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담의 그림창고


이 글은 '동아시아문화연대 포럼'에서
발표한 원고 초안입니다.


흘러서 강, 모여서 바다

                                     홍성담(화가)


내가 살고 있는 시대와 땅은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지구촌은 새로운 세기를 전쟁으로 시작하였다.
우리 앞에 예비된 전쟁이 비단 뉴욕의 맨하튼이나
아프가니스탄 뿐이겠는가.

그나마 우리들 삶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미래 세상에 대한 희망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시대는 이러한 희망마저도 포기하도록 끊임없이 강요하고 있다.

이러한 절망으로부터 비롯된 서구의 오리엔탈에 대한 경배,
혹은 아시아에 대한 환상은 그럴듯한 이유가 있다.
그러나 일부의 그러한 경향은 이국적 취미나 교양,
또는 '패션화'한 껍데기를 두고 예찬하는 것뿐이다.

세기말부터 진행된 금융자본의 세계화에 따라
월스트리드의 힘은 이미 국경을 뛰어넘은 지 오래이다.

그러나 이를 감시하고 제지할 어떠한 힘도 존재하지 않는다.
심판 없이 진행되는 이 가공할 '탐욕의 게임',
그것이 파국으로 끝날 것이라고 확신하면서도
우리들은 그것을 어떻게 제지할 수 있을지 진정한 대안이나 힘은 갖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우리들 아시아권 역시 이 파국을 향해
어느 누구보다도 더 빨리 달려가지 못해 안달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금융자본의 세계화의 최종 목표는 우리들 각자의 고유한 삶의 방식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세밀하게 관리하고 총체적으로 지배하겠다는 것이다.

문화는 삶의 방식이다.
새로운 문화의 배후를 '달러'가 지배하기도 하고,
'달러'라는 그릇에 전혀 새로운 문화가 실리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것을 '문화교류'라고 한다.
나는 이러한 '문화교류'를 '고요한 약육강식'이라고 부른다.

지난 세기까지 아시아는 전근대적인 야만적 약육강식에 의해 이미 살점은 죄다 뜯긴 채 뼈다귀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다.
이제 아시아 내에서 우리들끼리 물고 물리는 '고요한 약육강식'의 시대를 맞게 되었다.

사실은 먹을 것도 더 이상 뜯길 것도 없는 몸뚱아리 임에도 불구하고
시대의 변화는 이렇게 우리를 '餓鬼'로 만들고 있다.

서구로부터 강요받은 껍데기뿐인 근대성은 우리에게도 '죽음의 문화'를 남겨 주었다.
'삶'에서 '죽음'으로 이행과정이 그들의 문화적 등식이라면
아시아는 '죽음'에서 '삶'을 꽃 피운다.

아시아의 화가들 앞에 놓여진 그림에는 '죽음'에서 삶으로 다가가는
처연한 아름다움이 만개하고 있다.

형태를 갖고 있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언젠가는 사라지기 마련이다.
인간도 그렇다.

인간의 형태인 육신은 결국 사라지고 그 인간이 미래 세상을 위해 추구했던
영혼의 행적만이 남아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주위를 떠돌아다닐 뿐이다.
뼈는 썩어 흙이 되고 살은 썩어 물이 되어 대지에 스며든다.
이 거름으로 알곡식이 맺어져 미래 세상을 열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의
식량이 될 것이다.

우리 아시아인들은 인간 삶의 순환과정을
이렇게 보편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내가 살아온 땅, 그리고 내가 살아온 그리 짧지도 길지도 않은 세월은
'삶'보다도 '죽음'을 강요했다.
동티모르도 그렇고 방글라데시도 이와 같다.

차라리 죽음은 오히려 반가운 것인지도 모른다.
군사독재라는 불의의 힘은 죽음보다도
더 어두운 '깊은 잠'과 같은 침묵을 강요했다.
미얀마가 그렇고 아프가니스탄도 이와 같다.

수없이 많은 친구들과 동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어디론가 끌려가기도 하고
그리고 대다수는 끝끝내 우리들 곁으로 되돌아오지 못한 채 불귀의 객이 되기도 했다.
캄보디아가 그렇고 필리핀도 이와 같다.

나의 몸 어느 구석에는 어쩌면 어머니의 태 속에서부터 한반도전쟁의 상흔이 깊이 각인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양대 이데올로기의 극단적인 갈등은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이분법으로만
바라보도록 강요하여 사실상 우리 모두를 분열증 환자로 만들어 버렸다.
베트남도 그렇고 스리랑카도 이와 같다.

한반도는 아시아가 앓고 있는 병의 총체적 현상을 보여주었다.
제국의 수탈과 함께 근대화가 강요되었고, 역시 자주적이지 못한 해방과 독립이
민족분쟁을 낳았고 그 분쟁의 배후에 있는 극단적인 이데올로기의 양대 진영이
군사독재라는 패륜아를 낳았다.

이것이 아시아의 근현대사가 갖는 보편적 증후군이다.
그러나 한국은 이제야 민중의 자발적 힘에 의해 이 고난의 역사를 얼마간 극복할 수 있었다.

동아시아의 허접한 富는 아시아 주변 국가들에 대한 '고요한 약육강식'을 통해 유지 확장하려고 꿈꾸고 있다. 일본은 월스트리트에서 그렇게 배웠고 또한 한국도 역시 그 방법을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노동열사 전태일의 분신 이후로 수많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미래세상을 열기 위해
정의로운 죽음의 행진을 계속했다. 참으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감옥으로 갔다.
그리고 80년 오월광주가 있었다.

그 이후에 십수년의 세월이 넘도록 우리는 군사정권의 온갖 감추어진 만행과 대결해야만 했다.
동티모르, 필리핀, 태국 등이 모두 이와 유사한 역사적 궤적을 가지고 있다.

미술도 예외가 아니었다. 양심적인 화가들에게 그들의 폭력에 대항할 수 있는 무기는 오로지 그림밖에 없었다.
이것이 한국 80년대 민중미술의 출발점이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그들의 만행에 치를 떨며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이고 죽어갔다.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암흑의 시대를 자기 몸으로 불을 밝히려는 죽음은
'분신'에서 또 '분신'으로 이어졌다.
이 헤아릴 수 없는 죽음들이 나의 가슴에 깃들어 있다.
밥 먹을 때도, 잠자리에 들 때도, 길을 걸을 때에도 그 숱한 영혼들이 나의 가슴속에서 울부짖는다.
그들 중음신들이 저승의 세계로 들어가지 못하고 구만리 장천을 떠돌아다니다가 결국 나의 몸 속 어딘가에 웅크리고 있다.

우리의 시대에, 우리들의 눈앞에서 이러한 야만적 살인행위가 공공연하게 벌어졌다.

베트남전쟁에서 무참하게 죽은 수많은 영혼들을 생각한다.
스리랑카에서는 정쟁에 의해 3년동안 6만명이 실종되었다.
캄푸치아에서 200만명이 학살되었다.
현재 이 순간에도 아프간의 무고한 사람들 머리위에
폭탄이 투하되고 있다.
더 이상 거론하기조차 부끄럽다.

아시아의 예술가들은 이러한 원귀들을 도처에서 만나고 있다.

언제부터일까, 나의 그림은 그들의 영혼을 씻겨주는 일이 되어 버렸다.
죽은 자들의 원한과 설움을 씻겨서 피안의 세계로 올려 보내는 일이다.
억울한 영혼의 한을 풀어주어 저승에 들 수 있는 존재로 만드는 일이다.
더불어 함께 살아 가야할 미래 세상을 위해 죽어간 넋들의 혼을 진혼하고 위로하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

그렇게 그림 그리는 과정은 실제로 그들의 죽음을 다시 한번 차근차근 재현해 보는 과정이었고, 그것을 통해, 여지껏 살아남은 내가 그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고 나를 그들에게 이해시킬 수 있게 된다.

즉, 나의 그림들은 삶과 죽음이 화해하는 의례이며, 살아 남은 너와 나의 미래를 위한 祭儀이기도 하다.

나뿐만이 아니라 아시아의 화가들은 아직까지도 祭儀의 그림 그리기를 멈추지 않고 있다.

일본은 전쟁범죄라는 역사적 원죄에 대해서 結者解之하기 위해서도
새로운 차원의 동아시아 연대를 필요로 한다.
'동아시아 공동체'라는 훌륭한 낱말은 70여 년 전 일본의 '대동아 공영권'이라는
원죄에 의해 언제나 불온한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러나 현재 일본은 경제적 위기를 군사대국화로 돌파하려는 위험한 시도를 하고 있다.
동아시아의 허접한 富는 다시 암울한 미래를 예고한다.

중국은 스스로 이미 아시아가 아니고 '세계'라고 주장한다.
서구의 일부분에서 유행하고 있는 '차이니즈 패션'을 보고 마치 '세계'인 것처럼 생각 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중국 경제, 나아가 국가의 미래를 휘황한 모습으로 바꿔놓은 흑묘백묘론으로 상징되는 덩샤오핑의 실용주의는 과연 세계 공동체에서의 자국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중국의 폭발적인 경제적인 힘, 아직은 잠재력에 불과한 그것이 이 동아시아, 나아가 세계를 진정한 인간적 가치가 구현되는 세상을 위한 물적 토대가 될 수 있는가.

경제적인 이해관계는 서로간에 義人의 죽음까지도 저당 잡히는 일을 주저하지 않는다.

추악한 '머니전쟁'으로 전락한 자본주의는 이미 오래 전에 야수의 얼굴을 보여주었다.  
월스트리트가 벌이고 있는 '탐욕의 게임'은 우리들의 역사까지도 사고 파는 상품으로 둔갑시키는 일을 서슴지 않을 것이다.

일본은 이미 그 게임에 온몸을 던진 상태이고 한국은 두발을 담근 채 비틀거리고,
중국은 뒤늦게 한쪽 발을 깊숙이 내딛고 있으나 이미 되돌아 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아시아의 화가들은 다시 되묻고 있다.

"중음신들의 원한을 씻겨주기 위한 그림 그리기가 얼마나 더 계속되어야 하느냐" 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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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흘러서 강, 모여서 바다
이름: damibox


등록일: 2006-10-17 14:11
조회수: 1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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