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담의 그림창고


[내가 원하는 것은 ‘소독되어진 표현의 자유’가 아니다]

- 홍성담이 그린 ‘골든타임 - 외과의사 최인혁, 갓 태어난 각하에게 거수경례를 하다’
   즉, 일명 ‘出産그림’에 대하여 -

1. 왜 ‘의사 최인혁’인가.

2012년 가을에 모 지상파 TV방송에서 월화 드라마로 일종의 메디칼 드라마 ‘골든타임’을 방영했다.
물론 예전에도 한국産 메디칼 드라마가 있었지만 대부분 병원에서 근무하는 사람들 끼리
병원內 권력게임과 사랑놀음을 적당하게 비벼서 만든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이번 ‘골든타임’은 외상사고를 당한 다양한 응급환자를 수술하고 치료해가는 과정을 제법 리얼하게 묘사한 드라마다.
특히 외과의사 최인혁으로 분한 이성민, 그리고 인턴 의사 역할을 무리 없이 잘 소화한 이선균과 황정음,
맛깔스러운 부산 사투리로 담당 간호사의 복잡한 심경을 담백하게 표현하는 송선미의 연기는
시청자들에게 오랜만에 볼만한 안방 드라마를 만들어주었다.

중증외상사고를 당한 직후 약 30분 동안 어떻게 치료를 하느냐에 따라 환자의 생명이 좌우된다.
이 ‘30분’을 ‘골든타임’이라고 한다. 즉 환자의 생명을 살려낼 수 있는 ‘神이 허락한 시간’이라고나 할까.
현대사회에서는 어느 누구나 대형 외상사고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흉기를 든 범죄, 언제든지 무너져 주저앉을 수 있는 고층빌딩,
-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을 기억하자 - 집집마다 폭탄처럼 안고 살아야 하는 가스렌지, 그리고 너무나 많은 교통사고,
- OECD 가입 국가 중에 교통사고 사망률 1위가 대한민국이다. 영광스럽게 슬프다.
- 특히 요즘 아이들부터 어른까지 어지간한 고민만 있어도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리기를 날마다 널뛰듯 하고 있지 않던가
- 제기랄! 대한민국이 자살률도 항상 금메달이지!
- 그런데 가만히 더 생각해보니 우리나라의 현실이 일찍이 응급 외상사고 환자의 상태와 닮지 않았던가.
한번 더 주변을 널찍하게 둘러보자.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단 한군데라도 제대로 제 기능을 다해서 돌아가는 부분이 있는가.
대통령에서부터 민초들까지, 검찰부터 저 아래 강간범까지, 재벌에서 골목길 구멍가게까지, 대학교수 학자부터 보육원 강사까지.....
이런 대한민국이 진즉에 망하지 않았다는 것이 신기할 뿐이다.
아흐! 우리나라는 지금 ‘골든타임’에 든 절대절명의 外傷 內傷 他傷 自傷 환자임에 분명하다.
암튼 이런저런 외상사고의 과다증에 걸린 대한민국임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 병원들은 이익을 많이 남겨줄 병에 걸린 환자들을 반길뿐,
- 특히 강남의 잘나가는 성형외과는 수술비를 현금으로 지불할 경우 약 30%쯤 깎아 주기도 한다. 성형을 하고 싶은 여성들은 참고하시라.
- 병원들은 환자의 소생 성공률이 낮은 외상사고 환자를 대부분 싫어한다.
그리고 의사들도 힘이 들고 돈을 많이 못 버는 科 보다는 손쉽게 대박 낼 수 있는 科를 선택한다.

이런 시류에도 드라마 ‘골든타임’에서 우리의 외과의사 최인혁은 주변 동료의사들의 왕따와 조롱에도 불구하고
외상응급환자에 대한 시술과 치료를 자신의 사명으로 받아들인다.
그는 환자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는 의사가 해야 할 어떠한 어려운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리고 매사를 적당하게 대충대충 넘기는 일이 없다.
과도한 언론의 조명이나 혹은 정치인들의 관심도 환자의 생명을 살리는데 불필요한 것이면 단호하게 싫어한다.
- 아! 나도 최인혁 처럼 살아가고 싶다. 洪인혁!  이름도 멋있다 -

딸 박근혜가 지 애비를 닮은 아기를 낳는 광경을 그린 내 그림에서 의사의 소명에 투철한 ‘외과 의사 최인혁’이는
한껏 망가지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예전의 가카를 닮은 갓 태어난 아기를 보고 자기도 모르게 몸이 먼저 ‘차으~렷!’ 자세로 거수경례를 하는
의사 최인혁의 망가지는 모습을 그려놓고 나는 너무 즐거워서 혼자 키득 키득 소리를 내며 한참이나 웃었다.
그렇다. 1970년대를 제 정신줄 놓지 않고 살아온 사람이라면 ‘가카 닮은 갓 태어난 아기’를 보고 놀라지 않을 사람이 없다.
그토록 의사의 직분에 투철한 최인혁 마저도 차렷 자세로 거수경례를 할 수 밖에 없는 정신적인 충격을 나는 충분히 이해 할 수 있다.
초법적인 국가권력의 저 극악무도한 세월 1970년대를 제 정신줄 꽉 잡고 살아온 사람이라면
40 여년이 지난 지금이라도 가카의 음성이나 사진만 봐도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래서 내 그림 ‘골든타임’의  ‘외과의사 최인혁’은 1970년대 학번임이 틀림없다.  

2. 왜 박근혜가 出産을 하는가.

왜 이런 구질구질한 질문을 하는가.
이런 구차한 것을 ‘질문’이라고 하는가.
나의 대답은 너무 쉽다.

왜 박근혜가 출산을 하시냐고?

[正答] 女子이기 때문이다. - 내가 이런 대답을 하면 말꼬리 따먹기 좋아하는 땍땍거리는 여성주의자들이(모든 여성주의자들이 땍땍거린다는 말은 아니다.
여성주의자들 중엔 내가 존경하는 사람들도 많다. 엊그제 모일간지에 女性學 학자 정희진이 쓴 ‘행복한 대통령’이라는 칼럼은 정말 감동적으로 읽었다)
기회는 이때다 싶어 일제히 승냥이처럼 달려들겠지만 그래도 내 대답은 마찬가지다. ‘여자이기 때문이다’
물론 발달한 과학으로 남성의 몸도 인큐베이터처럼 아기를 임신했다가 출산할 수도 있겠지만...
그게 임신과 출산을 흉내 내는 것이지, 진정한 출산이라고 볼 수 없다. 각설하고 박근혜는 女子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시각엔 그녀는 어엿한 ‘女性대통령’으로써 청와대에서 집무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말에 힘든 일을 곧장 産苦 혹은 産痛에 비유한다.
가카가 김재규의 총탄에 맞아 서거하고 딸 박근혜가 청와대를 걸어 나온지 약 35년 만에 드디어 대한민국의 대통령에 출마했으니
그녀의 인생 전체를 대통령이 되기 위한 産苦에 비유하는 것도 부족하다.
내가 이런 변명과 같은 대답을 꼭 해야 하는가.
나는 이런 구질구질한 대답을 할 의무가 있다. 왜냐면 51%의 국민들은 이렇게 쉽게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이런 단순한 문제를 이해할 수 있는 머리가 잠시 외출중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딸 박근혜는 35년의 産苦와 産痛 끝에 결국 4천만 국민을 불호령하는 대통령 자리에 앉은 것이다.

2012년 가을 김영삼 전대통령의 아들 김현철이 某월간지 인터뷰에서 말했다.
‘박근혜와 최태민, 둘 사이에 자식이 있다. 현재 30대 여성이다. 일본에 숨어살고 있다.
더 자세한 팩트는 내 아버지가 모두 알고 계신다’

또한, 딸 박근혜의 고모부뻘되는 김종필 前중앙정보부장 前국무총리도 이와 흡사한 이야기를 했다.

‘팔푼이가...대통령은 무슨...................최태민.........’

아! 이건 정말이지, 위 기사는 각종 일간지에도 대문짝만하게 나왔었다.
이런 이야기가 사실이든 허구든지 예술가에게 얼마나 좋은 소재(素材)거리 인가.
풍자와 야유의 예술형식에서는 누구나 다~ 뻔히 알고있는 사실보다는 시중에 암암리에 떠도는
이런 종류의 유언비어 허구 픽션이 훨씬 더 구미가 당기는 법이다.
이런 나의 말에 일베충이나 십알단은 팽! 돌아서서 당장에 ‘넌 평생 허구나 소문을 소재로 싸가지 없는 그림이나 그려라!’라고 삿대질하며 지롤발광 떨겠지만,
아흐! 내가 지대로 갈켜줄께!
‘얌마! 예술가가 뭔 법학자, 회계사, 道士, 예수, 부처인줄 알어? 예술이 眞理냐? 예술이 성서냐? 예술이 과학이냐? 예술이 회계냐?
예술적 영감을 꼭 道德經이나 四書五經에서 얻어야 하냐?’  

예술이란 인간의 고통과 온갖 들척지근한 욕망이 싸질러놓은 설사 똥에,
인간이 만든 문명의 쓰레기들이 합쳐져 흘러내리는 던적스러운 곳에 뿌리를 박아 가까스로 피워낸 한송이 꽃이다.

예술은 善이 아니다.
예술은 道가 아니다.
예술은 眞理가 아니다.
예술은 會計가 아니란 말이다.

3. 딸 박근혜는 ‘유신 공주’가 아니라 ‘유신독재의 여왕님’ 이셨다.

그녀가 단순히 ‘유신의 딸’이었던가?
아니다. 유신 그 자체였다. 그녀도 여러 인터뷰에서 자랑스럽게 이야기 하지 않았던가.
어머니 육영수여사가 숨진 이후에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다고.
그게 그냥 단순한 퍼스트레이디 역할이었던가? 당시 박근혜 퍼스트레이디의 역할에 비하면
이명박의 발꾸락다이어 김윤옥 여사의 韓食 세계화는 정말 순박하다 못해 찌질하다.
당시 그녀가 총재로 있던 전국조직 ‘구국여성봉사단’이라는 단체는 무슨 일을 했던가.
그리고 역시 그녀가 총재가 되어 전국 읍,면,동,리 까지 조직했던 ‘한마음 운동본부’라는 단체는 무엇이라는 말인가.
모두 아버지 가카의 영구집권을 위해 국민들의 정신과 몸을 유신독재에 길들이기 위한 프로파간다가 아니었던가.
그녀의 퍼스트레이디 역할은 아버지 가카의 단순한 하부 권력이 아니라 국민의 몸과 마음을 사로잡아서 길들였던 실제 권력이었다.
비유할 바는 아니지만 히틀러의 시대에 괴벨스라는 선전선동 프로파간다가 있었듯이, 그녀는 유신독재의 실질적 ‘이데올러거’였던 것이다.
그녀는 유신 공주가 아니다.
‘유신독재의 여왕님’ 이셨다.
유신독재, 그 자체였다.
그녀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번도 '국민'이었던 적이 없었다.

4. 딸이 아버지를 낳는 패륜그림이다.

51%의 국민들 중에서 일베충들이 했던 말이다.

‘딸이 아버지를 낳는 패륜 그림이다’

나는 딸 박근혜가 만약 대통령이 된다면 아버지 가카를 닮은 통치와 정책을 펼 수밖에 없을 것이다라는 상상을 했던 것이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가는 잠시 후 저 아래서 다시 이야기 하겠다.
젠장할! 어떤 여성이 자신의 아버지를 닮은 아기를 낳는 것은 과학이다.
DNA 혹은 ‘유전’이라는 말은 모두 들어보았겠지?
이 분명한 과학적 사실을 일베충들은 이런 허구로 바꾸어서 왜장을 쳤다.

‘딸이 아버지를 낳았다네!’

이런? 일베충들아! 어찌 딸이 애비를 낳는다는 상상을 할 수가 있노?
이 친구들이 생각하는 것은 어찌 매사가 이렇게 변태스럽노?
차라리 니덜이 예술가 노릇을 해라!
예술가인 나도 감히 상상 할 수 없는 그런 멋진 생각을 하다니... 당신들이야말로 진정한 예술가의 비범성을 지녔구나!
그야말로 극악무도한 변태가 만들어낸 패륜이 온 천지를 다 덮었구나.

물론 그들이 저럴 수밖에 없는 복잡한 심경을 나는 이해한다.
우리말에 ‘도둑넘이 제 발 저린다’는 말이 있다.
자기네들이 몰래몰래 염원하던 생각이 - 박정희 유신독재와 같은 세상이 대한민국에 다시 도래해야 한다는 생각 - 그림에 언듯
나타나 있으니 제 발 저린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 할 수 있지만, 천만에 나의 그림은 과학적 사실을 말했을 뿐이다.
딸 박근혜가 아기를 낳는다는 가정아래 생각해 보자.
아기는 어머니나 아버지를 당근 닮아야 하고, 또한 할아버지나 조상의 유전자를 물려받아
그 모습이나 성정이 닮는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 아니던가.
만약 내 그림의 아기가 배우 장동건을 닮았다면 니들 입에서 이런 소리가 나올 뻔 했네.

‘박근혜와 장동건 사이에 아기가 있따아!’

대부분의 환쟁이들이 인물화를 그릴 때 그림의 이목구비가 아무래도 화가 자신의 얼굴을 닮는다.
눈이 큰 사람은 그림을 그릴 때도 눈을 화등잔 만하게 그리고, 광대뼈가 툭 튀어나온 화가는 자신이 그린 인물의
광대뼈도 툭 튀어 나오기 마련이다. 물론 내공이 약한 화가들에게 흔히 보이는 습관에 불과하다.
그래서....만약... 내가 혹시 잘못하여 조선의 도적 임꺽정 같은 얼짱 내 모습을 닮게 아기를 그렸다면.....니덜이 과연 뭐라고
왜장을 쳤을지....아흐! 동동다리! 상상하기조차 두렵다.

5. 出産은 성스럽다고?

새누리당 여성 의원들이 분기탱천하여 이렇게 목 놓아 부르짖었던가?

‘성스러운 出産 모습을 卑下한 화가에게 대한민국의 모든 여성들은 분노하라!’

‘여성들이 가장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산부인과 수술 장면을 그린 환쟁이에게
대한민국 여성들은 모두 떨쳐 일어나 분노하라! 부르르...‘

허허허! 내가 이 그림을 그리기 전에 꼭 이런 소리가 나올 줄 알고 있었지.
‘땍땍이 여성주의자’들(모든 여성주의자들이 다~ ‘땍땍이’라는 말은 아니다)이
옳다구나! 이때다! 싶어서 ‘수치심’ 과 ‘성스러운 출산’ 운운하며 ‘性스러운 여성주의’를
버르장머리 없는 남근처럼 확대 과장하여 키워낼 줄 알았다.
그래서 이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나는 여러 가지 많은 생각을 했다.
물론 주변의 속이 깊은 사람들과 그림을 직접 보면서 논의도 했다.
내가 여복이 많은 탓에 내 지인들 중엔 지극히 여성스러운 여인들도, 땍땍이 여성주의자들도 많다.

암튼, 결론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내가 내린 결론이다.
특히 한 나라의 대통령 후보로 나선 여인의 과거사와 관련하여 이런 정도의 풍자와 야유는
예술가에게 있어서 지극히 정당하고 당연하다.

임산부가 산부인과의 분만의자에 앉아 출산하는 것이 왜 수치심인가?
여성이 출산하는 것은 인간세상에서 당연하고도 자랑스러운 이치이고
남성이 군입대하여 나이 어린 선임이 까라면 까고, 문대라면 문대고 ㅈ 잡고 구보 훈련하는 것도 당연한 이치이고 -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또 땍땍이 여성주의자들은 남근주의로 똘똘 뭉쳐진 군대문화에 쩔은 환쟁이라고 욕하겠지?
그런데 군대 면제 받고 장차관 자리에 앉은 수많은 넘들은 인권 운운하며 이걸 애국심이 아니라
‘수치심’으로 여겨서 군대를 거부했을까.
그러나 나는 아직 성소수자에 대해선 글쎄.... 암튼 머리로는 이해를 하겠는데 가슴으론 아직 이해가 부족하다.
왜냐면, 나는 그들을 직접 만나서 서로 맘을 터놓고 이야길 해볼 기회를 갖지 못했다. 각설하고....

분만의자에 앉는 것이 여성의 ‘수치심’을 유발하는 것이라고 지랄을 떠는 땍땍이 여성주의자들은
‘임신’도 수치스러워할 못난이 팔푼이 여성들임이 분명하다.

땍땍이 여성주의자들이여! 이 비루하게 못난 여성들이여!
슈퍼 모델 <변정수>에게 배워라!

2006년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모델 <변정수>는 某여성월간지 표지에 자신의 임신한 모습을 공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성들의 그 어떤 모습보다 임산부 때 모습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이라 생각한다.
모든 임산부들이 당당하고, 임산부를 위해 먼저 배려해주는 시민의식이 갖춰지면 좋겠다’

말하기 좋아하는 넘들은 우리의 <변정수>가 헐리우드 여배우 <데미 무어>를 흉내 냈다며 말꼬리를 얹었지만,
미국과 한국의 사회문화를 감안한다면 당시 변정수의 ‘임산부 모델’은 한국인들에게 ‘임신’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를
다시한번 일깨워 주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도 역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이 임신한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길을 걷거나 지하철에서나 임신한 여성을 보면 그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황홀하기까지 하다.
예전에 봤던 어느 영화의 <슈왈즈제너거> 처럼 나도 임신을 한번 경험해보고 싶다.
<터미네이터>를 연기했던 근육질의 배우인 그가 남성임산부의 역할을 자상하게 하는 것을 보고 나는 감탄했다.
아! 비로소 저 화상이 임산부 연기로써 우리시대 손꼽는 명배우의 반열에 오르는구나!

기독교 성서 내용을 도해하여 그린 수많은 ‘수태고지’ 그림들에 나온 임산부 마리아는 성스럽고,
내 그림에 나오는 임산부는 수치스럽다니 이게 과연 말(馬)이 되는 말(末)이냐는 말(魔)이다?

현대미술에서도 出産은 자주 그림의 소재가 되었다.
미국 현대미술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는 페미니스트 화가 <모니카 스주>나 멕시코의 여성화가<프리다 칼로>의 出産그림을 보고
내 젊은 날에는 흉측하게 느끼기도 했지만 내 나이가 들수록  그녀들의 出産그림에서 처연한 아름다움을 느낀다.
그러니까 당신들도 나이가 들어 내 그림 ‘골든타임’을 다시 보면서 한시대의 처연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바로 작년 11월 후쿠오카에 있는 아시아미술관에서 인도네시아 화가 <모코흐>의 전시회를 보았다. 역시 出産그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신생아의 머리가 임산부의 검붉은 자궁을 비집고 세상으로 빠져나오고 있다.
흰 까운을 걸친 의사가 안경너머로 이 광경을 슬그머니 훔쳐보고 있다.

나도 역시 出産을 소재로 한 그림들을 많이 그렸다.
남들이 나의 대표작이라고 하는 ‘五月광주 민중항쟁 連作 판화’의 마지막 대미도 出産을 소재로 그린 판화로 완성되었다.
나는 그동안 출산을 소재로 하거나 주제로 작고 큰 그림들을 꽤 많이 그렸다.

出産!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기에 善惡을 떠나서 그 자체만으로 신비하고 아름답다!
가카 박정희를 세상에 내어놓은 출산도 성스럽고,
오월광주 학살 책임자인 전두환을 세상에 내어놓은 출산도 성스럽고,
연쇄살인범 유영철이나 강호순을 태어나게 했던 출산도 성스럽고,
대한제국을 팔아먹은 을사오적들의 출산도 성스럽고,
김정은이 태어난 출산도 성스럽고,
빈라덴의 출산도 성스럽다.
물론 박근혜와 땍땍이 여성주의자들을 세상에 내놓은 출산도 성스럽다.



봉산탈춤에 색시가 아기를 낳는 장면이 있다.
이 出産춤은 동작이 너무 리얼하다.
대부분의 탈춤 연구자들은 이 장면을 두고 ‘건강한 민초의 생명력’이라고 토를 단다.
그 말이 전혀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의 소견으로는 ‘민초들의 생명력’은 일종의 소재로써 出産춤의 구성 형식을 만들었고,
실제 말하고 싶은 내용은 분명히 따로 있다는 것이다. 즉, 당대의 현실에 합당한 주제와 목표가 있었을 것이다.
물론 가방끈이 짧은 내가 확증하기는 어렵지만 봉산탈춤의 전체를 관통하는 의미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상상하여
출산춤의 주제를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出産춤의 주제는 당시 손이 끊긴 왕가의 이런저런 모습을 야유했을 수도 있고,
당시의 정치현실을 좌지우지했던 어떤 권세가의 집안을 음험하게 비웃었을 수도 있다.
당시 광대들은 장마당에 모여든 백성들이 출산광경을 보고서 그냥 웃고 즐기라고 유희의 춤을 만들지 않았다.
출산춤에는 당대의 현실을 비판 풍자 야유하는 준엄한 메시지가 분명히 들어있었다.
조선 후기의 광대는 거의 노비보다 못한 취급을 받았다.
그런 그들도 민초들이 운집한 장마당에서 이렇게 출산을 소재로 권세가들을 야유하고 비판했다.
그러나 광대의 출산춤을 사대부나 양반들이 ‘수치심을 자극했다’ 혹은 ‘성스러운 출산을 비하했다’라고 지롤떨었다는 기록은
내 눈을 씻고 찾아봐도 단 한 줄도 없었다.

에라잇! 드응신덜!
조선후기 인민들의 고혈을 빨아먹기에 바빴던 사대부나 양반들 보다 지지리 못난 전근대적인 버러지들!
홍성담이가 성스러운 출산을 비하했다고라고라고?
니덜이 나의 ‘聖스러운 출산 그림’을 아주 ‘性스러운 출산’으로 오도 하고 있잖우?
아흐! 2012년 대명천지 대한민국에서 환쟁이 노릇하기가 조선후기의 광대 노릇하기보다  훨씬 더 어려운 시대인가 보다.
몇 년전부터 나라꼴 되어가는 것을 보고 이렇게 될 줄 나는 진즉에 알았지.
맞어! 요즘 市場美術의 생산과정을 보면 지금 환쟁이들은 현대판 노비계급에 불과하지. 미술옥션의 노비라고 할까?
부잣집 거실 벽면 인테리어를 책임진 몸종이라고 할까? 뭐 그게 다~ 우리덜 환쟁이들이 자초한 일이지 뭘! 노비나 노예 또는 종,
그게 현대 한국의 환쟁이들의 격에 맞춤한 것이라고.

‘대한민국 모든 여성들은 성스러운 출산을 비하한 그림에 분노하라!’며 지엄하고 자애로운 모성의 눈물샘을 자극하여
선거에서 여성의 동정표를 단 한 표라도 더 얻겠다고 팔 걷고 나선 새누리당 여성의원 몇 분덜과 그것에 부하뇌동하여
왜장치신 ‘땍땍이 여성주의자’덜!
대한민국의 여성성이 그렇게도 싸구려 모성인가?
물론 ‘여성대통령’이라는 감성정치를 자극하는 구호는 이번 대선결과에서 ‘싸구려 여성성’으로 퇴행하고 말았지만....
이 문제는 이것저것 따지기가 꽤 복잡하니까 따로 날짜 잡아서 이야기하자.

그런데 ‘聖스러운 出産’이라고 하셨습니까?
우리시대의 出産이 정녕 聖스럽습니까?

요즘 젊은 사람들은 결혼마저도 포기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결혼해도 아기를 낳지 않겠다는 젊은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팍팍한 현실에서 아기를 낳는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두렵다고 한다.
아기의 육아문제며, 보육비, 학교폭력, 끝이 없는 사교육비, 졸업후 취업문제등등이 한 생명의 탄생을 주저하게 만든다.
어쩌다가 대한민국이 OECD 가입국가 중에 最低의 출산률과 最高의 자살률을 자랑하게 되었는지 궁금하지도 않는가?
대한민국이 G20 의장국으로써 한껏 국격이 높아졌다며 깨춤 추는 대통령에게 경제전문가들이
G20 회의 유치로 30조원의 경제적 효과를 가져왔다고 장단을 쳐주는 나라! 대한민국은 정말 위대한 나라!  
그 잘난 새누리당 여성국회의원들이 과연 이 땅에서 출산을 성스럽게 만드는 법안을 단 몇 개만이라도 만들어 발의를 하셨는지도 궁금하고,
또한 최초의 ‘女性대통령’이라고 말하는 딸 박근혜가 지난 약 20 여년동안 국회의원 시절에 이 땅의 여성을 위한,
또는 여성들이 성스러운 출산을 위한 새로운 법안을 단 몇 건이라도 발의를 했는지 궁금하다.

그래서 ‘聖스러운 出産’이라고 하셨습니까?

맞아요! 당신덜, 권세가들의 出産은 혹시라도 聖스러울지 모르겠지만,
우리덜, 단 몇 년 앞의 계획은 커녕, 불과 며칠 후에도 내 몸과 정신이 이대로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절대절명의 생존권에 힘겨워하는 대부분의 여성들에겐 出産이 聖스러운 것이 아니라 저주스럽기 조차 하다.

에피소드 하나.

이글을 쓰고 있는 지금 모든 언론에 ‘원주별장 고위인사 성접대 동영상’ 파문이 일고 있다.
아랫도리에 빤츄만 걸친 중년 사내가 여성을 껴안고 노래를 부르다가 성행위를 한다는 내용이다.
아흐! 그 어떤 포르노보다 더 멋진 문제의 동영상을 나도 한번 감상하고 싶다.
동영상의 사내가 바로 엊그제 법무부 차관으로 임명을 받은 김某 검사라는 의혹이 일자,  그 검사는 돌연 차관직을 사퇴했다.
어이~ 金검사! 아니, 金차관! 조금 더 버티지 않고 왜 사퇴를 해? 인사청문회를 보믄 더한 죄를 지은넘들도 끝까지 버티던디....

지금으로부터 약 25년전에 나는 걸게그림 ‘민족해방운동사’사건으로 안기부 남산 지하실에서 졸라 당하고 서울지검으로 송치되어
약 20 여일간의 긴 조사를 받았다. 조사 중에 검사는 자신이 기독교의 장로라며 독실한 신앙을 나에게 자랑했다.
내가 안기부의 고문사실을 폭로하자 그는 대뜸 나에게 ‘쓰레기 같은 놈!’이라며 지랄발광을 했다.
그리고 6개월 후 재판정에서 검사는 고문조작한 안기부의 소견서를 토씨 하나 틀림없이 그대로 읽은 후에 나에게 징역 15년을 구형했다.
그는 그후 공안통 검사로써 승승장구했다.
당시 내 담당 검사가 바로 엊그제 사퇴한 金某 차관이다.

그런데 국과수에서 그 희미한 포르노 동영상을 분석한 결과 ‘빤츄만 걸친 사내’가 金某차관이라는 것을 확증할 수는 없지만
영상에 나오는 윤곽선으로 보아서 배재할 수도 없다는 견해를 밝혔다.
제기럴!  화소수가 형편없는 CC 티브이에 희미하게 잡힌 영상을 보고도 각종 범죄자들을 잘도 특정해서 잡아내더만....
요즘 스마트폰의 동영상 화소수는 HD급인데 저렇게 애매한 견해로 두루뭉수리하게 발표를 하다니....
나에게 그 동영상을 보여다오! 나를 고문한 안기부 수사관들을 나는 감옥 안에서 담요를 뒤집어쓰고
몰래 그려서 고문자의 얼굴을 세상에 폭로했던 사람이다.
그 문제가 된 金某검사와는 서로 얼굴을 노려보면서 댓거리를 주고받으며 20 여일간 검사와 피의자로 입씨름을 했던 사이다.
나는 지금이라도 그 검사의 얼굴을 보지 않고 사실적으로 그려낼 수가 있다.
나에게 그 동영상을 보여다오! 내가 분석하여 확증해 줄 수 있다.

‘땍땍이 여성주의자’들이여! 金某차관의 거룩한 성접대 의혹을 씻겨주고 싶다면
그 동영상을 화가 홍성담이가 보고 분석할 수 있도록 정부 해당부처에 부르르 떨면서 주장해 달라!
홍성담에게 감히 15년 징역형을 구형했던 검사가 저따위 변태 성행위자로 의심받는 것은 나도 자존심이 상해서 싫다.
‘땍땍이 여성주의자’들이여! 분노하라!

6. 아기는 왜 가카 박정희를 닮았는가?

너무 뻔한 ‘과학’을 왜 물어봐? 환쟁이에게 수학과 과학을 물어보는 무례한(?)짓을 서슴지 않는 약간은 모자란 사람들도
51%의 국민들 안에 있다. 아니 48%의 국민들 안에도 있다.
내가 이런 수학과 과학에 대답할 실력을 갖추었다면 법학대학이나 공대, 의대를 갔지, 왜 미술대학을 지망했겠는가.

암튼 그것은  ‘과학’이여!
더 세분화하자면 생물과목이고 유전공학이여!
저 앞에서도 잠깐 말했지만 아기가 자신의 외할아버지를 닮지 않으면 누구를 닮으라는 것이여?
장동건? 홍성담? 최태민? 장혁? 박중훈? 마빡이? 국민배우 안성기를 닮으란 말이여?

‘조상을 닮는다’라는 말을 조금 더 유식한 말로 하자면 ‘유전’이라고 할 수 있겠다.
DNA의 대물림은 인간의 숙명이고 운명이다.

가카 박정희는 일제 때 만주 육사를 졸업하고 다시 일본 육사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만주에서 일본군으로 근무 중에 해방을 맞아 숨어 지내다가 좌익이 당시의 대세일 것 같아서 남노당에 입당한다.
여순사건때 사형의 위기를 벗어나 다시 대한민국 군인의 길을 걷는다.
그리고 곧 군부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거머쥐고 부하의 총탄에 쓰러질 때 까지 약 18년간 대한민국을
세계에서 유래 없는 반공독재 국가로 만든다.
그의 일생은 우리시대 가장 슬프고 천박한 그러나 탁월한 기회주의자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나는 노태우 정권 당시에 3년 동안 네 곳의 교도소를 전전했다.
아마 대전 교도소에서 겪었던 일로 기억한다.

그는 무기징역 장기수다.
죄목은 간첩이다.
강원도가 고향이고 백부를 따라 어선을 타고 그물질을 하다가 북한의 경비선에 나포되었다.
3개월만에 한국에 돌아와 조사를 받고 풀려났다가 2년후 다시 조사를 받으며 잔혹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간첩죄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아 25년째 징역을 살고 있었다.
이후, 자신의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식구들도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그는 교도소에서 제공하는 식사를 절대 먹지 않는다.
하루 세끼 컵라면만 먹는다.
감옥이니만큼 컵에 부을 수 있는 뜨거운 물도 없으니 그냥 찬 물을 부어서 라면발을 불리고 스프를 부어서
젓가락으로 몇 번 휘저은 다음에 무심한 표정으로 먹는다.
나는 왜 교도소 식사를 거부하고 몸에 별로 좋지 않는 컵라면만 먹는가라고 물었다.
몇 번의 내 물음에 그냥 피식 웃기만 하다가 드디어 나에게 비밀을 속삭이듯이 말했다.

‘저놈들이 나를 죽이려고 해. 매끼마다 음식에 독을 조금 씩 타서 천천히 나를 죽인다구.
당신도 조심해! 교도소에서 주는 밥을 가급이면 먹지 않는 것이 좋을걸!‘

그리고 식사 때가 되면 컵라면을 개봉하기 전에 눈을 바짝 붙이고 요리조리 찬찬히 살피면서 혼자 중얼거리듯이 말한다.

‘컵라면 포장에 조그만 바늘구멍이라도 있으면 그것은 저놈들이 몰래 독을 넣은 증거라구’

그렇게 그와 함께 두꺼운 벽을 사이에 두고 몇 달을 살다가 나는 다시 안양교도소로 옮기게 되면서 헤어졌다.
나는 몇 년 전에 신문에서 그의 이름을 보고 깜짝 놀랐다. 재심에서 무죄를 받은 것이다.
고문 조작에 의해서 간첩으로 돌변하여 온 집안이 쑥대밭이 되고 자신의 평생을 감옥에서 지낸 다음에 무죄가 된들 무슨 소용이 있으며
판사가 국가를 대신하여 사과 한들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이게 모두 가카 박정희가 저지른 만행이다.
나는 당시 3년 동안에 네 곳의 교도소를 전전하면서 그와 비슷한 사람들을 몇몇 만났다.
자신의 독재가 국민들에게 이의 없이 받아들여지기 위해서, 아니 국민을 노예처럼 길들이기 위해서
반공을 포장한 공포정치가 절대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민심이 흉흉할 때 마다 간첩사건이 터져 나왔다.
이를테면, 진짜 간첩이 가짜 간첩을 수없이 만들면서 그 철권통치의 생명을 18년 동안 연장했던 것이다.
나는 그 시대의 국가폭력에 치를 떤다. 고문조작에 의한 재판이 끝나자마자 8명을 곧 사형집행 했던 그 개 같은 국가폭력에 치를 떤다.
일본 식민지시대 때 일본의 천황이 내린 <교육칙어>를 그대로 베낀 <국민교육헌장>을 줄줄 외우며 국가주의를 어린마음에 심었던
그 시절에 치를 떤다. 장발 단속한다며 경찰들이 바리깡을 들고 사거리에서 젊은이들을 무릎 꿇게 하고 머리 정수리에 고속도로를 내던
그 시절에 치를 떤다. 짧은 치마를 단속한다며 경찰들이 여성들을 차렷 자세로 세우고 30센티 대자로 무릎 위 치마길이를 재던
그 시절에 치를 떤다. 새마을 운동이라며 마을 도로를 온통 시멘트로 바르고 모양이 제각각 다른 돌담을 허물어버린 자리에
블록 담을 쌓던 그 획일화된 국가주의, 전라도나 경상도나 충청도나 모든 농촌이 자기 고유한 스토리를 잃고 붕어빵처럼
똑같이 변해버린 그 극악무도한 국가주의에 치를 떤다. 삶의 진정한 행복의 개념을 삭제해버리고 그 빈자리를 황금 쓰레기 만능주의로
만들어서 온 국민들을 천박한 자본의 노예로 만든 전제주의에 치를 떤다.
내 형 공돌이들, 내 누이 공순이들을 학교와 농촌에서 빼돌려 공단으로 밀어 넣고 그들의 피를 빨아 자본가들의 살만 찌우더니
결국은 오늘날 정치권력이나 국민들의 의식구조마저 좌지우지하는 무소불위의 소수 재벌을 만들었던 국가주의식 경제개발에 치를 떤다.
분단의 갈등을 맹목적 이데올로기로 만들어 선과 악의 무한대립으로 만들고 급기야는 경상도 전라도에 서로 치유할 수 없는 지역감정을 만들어 심화시킨 분리적 철권통치에 대해서 나는 치를 떤다.
하물며 극장에서 5십원짜리 영화를 관람하기 직전에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불러야 하는 그 시대 병영집체적 사회에 대해서 치를 떤다.
스페인 화가 <피카소>가 젊은 날에 공산당에 가입했다는 전력 때문에 학교 앞 문방구에서 팔던 <피카소 크레파스>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린 그 시절에 나는 치를 떤다.
신중현의 노래가, 이장희의 <그건 너>가, 송창식의 <고래사냥>이, <죤 바이스>의 주옥같은 노래가, <밥 딜런>의 노래가
어느 날 갑자기 금지곡이 되어 우리의 귀에 사라지기를 밥 먹듯이 했던 그 시절에 치를 떤다.
운동장 조회시간마다 군인들처럼 거수경례를 하고 차렷 자세로 ‘국기에 대한 맹세’를 외우던 그 조악한 국가주의에 치를 떤다.
이렇게 초법적으로 권력을 휘두르며 권력의 최고 정점에 서서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한 딸 박근혜의 과거에 대해서도 나는 치를 떤다.
그래서 DNA라는 유전의 과학적인 사실에 대해서도 치를 떤다.
그리고 ‘사람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라는 운명론에 대해서 치를 떤다.

사람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이 명제는 내가 나이를 먹어갈수록, 그리고 나의 명상이 깊어질수록 내 마음속에서 절대 진리가 되어가고 있다.
50대가 되면 누구나 초등학교 중고교 동창회가 여기저기서 열린다.
그곳에 단 한번만이라도 나가서 옛 친구들과 어울려 본 사람들이면 다~ 느낄 것이다.
아무도.... 아무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초등학교 시절 또는 중고교시절에 봤던 그 얼굴에, 그 행동에, 그 말씨에, 그 생각에 아무런 변화가 없이
그저 오롯이 어릴 적 그 습관과 행동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유신시대의 딸 박근혜가 가카 박정희 서거 35년 이후에 다시 한국의 대통령이 되어서도
절대 변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소름이 돋는 내 자신을 발견한다.
물론 내 이런 운명론의 기우가 사실로 나타나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그런 점에서 시인 김지하의 ‘어머니 육영수 여사를 닮아라!’라는 조언이 새삼스럽지 않다.

그러나 그녀는 아버지인 가카 박정희에 대해서 너무 심한 집착을 보인다.
물론 그녀에게 정치적 자산이라는 것이 아버지의 후광 밖에 없다는 것을 십분 이해를 할 수 있으나,
아버지에 대한 그녀의 과도한 집착이 나는 두렵기만 하다. 그녀의 마음속에 있는 남성성이,
즉 ‘아니무스’가 겪는 오이디푸스 콤프렉스일 수도 있다. 과도한 집착에 의한 콤프렉스는 곧 미분화된 자아의 현상이다.
미분화된 자아는 중요한 자기 결정의 시기 마다 종종 ‘망상’을 꿈꾼다.
지도자의 ‘망상’은 금방 생각 없는 국민들(모든 국민이 생각 없이 산다는 말은 아니다)에게 전이된다.
독버섯이 아름답듯이 현실로 이루어질 수 없는 ‘망상’은 달콤한 꿀을 바른 이미지를 생산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로망’이라고 하던가.  
작금에 여기저기서 수면위에 떠오르는 ‘잘살아 보세!’ ‘제2의 한강의 기적’ ‘뉴 새마을운동’ ‘경제부흥’이라는 구호에서
나는 위험한 망상을 보고 있다. 이러한 망상을 만들어내는 惡은 그녀의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 주변에서 권력의 단맛을 꿈꾸는 시커먼 욕망을 드러내는 타자에 의해서 자연발생적으로 조장되기도 한다.

다시,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예수는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사랑’의 힘으로 스스로 변화하라고 했다.
예수는 ‘사랑의 힘’이 결국 너희들을 변화 시킬 것이라며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이야기 했다.
그러나 아무도 변화하지 않았다.
오히려 제자들은 예수의 말이 무슨 뜻인지 조차 몰랐다.
그리고 제자들은 새로운 세상이 오면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인가 따위의 논쟁만 일삼았다.
결국 예수는 ‘사랑의 힘에 의한 변화의 약속’을 그들의 눈앞에서 보여주기 위해 십자가의 고행을 선택한다.
자기의 선생이 자신들을 살려내기 위해 죽었다는 것을 느낀 제자들의 몇몇은 변화했다.
그러나 그들의 변화는 결국 오늘날 우리가 의심해보면 자기들의 선생 예수가 가장 싫어했던 종교의 시스템을 만들어내는 것에
공헌하고 말았다. 그리고 예수 사후 2천년이 지난 지금의 사람들이 얼마큼 변화를 했던가.
예수 생전의 사람들과 2천년 이후 지금의 사람들의 가슴속의 심사가 무엇이 어떻게 변화되었던가.
아무것도, 단 한 가지도 절대 변하지 않았다.
오죽하면 우리말에 ‘저 사람 변한 것을 보면 곧 죽을 때가 되었는가 보다’는 말이 있겠는가.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또한 그녀도 절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지난 대선의 産痛을 보면서 상상했던 가카 박정희를 닮은 아기를 낳는 딸 박근혜의 모습을 그린 내 그림의 풍자와 야유는
대단히 ‘과학적’이며 또한 지극히 정당하다.

7. 신비주의는 현실정치에서 정책이 되지 못한다.

정치는 정책으로 말한다. 정책은 현실이다.
그녀는 ‘나는 국가와 결혼 했다’라고 이야기하며 잔뜩 신비감과 영웅적 태도를 취한다.
마치, 잔다르크식 영웅주의와 성녀이미지를 보는 듯하다.
사람들은 불행하게도 ‘현실’에는 잘 속지 않지만, 대신에 ‘신비감’에는 쉽게 속는다.
배울 만큼 배우고 벌 만큼 번 부자들이 더욱 사이비 점쟁이들에게 매달리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다.
그녀가 대통령이 되어 각료를 인선하는 과정도 모두 신비감에 둘러쳐있다. 때문에 죄 없는 대변인만 여기저기서 욕 얻어먹었다.
대선과정에서 TV 토론을 굳이 회피했던 이유도 이 ‘신비함’의 훼손을 최소화하기 위한 전략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이 신비주의가 맹목적인 지지자들을 확보하는데 일정하게 성공했다.
그러나 정치인에 대한 지지는 연예인이나 종교에 대한 지지와는 전혀 다르다.

노무현 전대통령에게도 이런 맹목적인 지지자들이 있었다. 맹목적인 지지는 오히려 지지 대상에게 독배로 돌아오기도 한다.
노무현 전대통령의 자살이 일차적으로는 물론 권부의 창녀가 되어버린 검찰의 저열한 짓이 가장 큰 원인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일부 지지자들의 맹목적인 지지의 댓가가 독배로 변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노무현 전대통령에 대한 맹목적 지지는 권위주의를 과감하게 탈피한 그이의 지극한 인간적인 모습에서 발현된 것이라면,
그녀에 대한 맹목적인 지지는 ‘신비주의’에 부축을 받은 半神半人的 신격화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엊그제 있었던 ‘박정희 탄신제’에서 보았듯이 이미 일정 지역에서 가카 박정희는 신격화의 대상이 되었다.
어쩌면 대한민국에서 가장 두려운 일이 이미 시작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논리적 근거나 사실적 근거가 없이 자신의 입장과 반대되는 사람을 찍어서 무조건 ‘좌빨’이나 ‘종북’으로 모는 현실을 생각한다면
대한민국은 이미 넘지 않아야 할 마지막 선을 넘어선 것인지도 모르겠다.
경제적으로 힘들고 살아가는 조건과 환경이 어려워질수록 자신의 분통을 터트릴 왕따의 목표물을 찾는다.
자신이 사회적으로 실패하는 모든 원인을 ‘왕따’에게 전가한다. 그리고 일단 목표가 정해지면 집단적으로 왕따를 행사하면서도
눈곱만한 죄의식조차 없고 심지어 쾌감과 카타르시스를 느끼기까지 한다.
대한민국에 이미 이런 유형의 새로운 ‘파시즘’의 초기 형태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지난 대선과정에서 국정원이 ‘댓글녀’를 내세워 했던 짓도 바로 이런 분위기를 조장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일부 개신교 종사자들이 ‘십알단’을 조직하여 훈련시킨 것도 바로 이런 ‘파시즘’을 조장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요즘 빈번하게 일어나는 학교폭력도 그런 조짐의 일면이다. 대명천지 대한민국에 새로운 ‘파시즘’의 싹이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불편한 마음으로 인정해야 한다.
IMF 경제위기 이후에 ‘파시즘’의 싹이 돋더니 지난 이명박 정권 5년 동안에 제법 굵은 둥치로 성장했다.
새로운 ‘파시즘’은 향후 경제적으로 중산층이 몰락하면서 극심한 빈부의 격차를 자양분으로 삼아
우리 사회 전반에 굳건하게 뿌리를 내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독재를 받더라도 강력한 지도자를 원하는 일정한 국민들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스스로 노예적 마조히스트의 성향을 내보이고 있다. 가카 박정희에 대한 우상화는 이런 의식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자신이 몸담고 살아가는 사회의 잘못과 모순을 자신이 스스로 개선하고 바꾸어나갈 생각을 하지 못하고
나 대신에 강력한 지도자가 나서서 일소해 주리라는 염원은 대한민국을 너무나 위험한 지경으로 몰아 갈 것이다.
영화나 소설에서 마조히즘은 인간의 의식을 분석하기 위해 재미있는 소재거리가 되기도 하지만 현실사회에서
마조히즘의 창궐은 온 나라를 노예사회와 파시즘의 사회로 만든다.

이런 수동적이고 우매한 국민의 태도와 신격화된 맹목적 지지가 합쳐지면 반드시 새로운 국가주의가 발생하고,
새로운 사회건설이라는 미명아래 잔인한 국가폭력이 정당화되고 급기야 우리 한반도는 되돌릴 수 없는 참화를 자초하게 될 것이다.
이 피해는 지지자와 반대자를 가리지 않는다. 한 달전에 옆 동네에서 국가폭력의 피해자가 나와서
우리 동네 이야기가 아니구나 안심하지만,
일주일 후엔 우리 동네에서 그런 피해자가 나온다. 그래도 우리 집 일이 아니구나 안심하지만,
한 달 후엔 우리 가족 중에 누군가 그런 피해자가 생기면서 고통을 느낄 틈도 없이 두어달 후엔
바로 내가 그런 피해자가 되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해주던가?

나의 논리는 절대 과학적이지 않다. 상상과 비약이 심하다.
그러나 나는 이승만 시대와 유신정권, 광주학살과 전두환 노태우 신군부 정권 그리고 1987년 6월 시민항쟁을 거쳐 지금까지
온 몸을 던져 살아 온 예술가의 동물적인 감각과 본능으로 감히 박근혜 정권의 미래에 대해 예감한다.
심히 불길하다.
그녀의 아버지 박정희 가카는 ‘독재’를 했다. 독재도 ‘정치’다. 가카는 ‘독재 정치인’이다.
2013년의 박근혜는 ‘독선’이다. 독선은 정치적 행위가 아니다. 극히 개인적인 아집에 불과하다.
박정희의 당시 국민들은 인내하고 기다릴 줄 아는 미덕(사실 미덕이 아니라 전근대적인 인간형이었다)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2013년의 국민들은 참고 견뎌야 할 방법과 이유가 없다.
조만간에 대한민국 국민들은 ‘지 아버지를 보듬고 역사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박근혜’의 모습을 보면서
비로소 이 땅에 ‘현대-modern’의 문이 열리는 것을 실감하게 될 것이다.
이런 나의 예감은 너무나 불길하다. 그러나 어찌할 수 없는 그녀의 운명이다.

내 그림 ‘골든타임’은 그녀를 신비화, 신격화시키는 맹목적인 지지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녀는 신이 아니라 우리와 다를 바 없는 보통 인간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다.
우리 인간이 신보다 우월한 점이 딱 한 가지 있다. 인간은 出産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신과 대등하게 만날 수 있다. 기독교의 하느님도 자신의 아들을 이 땅에 내보내기 위해
인간 <마리아>의 몸을 빌리지 않았던가. 얼마나 급하셨으면 낼모레  결혼할 날까지 잡아서 곧 신부가 될 처녀 몸을 빌렸겠는가.

에피소드 하나 더.

‘出産그림’이 ‘性스러운 출산’으로 한창 지롤방정 떨고 있을 당시에
조중동의 모 일간지 여성기자가 내 작업장에 와서 인터뷰를 했다.
예쁜 얼굴의 그 여성기자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저..... 이왕이면...... 딸 박근혜가 가슴에 아기를 소중하게 안고 있는 모습은 왜 생각을 못하셨읍니까?’

나는 꽥! 악을 썼다.

‘박근혜가 <마리아>라도 된다는 말이요?’



8. 정치인은 사기꾼이다.

전과 14범도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는 시대이니 만큼 ‘정치인은 사기꾼이다’ 또는 ‘사기꾼이 출세하면 정치인이 된다’라는 명제에 대해
별다른 이의는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요즘 각료들 인사청문회를 되돌아 볼 것도 없이 어쩌면 하나같이 위법과 범법을 몇 가지 저지르지 않는 넘들이 없다.
이건 완죤히 범죄자 집단에게 나랏일을 맡겨놓는다는 생각에 분통을 터트리는 국민들을 지켜보면서
대한민국에서 국민 노릇을 제대로 하려면 쓸개도, 애도, 간장도, 창자도 모두 빼놓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정치인을 너무나 신성시하고 절대시한다.
이러한 노예적 의식은 정치인들이 지덜 맘껏 사기농락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범죄의 온상이 되었다.
요즘 같은 약간 꼭지가 덜 떨어진 민주사회에서도 그넘들이 국민보다 더 똑똑해서 정치인이 된것이 아니다.
만약 우리가 그들을 정치인으로 만들어주지 않았다면 평생 백수건달로 살아야 할 넘들이 너무나 많다.
박근혜만 보더라도 그녀 평생동안 자신이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알바든 땀을 흘리고 일을 해서 단 한달이라도 생활해 본적이 있었던가?
이런 넘들에게 국가대사를 맡겨놓는다는 것이 너무 불안하지 않는가?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끊임없이 비판하고 견제해야 된다.

내 주변에도 정치인들이 제법 많다.
지자체 의원에서부터 장차관까지 이런저런 인물들이 있는데, 이 위인들이 정치권에 접근하지 전에는 신실함을 보였다가도
아무튼 정치권에서 불과 몇 년 굴러먹다보면 모두들 사기꾼의 모습을 보여준다.
정치인 두 명이 모이면 협잡이 이루어지고, 세 명 이상이 모이면 사기꾼 집단의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 선거에 의해 유권자인 국민이 아무리 좋은 정치인을 뽑아놓은들 결국 큰 사기꾼 한 명을 더 만들어내는 것에 일조할 뿐이다.
그래서 좋은 사람을 뽑는 것도 필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정치인 그들을 감시하고 견제를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누군가는 정치인을 ‘합법적인 사기꾼 집단’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정치인이란 국민의 세금으로 월급과 연금을 받으면서
국민의 등을 쳐 피를 빨아먹는 거머리 사기꾼이 된다는 것이다.

정치인을 끊임없이 견제하고 감시하는 여러 가지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으면 항상 국민들은 저들에게 당하게 된다.
그래서 정치인은 예술가에게 끝없는 풍자와 야유의 소재가 되고 있다.
나는 우리시대 가장 탁월한 정치풍자화의 대가로 김용민과 손문상을 꼽는다.
그들이 그려놓은 만평을 볼 때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무릎을 친다. 그들의 풍자와 야유는 정말 보는 이의 가슴을 시원하게 만든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들의 천부적인 재능이 정말 부럽다. 그들의 만평 입살에 오른 정치인들의 심정은 정말이지,
그 두 사람을 잡아 가두어 귀싸데기라도 몇 대 주어 패고 싶을 만큼 분통이 터질 것이다.
그토록 가슴이 아프고 고통스럽다면 ‘정치’라는 직업을 선택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예술에 있어서 풍자와 야유는 금기사항이 없다.
특히 公人이라는 정치인일 경우엔 더욱 그렇다. 내 그림  ‘골든타임’정도의 풍자와 야유에 그 주변사람들이 바르르 떨 정도고,
당사자가 분노할 정도라면 대갈빡이 공구리처럼 굳어있는 그 따위 집단에게 대한민국의 경영을 맡기기엔 대단히 안타깝다.
향후 그들의 운영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나라꼴은 안 봐도 비디오다.  

나는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정권 때도 항상 그들의 인간성과 정책을 비판하는 그림을 그려왔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을 제외하고는 풍자와 야유에 대해서 기억날 만큼 심한 탄압을 받아 본 적이 없다.
그런데 감히 아직 대통령도 아닌 후보자 시절에 이 정도의 풍자와 야유에 바르르 떨면서 꽥꽥거리는 경우는 이번 ‘出産그림’이 처음이다.
대통령에 당선되기도 전인 후보자 시절 임에도 이렇게 난리발광을 한다면,
대통령 자리에 앉아서는 이런 풍자와 야유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대응할지 자못 궁금하다.

나는 땍땍거리는 여성주의자들에게 감히 말한다.

‘박근혜, 그녀가 만약에 남성이었다 하더라도 나는 성스러운 出産그림으로 야유와 조롱을 했을 것이다’

각설하고,
지금 박근혜 대통령은 시인 김지하가 자신의 지난 인생을 초개와 같이 내던지면서 당신에게 했던 말을 기억해야한다.

‘지금부터는 어머니 육영수 여사를 닮기를 노력하여 자애로운 모성으로 이 민족과 나라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보듬어라’

물론 나도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김지하의 조언 이후에 그녀의 대선 진영은 ‘女性대통령’이라는 감성정치의 이미지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요즘 대세가 아무리 ‘이미지시대’ - ‘이미지시대’라는 말에는 ‘가짜’와 ‘사기’라는 술수가 포함되어 있다.
즉 내용이 모자란 부분을 이미지로 대신 채워 넣는다. 그래서 ‘이미지시대’라는 말은 ‘짜가의 시대’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 라고 하지만,
우리나라 요즘 선거는 이러한 ‘사기 포장술’이 난무하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그녀가 1989년 정계입문-천만에, 그녀는 어머니 육영수 사후에 이미 가카 박정희와 버금가는 정치권력의 실력자로 등장했고
또한 유신독재의 후계자 교육을 받고 있었다- 이후로 지금까지 이런저런 언론들과의 인터뷰했던 내용들을 다시 되돌아 볼 필요도 없이
그녀는 ‘남자로 태어나지 못한 것’에 마치 한이 맺힌 것처럼 보였다. 그러한 그녀에게서 ‘여성대통령’으로서의 정체성을 찾는 일이란
부질없는 짓이 될 것이다.
그렇다.
대한민국이 현재 앓고 있는 분단과 갈등의 질병은 남성성의 강한 리더십만으로 치유할 수 없다.
그러기엔 너무 많은 세월 동안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그 갈등의 직간접적인 피해자로 알게 모르게 고통을 받아왔다.
성장의 허세 속에서 무한경쟁에 내몰리는 것 보다는 적게 벌더라도 서로 공평하게 나누어 먹는 화해와 평화의 연습이 필요하다.
그러한 국가와 사회의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서 자기 자신 속에 깊이 침잠하여 명상하고 이 땅의 모든 슬픔과 고통에 대해
연민하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그러한 ‘여성성’과 ‘모성성’을 지닌 지도자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녀의 심중에 너무 강하게 자리를 잡은 ‘아니무스’ 즉 환갑의 나이가 되기까지 아버지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시인 김지하의 바램(母性의 대통령)을 무산시키고 말 것이다.  이것은 나의 비극적인 예감일 뿐이다.
그러나 나의 진심은 현실에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 입장에서 그녀가 결코 성공하기를 빈다.
왜냐면 미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정치 경제의 역학관계에서 한반도의 현실은 조금만 삐끗해도 그 모든 피해가
이 땅에 살아가는 수많은 인민대중들의 고단한 삶에 더 가중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내 개인적으로 좀 더 확실하게 말하자면 현재 동아시아에서 한반도의 미래는 불행하게도 그다지 ‘희망적’이지 못하다.

9. 내가 원하는 것은 ‘소독되어진 표현의 자유’가 아니다.

일명 ‘出産그림’사건으로 익명의 수많은 사람들이 수고를 했다.
우리나라 언론사의 조악한 시스템 때문에 미술에 관한 전문성도 없는 문화부기자나 정치사회부 기자들이 이 사건에 대해서
크고 작은 기사를 작성하느라고 수고가 많았다. - 그런데 왜 나에 관한 기사는 신문 문화면에 나오지 않고 꼭 정치면이나 사회면에 나오는지...
나는 그것이 좀 섭섭하다. 나도 그림만 40년 넘게 그려온 환쟁이다. 내 평생 소원은 ‘통일’도 아니고, 로또당첨도 아니고,
내 그림이 고가에 팔리는 것도 아니다. 바로 내 그림에 관한 기사가 문화면에 멋있게(간드러지게) 또는 소박하게 장식하는 것이다-

특히 일베충과 십알단 여러분들이 스마트폰 자판을 문질러 리트윗하고 컴퓨터 자판을 두들기며 수많은 댓글을 올리느라 너무 수고가 많았다.
그것이 짧은 댓글이라 하더라도 자간과 행간의 모양세를 보면 글 쓴 사람의 호흡과 맥박이 느껴진다.
모두들 분기탱천하여 울부짖는 소리가 컴퓨터 랜선을 타고 낭자했다.
그리고 저들을 더 리얼하게 울부짖게 하려는지 혹은 그들의 울부짖음에 힘을 받았던지
새누리당 여성의원들 몇 분이 연일 성명서를 발표하느라 목에 핏대를 올리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아름다운 여성들이라고 생각했다.
‘대한민국의 여성들이여 분노하라!’는 그녀들의 재촉에 못 이겨 몇몇 이름도 첨 들어보는 여성단체도 등장했다.
사이비 여성단체라고는 말하지 않겠다. 심지어 유해환경이 어쩌구저쩌구하는 청소년 보호 단체까지 주둥아리를 열었다.
이때다 싶은 몇몇 땍땍이 여성주의자들도 등장했다.
물론 그녀들의 말이 다~~~ 옳다. 그러나 ‘옳다’라는 이유만으로 예술행위를 판단할 수 없다.
종종 ‘그르다’라는 소재나 주제도 예술에서는 얼마든지 여러 다양한 미학적 실험이 가능하다.
옳고 그름, 선과 악, 추함과 아름다움을 거침없이 넘나드는 것이 예술이다. 하아! 이러다가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예술론’이 나오겠다.  
이 부분은 다음 기회에 이야기하기로 한다.

다만, 화가가 일정하게 정치적 의도를 갖고 그림을 그렸더라도 예술은 예술로써 바라보면 별스런 탈이 없다.
풍자의 미학은 익살과 해학, 조롱과 야유, 인간적으로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모질게 비틀고 꼬집는 것에 의미가 있다.
풍자의 대상이 공인인 정치인이라면 더욱 그 정도가 심해지기 마련이다.
이것은 정치인의 숙명이고 또 정치인을 바라보는 예술가의 운명이다.
예술의 풍자적인 공격에 대응하는 방법은 ‘정신적인 여유’다.
여유가 있어야 풍자를 농담으로 감아 싸안아서 다시 예술가에게 되돌려줄 수 있다.
이를테면 내 ‘출산그림’에 대해 당사자인 그녀가 기자들 앞에서 인터뷰하는 도중에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언급했다고 가정해보자.

‘예! 출산그림을 그린 某화가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합니다. 저의 버킷리스트에 예쁜 아가를 낳아서 잘 키우는게 있거등요.
그것을 이루지 못하고 세월이 흘렀는가 싶더니 某화가가 아쉬워하는 내 마음을 어떻게 읽어내어 그림으로 이루게 했습니다. 고맙습니다’

만약 당사자가 ‘풍자’를 이런 식으로 여유롭게 ‘농담’으로 받아냈다면 화가도 구경하는 사람들도 모두 즐거운 시간이 되었을 것이다.
아니, 그림으로 야유를 내던진 화가는 박근혜의 여유와 농담 한마디에 'Big 엿'을 먹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녀의 여유를 보면서 안심하고 이 나라를 그녀에게 맡겨볼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사실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지도자는 이렇게 마음의 여유와 농담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증말이지, 내가 왜 이런 것 까지 갈켜줘야 하냐? 미천한 환쟁이가 대통령 후보를 가르쳐야 하는 왕짜증의 시대다.
정치인이 국민을 걱정하는 시대가 아니라 국민이 정치인을 걱정해야 하는 시대라더니.....쯧쯧
오스트렐리아의 정치인 <멘지스>가 이렇게 말했다.

‘전체주의와 민주주의의 싸움은 웃을 줄 모르는 사람들과 웃을 줄 아는 사람들과의 싸움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특히 그중에서 재미있었던 것은 여러 남성들이 올린 댓글이다.
댓글의 폼세를 보면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남성의 상징인 남근을 항상 자신의 콧잔등 위에 세우고
거들먹거리며 위세를 부렸을만한 남성들이 갑자기 여성주의자로 행세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도덕과 윤리의 잣대를 들이대며 지롤떠는 모습에선 마치 홍합 밭에 넘어진 사이비 변강쇠나
뻘발 낙지 부롯(구멍)위에 앉은 심봉사 처럼 보였다.  
지금 이 시각에도 저들은 지하철에서 누군가의 엉덩이를 더듬거나 전봇대 뒤에서 바바리를 걸치고 빤추는 내린 채
성희롱 대상자를 기다리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내가 남보다 도덕과 윤리의식이 뛰어나거나 혹은 도덕성과 윤리의 문제를 초월해서 살아가는 道人도 아니다.
지난날들의 내 행색을 되돌아보면 나도 ‘마쵸’에 불과한 찌질한 남성이다.
그러나 여성과 남성, 그런 식의 전근대적인 性의 분별을 떠나 나를 포함한 모든 인간과 세상에 하염없이 떠도는 생물과 무생물에 대해서
안타까운 연민의 심정으로 살아가는 ‘아직 꼭지가 덜 떨어진 마쵸’임이 분명하다.
다시, 각설하고.

그런데 더 웃기고 재미있는 것은 따로 있었다.
‘게다짝 지식인’들이다.
‘게다짝 지식인’이란 소리만 요란하고 걸음 걷는 모양세나 속도가 형편없으며,
언제든지 남의 집 안방과 마당에 드나들기를 바람처럼 한다는 책상물림을 가리키는 조어다.
물론 아무리 ‘게다짝 지식인’이라고 하더라도 나 같은 미천한 환쟁이 보다는 훨씬 책도 많이 읽고 사색도 많이 하고
곧은 소리도 많이 하겠다는 내 믿음이 있다.
그래서 일간지에 그들이 내놓은 칼럼은 내가 아무리 바빠도 볼펜으로 줄을 쳐 가면서 읽어주는 것을
동시대를 살아가는 동료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한다.
그들 중에 소수의 몇몇 ‘게다짝’들이 일간지에 칼럼 형식으로 이번 ‘출산그림’사건에 대해서 거론하거나,
혹은 그들의 블로그에 짧은 글을 올렸다.
물론 땍땍이 여성주의자나 새누리당 여성의원들이 ‘여성성에 대한 비하’라며 왜장을 친 후이니 만큼
대단히 예민하고 성가신 것을 감안해서인지 그렇게도 매사에 똑 부러지던 그들의 어조가 왠지 어눌해지면서 황희정승 같은 어법을 사용했다.
이를테면, 이런 따위의 말씀들이다.

‘형식은 내 맘에 들지 앉지만, 풍자 표현엔 죄가 없다’

‘몇 가지 잘못된 점이 있다 하더라도 예술 표현의 자유는 인정해야 한다’

심지어 어떤 ‘게다짝’은 뻔데기 같은 낯짝으로 나에게 이렇게 불호령을 하며 지시를 하셨다.

‘이런저런 변명하지 말고 한시라도 빨리 대한민국의 모든 여성들에게 사과하라!’

아다시피, 나는 이번 ‘출산그림’사건에서 단 한마디의 변명 따위를 하지 않았다.
저들이 볼 때 왕썽질이 날 정도로 내 소견을 일관되게 주장했다.

‘주장’과 ‘변명’ 조차도 구분하지 못하는 ‘게다짝’이 각종 일간지에 가끔 연재하는 칼럼은
왜 그리 딱딱 맞는 소리만 뺀지르르 하게 쓰는지 궁금하다. 혹시 나만의 의심이지만 누군가가 대신 써주는 것이 아닐까?
암만 생각해도 무참한 저 대갈빡에서 그런 뺀질한 칼럼이 쓰여 질 리가 만무하다. 흐흐흐...괜한 내 의심이겠쥐.

나는 요런 경우에 결말이 없는 말꼬리 잡는 논쟁을 싫어해서 공개적인 자리(광화문 광장이나 종로 사거리등등)에서  
‘리얼 킬’로 한 판 붙는 것을 예사로 했다. 그러나 점잖은 사람들끼리 그럴 수도 없어서 그냥 어설피 웃기만 했다.
그렇다. 사람이 죽고 사는 일도 아닌데 그 따위 땍땍이 여성주의자들의 주둥아리에 씹히는 것은 우리 ‘마쵸’들에겐 질색이다.
그리고 저 땍땍이들과 서로 대거리를 열나게 주고받아야 결말도 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본전 찾기도 힘들다는 남성주의적 논리에 동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성만능주의의 앵벌이식 눈물짜기에는 동의할 수 없다. 그런 식으로는 한국의 강고한 남성주의의 협잡을 깰 수 없다.
선거권을 제외하고는 조선시대 보다 뒤쳐진 열악한 여성의 권리를 되찾을 수 없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한국을 둘러보고 가장 의아하게 느낀 점 1위가 ‘한국 여성들의 성형 수술’이라는 것도 슬픈 일이다.
방학이나 휴가 때마다 어머니와 딸이 가족단위로 성형외과 대기실에 줄서는 진기한 풍경이 보편화되었다.
이것 역시 대한민국의 찬란한 男根主義가 빚어낸 영광스러운 결과가 아니던가.
이미 한국의 모든 기득권에 바위처럼 단단하게 자리 잡은 봉건적 남성주의는 대한민국의 모든 여성을 ‘妓生化’ 내지는 ‘娼女化’시켜 버렸다.

나는 이 땅의 지식인들에 대해 실망한지 오래 되었다.
1980년대에 얼핏하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보검처럼 휘두르던 넘들이
1990년대가 되어서는 하나같이 푸코나 데리다 운운하면서 지롤을 떨었다.
그리고 지금은 라깡인지 수수깡인지 다깡인지 패깡인지 어수선 떠는 꼬라지를 보면서 저들의 면상에 구토를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지식인이 공부를 멀리하는 사회는 망한다. 공부는 카피(copy)가 아니다. 공부는 창조다.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시절에 그들 ‘게다짝’들은 이리저리 줄을 대어 정부 요직이나 기타 기관에 한 자리 차지해 보려고
지롤 떨던 때를 나는 기억한다. 무슨무슨 프로젝트니, 연구니, 위원회니 하여 돈 따내기에 환장하던 ‘게다짝’들을 기억한다.
나는 새로운 지식이 정부 돈을 받아 창조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을 내 육십평생 보지 못했다.
정부의 돈을 받아서 만들어진 예술이 우리 에술사에 남는 작품이 되는 것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당시 15년 동안 한국의 지식인들은 참다운 공부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전과 14범이 대한민국의 대통령에 오르고야 말았다.

지난 이명박 정부 5년 동안 내내 한국의 지식인들은 사기꾼 정치인들이 설정한 의제를 따라가기에 바빴다.
동아시아가 전면적으로 변화하는 시기인 지난 5년 동안에 지식인들은 단 하나의 담론이나 의제도 생산하지 못하고
매번 사기정치의 일정표를 쫓아다녔다. 의제 제출이나 담론 생산은 커녕 그럴 능력도 없이 시간을 소비하다가
지난 대선기간에 겨우 한다는 꼴이 ‘후보 단일화 선언’이니 ‘원로 원탁회의’니, 또는 야당 쪽의 두 후보를 각각 지지선언 하는 등등
온갖 추태를 보였다. ‘게다짝’들이 모모후보에게 지지선언을 한다하여 인민대중이 감동 먹는 것도 아니며,
특히 ‘원로’라는 말에 국민들이 감읍하여 따라 나설 일도 없다. 이런 무참한 일을 당하고도 이 나라 지식인들은 공부할 생각이 없다. 그
래서 대한민국의 미래는 어둡다.

하물며,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이 무엇인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각 부분에 버티고 있는 ‘타부’를 깨부수는 일이다.
이것은 예술가의 의무이며 권리다.
합법적으로 관습적으로 정서적으로 우리 주변에 꿍쳐져 있는 ‘금기사항’을 깨부수는 것!
왜냐면, 합법과 관습과 감성으로 위장한 ‘금기사항’ 속에 우리의 창조적 상상력을 억압하고
인민대중의 고혈을 빨아먹는 디테일한 악마들이 숨어있다.
‘게다짝’들은 자신이 알게 모르게 그들 디테일한 악마들과 무시로 은밀한 카르텔을 형성하여 주린 배를 채우기도 한다.
인류의 역사를 읽어보면 배신자는 반드시 ‘게다짝’들 중에서 출현한다.

나는 ‘게다짝’ 들과 디테일한 악마들의 카르텔이 모의하여 마치 시혜를 베풀듯이 던져주는 ‘소독된 표현의 자유’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당신들의 입맛에 맞추어 소독되어진, 혹은 양념된 ‘표현의 자유’는 거부한다.
인간에게 원래부터 주어진 천부적인 ‘자유’, 자연(natural) 그 자체의 싱싱한 자유를 원한다.
니들이 모의하여 만들어 놓은 ‘금기사항’을 제외한 제한된 자유, 그렇게 ‘금기사항’으로 ‘소독되어진 자유’는 나에게 아무런 필요가 없다.

예술가에게 10 이라는 ‘표현의 자유’가 주어진다면, 일반 사람에겐 겨우 그 절반인 5 정도의 ‘제한된 자유’가 주어진다.
한 시대를 살아가는 예술가가 어떤 정도의 ‘표현의 자유’를 쟁취하느냐의 문제는 곧 당대를 살아가는 일반대중들이 누릴 수 있는
‘자유’의 질과 량을 추론할 수 있는 바로메터다.

젊은이들은 자신의 영혼과 몸에 예술가의 남루한 옷을 걸치기 전에 결연하게 ‘선택과 포기’를 분명히 한다.
예술가의 자유로운 영혼을 내 몸에 담기 위해 그까짓 가난이 주는 불편이나 명예나 권력은 애시당초 포기한다.
물론 요즘 정부 관료들의 인사청문회를 보면 자기에게 주어진 인생에서 극히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전혀 포기하지 않고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거머쥐어 성공한 양아치들이 즐비하다.
좋은 학벌, 군 면제, 검찰이나 정부 요직에서 그 모든 권력을 누리고, 또 대형 로펌에서 일 년에 수억의 연봉과,
온갖 부정한 방법으로 여기저기 부동산에 투기하고, 중요한 순간마다 위장전입으로 자식들에게 좋은 학군을 선사하면서
인간에게 주어진 온갖 욕심을 단 한 가지도 포기하지 않는 자들이 결국 다시 국민을 호령하는 총리나 장관 자리를 차지하는
저 천박한 버릇 따위가 ‘예술’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예술가들이 ‘자유로운 영혼’을 선택하는 대신에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자유로운 영혼’만이 진정한 창조의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미술옥션이 강요하는 市場美術을 그리더라도, 부잣집 거실 인테리어 용품으로 액자 속 장미 한송이를 그리더라도,
요즘 잘 나가는 중국의 팝아트를 베끼더라도, 외국미술잡지 한 쪽 귀퉁이을 카피하면서 주접을 떨지라도
그것이 천박하고 비루먹은 손에 붓을 들었을지라도 ‘영혼’ 만큼은 자유스러워야 한다.
우리 예술가는 영혼의 온전한 자유를 갈구해야 한다.
우리 예술가들의 영혼이 갈구하는 표현의 자유는 ‘소독되어진 자유’가 아니라 ‘완벽하고 온전한 자유’다.

내 자유를 제약하는 모든 ‘타부’들과 과감하게 온몸으로 부딪쳐 깨지면서 흘린 피가 비로소 ‘예술’로 현현 한다.
그 점은 철학이나 학문의 세계에서도 별다르지 않다.
그래서 우리 선배들과 스승들, 즉 예술적 천재들은 하나같이 온전한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서 언제 어디서나 무모한 싸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것은 예술가의 예술적 욕망 따위를 실현하기 위한 저급한 싸움이 아니다.
‘표현의 온전한 자유’는 가장 낮은 곳에서 수많은 고통을 당하며 겨우겨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인민대중들로부터 위임받은 의무이며
예술가의 고유한 권리이다.


우리시대의 비열하기 짝이 없는 ‘게다짝’ 지식인들이여!
저 ‘금기사항’ 속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디테일한 악마들의 초상을 내 붓으로 밝은 햇빛아래 낱낱이 보여줄 때 까지
나는 싱싱하고 온전한 자유를 기어코 쟁취해 낼 것이다.
그때까정 니들은 ‘소독된 자유’를 누리면서 배부른 돼지처럼 만족하여라.

미천한 환쟁이인 나에게 지금 당장에 필요한 것은 ‘소독되어진 표현의 자유’가 아니다.
내가 원하는 ‘표현의 온전한 자유’를 쟁취해 낼 때까지,
그리고 여기저기 안팎에 버티고 있는 ‘금기사항’속에 숨어있는 디테일한 악마의 위장막을 벗겨낼 때 까지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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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씨발~~조용히 그냥 꼭꼭 숨어서 지내겠다.ㅎㅎㅎ
(2013.3.17  화가 홍성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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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내가 원하는 것은 ‘소독되어진 표현의 자유’가 아니다 - 일명 <出産그림>에 대하여
이름: damibox


등록일: 2014-05-27 20:03
조회수: 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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