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담의 그림창고


[광주정신이 과연 존재하기나 할까]
홍성담 · 화가

1. ‘오월항쟁’은 무엇인가.

정부는 오월광주민중항쟁을 ‘광주 민주화 운동’이라는 제법 멋들어진 이름을 지어주었다.

민주주의는 시민계급을 필요로 한다.
서구 민주주의의 역사는 억압받던 인민들이 당시 절대지배자였던 전제군주를 광장으로 끌어내 단두대에 올리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즉, 자신들을 억압했던 전제군주의 목을 자른 경험이 있는 인민들만이 시민계급으로 성장한다.
전제군주의 목에서 흘린 피를 손에 묻힌 인민들만이 민주주의를 시작할 수 있다.
민주주의는 이러한 시민계급이 만들어가는 정치 시스템이다.
다시 말해서 민주주의는 인민혁명의 역사를 밑천으로 발전한다.

그러면 ‘오월광주민중항쟁’은 무엇인가.

아시아는 길게는 2천년, 가깝게는 1천년 이상을 유교적 봉건체제를 유지해 왔다.
모든 체제에 그 고유한 이상국가의 개념이 있듯이 유교적 봉건체제도 이상국가를 꿈꾸고 있으나
실제 현실에서는 철저하게 신격화된 지배자와 노예화된 피지배자의 관계로 나타난다.
이러한 모습은 근대를 거쳐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서아시아, 또는 동남아시아의 근본주의적인 무슬림체제는 유교적 봉건체제의 변화된 모습이나 다를 바가 없다.
현대중국의 공산당의 주석제 시스템도 유교적 봉건체제의 또 다른 모습이다.
북한의 병영집체사회를 이루는 세습제나 소위 ‘주체사상’도 역시 유교적 봉건체제를 바탕에 깔고 있다.
타이완의 장제스 국부 체제도 역시 유교적 봉건주의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일본의 천황제와 침묵하는 다수 일본국민들의 감성도 역시 유교적 봉건주의를 철저하게 계승하고 있다.

모두 알다시피 한국의 민주주의는 미군정이 만들어주었다. 이때 ‘軍政’이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시 우리의 민주주의는 오늘날 우리의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원인이 된 동족상잔의 비극을 막지 못할 정도로 허술했다.
이 시각에도 우리사회 한 쪽에서는 쫓겨난 독재자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 국부론을 주장하고 있다.
독재자 박정희를 반신반인으로 떠받들고 있는 종교적 기현상도 사회일각에서 나타나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자신의 딸 보다 더 어린 여자의 품에 안겨서 부하의 총에 맞아 죽었어도
우리 국민들 대다수는 그의 죽음에 대해 땅을 치고 통곡하며 애도했다.
유교적 봉건제의 전형을 보여주는 에피소드이다.

그런 우리는 비로소 ‘오월광주민중항쟁’을 통해서 한국사회의 민낯을 알게 되었다.
동시에, 뻑하면 북한이 남침한다고 국민들에게 겁박을 주더니 전방의 군인들을 동원하여
백주대낮에 무고한 시민들을 잔인하게 죽였던 학살자가 대통령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항쟁 10일 동안 광주는 그까짓 국가나 나라의 시스템이 없이도 우리끼리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통령이나 시장이나 국회의원 따위가 없어도 우리끼리 잘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아니, 그따위 국가시스템이나 벼슬아치들은 오히려 우리들의 피를 빨아먹는 빈대나 거머리에 다름아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오월광주민중항쟁’의 역사적 의의는
현대 아시아의 사회시스템에 은밀하게 숨어서 사상적 거처와 감성적 가치와 행위적 당위성을 강고하게 틀어쥐고 있는
‘유교 봉건제의 주술성’에 대한 전면적인 혁명이었다.

2. 광주에 ‘광주정신’이 존재하기나 할까.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 중에 직접 경험해보지 못하면 절대 알 수 없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민주주의다. 지난 과거에 우리들 대다수는 유신독재도 민주주의로 믿어 확신하고 있었다.
민주주의의 합리성에 대해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절대 민주주의의 참 뜻을 알 수 없다.
둘째는 사회복지다. 복지를 직접 경험해본 사람은 그것이 얼마나 긴요하고 귀중한 것인지 깨닫는다.
일생에 단 한 번도 그런 경험이 없으니 그 소중함을 모른다.
그래서 지금 우리사회가 노인문제의 거대한 늪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 것이 눈에 훤하게 보이는데도
20만원짜리 보편적 노인복지마저 종북좌빨로 몰아가고 있다.
학교에서 아이들 점심을 국민들 세금으로 한 끼 먹이는 것도 마치 북한에 핵개발비용이나 퍼주는 것처럼 금기시 하고 있다.

물론, 1980년 ‘오월’ 당시에 광주시민들은 ‘민주주의’를 외쳤다.
경험해보지 못했으니, 민주주의의 참 뜻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고 외쳤다.
어쩌면 단순한 구호나 함성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어떤 다른 의미를 ‘민주주의’라는 보편적인 구호에 담았을지도 모른다.
바로 그것이다.

‘광주정신’은 ‘정의’의 실현이다.
不義한 모든 것들에 대해 저항하는 정신이다.

대통령이라도 不義하다면, 멱살을 쥐어 잡아 끌어내리는 정의의 정신이다.
국가나 나라가 인민에 대해 不義한 일을 저지른다면, 그런 따위를 깨부숴버리고,
정의가 바로 설 수 있는 새로운 국가와 나라를 건설하는 정신이다.

1980년대 내내 모든 시민들이 피땀 흘리며 싸웠던 ‘오월진상규명투쟁’이 그랬고,
국가가 한 도시를 학살의 구렁텅이에 쳐박아 넣어버리고 포기해버린 ‘오월광주’ 당시의 현장에서
우리는 사랑과 나눔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공동체 자치시스템을 목도하고 경험했다.

이 ‘正義의 정신’을 거론하기를 두려워한다면 인권도 민주주의도 평화도 모두 사탕발림에 불과한 정치적 레토릭일 뿐이다.
인권과 환경, 그리고 평화는 국가나 나라가, 혹은 어떤 혜안 있는 통치자가 베풀어주는 선물이 아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국가의 정부와 통치자는 인권과 환경과 평화를 짓밟는 것으로부터 애국심과 자신의 정치적 활로를 찾는다.
이젠, ‘오월광주’의 얼굴에서 정치적인 수사나 학문적인 수사로 쳐 발랐던 化粧과 분칠을 벗겨내고
당시의 야만과 대적했던 생얼을 보아야 한다.

‘광주정신’은 正義를 실현하려는 저항정신이며,
인민이 진정한 주인이 되는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려는 정신이다.

‘광주정신’은 불의에 대한 ‘저항의 권리’이다.

3. 광주정신과 아시아

‘세계 속에서의 광주정신’을 이야기해야 하는데, 필자가 세계를 들먹이기엔 소견이 너무 협소하여 불가하다.
단지, 오월광주가 현대아시아의 고질적인 병인 ‘유교적 봉건제’에 대한 일종의 혁명이었듯이
광주정신은 아시아의 인민들과 함께 나아가야 할 것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일본과 한국은 아직도 철저하게 미국의 아시아 군사전략의 전초기지나 보급기지로써 역할을 하고 있다.
냉전체제가 무너진 뒤에는 군사적 문제뿐만 아니라 경제적 문제에서도 그 역할을 떠맡고 있다.
중국 경제의 무차별적인 확대로 이러한 전초,보급기지 역할의 미래가 과연 어떤 상황을 초래할 것인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미국은 중국 견제를 위해서 한미일 안보조약을 서두르고 있다.
어쩌면 가까운 미래에 마치 지금의 한미연합사령부에 우리의 군사작전권이 있듯이
한국군은 자위대에 군사작전권을 양도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말은 단지 기우만이 아닌 듯하다.
영리한 부자나라는 자신들의 이해관계가 걸린 전쟁을 꼭 이웃나라에서 벌인다.
종북몰이와 좌빨몰이로 무장한 증오심이 싱싱하게 살아있는 분단 한반도는
각 나라의 이해가 걸린 전쟁현장으로 간택받기가 훨씬 수월하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사태에서 보았듯이 원자력발전소의 핵사고는 피할 수 없다.
한국이 세계에서 핵발전소의 밀집도가 가장 높으며, 또한 핵발전소 주변의 대도시와 인구 밀집도가 가장 높다.
향후 우리 인류에게 다시 핵사고의 재앙이 주어진다면 아무래도 원전비리문제와 가짜 부품문제로 점철된
한국의 월성이나 고리, 영광, 이 셋 중에 하나가 또 인류의 핵사고 역사를 기록할 만한 일이 터지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도
무리한 생각이 아니다.
전혀 예기치 못한 곳에서 벌어지기 때문에 ‘사고’라고 한다.
고리나 월성은 그나마 노후원전이기 때문에 누구나 적잖이 긴장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래서 영광 한빛 원전이 사고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만약 영광 한빛이 후쿠시마 수준으로 셧다운이 된다면
바람의 방향과 상관없이 광주는 두 시간 만에 고농도 방사능으로 파국을 맞이할 것이다.
어쩌면 광주는 영원히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즉, 인류에게 닥친 보편적인 에너지 문제다.

그리고 유독 아시아만이 식민지시대의 잔재를 아직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식민지배의 유산 중 하나인 차별정책의 후유증이 아직까지도 타민족과 혹은 같은 민족 내에서 심한 갈등을 겪고 있다.
이것은 크고 작은 전쟁으로, 또는 참혹한 국가폭력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환경은 경제세계화로 인해 빈부의 격차를 더욱 심화시키고 빈곤층을 양산하고 있다.
이러한 모든 문제를 풀어가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 ‘유교적 봉건제’로부터 벗어나는 일이다.
국왕이든, 대통령이든, 수상이든, 천황이든, 그 어떤 벼슬아치든
바로 ‘나’와 하등에 다를바가 없는 한사람의 ‘개인’이라는 의식이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국가든, 나라든, 민족이든 간에 한 ‘개인’의 생명이나 자유보다 더 우위에 설 수 없다는 의식이 살아나야 한다.
그러한 자유로운 영혼들끼리 엮어지는 공동체를 만들어서 새로운 미래를 열 수 있다는 희망이 살아나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총체적(육신과 영혼)으로 실패한 사회주의나 자본주의를 대신할 미래의 대안을 찾을 수 있다.

세계인권선언이나 광주인권헌장에서도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몇 가지 사항들만
나열해 놓았을 뿐이지(궁극적으로 권고사항일 뿐),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저항권’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4. 광주정신과 비엔날레

광주비엔날레는 한국의 문화기획 중에서 세계화에 성공한 몇 가지 행사 중 하나다.
물론, 이것은 지방정부의 적극적인 지원과 지방정부의 문화부분 예산중에서 가장 압도적으로 많은 예산의 힘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다.
아마 현재 지구상에서 열리는 다양한 미술 기획전시회 가운데 이러한 정책적 배려와 예산 지원을 받는 행사가 또 있을까 의문스럽다.
그런 만큼, 광주시민이 비엔날레를 통해서 무엇을 얻고 있는지 궁금하다는 사람도 많다.
한마디로 말해서(어줍잖게 요리조리 돌리지 않고 쉽게 말하자면), 광주비엔날레는 ‘광주오월’ 당시에 흘린 시민들의 피값으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들이 흘린 피의 참 의미를 문화적으로 승화시켜 세계에 보여주자는 의도가 있었다.

물론 현대미술은 작품보다 해몽이 더 쉬울 때가 많다.
그만큼 해몽에 따라서 작품의 내용이 좌지우지 된다는 이야기겠다.
옛적 우리는 이런 것을 두고 귀에 대면 귀거리요, 코에 대면 코걸이라는 말을 했다.
귀거리에서 코걸이로 만들기 위해서, 때로는 코걸이에서 귀거리의 운명을 발견하기 위해서
그리스로마신화에서부터 마르크스, 헤겔, 프로이드, 융, 라깡, 푸코, 데리다, 들레즈까지 동원되어야 한다.
그래서 이런 현란한 언어로 지금까지 비엔날레에서 보여주었던 것은 광주정신이 승화된 그 어떤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나도 별로 할 말이 없다.  

마르크스도 아시아적 생산양식에 대해서 언급하기를 어려워했다.
지구 뒤편에 있던 예술가 한 사람이 천재적 상상력이 발동하여 아시아에서도 가장 착종된 근현대를 보이는
분단 한반도의 광주정신을 승화시키는 작업이 부지불식간에 나왔더란 말인가.
물론 예술이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나도 동의할 수 있다.
그렇다면 승화가 조금 덜 된 광주정신의 작품이라도 비엔날레의 나이와 함께 켜켜이 쌓아올린 전시회 프로그램이
비엔날레에 있었던가 하는 생각도 든다.
오월전이니, 인권전이니 하는 몇몇 특별전이 있었지만 단발적으로 들러리 노릇이나 했을 뿐이다.
아! 들러리라니! 광주의 피값이 들러리라니!

그리고, 단 한번이라도 광주를 중심에 둔 아시아의 시선으로 세계미술을 바라보았던 적이 있었던가.
물론 세계미술이 아니라 세계미술시장을 바라 본 적은 한두번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우리 땅의 여러 가지 현상을 서구 지식인들의 가증스럽고 소박한 오리엔탈리즘으로 바라보았던 적이 한 번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예술적 상상력을 그리스 로마 신화로부터 삼국유사로 대신해 본 적이 있었던가.
7천2백위의 신을 갖고 있는 신의 섬 ‘제주도’의 설화가 그리스 로마의 신들을 대체해 본적이 있었던가.
헤겔 대신에 이황이나 이이로 대신해 본 적이 있었던가.
정다산이나 허균은? 최제우와 최시형의 동학사상은?

합법칙성을 다루는 인문학에서도 활발한 상상력이 새로운 학설과 시선을 창조한다.
하물며 학술심포지움도 아닌 예술행사기획에서 이런 정도의 상상력을 발휘해보지도 못한다면
아마 향후 2천년은 더 서구 미술평론가나 이론가들의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녀야 할 것이며,
그들이 만들어놓은 시선으로 우리의 한국미술을 분석하고 정리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형상을 정신적 식민지 상태라고 말한다.

‘광주오월’은 정신적 식민지 상태를 거부하는 것에서 출발했다.
모든 두려움과 공포와 싸워 이겼다. 저들이 만들어 놓은 합법칙성을 거부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피 흘려 싸워서
기어코 우리의 합법칙성을 만들어냈다. 이것이 ‘광주정신’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몇 년 전 광주 시립미술관 개인전과 기획전에서 외부의 압력 때문에 두 번이나 작품을 내려야 했다.
모두 현직 대통령을 비판했다는 이유였다.
서구의 어떤 나라에서도 현직 대통령을 비판했다는 이유 때문에 국공립 미술관에서 작품이 내려졌다는 소식을 접하지 못했다.
심지어 오월재단 갤러리에서 했던 기획전에서도 현직 대통령을 풍자비판 했다는 이유로 후배 작가의 작품이 철거되었다.
이것이 광주의 현실이다.
이런 광주가 세계의 작가들을 상대로 엄청난 예산을 쏟아 부어서 비엔날레를 한다는 것도 우습고,
문화의 도시라고 우쭐대는 것도 허탈하고,
인권의 도시라고 방정떠는 모습도 꼴사납다.

광주시민들에게 가장 이득이 되는 방법은 당장이라도 비엔날레를 해체하고 문화복지 비용으로 돌리는 것이다.
그래서 더 많은 광주작가들이 창작 지원을 받고 더 많은 시민들이 문화복지를 누리는 것이다.
그러나 20년의 비엔날레 역사가 아깝다.
그리고 세계 미술계를 향해 여러 가지 약속과 우쭐댔던 장면도 부끄럽다.
마치 북중수교 이후에 한국의 졸부들이 앞 다투어 연변에 몰려가 1만원권 지폐를 흔들며 돈 자랑했던 때가 생각난다.
그렇다고 20년이 지난 지금의 광주시민이 비엔날레 덕분에 예술정신에 매료되어
특별하게 문화를 향수하는 생활을 누리는 것도 아니고,
또한 세계의 미술시장이 일부분이라도 광주로 옮겨와서 광주의 미술시장이 활성화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광주비엔날레가 지속될 수 있는 진정한 길은 ‘광주정신’을 아시아의 각 나라와 민족에게 발신하는 문화적 행사로써 거듭나야 한다.
물론 때로는 그들로부터 수신을 받을 수도 있다.
예산을 한 푼이라도 더 타내기 위해서 그놈의 ‘세계’니 ‘국제’니 하는 말도 이제 그만 신물이 난다.
제발 원숭이 노릇 좀 그만하자.
국제적인 호구 노릇 좀 그만하자.
이젠 20년의 나이라면 서구미술의 꼬붕 노릇에도 이골이 날 때가 되었다.
요즘 국제 대형 전시프로젝트에서 유행이다시피 하는 미디어 설치 아트만 예를 들더라도,
그 부분에서 미국 방위산업을 따라갈 예술가가 지구상에 존재할 수 있겠는가.
이미 1969년 인류 최초로 핸드폰을 든 암스트롱의 달 착륙을 세계에 중계하는 ‘아트’라니!

미국 펜타곤은 이라크 전쟁에서 GPS에 의한 크루즈 미사일 정밀 타격을 전세계에 중계했다.
우리는 이것을 전 지구를 대상으로 하는 미디어 아트라고 불어야 할까?  
미국방장관 럼스펠트는 이렇게 미학적으로 평론했다.

‘우리는 메스로 도려내듯이 폭격하고 있다’

요즘 융합이니 통섭이니 별로 일상에서 써먹지 못하는 말이 문화현상에서 유행하고 있다.
예술의 각 장르를 불문하고 각 지역의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현상과 함께 하는 미술을
그 지역의 고유한 전통 사상으로써 분석하고 정리하는 모습까지 담아내는 아시아 비엔날레로 거듭나기를 조심스럽게 주장해 본다.
이러한 새로운 문화적 현상을 광주비엔날레가 이끌어가야 한다.

광주비엔날레는 재단과 시민과 관청과의 관계 시스템은 물론, 기획에서 전시까지 총체적으로 변화하지 않으면
결국 머지않은 장래에 시민들이 던지는 돌멩이에 맞아 침몰당할 것이다.
비엔날레의 태동에서부터 지금까지의 진행과정에서 광주시민들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불의’가 있었는지도 되돌아봐야 한다.

전면적으로 변화해야 한다.
비엔날레 본 행사 자체는 어영부영 그대로 두면서 이번 ‘광주정신 특별전’처럼 끼어 넣기 식의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변화는
아무런 필요가 없다.
예산만 낭비할 뿐, 유효한 변화를 기대하기 힘들다.  

가끔 서구인들이 <‘광주비엔날레’가 잘하고 있다>라는 말의 본질을 잘 알아야 한다.
이 고마운 말을 제대로 해석하면 다음과 같이 눈물겹다.

‘햐! 니덜 돈 많이 퍼붓더니 우리덜의 흉내를 확실하게 냈구나!
허허허 우리보다 나은 구석도 있다야! 거참! 대단하다’

‘아흐! 원숭이덜이 대단하네!’

카피하는 자는 절대 창조할 수 없다.
서구비엔날레를 더 이상 카피하기엔 돈도 아깝고, 그렇게 백년을 유지하더라도 진정한 의미에서 절대 우리 것이 될 수 없다.
무모하고, 도발적이고, 혁명적이고, 위험하고, 등골이 서늘하고, 싸가지 없고, 아슬아슬하고, 숨 막히고,
기가 막히고, 지극히 불온한 상상력이 필요하다.

그러한 상상력을 발휘하기가 두려운가?
당근 몹시 두려울 것이다. 그래서 직·간접적으로 관이 개입하는 문화행사는 새로운 문화의 전형을 절대 창조할 수가 없다.
문화복지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최상의 진리다.
누워서 침 뱉기지만 대한민국 관료나 공무원들은 자신들이 지원하지 않는 문화행사도 간섭을 하고 싶어 안달이다.
하물며 엄청난 예산과 각종 지원을 하는 비엔날레를 간섭하지 못하면 아마도 자존심이 상해서 공황장애를 겪을게 분명하다.
가만 놓아두고 싶어도 ‘공안’기관의 안부 전화 한 통화면 똥줄이 탄다.
그래서 문화 전문가는 뒷전으로 밀리고 관료나 공무원이 스스로 검열을 하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정상적인 국가에서 공무원이나 관료 따위가 감히 예술가들의 상상력에 검열의 칼질을 하는 일은 대한민국이 유일한 나라일 것이다.
자칭 문화와 인권의 도시라는 광주가 그러니 다른 지역은 더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작가들에게 겨우 1,2백만원 지원하는 일에도 이러저러한 간섭과 타부가 굴비 엮듯이 줄줄 따라다닌다.

광주비엔날레는 이제 창조의 시대로 들어서야한다.
서구의 눈으로는 보이지도 않고 이해할 수도 없으며 분석할 수도 없는 아시아의 새로운 문화현상에 눈을 돌려야 한다.
아시아라고 해서 다 아시아가 아니다.
이를테면 서구의 눈으로 간택된 중국의 신팝아트 같은 것은 애초부터 거리가 멀다.
아시아 각 지역의 첨예한 삶의 현장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문화현상, ‘큐브나 화이트’로부터 이미 자유롭게 떨어져 나가
삶의 현장에서 치열하게 벌어지는 다양한 문화현상에 주목해야 한다.
아니, 그러한 새로운 문화현상을 주도해야 한다.

이젠 광주시민들도 알만큼 안다.
말이 좋아서 ‘큐레이터’지, 사실상 세계미술시장의 브로커들을 죄다 광주에 불러다가
광주시민 세금으로 그들의 이력서에 한 줄 채워주는 일만 하고 있다는 시민들의 날선 비판도 잘 새겨들어야 한다.
(2014.3/ 광주비엔날레- 광주정신이란 무엇인가(토론회)/홍성담 ·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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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광주정신이 과연 존재하기나 할까 - 2014.3 / 광주비엔난레-광주정신은 무엇인가(토론발제)
이름: damibox


등록일: 2014-05-24 10:38
조회수: 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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