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담의 그림창고


‘집’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
      홍성담 화가의 ‘집에 관한 명상’ 총 4편의 글
         1. ‘집’이란 무엇인가
         2. ‘집’을 어떻게 지을 것인가
         3. ‘집’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4. ‘집’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가운데 이번호에는 그 세번째 글로 “‘집’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게재한다.
----------------------------------------------------------------------------------------------------------------------------

  사람들은 집을 짓는다.
  
기둥과 보로 정해진 구획에 흙을 쌓아 올려 벽을 만들고 또 흙을 돋우워 바닥을 만든다.
  때로 역사는 바람과 눈․비 등 자연현상으로부터 인간이 피하는 기술로 그들의 족적을 남겼으니 그것을 ‘문화’라 이름한다.
  사람들은 흙을 쌓아 올려 벽을 만들고 그 속에 숨어 잠시 자연의 화를 피하였다. 이 것에서 가장 최소한의 공동체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그래서 벽은 자연공동체를 만들고 그 벽안에서 개인의 특별한 역할에 따라 또다시 벽이 쌓아지기도 한다. 이러한 벽은 내․외부를 가늠하는 구획일 것이고, 필요공간을 분할하면서 소음과 시야를 차단하고 비바람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또 심신의 안정을 꾀하는 동시에 외부로부터의 보안성을 유지하매 그 쓰임새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필요불가분의 요소로 되었다.
  벽을 쌓는 일 - 그것은 인간공동체를 추구하는 적극적인 노동이다. 종국적으로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유토피아로의 갈망이겠지만 그것은 자신만의 삶을 이루려는 가장 적극적인 표현이다.
  지오폰티(이탈리아의 건축가)도 벽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벽들에 의해 감싸져 온 기쁨과 슬픔들로 인하여 건축을 사랑하라. 그 벽들이 귀담       아 들은 모든 것들로 인하여(만일 벽들이 말을 할 수만 있다면!) 그리고도 비밀을       지켜온 것으로 인해 건축을 사랑하라. 이 감추어진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 그들의        기쁨, 희극과 비극, 어리석음, 희망, 기도, 좌절, 깨달음, 그 모든 것들로 인해 건축       을 사랑하라. 벽은 역사와 사건과, 삶과 죽음, 시, 광기 그리고 부귀와 빈곤으로 가       득 차 있다.”
  사람은 벽을 쌓아 올리고 그 안에 자신이 선택하는 우주의 어떤 부분을, 그리고 세상만물을 끌어들이고 싶어 한다. 그러나 벽은 거꾸로 장애물이 되기도 한다.
  집을 짓는다는 것도 결국 빈 것 속에 또다른 빈 것을 만들기 위해 벽을 쌓는 일이라면 자연이라는 총체적 공간 속에 인간의 공간을 구획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이 벽이 결국 자연으로부터 인간을 유폐시키고, 인간과 인간을 단절시키기도 하며, 벽을 조금 더 높고 넓게 쌓아 올리는 것을 두고 그 개인의 능력과 권위를 나타내는 잣대가 되기도 한다.
  벽을 만드는 일 - 흙을 쌓는 일을 통해 인간은 우주를 표현한다. 즉 자기만의 작은 우주를 그 벽안에 만들고 싶어 한다.

  한국가옥의 전통적 특징은 그 집에 앉아 있는 자연과의 혼연일체에 있다. 집이 자연과 인공과의 긴밀한 유대관계를 지니는 것으로 만들어 질 때, 그 유대관계라는 틈․완충지대를 통해 교묘하게 우주의 기운이 집안으로 스며들게 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집의 조형은 더욱 정밀해져야 한다. 사람이 만든 집이 산천의 흐름을 인공적으로 중단시키지 않게 하기 위해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상의 조형은 물론, 가상의 공간까지도 계산한다. 집이 뒷산을 닮기 위해 지붕의 곡선을 매일 대면하는 밥그릇의 호를 따라 매끄럽게 그어내렸던 초가집 지붕이며, 기와의 무거운 색깔이 갖는 중량은 처마끝을 약간 치켜올려 반감시켰던 것이다. 또는 그곳에 건물이 위치함으로써 뒷산 줄기의 흐름을 인공적으로 중단시키는 것을 보완하기 위해 처마라는 공간을 동시에 보유하는 것도 모두 대지와의 일체감을 지니기 위한 노력이다. 한마디로 이야기 한다면 집은 대지와 혼연일체가 되어 조형의 정밀감 속에서 대비적으로 강인한 질감을 동시에 표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한국가옥의 특징이 처마의 고유한 곡선에 길들어져 있다고 이야기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부분적인 의장적 특성을 바라보는데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중요한 특징은 건축과 대지와의 강인한 관계속에서 인식해야 한다. 한국의 가옥은 흙과 나무로써 가장 완벽한 조형적 완성을 꾀하는 구조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흙은 골격위에 입혀져 공간을 구획하거나 마감하는 재료로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선사시대의 움집에서 보여지듯이 인간은 흙으로 둘러싸인 공간을 오랫동안 경험하여 왔다. 흙은 구하기 쉬울 뿐 아니라 방습과 보온, 그리고 의장적 성능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바닥이나 벽체, 천장 등의 마감재료로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었던 것이다.
  흙은 한국 전통가옥의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아마도 흙은 자연속에서 살아 숨쉬고 자연으로 다시 귀환하려 하는 의미로써 한국인의 삶 전체의 원점이고, 흙에 대한 경의는 한국인에게 있어서 신앙과도 같은 것이다. 이렇듯 우리의 집은, 흙에서 스며나오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감각은 물론 흙이 갖는 원초적 생명력에 대한 감응을 빼고서는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흙은 추위와 더위에 대응하는 자연조절 기능을 갖고 있다. 한국 전통가옥의 가장 큰 특징중의 하나는 마루와 구들이 있다는 것이다.
  온돌은 북방의 추운 지방으로부터 시작된 폐쇄적 구조이지만 마루는 남방의 고온다습한 기후에 대처하기 위한 개방적 구조이다.
  이와 같은 이율배반적인 구조가 한국에 있어서는 한 지붕의 내부공간에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온돌이 겨울의 생활공간을 위한 것이라면 마루는 여름의 생활공간을 위함이다.
  불(火)은 나무(木)를 얻어서 발생하고 물(水)을 만나서 꺼지며 흙(土)에 이르러 완전히 없어진다고 오행은 가르치고 있다.
  불은 흙을 넘나들 수 없으니 어찌 보면 서로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두 개의 기능이 함께 존재하는 특성은 우리 기후에 가장 적합한 기능의 완결성을 의미한다.
  외벽도 내벽도 모두 흙을 쌓아 공간을 구획한다.
  흙을 쌓아 올려 흙속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흙과 함께 숨쉬는 것이다. 흙벽이 숨을 쉬면서 습기와 건조한 기운을 조절한다. 그래서 집은 사람의 숨결과 맞닿아 있어야 한다. 아무리 좁은 집도 사람의 기운을 받지 않으면 쉽게 폐허가 되어 버리고 만다. 집 자체가 혼자서 버틸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은 집을 통해 천지의 기운을 받고 집은 사람을 통해 영혼을 갖는다.
  우리의 흙벽은 일정한 공간을 분할, 분리시키는 기능 뒤에 또 다른 특수한 기능을 갖고 있다.
  서구 건축의 벽이 대립하는 공간을 만들어 벽과 벽이 이루어내는 선의 갈등속에서 균재와 조화를 이루어 낸다면, 흙벽이 만드는 공간은 연속과 확장을 반복하는 공간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서구 건축이 근래에 인간회복을 꾀한다는 명제아래 불규칙적이고 부서지는 듯한 탈 형태의 해체주의적 전략까지도 제출했으나 그 것 역시 형태적 유희만을 추구해 버린 결과를 낳았다. 서구의 기존문화와 철학에 대한 근본적 의문을 제기하는 해체주의의 본질을 건축적 차원에서 더욱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역적 전통을 현재적 관점에서 실천하는 것에서 그 이전의 건축방법들이 갖고 있는 기존의 정의와 개념을 해체시켜 보아야 한다.
  그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의 흙벽은 비표준적 척도의 무한 공간이다. 그들이 그렇게 중시하는 모서리의 경계를 해체시켜 버린 것이다. 그것은 흙벽이 얻는 자연스러움, 자연 그 자체로써 가능한 것이다.
  그들의 집은 주어진 것 그 자체가 아니라 구축을 통해 획득하는 인위적 자연이라 할 수 있다. 또 그들은 국제적 양식 대신에 지역적 전통을 추구함으로써 인간을 위한 건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통성이라는 문제도 건축을 이루는 문화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할수록 건축을 형태의 차원으로 받아들이게 마련이고, 그 각각의 모습은 별개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된다. 그러한 어리석은 예를 경복궁의 민속박물관 뿐만 아니라 7․80년대 한국의 건축에 유행처럼 번졌던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었다.
  우리의 흙벽은 그 안으로 자연을 끌어 넣거나 혹은 자연이 스스로 스며들어 자연의 일부에 동화되므로써 자연과 집이 조화하고, 일체화하는 것에 의해 그 생명을 얻는다.
  그 흙벽속에서 내부와 외부의 상호침투가 존재하고 있다.
  처마 밑의 공간이나 마루의 존재에서 우리는 그것들의 경계영역이 가진 양의성, 다의성을 재발견할 수 있다면, 그렇게 허물어진 경계는 흙벽너머에까지도 넘나들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현대의 건축가들은 인간주의의 정신을 벽에서 찾는다.
  그들은 물리적으로 형성된 벽을 설계함에 그치지 않고 보이지 않는 벽, 벽이 있어도 뚫려 보이는 벽, 뚫린 벽 사이로 보이는 벽, 벽이 아닌 것 같으면서도 실재하는 벽, 벽 속에 무엇인가 다른 특별한 세계가 펼쳐 보이도록 하는 비밀스러운 벽 - 을 만들어 내기 위해 자신의 모든 가능성을 타진한다.
  불투명한 벽의 투명함, 투명한 벽의 불투명함 - 솔직함, 투시성, 가벼움, 의미 없음, 비어 있음, 결국 이렇게 파생된 관념적 의미를 마술처럼 벽에 투사시킴으로써 벽의 형식을 확보하려 시도한다.
그러나 우리의 흙벽은 인간과 자연의 길항관계속에서 가질 수 있는 모든 가능한 내용을 이미 내포하고 있다.
  흙벽은 자신의 속성을 그대로 드러내므로써 솔직해지고, 자유로와지며 가벼워지며 벽 자체의 근원적 의미를 환기시키게 되며 이로 인한 관념적 투명성을 획득할 수 있는 미덕을 갖는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쌓아 올린 흙벽에는 과거와 미래가 분명하다. 이 벽이 허물어지면 흙이 되고 다시 지으면 집이 되는 순환의 원리를 갖고 있다.
  인간의 손으로 만드는 것이 신성한 것이 되고, 우리의 살이 되었던 대지를 공경하는 것이 되려면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들은 땅에서 나와야 할 뿐만 아니라 다시 땅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땅으로부터 받은 모든 것들이 자유롭게, 어떤 생명계에도 해를 끼치지 않고 되돌아 갈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가장 완전한 순환이며 가장 완전한 인간의 과거와 미래이다.
  그래서 사람은 흙으로 벽을 쌓아 사방을 두르고 흙위에 누워 삼라만상을 여행한다. 그 흙들의 투명성에 의해 대지의 숨결, 자신을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 땅의 맥박과 자기의 맥박을 일치시킨다.
  흙벽의 내․외부 상호 침투성은 낮과 밤, 사계절, 즉 자연의 순환이 갖는 리듬이 악기의 현을 고르듯 생장소멸의 율동이 어느덧 사람의 몸안에 스며 들게 하니 그는 어느덧 자연에 속한 가장 자유스러운 생명의 하나가 되는 것이다.
  마당에서 마루로, 마루에서 다시 안방으로, 안방에서 부엌으로 뒤안으로 대청으로 흙벽과 흙벽의 극히 단조로운 구획은 문턱 하나를 넘을 때마다 시각체험이 다르고 맨발에 느껴지는 질감이 다르다.
  그러나 그 공간들은 모두 한 축에 꿰어 있어 우리의 삶 속에서 긴밀하게 이어져 있다.
  이것에 대한 단순한 분석을 경계해야 한다. 말하자면 “마당이 거실이고 마루가 탁자의 역할을 하며 안방은 소파의 구실을 한다.”는 식의 구조적 이해가 전통의 현재화를 위해 얼마나 위험한 발상인지 그 해악을 우리는 문화 각 부문에서 충분히 경험하고 있는 터이다.
  우리의 집이 갖는 구조는 단순히 서로 다른 공간이동이 아니며 공간과 공간의 접합도 아니다. 공간과 공간사이를 엮어 주는 문이라는 구조가 ‘열림’과 ‘닫힘’의 개념을 넘어서 더 복잡한 의미의 초월을 포함한다.
  ‘문’ 하나를(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창호지 한 장의 두께) 사이를 두고 각 공간을 주재하는 신이 다르다. 부엌에 조왕신이 있고 대청마루에 성주신이 있다. 안방에는 삼신할미가 주재한다. 신격을 빌려서 표현되는 각 공간에 대한 개념은 창호지 한 장 두께를 통해 교통된다.
  이렇게 사람은 흙벽안에서 초월적 지향을 꿈꾸고 있다.
  사람을 태어나게 하고, 나무를 싹트게 하여 꽃봉오리를 피우게 했던, 그리고 그 생명들이 다 하면 다시 흙으로 되돌아가는 것으로 순환의 한 매듭을 막음하는 근본 바탕인 흙으로 쌓아 올린 벽, 그것은 투명할 수밖에 없다.
  이 시점과 저 지점을 넘어 가는 그리고 연속되는 한 없이 큰 세계를 향하는 것이다.
  질서와 조화는 외부에서 가해지는 압력에 의해서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조성되는 균형이다. 흙벽으로 구획된 공간은 ‘단절’이 아니라 연속적으로 인간의 순환역사의 중심을 차지한다. 마당에서 마루 안방 대청 부엌 뒤안으로 이어지는 중첩된 흙벽은 이렇게 초월적 세계를 포함함으로써 우리들 삶에서 공간의 의미를 더욱 완전하게 만든다.
  근대이후 건축가들은 인간의 꿈을 실현하려는 가상공간을 만들어 내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건축가들은 인간에게 가장 쾌적한 공간을 자신들만이 제공할 수 있다는 생각, 즉 자신의 손은 신의 손이라는 오만에 빠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설계도면에서 공간과 공간의 연결이 삶의 구조물이 된다는 것을 간혹 간과해 버렸다. 그것은 편의 또는 합리라는 이름으로 공간과 공간을 분리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밀폐된 공간끼리 서로 조합을 이루고 있다.
  어떤 이는 이렇게 단언한다. “근대의 건축은 실패했다. 건축가가 있는 최근의 건축이 건축가 없는 건축보다 우수하다는 증거는 사실상 하나도 없다. 아니면 그것이 더 많은 행복을 낳는다는 증거도 없다.”(피이터 블레이크)
  현대 산업문화가 채택해 온 건축문화의 전략은 근본적으로 폭력적이거나 막대한 양의 에너지의 사용을 전제로 한다. 인간주의 건축으로 나아가는 벽의 투명성을 단편적으로 해석한 결과가 사람보다 건물이 더 중시되는 유리건물들까지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유리가 사람을 바깥과 연결해 줄 것이라는 희망은 건물이 밀폐됨으로써 완전히 망쳐졌다. 유리벽면으로 사람들은 바깥과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벽하게 갇히게 되었고 집은 ‘주거용 기계’가 되어 버린 것이다.
  바람은 뒷산 골짜기를 내려와 집 뒤안을 거쳐 안방으로, 그리고 마루를 넘어 마당을 가로지른다. 낮은 담을 끼고 한 번 가볍게 휘 돈 다음 양쪽의 산허리 율동을 따라 넓은 들의 온갖 살아있는 것들을 어루만지고 앞산에서 잠시 쉰 다음 그 앞을 흐르는 강 속에 머물며 다시 맑은 햇빛 한가닥으로 변하여 하늘로 올라간다.
  중첩과 중첩의 연속이면서 반복과 반복을 더하여 그 순환으로 산이 숨을 쉬고 들에 맥박이 생기니 사람이 쌓아 올린 흙벽안에까지 그 율동이 은근하게 파동친다.
  하늘이, 들이, 산이, 강이 그리고 집이 숨을 쉬고 그 안에서 사람이 그것들과 똑같은 호흡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공간이 ‘숨’이면 빛은 ‘결’이다.
  흙벽은 ‘숨’을 담고 있다.
  여기에 빛이 닿아 ‘숨결’을 만든다.
  건축에서 빛이란 단순히 계량적인 광량을 다루는 문제가 아니다.
  역사적으로 수없이 많은 건축가들이 빛과 건축과의 관계에 있어 공간과 형태의 존재를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요소의 하나로 다루어 왔고, 건축에서의 빛의 실패는 건축의 실패로 이어지듯이 건축가들은 빛을 다룸에 있어서 평생을 바쳐야 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말해 “건축은 빛의 연출이며 빛은 건축이 입은 옷이다”라고 말 할 수 있다. 빛과 침묵(그림자)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발현되는 창조적 표현의 기원을 탐구하는 것이다.
  빛은 자연이 준 표현의 수단이며 도구다. 아울러 빛이 만들어 낸 그림자라는 ‘침묵’은 집단무의식에서 솟구치는 표현하고 싶은 욕구로 이들은 필시 예술작품을 창조하는 영감을 발현시키는 것임에 틀림없다.
  형태와 공간은 빛에 의해 그 본래 모습이 나타나게 된다. 빛은 에너지이기 때문에 공간은 빛에 의해 활성화되고 생명이 있는 공간으로 전환된다.
  어느 젊은 건축가의 빛에 관한 단상을 읽은 적이 있다.
    “빛은 건축에서 영원한 숙제이다
     빛은 생명이고 환희다
     빛은 형태이고 공간의 본체이다
     빛은 살아있는 예술이다
     빛은 언어이다
     빛은 향기이다
     어두움은 빛을 만드는 근본이다
     빛은 흐르기도 하며 떨어지기도, 쏟아지기도 한다
     빛은 정신적인 물체와 물체화된 정신을 잇는 조정자이다
     빛은 영의 또다른 모습이다
     빛이 농축되면 소리로 변한다
     빛은 불이다
     빛은 몸이며 파장이다
     빛은 물체이다
     빛은 창조자이다
     인공빛은 죽은 빛이다
     빛은 진리이다
     건축은 빛의 그릇이다”

  집을 구상하고 짓는 사람들에게 빛은 이처럼 가장 좋은 재목일 수 있다.
  빛에도 여러 가지의 형태가 있다.
  직진하는 빛은 강한 음영을 남긴다. 그 공간은 음과 양이 극단적으로 교차하여 대립한다.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는 어둡다고 했다. 어두운 그림자에 의해 빛은 그 존재가 더욱 오만해진다.
  그러나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고 했다.
  확산하는 빛, 반사하는 빛, 산란하는 빛, 스며드는 빛, 걸러지는 빛, 쏟아지는 빛…. 사람들은 어차피 빛의 홍수속에서 살고 있고 또한 빛을 향해 모여든다. 자본주의의 발달한 상업성은 이 빛을 더욱 강하게 전율스럽게 만드는 방법을 잘 응용하여 자기 상품을 광고한다. 근대 건축의 예술성은 이러한 상업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곳에 사용되는 빛들은 모두 인간적인 요소들을 제거해 버린 손에 잡히지 않은 ‘광선’에 불과하다.
  산란된 균질의 빛은 그림자 없는 공간을 만들고 형태나 질감의 조형적 효과를 나타내지 못한다. 사물의 형을 숨겨 버리니 호흡이 없는 죽어있는 빛이다.
  근대건축가들이 좋아하는 집중되는 빛은 형태나 질감을 보는데 좋으나 방의 폐쇄적 성격을 너무 강조한다. 대상이 뚜렷하게 보이는 대신에 저 물건들이 모두 내 소유여야 한다는 이기적 자아를 만든다. 자신의 방안에 들어온 빛까지도 자기만의 분량으로 착각한다.
  이사람은 빛까지도 일인분, 이인분, 삼인분… 인간으로서는 가장 처절한 계산법에 익숙해져 자기것이 아닌 다른 것과 단절이 되지 않으면 절대 안심할 수가 없다.
  빛은 비로소 흙과 만나거나 살아있는 무엇인가를 경유 투과하면서 맑고 투명한 호흡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빛은 절제된 상태에서 풍요로워야 한다.
  창살에 의해 일차적으로 걸러진 빛은 진행방향의 가닥을 잡는다.
  창살의 형태나 조형의 아름다움을 논하기 전에, 맞춤한 창살의 두께와 높이가 직진하는 빛의 각도를 바꾸고, 쏟아지는 빛의 양을 조절하고, 산란하는 빛을 일정한 방향으로 모두어 준다.
  이렇게 정리되어진 빛은 창호지를 투과하면서 모든 것을 감싸안을 수 있는 가장 겸양의 태도로 확산한다.
  세상만물에 대해 빛이 갖고 있는 자비로움이 얼마나 커다란 것인지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읽어낼 수 있다. 빛은 특별하게 어떤 방향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공간안에 태초부터 존재하는 것이어야 한다.
  빛은 빛이 나타내고자 하는 대상 자체에 녹아 있고 스며들어 있다. 이것이 빛에 관한 확산의 개념이고 스며듦의 모양이다.
  이때 비로소 창은 단절이나 밀폐가 아니라 공간밖의 자연으로 한없이 연결되어 있다.
  산과 들의 호흡이 빛에 실려 창살의 인위적 조형과 어우러져 다시 태초의 자비한 빛으로 방안에서 숨을 쉬고 있다.
  이것을 무현금無玄琴의 시간이라고 한다.
  해가 뜨기 직전 또는 해가 서산너머로 넘어 가는 어떤 짧은 시각에 천지의 기운이 정음정양正陰正陽을 이룬다. 이때는 부는 바람도 잠시 멈추어서고 풀벌레울음소리도 멈추어 마치 시간이 정지되는 듯이 태고의 정적속에 빠져드는 극히 짧은 순간이다.
  천지의 기운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순간이니 어떤 다른 무엇이 그것에 개입할 수도 없도 그럴 필요도 없다. 그러나 살아있는 것들의 영혼은 그 시각에 멈추어 밀폐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만물을 꿰뚫고 가장 근원적인 곳을 향해 서로 열려 있다. 세상의 시작과 끝의 어떤 지점을 관통하고 있다.
  창호지에 스며들은 빛의 ‘결’은 흙벽의 ‘숨’과 만나 비로소 숨결을 고르니 ‘무현금’의 시간을 만든다. 고요한 정적이 하늘의 본성이고, 인간은 하늘의 본성을 따르는 것을 인생의 목포로 한다.
  어머니의 자궁인 땅으로 돌아와 다시 ‘태’라는 집속에 안기는 일, 「역경」에서도 돌아오는 일은 항상 길한 일로 되어 있으며 떠나거나 돌아오는 길을 잃어버리는 것은 흉한 일로 되어 있다.
  인간은 태초의 자리로 돌아감으로써 우주적 화해를 이룬다.
  노자의 도덕경 16장이다.
     “만물은 왕성하게 번성하다가도 결국은 그 뿌리로 되돌아간다. 뿌리로 돌아간 때를        일컬어 조용하다(靜)고 한다. 그 조용함을 천명 그대로의 자연스러운 상태로 돌아        왔다고 한다. 그렇게 천명 그대로의 자연스러운 상태로 돌아온 것을 상태常態라고        한다. 상태를 아는 것을 참다운 지혜(明)라고 한다.”

  흙의 ‘숨’과 빛의 ‘결’이 만나 참다운 ‘명’을 이루었다.
  우리 인간이 발전시킨 여러 형태의 근대 건축은 창이나 갖가지 빛우물을 통해 공간에 들어온 빛을 완전하게 가두어 두는 것을 목표로 하거나 인위적인 빛을 만들어 밖으로 내뿜어 내는 것을 특별한 자랑거리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은 ‘빈공간’을 만들어 그 안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 또는 ‘어떤 공간’에 담을 것인가가 건축실천의 중요한 방법이 되었다.
  그러나 사람의 삶을 필요로 하는 공간은 그 공간을 만들기 전에 이미 그곳에 ‘무엇’이 있다는 것을, 무엇인가를 담기 전에 ‘어떠한 공간’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함으로써 “자연은 최소의 수단으로써 최대의 목적을 이루게 되어 있다”라는 진리를 깨닫게 된다.
  산과 들이 맥박을 뛰게 하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그 맥박과 정기로 생장소멸을 반복한다.
  인간은 그 어디만큼에서 어머니의 자궁같은 땅을 만나 흙벽을 쌓아 인간의 탄생과 죽음을 맞이할 ‘태’를 만든다. 그러므로 터를 정하는 일이 어머니의 자궁을 찾는 것이라면 집을 짓는 것은 ‘태’를 만드는 일이며, 집에서 산다는 것은 ‘태’속에서 호흡하는 일이다.
  ‘태’의 흙벽은 산천의 정기를 머금어 ‘숨’을 만들고 그곳에 하늘의 빛이 스며들어 ‘결’을 얹는다.

  사람들은 태어나 집을 짓는다.
  자연속에 집을 짓는 것을 두고 “자연을 정복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 자연이 맞춤한 자리를 비켜두매 내가 그 곳에 집을 지어 삶의 뿌리를 내리니 이제 그 자연을 완성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장자 제 3편에는 양생주養生主의 포정해우疱丁解牛의 이야기가 있다.
     “백정인 포정이 소를 잡는 모습이 마치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하는 것과 같아 예술        적인 경지에 이르렀기에 왕이 감탄하니 포정이 답하기를 자신은 기술로 소를 죽이        지 아니하고 도道로써 소를 풀어(解)내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곧 소의 자연스러        운 결을 따라서 칼날이 스며들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무후입유간以無厚入有間’은        두께없는 칼날이 소의 근육과 뼈 사이의 넓은 틈으로 들어간다는 표현이다.”

     산천도 혹 그 틈을 스스로 열고 자궁을 만들어 숨을 쉬고
     인간이 만드는 집들도 그 틈을 열고 ‘자궁’의 숨을 따라 쉬며
     사람도 그 틈을 열고 집의 숨결을 따라 호흡하므로
     그 틈이 넓지 못한 자는
     ‘집’을 지을 수도,
     ‘집’을 소유할 수도,
     ‘집’안에 살아갈 수도,
     그 안에서 호흡할 자격도 없으니….         [1995년]

  -목록보기  
제목: 집에 관한 명상(3) - '집'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이름: damibox


등록일: 2006-10-17 11:17
조회수: 1356


Copyright 1999-2020 Zeroboard / skin by DQ'Sty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