다. 그리고 다시 빈 깡통에 물을 채워서 양촛불 위에 올려놓았다.

그와 나는 바다 바람을 피해 절반만 남은 담 앞에 쪼그리고 앉아 요란하게 후르륵 소리르 내면서 컵라면을 먹었다.
우리는 ‘오이시!’와 ‘아리가또 고자이마스!’를 서로 번갈아 외치면서 뜨거운 국물 한 방울 남김없이 모두 비웠다.
그는 컵라면 껍데기와 와리바시와 쓰레기를 비닐봉투에 꼼꼼하게 모두 주워 담아서 자신의 배낭 옆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이제 그와 나는 서로 경계하는 두려운 마음이 사라진 것 같았다.
내가 한국에서 가져온 믹스커피를 종이컵에 털어 넣고 깡통의 데워진 물을 부어 그에게 내밀자
또 그가 ‘아리가또 고자이마스’ 라고 하면서 연신 허리를 꾸벅이며 고마움을 표했다.
나는 이 한국제 믹스커피에 대해서 어렵지 않게 설명했다.  ‘디스 이스 코리안 해피 믹스 베리베리 스위트 커피!’
그가 한모금 맛을 보더니 정말 그렇다고 맞장구를 쳤다.

그가 밑동만 남은 담장과 담장사이에 작은 텐트를 쳤다.
나는 거센 밤바람에 심하게 흔들리는 텐트의 한쪽 귀퉁이를 잡고 팩을 박아주었다. 그가 텐트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한다.
이제 그와 나의 감정의 사이클이 맞아 떨어지면 우리의 소통에서 언어의 다름은 장벽이 되지 못한다.
‘窮卽通’이라는 말이 있다. ‘궁’하면 ‘통’한다는 이 말은, 마음을 서로 비우면(空) 통(通)한다는 뜻이다.
짧은 영어와 손짓 발짓 그리고 몸과 얼굴의 표정이 완벽하게 통역을 해준다.
아니 서로 말을 알아듣지 못하더라도, 말을 하는 사람은 듣는 사람이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물론, 말을 듣는 사람은 감정의 방향이 지시하는 대로 해석하면 그냥 모두 소통이 된다.
말하는 사람의 진정한 가슴과 듣는 사람의 진실한 눈빛이 만나면 언어는 단지 ‘소리’일 뿐이다.
그래서 일본말이라고는 ‘아리가또 고자이마쓰’ 외에는 한마디도 못하는 내가 두어 시간 동안 그가 한 이야기를 대충 알아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밖에는 바닷바람 소리가 한 겹 텐트 얇은 천을 요란하게 핥고 있었다.
그가 배낭에서 털수건을 꺼내 목에 두르며 입을 열었다. 내가 들은 그의 이야기는 대강 다음과 같았다.

나는 니가타 출신이다. 중학교를 중퇴하고 도회지로 나와서 돈을 벌었다.
40대 초반에 회사가 망한 후 직장에서 쫓겨났다. 2년 동안 놀다가 이곳 원전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었다.
수입은 그런대로 괜찮았다. 별로 힘든 일도 아니었다. 특별하게 위험한 일도 아니었다.
40대 후반에 이곳 히로노의 나이든 처녀와 결혼했다. 행복했다. 아이를 낳았는데 나흘만에 죽었다.
그 후에도 참 열심히 일했다. 한창 잘 나갈 때는 혼슈 원전들 여기저기로 불려 다니며 하루도 쉴 틈 없이 일을 했다.
50대 후반인  2003년에 가쓰라 오무라의 폐사된 조그마한 가축 농가를 샀다. 이곳 히로노에 사는 장모가 우리 부부를 많이 도와주었다.
장모는 정말 자상하고 인자하신 분이다.  나도 더 나이 들기 전에 원전 비정규직 노동자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농가가 너무 좁아서 옆 땅을 조금 더 빌렸다. 그리고 소를 키웠다. 때때로 아내에게 소를 맡기고 칠요할 때 마다 나는 원전일도 했다.
소가 우유를 생산하면서 생활이 제법 풀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3년 전에 아내가 암 진단을 받았다.
그리고 수술을 받은 후로 다섯 달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장모님을 닮아 정말 건강하고 자상한 아내였는데.......
장모님도 딸을 잃은 슬픔으로 갑자기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나는 노인요양소로 가기를 권했지만 좀 불편하더라도 여기 집에서 그냥 살겠다고 하셨다.

내가 잠시 그의 말을 막아서며 물었다.
‘저기 히로노 해안 왼편으로 보이는 높은 굴뚝은 뭔가?’
그가 어둠속에서 희끗하게 비치는 높은 굴뚝을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화력발전소’
내가 의아해서 다시 물었다.
‘지척에 후쿠시마 핵발전소가 있는데, 왠 화력발전소?’
‘핵발전소가 생산하는 모든 전기는 도쿄로 송전한다. 여기 히로노 사람들은 저 화력발전소에서 만든 전기를 사용한다, 허허’
나는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에 그만 입을 꾹 다물었다.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그가 다시 기억을 더듬어 아까 하던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농장에서 장모님 집까지 차로 약 20분 걸린다. 아내와 사별한 후에도 나는 거의 날마다 장모님의 집에 들려 건강을 물었다.
장모는 그때마다 항상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미리 만들어놓은 오니기리를 비닐봉지에 싸주었다.
농장에 돌아와 장모님이 싸주신 오니기리를 혼자 먹으면서 많이 울었다. 아내를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런데 작년 2011년 3.11 쓰나미로 저 제방이 무너지고 여기 마을이 잠겼다. 장모님의 오래된 집이 장모님과 함께 무너졌다.
물이 빠진 뒤에 쓰러진 집을 뒤지고 이곳 해안가를 샅샅이 찾았지만 장모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다.
아까 내가 앉아있었던 빈터가 바로 장모님의 집터다. 내 아내가 바로 저 집에서 태어나 자랐다.
내 농장은 방사능 경계지역에 포함되어 버렸다. 사람들 말로는 내 농장이 있는 땅은 영원히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되었다고 하지만
원전 노동자였던 내 경험에 의하면 수년 안에 복구 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암! 그렇지. 복구 되어야 한다. 그런데......
아마도.... 내 평생에는 다시 들어가 살 수 있는 기회가 올 것 같지는 않다.
여기 후쿠시마현에서 이와끼 근처에 가설주택을 임시로 지어주었다. 재해수당도 받는다.
겨울만 그곳에서 지내고 봄이 되자 도저히 쓸쓸한 마음을 견딜 수가 없고 가슴이 답답하여 아예 배낭을 메고 이곳에서 떠돌고 있다.
바로 여기서 아내의 영혼도 만나고 나에게 항상 인자했던 장모님의 영혼도 뵙고 싶다.
오늘 밤에도 내 아내의 영혼은 틀림없이 나를 찾아 이곳에 올 것이다.

그가 울었다. 나도 울었다. 텐트 밖에서 불어대는 밤바람도 울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일어서서 밖으로 나왔다.
바다를 향해 오줌을 누는데 바람이 워낙 거세어 오줌 줄기가 오히려 내 바지 자락에 떨어졌다.
나는 욕조로 돌아와 누웠다. 욕조를 덮은 비닐 너머로 별빛이 찬란하다.
배낭에서 熱파스를 꺼내 양말 바닥에 붙이려다 말고 갑자기 거센 바닷바람이 두렵다는 생각에 잠시 계산을 해보았다.
감기에 언제나 약한 내 몸이 생각났다. 이렇게 거센 바닷바람이 부는 밤을 이곳에서 지냈다가는 딱 감기가 들고 말 것이다.
현재 내 건강으로 보자면 지금 내가 만용을 한껏 부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감기든 몸으로 여행을 한다는 것은 나에게 절대 무리한 짓이다.
나는 감정을 억누르고 배낭에 이것저것을 주워 담기 시작했다. 그리고 배낭을 메고 그의 텐트 옆에 서서 ‘쓰리마셍’을 외쳤다.
그가 텐트에서 기어나와 배낭을 멘 나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내가 억지로 ‘쿨럭쿨럭’ 기침소리를 크게 내며 호텔로 돌아가야겠다고 말했다.
그가 손목시계를 달빛에 비쳐보며 20여분 후에 <이와끼>로 향하는 막차가 있다며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쓸쓸하게 웃었다. ‘오늘밤 당신의 텐트에 아름다운 아내의 영혼이 깃들 것이며,
그리고 당신은 머지않아 당신의 농장으로 꼭 돌아갈 것이다’ 그는 소리 내어 웃으며 말했다.
‘고꼬로가라 아리가또 고자이마쓰!’

거센 바람을 등지고 히로노 역을 향해 걸었다. 역의 희미한 가로등이 보일 즈음에 등 뒤로 거센 바람에 뒤섞여 사람의 소리가 들렸다.
‘제기 랄!’

전철 차창 밖으로 이와끼의 푸른 밤이 지나가고 있다.
쓰나미라는 자연재해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이런 슬픈 문제가 닥치지 않았을까?
‘핵발전소가 없었다면’ 그이의 비극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해안에 방파제를 20미터 높이로 쌓았다면 모든 사람들은 안전했을까?
인간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핵발전소를 폐기하는 것으로 이런 모든 문제가 해결될까?
대안에너지 혹은 재생에너지가 이런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까?
핵발전소 폐기와 대안에너지, 재생에너지, 유기농과 친환경이 인간의 거대한 욕망과 끝없는 야망과 부(富)에 대한 집착과 안락함에 대한
중독을 해결해 줄 수 있을까?
정치인을 뽑는 투표가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국가가 이런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한 적이 인류역사에서 존재했던가?
하물며 과학자나 재벌과 기업이 인간의 이런 고통을 해결할 수 있을까?

저들 모두가 고작 해결책이라고 내놓은 것들은 살펴보면 차라리 아편 3그램, 히로뽕 5미리그램, 마리화나 한 개피 보다
그 효과가 훨씬 더 못하다. 저들이 정말 두려워하고 불편해하는 것은 우리들의 새로운 삶을 위한 ‘가치관의 변화’이다.
그래서 저들이 황급히 제시하는 해결책에는 ‘가치관의 변화’를 이끌어 갈 그 어떤 대안도 존재하지 않는다.
‘가치관의 변화’ 앞에서는 저들끼리 복잡하게 얽힌 이해관계의 강고한 카르텔이 햇볕아래 아이스크림처럼 녹아서 없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아니, 저들의 존재 자체가 필요치 않는 세상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늦은 밤에 후루카와에 도착했다.
나는 3.11 대지진의 현장을 돌아보는 이번 여행에 쓰나미로 많은 피해가 있었던 게센누마를 가거나,
혹은 가장 많은 인명피해가 있었던 이시노마끼 주변을 돌아본 후,
혹시 상황이 허락하면 후쿠시마 제1핵발전소 의 방사능 경계지역을 들어갈 수 있는 후방 베이스로 후루카와를 선택했다.
조그마한 배낭인데도 왼쪽 어깨가 빠져나가는 듯이 고통이 심했다.
일단 후루카와 역 바로 앞에 있는 호텔을 정해 피곤한 몸을 뉘었다.
호텔 이름도 ‘후루카와’라는 말에 깜짝 놀라 일어나서 공중전화를 찾아 나의 오랜 친구 <후루카와 미카>에게 전화를 했다.
아마 그녀는 몹시 지쳐있을 것이다. 내 전시회 일주일 동안 요코하마 그녀의 집에서 도쿄 무사시세키 브레히트 소극장까지
날마다 출퇴근을 하며 전시회의 크고 작은 일들을 모두 챙겼다. 그녀는 내가 후루카와에 있다는 말에도 잘 믿기지 않은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안산 집에서도 급하게 찾았고, 광주 시립미술관에서도 급하게 찾습니다’
나는 낄낄대며 ‘여기는 후루카와 역 바로 앞의 후루카와 호텔입니다’ 그녀는 크게 놀라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다.
<미카>의 외갓집이 후루카와다. 외할아버지가 오래전에 이곳에서 큰 병원을 만들었고 지금은 삼촌과 조카들이 그 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미카>는 바로 석달 전에 어머님을 모시고 바로 이곳에 와서 삼촌과 친척들을 만나며 여기 후루카와 호텔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내과의사인 아버님의 고향도 이곳에서 가까운 센다이 부근이라고 했다.
‘그곳에 가시는 줄 알았으면 제가 따라나섰을 텐데.... 후루카와의 쌀은 일본에서 가장 맛있답니다.
호텔에서 주는 아침식사 때 밥을 한 알도 남김없이 다 드세요’

나는 해외여행에 나설 때 마다 휴대전화를 로밍하지 않는다.
일년에 두어번 있는 해외여행의 짧은 기간만큼은 휴대전화의 족쇄로부터 완벽하게 해방되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세계의 어느 구석이든 거미줄 같은 무선랜에 연결되는 인터넷과 어디를 가나 분신처럼 따라다니는 휴대전화 덕택에
우리 인간들은 얼마만큼 무엇이 더 행복해 졌을까? 한국에서 나를 급히 찾는다는 소식은 지난 이틀 동안의 여행에서
이곳 후쿠시마 땅에 완벽하게 나를 스며들어 새롭게 만들어진 감정을 한순간에 흩어 놓았다.

아침에 일어나 식사를 마치고 공중전화부스에 들어가 한국의 여기저기에 전화를 돌렸다. 모두 숨이 넘어가게 바쁜 모습들이다.
때로는 총선을 일주일 앞두고 지역구에 출마한 누구를 지지해주라는 말도 있었다.
그리고 뭔 미술상에 나를 선정한다는 것과 기획전에 그림을 출품해주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곰곰이 따지고 보면 나에겐 털끝만큼도 필요 없는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사람이 꼭 필요한 일만 하면서 살 수 있는가?
필요 없이 하는 일이 더 많은 것이 인생이다. 인생의 의미는 그만큼 복합적이고 사람마다 다 다른 뜻을 갖고 있다.
아내의 반가운 목소리다.
‘노마야! 으잉! 이렇게 한동안 전화가 없으면 자기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아무도 모르잖아!
후쿠시마 핵발전소 내부 까지는 들어가지 않을 거지? 지금 노마가 있는 곳은 안전해?
지진은 일어나지 않았어? 혹시 시위대와 함께 있는 것 아니야? 제발 안전한 곳만 골라서 다녀야 한다구!
자기가 있는 곳은 방사능 지역은 아니지?
지금 혹시 방사능을 함박 뒤집어쓰고도 잘났다고 나대는 것 아니야?’

후루카와 역에서 이시노마끼로 향하는 전철 표를 구입한 후에 역 바깥에서 어슬렁거리다가 역 광장에 서있는 청동부조상이 언뜻 눈에 띄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母子像이었다. 어머니가 논에서 일하다 말고 우뚝 서서 밝은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 아들인 듯한 소년이 두 손으로 벼이삭을 한 묶음 쥐어 나에게 내밀고 있었다.
<미카>가 말한 대로 이곳은 쌀의 고장이었다.

역 안팎 여기저기에 ‘후루카와 관광 재개’, 혹은 ‘힘내자! 후루카와’ 등의 표어가 씌어진 밝은 색깔의 배너가 나부끼고 있었다.
개찰구 앞이나 또는 상점 안에 두세명씩 서성대는 여행객들 중에 아무도 작년의 재앙을 이야기 하고 있는 사람은 없는듯했다.
물론 내가 일본어를 알아듣지 못하지만, 그러나 내 온몸이 전해주는 느낌에는 그런 이야기를 아무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했다.
모두 작년 재앙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아니다.
작년의 쓰나미와 이곳 근처의 핵발전소 현황에 관해서는 이야기 하지 않는다는 것을 서로 간에  암묵적 합의가 이루어진 듯 했다.
원래 가뜩이나 속마음을 감추는 것이 일본사람들이라고 하지만.... 어제와 오늘 이곳에서 만나는 일본인들은
어느 누구나 무엇인가를 애써서 감추고 있는 모습이었다. 누구든 빤히 다 아는 것을 서로 말하지 않고 감추어야 한다는 사실,
그 사실을 또한 누구나 당연히 알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이시노마끼 역으로 향하는 전철에 앉아있는 젊은이나 청소년이나 그리고 노인이나 모두 그런 표정이 역력했다.

후루카와市 멀리 북쪽에서부터 시작된 평야는 남쪽 태평양 연안에 있는 이시노마끼 까지 전철이 달리는 동안에도 계속 펼쳐졌다.
논으로 이어지는 들판과 들판사이에 가끔 낮은 구릉이 부드럽게 솟았다가 내려갔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풍경이었다.
너른 들판에 여인의 가슴처럼 봉긋 솟은 언덕 아래로 농가들이 줄지어 있고 그 옆으로 맑은 개천이 구불구불 흐르고 있다.
개천에는 철없는 아이들이 벌써 조그만 그물 막대를 들고 물속을 더듬고 있다.
네 귀 반듯한 큰 논들이 바둑판처럼 잘 정비되어 있지만 하천은 자연의 구불구불한 흐름을 유지하고 있었다.
농가들은 모두 이곳 땅의 빛깔을 닮아서 천연덕스럽게 이미 땅과 합일을 이루었다. 지평선의 끝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넓은 평야지대였다.
한국의 곡창지대 전라도 땅이 분명했다. 김제평야와 만경뜰을 가로질러 장성재를 훌쩍 넘으면 광주에서부터 시작하여 나주를 거쳐
목포까지 이어지는 그 너른 호남평야가 바로 후루카와에서 이시노마끼 까지의 풍경과 똑 같았다.

이시노마끼 해안을 따라 다섯 시간도 넘게 걸었을까. 엄지와 검지발가락 사이가 벌써 부르트기 시작했다.
일년전에 보았던 쓰나미의 아수라판은 이미 말끔하게 청소되었고 항구 연안의 콘크리트 방파제는 약 1.2미터씩 높이를 보강하여 새로 쌓았다. 골목 마다 모두 윤기 나는 새 아스팔트가 깔렸지만 대부분의 상점이나 여관은 모두 문을 닫았다. 학교도 문을 닫았다.  
경찰견을 동원하여 시신을 찾아준다는 색 바랜 포스터가 아직까지 붙어있었다.
텅 빈 가게에 들어가 벽면을 바라보며 작년 쓰나미 바닷물 침수의 흔적을 찾아보니 바닥에서 내 이마 높이까지 갯펄의 띠가 올라왔다.  
좁은 골목길을 걸었다. 텅빈 건물과 건물 사이에서 주인을 잃은 나무지팡이 하나를 발견했다.
둥글게 구부러진 손잡이에 흙물이 잔득 낀 데누구이가 감겨있었다.
지팡이에 달라붙어 있는 데누구이를 풀어 펴보니 작은 섬처럼 보이는 푸른 문양 아래로 바다 물결과 하얀 파도가 가득 넘쳐나는 그림이
프린트 되어있었다. 아마도 이곳에서 가까운 일본 三京중에 하나인 미쯔시마(松島) 앞바다의 풍경으로 보였다..
작년 3월 11일 그날, 이 지팡이를 놓친 노인은 살았을까 죽었을까..... 나는 부르튼 발을 더욱 절뚝이며 지팡이를 짚어 보았다.
노인의 체온이 느껴진다. 낮은 가옥들 위로 보이는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다.
맑은 햇살아래서 테누구이에 달라붙어 있는 흙먼지를 몇 번이나 강하게 휘저으며 탈탈 털었다.
뽀얀 흙먼지가 맑은 공기사이로 퍼졌다. 흙먼지가 내 숨 속으로 들어갔을까. 가벼운 기침이 나왔다.
나는 노인처럼 몸속으로 깊은 기침소리를 냈다. 그리고 데누구이로 땀도 나지 않는 내 이마를 닦아보았다.
노인이 나에게 물었다. ‘그대는 죽음을 생각하고 있는가?’
나는 마른기침을 몇 번 더 하고나서 말했다. ‘삶도 깨닫지 못했는데 어찌 죽음을 생각할 수 있겠소’
노인이 곱게 웃으면서 바다 쪽을 보며 말했다. ‘삶과 죽음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더만’
나는 더욱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노인께서도 생전에 그리 아셨소?’
내 앞장을 서서 걸어가는 그에게 지팡이를 돌려주려니까 그가 가볍게 손사래를 쳤다.
‘아니네! 내 한평생을 누군가가 시키는 대로만 살아왔었네, 쓰나미 파도가 밀려오는 그 순간에 처음이자 마지막 결정을 내가 했다네’
나는 큰 걸음으로 그 노인을 따라가 옆에 나란히 걸었다. ‘무슨.....’ 노인이 나의 표정을 살폈다.
‘나는.... 쓰나미 앞에서 이 지팡이를 멀리 던져버리고 죽음의 문을 직접 내손으로 열었지..... 내가 그것을 결정 했다네’
그리고 노인이 빠르게 말을 이어갔다. ‘ 그냥 시원하네! 인생은 꽃피는 봄날의 꿈 한자락이라더니, 허허허 그 말은 틀렸네’

이시노마끼에서 게센누마로 가는 전철은 중간에서 끊어졌다.
3.11 쓰나미 당시 게센누마의 연안에 있던 기름탱크들이 거센 바닷물에 무너지고 기름들이 쏟아져 파도와 함께 떠밀려와
시가지 전체가 불이 붙었다. 그 불바다를 찍은 사진은 마치 세계대전이나 월남전에서 대형 폭격기가 설사 똥을 싸듯 폭탄을 뿌리며
융단폭격을 하던 장면과 흡사했다.

이시노마끼에서 연안을 따라 오나가와(女川) 포구에 도착했다.
작년 이맘때 나는 오나가와 포구가 쓰나미에 깡그리 망가진 모습을 직접 보았던 터였다.
그러나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이 조용했다. 쓰나미로 망가진 잔해들과 높은 파도에 떠밀려온 크고 작은 배들로 산을 이루었던
폐자재들은 모두 깨끗하게 치워졌다.
바로 내 이마 건너편에 태평양이 퍼렇다.
해안은 작은 바구니를 닮은 포구를 만들어 소담스러운 풍광을 보여주고 있다.
아름답다.
겨우 살아남은 소나무 한그루가 태평양을 향해 목을 길게 구부리고 있다.
폐허의 길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이 조용한 발걸음을 옮겼다.
맞다! 아무런 일도 없었다.
지극히 조용했다.

1980년 5월 27일, 0시를 기해 계엄군들의 작전이 시작되었다. 장갑차와 탱크를 앞세우고 광주시 외곽을 시작으로
시가지 중심부 시민군 본부로 사용했던 도청을 향해 물밀듯이 쳐들어 왔다.
멀리 외곽에서 시작되는 총소리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도청을 향해 포위망을 좁히고 있었다.
새벽 4시경에 도청에서 수류탄 터지는 소리와 함께 콩 볶는 듯한 총소리가 30 여분 계속해서 들렸다.
그 후론 계엄군들이 갖고 있는 엠16소총의 고막을 후벼 파는 파열음만 일방적으로 들려올 뿐,
시민군들이 무장한 엠1과 칼빈 소총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어느 주택가 뒤 야산의 밭고랑에 새벽 어두운 하늘을 보고 반듯이 누워있었다. 아득하게 먼 곳에서 푸르스름한 여명이 어둠을 밀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금방 날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간혹 멀리서 시민군들이 저항하는 총소리가 짧게 들렸지만 바로 그 뒤엔 무차별적으로 퍼붓는 계엄군의 총소리가 들리고 나면
다시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그렇게 총소리가 몇 번 더 들리더니 날이 밝아지자 하늘과 땅이 모두 고요했다.
밭에 우거진 녹색 콩잎들과 줄기가 밭고랑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는 내 눈과 이마를 가려주었다.
동지들과 도청의 청년들은 모두 어떻게 되었을까. 눈물 한줄기가 눈꼬리에서 뺨을 타고 귀볼을 적셨다.
그냥 이대로 이곳에서 영원히 잠들고 싶었다. 이 움푹 파인 밭고랑이 갑자기 어머니의 품처럼 아늑하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밭고랑에 반듯이 누운 채 살포시 잠에 빠졌다.
어디선가 된장국 끓는 냄새 한줄기가 내 코끝을 감싸더니 금방 사라졌다.
붉은 장미와 흰 장미들이 포도송이처럼 무리를 지어 여기저기 피어있는 모습이 나타났다. 무수하게 많은 하얀 나비들이 하늘을 덮었다.
나비들이 너울너울 날아서 산을 덮고 강을 덮고 바다를 덮었다. 그리고 곧 이어 잠든 나를 깨워 부르는 어머님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렸다.
야산 밭 아래 주택가에서 그릇과 수저들이 가볍게 부딪치며 식사를 준비하는 소리가 아련하게 들렸다. 된장찌개 끓이는 냄새도 풍겼다.
아내가 남편과 아이들을 다그쳐 깨우는 소리도 들렸다. 이제 또 하루의 일상이 시작되는 소리였다.
지난 10여일 동안, 그리고 간밤에도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사람’의 일상이 시작되고 있었다.
사람들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정말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이 날마다 했던 것처럼
똑같은 말과 똑같은 표정과 똑같은 몸짓으로 아침을 열고 있었다. 갑자기 나는 심한 허기를 느꼈다.
너무 배가 고팠다.

나는 넓은 평야지대를 지나서 후루가와市로 되돌아가는 전철에 다시 앉아있다.
네 귀 반듯한 논엔 벼 밑동들이 정확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꼽혀있다.
작년 가을 추수할 때 잘랐던 트랙터의 칼날의 흔적이 땅에 박혀있는 벼 밑동에 아직도 푸르스름하게 남아있었다.
후쿠시마 제1핵발전소에서 이곳 들판까지 약 200 킬로미터. 작년에 폭발한 후쿠시마 핵발전소가 토해낸 방사능이
한국 땅까지 날아와 떨어졌으니 이 기름진 평야도 절대 온전치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기준치 이하든 허용치 이상이든
아무튼 방사능은 이 기름진 들판에 유령처럼 스며들었을 것이다. 인간의 욕망과 야망이 창조한 새로운 물질이다.
올 초여름에 이곳 들판에 모내기한 벼는 여기 흙속에 유령처럼 스며든 방사능을 물과 함께 마시며 자랄 것이다.
벼가 익어서 이삭이 고개를 숙일 쯤에 방사능은 다시 유령처럼 벼이삭 안에 몰래 들어가 앉아있겠지.
일본에서 가장 맛있다는 후루가와 쌀 속에. 그리고 내 친구들과 나는 그 쌀로 밥을 지어 먹을 것이다.
쌀 속에 비밀스럽게 앉아있던 방사능은 또다시 유령처럼 내 친구들과 나의 몸속에 들어와 어딘가에 똬리를 틀고 숨을 죽이며 엎드려 있겠지.
내 친구들과 내가 죽어서 다시 땅에 묻힐 때 까지 유령은 우리들 몸속에서 소리도 없이 자기네들이 해야 할 일을 어김없이 되풀이 하겠지.
내 몸속에 든 유령들은 서로 불을 밝히고 춤을 추고 좁은 혈관을 따라 나의 뇌와 허파와 간과 신장과 심장을 모두 엿보며 조금씩 갉아먹다가
자기네들끼리 연애하고 싸우고 미워하는 짓을 내내 반복할 것이다. 그때쯤이면 내 몸은 이미 유령의 소유가 되어서
오히려 주인인 나는 쫓아나고 유령들 마음대로 내 몸을 난자(亂刺)할 것이다.

나의 ‘광주오월연작판화 - 새벽’ 50 여점을 관통하는 내용을 쉽게 말하자면 ‘세상과 우주를 순환하는 사람의 기운’이다.
즉, 역사와 사람과 우주 자연 만물과의 인연을 ‘새벽’에서 말하고 싶었다.
계엄군들은 자기들이 학살한 시민들의 많은 시신을 아무도 모르게 자신들도 모르는 곳에 지도에도 없는 곳에 몰래 파묻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은 행방불명이 되었다. 저들은 시신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도록 화염방사기로 태우거나 칼로 긁어 뒤집어 놓거나
페인트를 칠하는 야만을 저질렀다. 많은 사람들이 ‘무명열사’라는 이름으로 땅에 묻혔다.
광주 시민들이 뿌렸던 붉은 피도, 우리들의 열정도, 우리들의 원한과 미움과 사랑도 모두 광주 땅이 머금었다.
이듬해 봄에 그 위에 싹이 돋고 줄기가 크고 너른 이파리가 펼쳐지고 꽃이 피고 벌과 나비가 머물고 가을 따가운 햇볕을 받으며
씨가 영글고 온갖 곡식과 과실이 익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것을 수확하여 자신의 몸을 향해 제사를 지냈다.
날마다 먹는 ‘식사’는 내 몸을 향해 매일 ‘제사’지내는 일이다.
그렇다. ‘밥’을 먹는다는 일은 광주 땅에 묻은 그들의 열정과 희망과 소원을 내 몸 안에 모시는 ‘의식’이다.
1980년대의 10여년 짧은 기간 동안에 서구사회가 겪었던 근대 100년의 역사가 바람처럼 지나갔다.
지식인들에 의해서 일종의 한국사회의 구성체 논쟁이 그 잡다하고 너절한 꽃을 만개했다.
이것은 곧 ‘광주오월’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와 맞물려 진행되었다.
어떤 사람은 ‘광주오월’을 ‘민주화 운동’이라고 했다. 다른 사람은 ‘항쟁’이라고 했다.
또 다른 사람은 ‘혁명’이라고 했다. 또 다른 사람은 ‘폭동’이라고 말했다.
저 사람은 일종의 시민계급에 의한 자유 쟁취 투쟁이라고 말했다.
우리 사회엔 지금도 봉건잔재가 시퍼렇게 남아있는데 왜 시민을 거론 하는가 라며 바로 옆 사람이 반대를 했다.
어떤 사람은 권력과 착취와 피업악자의 관계로 분석했다.
제법 눈치 빠른 사람은 당시 마지막까지 총을 들고 도청 시민군 본부를 사수했던 사람들은 노동자와 룸펜 계급뿐이었다고 주장했다.
‘광주오월’은 금방 유물론의 거대한 성찬으로 이어졌다.
모든 지식인들은 자신이 내세우는 특정한 계급을 오월의 중심에 앉혀놓기에 바빴다.
모두 제각각 코끼리 다리를 하나씩 껴안고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나는 당시 광주시민이 밥상공동체를 통해 대동세상을 만든 항쟁 10일 동안 자신과 광주를 지키는 모든 이들의 몸을 향해
서로 ‘제사’를 지냈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는 이러한 ‘의식’을 갖는 공동체를 서구역사에 존재했는지, 혹시 존재했다면
그런 공동체에 어떤 개념의 이름을 붙였는지 굳이 알고 싶지도 않다. 다만, 나는 그것을 판화로 새겼을 뿐이다.

여기 저 너른 평야, 후루가와 들판에 떨어져 기름진 땅에 스며든 미세한 방사능 입자에도  
권력과 재벌의 착취와 피업악자의 관계가 연동하고 있을까. 아니면, 우리의 밥상공동체를 천천히 파괴시키려는
국가폭력의 또 다른 얼굴이 ‘밥’의 가면을 쓰고 神의 눈(明)을 송두리째 뽑아버리는 것일까.

늦은 밤에 후루가와 호텔에 돌아오니 지배인이 방 열쇠와 나에게 도착한 3장의 팩스를 건넸다.
<미까>가 보낸 팩스였다. 이곳과 센다이 근처에 있는 중요한 신사(神社)와 그곳을 찾아갈 수 있는 그녀가 직접 그린 약도,
그리고 나의 건강을 걱정하는 짧은 메모에는  ‘홍선생이 이번에 여행하는 곳엔 너무나 아프고 슬픈 보이지 않는 영혼들이 많으니까
항상 기도하면서 다니세요. 미까.’로 끝맺고 있었다.

친구 <미까>와의 인연도 벌써 20 여년이 가까워지고 있다.
일본의 ‘보이지 않는 것’들에 관하여 그녀로부터 나는 많은 배움을 받았다. 특히 신도문화에 관해 많은 도움을 받았고
나는 결국 그것을 인연으로 약 30 여점의 ‘야스쿠니의 迷妄’ 연작을 그릴 수 있었다.
아마 일본의 많은 친구들 중에 한국의 <대충대충>과 <빨리빨리>를 거의 완벽하게 이해하는 사람으로써는 당연히 <미까>가 으뜸이다.
이제 그녀는 내가 아는 한, 일본인 특유의 ‘섬세함’과 ‘완벽함’과 ‘주저함’에
한국의 ‘대충대충과 빨리빨리와 재빠른 완결성’을 접합할 수 있는 특별한 사람이다.
나는 정말 숫자와는 인연이 없다. 그래서 돈도 시간도 모두 나와는 인연이 없다.
혼자서 자유롭게 떠난지 불과 며칠 되지도 않아서 이미 날짜를 모두 잊어버렸다.
나의 발길은 이른 아침에 센다이 역을 서성이고 있었다.
커피 한잔을 들고 후쿠시마 제1핵발전소를 향해 전철을 탔다. 그러나 불과 몇 정거장을 지나지 않아 철길은 끊어졌다.
역 앞에서 출발한 임시 버스가 나를 어딘가에 내려주었다.
건너편에 하얀 띠가 길게 쳐져있고 수많은 ‘출입금지’ 입간판이 사람의 통행을 가로막았다.
여기는 미나미소마와 나미에마치가 서로 만나는 지역이었다. 여기저기 붙어있는 경계벽보를 보아
대충 짐작컨대 이 도로를 경계로 저 앞의 작은 언덕 너머부터가 ‘거주제한구역’에 해당하는 모양이었다.
이 도로를 사이에 두고 오른 쪽의 논은 작년 가을에 추수한 벼의 밑동이 가지런하게 남아있다.
그러나 반대편의 논은 갈대와 잡초 그리고 마른 검불이 무성한 것으로 보아 작년 1년 내내 버려진 땅이 되었다.
불과 몇 미터 폭의 도로를 가운데 두고 한 쪽은 ‘거주제한구역’으로 희망이 단절된 땅이고
다른 반대편은 올해도 모내기를 위해 농사일이 시작될 것이다. 내가 서있는 이 도로는 말 그대로 ‘희망의 경계선’이다.
상점에서 맥주와 담배를 샀다. 담배를 피면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얼쩡거리며 목마른 입에 맥주를 부었다.
금방 얼굴이 붉어졌다. 억지로 비틀걸음을 떼며 엥까<블루라이또 요꼬하마>를 흥얼거렸다.
그리고 이시노마끼에서 얻은 노인의 지팡이로 땅을 가볍게 때리며 장단을 맞추었다.
경계하는 사람들 눈을 그럭저럭 피해 저 멀리 논둑을 지나 작은 언덕을 넘었다. 언덕아래 쪽에 농가 서너채가 보였다.
그리고 건너편엔 절벽처럼 깎아지른 산이 막아섰다. 사방으로 삼나무 숲이 울창했다.
나는 무성하게 자란 산죽(山竹) 사이에 배낭을 깔고 앉았다.
아래로 멀리 보이는 농가와 농가사이로 맑은 개천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아름답게 들렸다.
짙은 녹색 풍광을 배경으로 이제 막 피기 시작하는 벚꽃의 하얀 색이 유독 도드라져 보였다.
마치 풍요한 자연이 만들어놓은 오선지에 음표처럼 붙어있는 새하얀 벚꽃이 음악을 만들고 있었다.
조선시대, 안평대군(安平大君)이 꿈속에서 보았던 풍경을 그린 화가 안견(安堅)의 그림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가
여기 내 눈앞에 실제로 펼쳐져 있었다. 숨이 막힌다. 정말 숨 막히게 아름다운 풍광이다.

하나 남은 캔 맥주의 꼭지를 천천히 따다가 그만 둥그런 꼭지만 똑 떨어지고 말았다.
‘제기 랄!’
나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주먹 크기의 돌멩이를 챙겨들고 배낭 속에서 볼펜을 꺼냈다.
캔맥주를 땅에 세워놓고 볼펜을 가장자리에 대고 돌멩이로 내리쳤다. 돌로 내려치기를, 한번 두 번 세 번째에 캔에 작은 구멍이 났는지
하얀 거품줄기가 가늘게 솟았다. 다시 나는 힘주어 돌멩이로 때렸다. 볼펜이 캔 속으로 쑥 들어가더니
하얀 맥주거품이 좁은 구멍을 통해 사정없이 분출했다. 나는 재빨리 볼펜을 빼내고 구멍을 손으로 막았지만
맥주거품은 삐질삐질 계속 손바닥 사이로 새어 나왔다. 볼펜의 앞과 뒤쪽은 모두 깨어져 쓸모가 없어졌다.
솟아오르는 거품이 그치자 구멍 속을 햇빛아래 비추어 보았더니 글쎄, 맥주는 절반이나 새나간 뒤였다.
한모금 마셔보니 ‘거품 빠진 맥주’라더니 그 맛이 맹하여 심심했다.
‘제기 랄!’
그렇다! 히로시에서 노숙하던 그 사람의 모습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에게 한국산 믹스커피라도 몇 개 선물하고 돌아왔어야 했는데...
‘제기 랄!’
그래도 이 숨 막히는 순간에 맥주를 한 모금이라도 할 수 있다는 것에 나는 만족했다.

아무도 살지 않는다는 사실만 빼면 정말 저 농가를 둘러싸고 있는 광경은 너무나 평화로웠다.
아마 저 절벽처럼 버티어선 산을 넘으면 ‘귀환곤란 지역’일 것이다. 저 풍요한 산하가 모두 귀환불가 지역이 될 것이다.
우리세대엔 영원히 저 곳에 들어가 살 수 없을지도 모른다.

며칠 전, 내 오월판화 전시회 이벤트에서 담담한 목소리로 시를 낭송하던 <고우케 요시노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고향 후쿠시마를 생각하면서 이 시를 골랐다고 내게 은밀하게 말해주었다.
이 아름다운 풍경위로 쓰나미의 높은 파도가 덮쳐오는 거대한 음향이 쏟아졌다.
소극장의 완벽한 암흑 속에서 거대한 쓰나미가 밀려오는 음향이 두려워서 가슴이 떨렸다. 그
리고 곧 뒤이어 후쿠시마 제1핵발전소가 토해낸 방사능이 뒤덮이는 영상이 스크린에 비쳐졌다.
<고우케 요시노리>의 담담한 목소리다.

「혈루 - 7」

그녀는
내게 속삭였다

언젠가 웅덩이에 고인 물이었다가 하늘로 올라가 구름이 되어 흐르다가
그 중간쯤에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별과 또 다르게 빛을 뿜어내는 하늘 꽃 한 송이를 머리에 꽂았더니
비가 내린 후 오색무지개를 타고 다시 땅에 내려와
작은 실개천에 흐르다가 강물에 뒤섞여 바다를 만났다고.

그리고 나에게 가슴을 열어 보였다

가슴속에 구름과 별과 꽃과 무지개와 실개천과 강과 바다가
새겨져 있다고
나의 우둔한 귀에  푸른 입술로 속삭였다


30년 전에 세상에 태어난 광주오월판화를 그가 다시 새로운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 후쿠시마의 현장으로 불러들이고 있었다.
나는 산죽밭에 앉아 김빠진 맥주를 입에 털어 넣고 입에 물린 담배에 라이터를 켰다.
아래쪽에서 올라오는 거센 봄바람 때문에 몇 번이나 라이터 불이 꺼졌다. 나무 뒤에 숨어서 불을 켜보기도 하고,
한 손을 라이터 주위로 동그랗게 말아서 라이터를 켜보았지만 불은 금방 바람에 훅 꺼져버렸다.
결국 땅에 기어가는 자세로 납작 엎드려 담배에 겨우 불을 붙이고 한 모금 크게 들이킨 후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동시에 몸을 불쑥 일으키면서 소리를 내질렀다.
‘제기 랄!’

나는 마쯔시마로 향하는 전철에서 노인의 지팡이에 감겨있던 데누구이를 배낭에서 꺼내 가지런하게 폈다.
누르스름한 흙물에 찌들어진 수건이었다.
이 데누구이에 프린트된 푸른 빛깔 문양에 보이는 작은 섬들을 실제 마쯔시마의 해안 풍경과 꼭 대조해 보고 싶었다.
센다이 해안은 모두 폐허로 변했다.
마쯔시마 해안 역에 내릴 때 까지 전철 차창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해안들은 1년 전의 상처를 오롯이 보여주고 있었다.
송도해안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내렸다. 가족들을 데리고 나들이 온 사람들, 그리고 젊은 연인들도 보였다.
전철에서 내려 아래쪽으로 내려다보니 작은 섬들로 이루어진 해안이 아름다웠다. 나는 역 광장에 설치된 관광안내소를 찾아가
마쯔시마의 간단한 관광지도를 찾았다. 그러자 한 여인이 대뜸 한국말로 대답했다.
제법 유창한 한국말을 하는 한국어 통역 자원봉사자였다. 그녀는 내가 짚고 있는 나무지팡이와 내 얼굴을 번갈아 보면서 이야기했다.
이곳엔 한국 관광객들도 많이 들르는 모양이었다. 커피 한 잔을 얻어 마시면서 이곳의 이런저런 사정을 들을 수 있었다.
이곳은 해안 앞바다에 크고 작은 섬들이 약 1000 여개가 솟아있다.
작년 쓰나미 때 마쯔시마 앞바다의 무수히 많은 작은 섬들이 방파제 역할을 충분히 해서 밀려오는 바닷물의 속도를 현저히 낮추어줘
피해가 전혀 없었다. 약 1미터 높이쯤 바닷물이 올라왔지만 이 마을에서는 아주 오래된 집 한 채만 반파되었고
나이 많은 어르신 한분만 사망했다. 이 어르신도 미리서 대피하는 도중에 넘어진 부상을 회복하지 못하고 운명했다.

나는 지팡이를 짚고 억지로 더 절뚝거리며 아름다운 마쯔시마 해안을 따라 중병이라도 든 사람처럼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었다.
때로는 지팡이에 체중을 모두 싣고 버티어 서서 바다에 고요하게 떠있는 작은 섬들을 한동안 황홀하게 바라보았다.
이 나무지팡이에 의지하여 걷고 있는 ‘나’라는 몸은 정말 온갖 병이 심하게 든 환자인지도 모른다.
내 몸속에 일단 들어갔다가 배출되는 것은 모두 오염된 폐기물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것도, 향기 나는 모든 것들도 내 몸속을 통과하면 모두 더럽고 추한 것으로 변해버린다.
내 손을 거쳐 가는 모든 것은 십중팔구 쓰레기로 변한다. 그리고 단 한 시간의 불편함조차 도저히 견디지 못하는 가냘픈 동물이다.
어쩌면 우주자연의 만물 중에서 가장 추악한 생물에 불과하다. 찰나의 편리함과 안락함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목숨을 담보하는
게임 속에 빠져있는 중환자인지도 모른다. 느물느물한 야망과 끈적끈적한 욕망으로 가득 채워진 한갓 썩어가는 고깃덩어리가
나무지팡이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서 걷고 있다.  
신이 창조한 것 중에 가장 추악한 한 마리의 동물이 저 눈부시게 아름다운 해안을 절뚝이며 걷고 있다.
그런 ‘나’를 발견한 잿빛 갈매기 두 마리가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내 주위를 빙빙 날아다녔다.

해안가 멀지 않은 곳에 짙은 소나무 숲 사이로 밝은 주황색 도리가 내 눈에 들어왔다.
마쯔시마 앞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는 작은 신사(神社)다.  
그곳까지 올라가는 좁은 돌계단이 제법 높아서 중병이 든 나에겐 너무 숨이 차다. 지팡이에 의지하면서 더욱 느리게 발걸음을 옮겼다.
계단을 조금씩 올라갈수록 소나무 숲의 공기가 서늘했다. 따라서 내 가슴도 서늘해졌다.
신사 앞에 앉아서 바다위에 고요히 앉아있는 섬들을 내려다보았다.
양지바른 왼쪽에 동백꽃이 붉다. 가지마다 달린 꽃송이는 나를 못 본채 고개를 돌려 바다를 바라보고 있고,
바닥에 떨어진 꽃송이가 선연한 붉은 꽃잎을 꿈틀대며 나를 쳐다본다. 나는 호주머니에 넣어두었던 데누구이를 무릎위에 폈다.
맞다! 수건에 그려진 푸른 문양들은 내 눈앞에 펼쳐진 마쯔시마 앞바다의 작은 섬들이 분명했다.
배낭에서 물병을 꺼내 한 모금 마신 후에 데누구이 중간쯤에 물을 부어 적셨다. 그
리고 나무지팡이의 둥근 손잡이에 두어번 감아서 야무지게 묶었다. 동백나무들 사이 좁은 땅에 지팡이를 박았다.
지팡이 끝이 약 삼분의 일쯤 땅속에 들어가도록 체중을 한껏 실어 박았다. 땅에 박힌 지팡이 끝에 작은 돌멩이 몇 개를 쌓았다.
그리고 노트를 한 장 찢어내 종이배를 접어 그 돌멩이 아래 놓았다. 손목시계를 보았다. 마음이 급해졌다, 벌써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내가 신사 앞 계단을 종종걸음으로 빠르게 내려올 때 노인은 도리 앞에 서서 나의 뒷모습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계단을 잽싸게 내려가는 나에게 노인이 눈빛으로 물었다. ‘이제 돌아가는 것인가?’
나는 더욱 빠른 걸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니요! 다음 차례는 한반도 땅 어디에선가 다시 이렇게 걷고 있을 것입니다’
노인은 도리 밑에서 하얀 기둥처럼 마냥 선채로 바다만 바라보았다.

센다이 역은 무척 붐볐다.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사람들은 제 갈 길을 서로 서두르고 있었다.
아무리 늦어도 최소한 오후 6시까지 동경 우에노 역에 도착해야 하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전철 출발까지 10분쯤 남은 시간도 아까웠다.
점심을 굶었다는 생각에 달리다시피 걸어서 역구내 상점에 들어가 도시락을 샀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티켓의 차량번호를 확인하고 좌석을 찾아 앉자마자 전철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다. 일년전이나 지금이나 이 땅엔 아무런 일도 없었다.
시속 300 킬로를 달리는 전철 안에서 도시락 뚜껑을 여는 내 손이 바쁘다. 옆에 앞에 뒤에 건너편에 앉은 사람들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어느 누구도 잠시라도 쉬지 않았다. 누군가는 랩톱을 꺼내놓고 열심히 자판을 두들기고 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입에 가득 뭔가를 집어넣고 우물거리면서 손가락 끝으로 스마트폰을 문지르고 있었다.
나도 역시 마른입에 밥을 거푸 집어넣으면서 두꺼운 ‘열차 시각표’ 책을 펴 깨알 같은 숫자를 읽고 있다.
꼭 필요해서 읽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생각 없이 그냥 보고 있을 뿐이다.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이 그냥 보고 있을 뿐이다.
누군가가 슬그머니 창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차창 밖으로 급하게 스쳐가는 바람소리를 타고 農夫 배우 <타케구치 노리야키>의 절규하는 듯한 낭송 소리가 들렸다.
나는 밥알을 씹으면서 귀를 기울였다.


「구경꾼들」

보고 있다
거리가 도살장으로 변해 버린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저들이 일제히,
일제히 총검을 빼들어
우리들 목줄기를 겨누고 있는 모습을

벽 너머에 몸을 숨기고
사람의 목숨이
일순간에
파리목숨으로 변하는 것을
보고 있었다.


시낭송을 끝내자마자 그가 즉시 창문을 굳게 닫았다. 창문을 닫기 직전 언뜻 스치는 그의 표정이 너무나 무정했다.
굳게 닫힌 창문은 이제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처럼 단단하게 걸어 잠겼다.
나는 마지막 남은 김밥 한 덩어리를 씹으면서 물병을 입에 대고 목을 뒤로 젖혔다.
그때 열차 문 위에 붙은 작은 LED 전광판에서 문자뉴스가 지나갔다. 후쿠이(福井)현의 오이(大飯) 원전 재가동을 결정했다는 뉴스였다.
뒤이어 북조선의 로켓 발사 뉴스가 지나갔다. 세상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 털끝만큼도 변한 것이 없었다.
도시락으로 배부른 나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신칸센 의자를 한껏 뒤로 재껴 편안하게 누웠다.  
달콤하게 쏟아지는 졸음을 희롱하면서 눈을 감았다.
시속 300 킬로를 질풍처럼 달리는 차창 밖에서 그 노인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이번 브레이트 소극장의 ‘광주오월’판화 전시회에 관하여 자랑할 만한 일이 여럿 있다.
1980년대 한국의 문화운동 활동가로써 브레히트 소극장 벽면에 전시된 내 판화들을 보면서
마치 원래의 고향으로 되돌아 왔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나도 화가 이전에 한명의 광대(廣大)이다. 역시 광대의 고향은 마당과 극장이다.
그리고 일본 최고의 배우들과 함께 무대를 만들었다는 것은 나에게 큰 자랑거리가 될 것이다.
특히 그들의 노력과 헌신으로 30 여년 전에 광주에서 태어난 판화가 오늘 후쿠시마 상황에서 새롭게 살아 움직였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다.
<고모리>님의 자상한 애정이 내 판화전시회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한겨울 새벽녘까지 온기가 남은 ‘유담뿌’를 닮은 그녀의 따뜻한 가슴이 브레히트 소극장을 항상 지키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해와 달과 별을 뜨고 지게 하여 소극장을 드넓은 우주공간으로 만드는 조명, 음향, 영상을 맡은 분들께도 감사한다. ‘진짜 홍성담’의 마음으로 무대를 만든 <미쯔시타 시게토>총감독과 그의 아름다운 부인 <홍미옥>님에게 감사하는 마음 가득하다.
시게토 감독의 고향은 오끼나와 바닷길 어느 섬이라고 했다. 나와 똑같은 ‘섬 놈’이라서 그런지 서로 눈빛만으로도 마음이 통했다.
그런데 걱정거리가 하나 있다. 어느 날 밤에 술 취한 <시게토>가 두 눈에 불을 켜고 ‘애완견’을 잡으러 무사시세키 주택가를
무작정 배회하지나 않을까라는 생각에 나는 은근히 불안해진다.
브레히트 소극장의 대표 어르신들과 <사쿠라이>사장님께서도 저의 전시회에 각별한 관심을 보여주셨다.
네팔음식으로 저와 배우들의 힘을 북돋아주신 <유코 오카모토 말라>는 네팔 민속춤의 명인이다.
또한 모든 관객들과 함께 나누어 먹을 수 있는 김밥을 만들어주신 <양유하>씨는 바로 지난여름에 ‘아리랑 타령’으로
‘재일여성문학‘에 등단했다. 나는 정작 짧은 詩임에도 불구하고 외우지 못하여 컨닝 페이퍼를 훔쳐보면서 겨우 시낭송을 마쳤지만,
다른 모든 배우들은 詩를 뜨거운 가슴으로 암기했다. <히구치 유카>와 <오오다와 다미키>의 목소리도 너무 아름다웠다.
<마치다 사토코>가 무대에 베이비 조명을 받는 모습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황해도 내림굿의 보유자 김금화 여사를 너무 빼 닮았다.
<구와바라 무쯔미> <사카모토 유키>도 모두 신들린 모습과 목소리였다.  
그리고 내게 이름도 말하지 않고 열심히 전시회를 도와주신 극장의 더 많은 사람들과 ’전야‘의 여러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맞다! 30 년전 판화 ’대동세상-1‘을 만들 때 트럭 운전수의 실제 모델은 <고화정>이 분명하다!
’대동세상-프레쉬 몹‘의 짧은 순간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종이에 고정된 흑백 판화의 인물들이 일순간에 살아나서 움직이며
관객들 사이로 뛰어 다녔다. 그림이 살아 움직인 것이다. 특히 프레쉬 몹에서 유일하게 빨간 옷을 입은 <아가짱>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어린 <아가짱>은 소녀가 될 쯤에 오늘 소극장에서 우리가 했던 일들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는지를 느끼면서
훌륭한 어른이 될 것이다.
이번 전시회를 알리는 인쇄물 디자인은 정말 내 마음에 들었다.
<오이카와 게이코>의 디자인엔 ’열정‘과 ’냉정‘이 서로 적절한 긴장관계를 잘 연출하고 있다.
오월판화전시회를 하면서 따로 감사를 드려야 할 분이 있다. <서승>선배님이다.
판화설명으로 단순하게 적은 나의 메모가 그의 충실한 번역에 의해 詩가 되었다.
혹시 내가 화가보다는 시인으로 불리게 되면 이것은 순전히 <서승>선배님 때문이다.
작가와의 대화 시간에 내 ’오월판화‘에 숨겨진 비밀을 나로 하여금 발설하도록 특별한 기회를 주신 <나카니시 신타로>교수님께
두 손을 모아 감사한다. 특히 전시회 내내 나에게 네팔의 신성한 기운을 전해준 소녀 <하와>와 보름달 보다 더 환한 표정의 <리행리>,
지금쯤 <홍창극>은 다리에 입은 화상(火傷)이 다 나았을까.
아무래도 다음에 도쿄를 방문할 기회가 있으면 필히 이번 전시회에 함께 했던 洪氏들을 모아서 ’홍씨 종친회(宗親會)‘를 해야 할 것 같다.

우리는 지난 일주일 동안 아름다웠다.
아름다움이 깊어지면 눈물이 난다.
그래, 눈물 나도록 모두 아름다웠다.

우리 모두, 우스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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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후쿠시마에서 '五月'을 보다 / 홍성담
이름: damibox


등록일: 2012-11-16 12:28
조회수: 1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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