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담의 그림창고


‘집’을 어떻게 지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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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담의 ‘집에 관한 명상’ 총 4편의 글
  1. ‘집’이란 무엇인가
  2. ‘집’을 어떻게 지을 것인가
  3. ‘집’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4. ‘집’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 가운데 이번호에는 그 두번째 글로 “‘집’을 어떻게 지을 것인가”를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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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은 집을 짓는다.
  집에서 사람이 태어나, 세상의 한을 품은 사람은 품은 그대로, 이승에 여한이 없는 사람은 또 여한이 없는 대로 자신의 긴긴 여정을 끝마치고 지친 육신 뉘우는 곳도 그 집이다.
    집에서 일어나 집에서 눕고
    집에서 나가면 집으로 돌아오고
    집에서 태어나 집에서 죽는다.
  그렇듯 집은 인생의 거대한 순환의 중요한 시작과 종착점의 한 매듭이다.
  또한 세월이 흘러가며 흥망성쇄의 바람을 안고 가듯이 인간도 그 바람을 등질 수 없으니, 하물며 인간이 짓는 집도 역시 새 집의 찬란한 자태도 잠시일 뿐 세월의 파도에 그 빛이 바래가다가 어느 허한 구석 무너지기도 하고 드디어는 수 많은 사람들이 번질나게 드나들던 대문이며 마당에 잡초가 수북하고, 한때 제비머리처럼 가지런하고 저 산자락 보다 더 수려하게 하늘로 치솟아 오르려던 처마위엔 어디서 날아 왔을까 세월의 바람을 타고 날아 온 잡초들이 마치 노인의 백발처럼 스산한 바람에 나부끼면서 우리 인간들에게 세월의 무상함을 침묵으로 말해준다.
  사람이 세월앞에 스러져 가듯이 집도 그렇다.
  그러나 집에서 새로운 사람이 태어 났듯이 또한 새로운 사람이 새로운 땅을 찾아 새로운 집을 짓는다.

  흔히 예로부터 내려오는 말로 ‘집을 짓는 일’은 ‘성주님을 모시는 일’이라 했다. 집안에서 하는 모든 일의 주인은 ‘성주’일 뿐 아니라 아예 집주인 자리를 ‘성주’가 차지한다.
  무속에서 어느 굿이나 첫 마당에 성주굿이 들어 있다. 모년 모일 바로 이 집에서 굿을 하오니 이 굿의 주인이시고 이 집의 주인이신 성주님께 고하는 사설로 흔히 ‘성주풀이’라고 한다.

    성주야 성주로다. 성주 근본이 어디메뇨
    경상도 안동땅의 제비원이 본이로다
    제비원에 솔씨 받아 동문산에다 던졌더니
    그 솔이 점점 자라나서 황장목이 되었고나 도리 기둥이 되었네
    낙낙장송이 쩍 벌어졌으니 대활량으로 설설이 나리소서
    에라만수 에라 대신이야 어화어루 끄러허 설설이 나리소서

  장단은 굿거리에 창부타령 모양의 무곡이다.
  민간 신앙에서 집터를 맡은 신령인 성주왕신과 그의 아내 성주부인이 있는데 집을 지을때 부터 일문 일족의 번영에 이르기까지 시종 집의 길한 일이나 흉한 일을 직접 다스린다고 믿어 온다.
  이 사설에서 솔씨 라는 단어는 솔松이면서 쌀米, 그리고 살肉의 의미를 갖고 있다.  우리 땅 어디에를 가나 흔히 볼 수 있는 ‘소나무’ 그리고 우리 민족에게 ‘쌀’은 생명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살’은 말 그대로 우리의 육신이다.
  그러므로 ‘성주’는 집의 주인이되 집을 짓는데 쓰이는 소나무에도 거하고 우리가 매일 먹는 쌀속에도 거하고 우리 살(육신)속에도 거한다.
  그래서 집을 짓는 일은 바로 ‘성주’라는 한 인격체가 탄생하는 과정이며, 곧 집을 살아 숨쉬는 하나의 인격체로 해석했다. 다시 말해 건물을 ‘성주’라는 인격체로 보았고, ‘집을 짓는 일’을 ‘성주’라는 인격체의 탄생과정으로 믿었다.
  그 인격체가 바로 세워질 수 있기 위해 집터는 필수적으로 주위의 자연 풍광과 함께 호응해야 한다. 즉 집터란 건물이 세워질 단순한 장소이기에 앞서 성주신이 태어날 장소로 인식되었다. 물론 성주님을 모실 땅을 찾기 위해 풍수지리의 여러가지 논의들을 동원하기도 한다.
  풍수상으로 좋은 땅이란 땅 속으로 흘러다니는 생기의 감응을 받을 수 있는 곳을 말한다. 땅 속을 흘러다니는 생기가 바람을 만나면 흩어지고 물을 만나면 모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생기를 얻기 위해 바람을 막고 물을 얻는 온갖 방법으로 땅을 선택했다.
  이 세상 어느 것도 죽어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살아 있는 사람의 눈에는 죽음 자체도 삶의 연장선으로 보인다.
  산이 굽이굽이 솟았다 가라앉음을 반복하며 뻗어 내려가는 것도, 실개천이 모아져 강으로 흘러 산들을 보듬고 휘돌아 흘러가는 것도 모두 살아있는 하나의 생명으로 보았다.
  여기에서 사람이 살아야 할 집터란 단순히 건물이 세워질 장소이기에 앞서 성주신이 태어날 장소로 인식되었다. 하늘도 살아있고 땅도 살아있다. 하늘은 아버지이고 땅은 어머니다.
  민요 ‘회심곡’은 이 세상 모든 생명의 탄생과정을 이렇게 노래한다.
    어머님전 살을 받고
    아버님전 뼈를 받아
   칠성님전 명을 받고
    제석님전 복을 빌고

  생명은 하늘의 숨을 얻고 땅의 기운을 받아 태어난다.
  원래 풍수사상은 땅을 만물의 어머니로 생각하는 지모사상地母思想에서 출발한다. 좋은 운명을 가진 성주를 탄생시키기 위해 그 어머니인 좋은 땅을 구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땅이 성주신을 잉태할 어머니로 인식되었다면 집이 들어설 자리는 성주신이 태어날 장소, 즉 어머니의 자궁으로 해석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어머니의 자궁같은 땅을 찾기 위한 방법으로 무녀가 부르는 사설에도 여러가지 형국의 모양을 설명하고 있다. 스님형용을 한 무녀가 등장하여 덕담과 춤으로 망자는 물론 굿판에 온 사람들에게까지 근사한 집을 지어 준다.

    상좌씨―!
    시주를 하고
    좌우를 살펴 보니
    꼭 명당일시 분명하오
    갈마음수성이라
    목마른 말이 물먹는 성국이요
    노서하전 늙은 쥐가
    만곡을 내려다 보고
    웃고 내려오는 성국이요
    동남간을 바라보니
    문장성이 비쳤으니
    대대문장이 날성부르요
    서남간을 바라보니
    노적봉이 비쳤으니
    당년에 부자가 되것소
    앞산을 건너다 보니
    옥녀탄금성이라
    아름다운 미녀가
    칠보단장에
    거문고 앞에 놓고
    희롱하는 성국이요
    요런 좋은 성국
    요런 좋은 명당을 잡어갖고
    그냥가서 쓰것소
    집을 한 채 짓으는데
  진도 씻김굿의 한 장면이다.

  이렇게 땅이 결정되면 이제 집터를 닦는다.
  땅을 파거나 다지는 것이므로 분명히 땅에 인위적 손상을 가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집짓기의 시작은 어머니의 육신인 땅을 파헤치는 일이니 ‘집지음’을 알리는 ‘텃고사’를 지낸다. 이 텃고사는 모년 모일 모씨가 이 땅에 집을 지으려고 하니 토지신께서 이 땅을 부디 빌려 주시고 이 집짓는 공사기간동안 날씨도 청명하게 하시고, 사고도 없게 해 주시고 이 집이 완성되어 이 곳에 사는 사람에게 만복을 내려주라는 의식이다.
  땅을 토지신의 소유로 보고 사람이 살아생전 잠시 잠깐 빌려서 사용한다 라는 생각은 이미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 흔히 자연을 살아있는 생명체계로 보는 모든 민족은 자신이 사용하는 땅을 잠시 빌려 쓰는 것으로 인식했다. 미대륙 인디언들의 생활사에서도 그러한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다.
  ‘텃고사’는 집짓는 의식의 시작인 동시에 토지를 주관하는 신에게 그 땅을 이용한다는 것을 알리는 의식이다.
  지반이 무르거나 기초가 부실함으로서 집이 기울거나 무너지는 사례를 우리는 기술이 발달한 현대에도 수 없이 경험한다. 가깝게는 성수대교가 그렇고 삼풍백화점이 그렇다.
이러한 사고들의 근본을 좀 더 깊이 따져 보면 무릇 기술이나 공법에서 발생되는 문제라기 보다는 인간이 자연에게 언제나 승리하여야 한다라는 자만심에서, 그리고 자연을 인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는 오만함에서 비롯되어진 것을 알 수 있다.
  그 땅이 자신들의 영원한 소유물이 아니라 자연으로부터 잠시 빌려쓰고 그 결과물을 자연 만물에 다시 되돌려 주는 것이라는 경건한 명상이 집을 지으면서 단 일분만이라도 있었더라면 그 비참한 결과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제석굿의 ‘지경다구기’ 한 대목이다.

    헤~여 헤어헤
    어이여루 어기야 청청 지경이로구나
    나무가래는 칡줄로 매고
    쇠가래는 쇠줄을 매야
    알아감실로 지경을 닦세
    헤~여 헤어헤
    금가래에다 금줄매고
    은가래에다 은줄매야
    알아감실로 지경을 닦세
    (후렴)
    일세동방 주추밑에
    봉 한쌍이 묻혔으니
    봉의 머리 거치지 않게
    알아감실로 닦아나 보세
    (후렴)
    삼세서방 주추밑에
    금두꺼비 묻혔으니
    금두꺼비 거치지 않게
    알아감실로 닦아나 보세
    (후렴)
    반안지경 다글적에
    청용 한쌍이 묻혔으니
    용의 머리 다칠세라
    알아감실로 다가보세
    (후렴)
    정저지경 다글적에
    황용 한쌍이 묻혔으니
    용의 머리 거치지 않게
    알아감실로 다가보세
    (후렴)
    마구칸지경 다글적에
    우마 한쌍 들었네
    우마머리 다치지 않게
    알아감실로 다가나 보세
    (후렴)

  이미 이승을 떠나는 망자에게 지어주는 집의 터를 닦는 모양도 이렇듯이 자연과의 조화를 생각하며 조신하게 공사를 벌이고 있다. 우리는 이 사설에서 집짓는 사람들이 땅을 다스림에 있어 얼마나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는 지 알 수 있다.
  땅을 아끼고 존중하는 마음은 땅 한 뼘이라도 다칠세라 조심하면서 그 땅의 형상에 맞추어 집을 완성하는 일로 만족하였다.
  
  집터를 닦았으니 이제 주춧돌을 심는다.
  건물의 평면형태는 바로 주춧돌을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셈이다. 주추를 배열하는 모양에 따라 집의 위치와 방향이 결정되므로 주추를 놓는 작업은 현대 건축공정에서 ‘설계’의 지위와 같다. 그러므로 설계 즉, 주춧돌을 놓는 것에서 부터 하늘과 땅의 결합이 이루어지고, 짓고자 하는 집, 다시 말해서 성주신의 모양새가 충분히 상상 가능하게 한다. 집짓기의 신화적 맥락으로 보면 어머니인 땅에 성주신의 씨가 심어져 잉태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즉 집터에 주추를 박는다는 의미는 아버지의 생명의 씨앗이 자궁에 자리하여 잉태되는 것과 같은 상징적 의미를 가지게 된다. 성주신을 탄생시키기 위한 하늘과 땅의 결합이다.

  집짓기 의식에서 집을 성주신의 신체로 간주한다면, 기둥은 성주신의 골격을 형성한다. 옛부터 집짓는 재목으로는 소나무를 으뜸으로 치고 기타 재목들은 좋다고 하더라도 헛간 짓는데 쓰이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래서 솔(나무)은 살(육신)이고 쌀(식량)이라는 생명의식으로 인식되었는 지도 모른다. 이 세 단어의 어원은 모두 같은 곳에서 출발했다.
  소나무 기둥은 아버지인 하늘로부터 숨을 받은 신체의 뼈대이기에 신성하게 여겨졌을 것이다. 신체의 용모가 골격에 따라 결정되듯이 신체의 뼈대를 선택하는 일은 좋은 신체를 만들어 내기 위한 신성한 의식의 일부로 여겨졌다.
  민요 ‘지신밟기’는 나무를 고르는 광경을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어헐사 지신아 지신지신 올리자
    이집 짓던 대목大木은
    어느 대목이 지었나
    각성받이 중에서
    그 중에 한 대목이 지었지
    강남서 나온 제비
    솔씨 한대 물어다가
    조선천지 헐었더니
    한 장목이 되었고나
    앞집의 김대목아
    뒷집의 박대목아
    설흔 세가지 연장망태 둘러메고
    서울 앞산 오남산
    서울 뒷산 삼각산
    전라도 지리산
    나무 한개 작발하니
    까막까치 집을 지어서
    그 나무 부정하다.
    또 한개비 작발하니
    날새 들새 집을 지어
    그 나무 부정하다
    황해도 구월산서
    나무한 개 작발하여
    굽은 나무 굽다듬고
    가진 나무 잣다듬어
    이 집을 지었고나

  성주신의 뼈대를 상징하는 목재가 하늘의 성질을 갖는 솔씨가 근본이 되어 자라난 소나무이며, 이 소나무를 고르고 가공․조립하는 작업이 바로 성주신의 신체를 만드는 과정으로 상징한다고 볼 때, 집짓는 사람들의 작업은 생명을 창조하는 신성한 작업일 수 밖에 없다.
  모든 재료는 그 재료 자체가 본래 지니는 천연스러움을 존중한다. 약간 휘어진 나무는 휘어진 그대로 오히려 자연스러운 공간을 만들어낸다.
  서구 현대미술에서 몽드리앙의 냉정한 공간감각은 자신이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라고 믿는 오만방자함으로 극치를 이룬다면 우리 건축의 공간감은 재료와 자연환경과의 끊임없는 조화를 구한다.  천연과 인간의 공간감각이 합해지는 일이 바로 ‘집짓는’ 것이고 곧 성주님을 모시는 일이다. 천연은 인간의 공간감각을 존중하고 인간은 재료의 천연스러움을 존중한다. 가장 천연스러운 것은 그대로 살려주는데 존중의 아름다움이 있다.
  작년 봄 나주 다도마을을 둘러 보았을 때 느꼈던 감상이다.
  대들보도 꾸불거리는 나무를 썼을 뿐만 아니라 기둥 또한 옆 기둥들과 굵기가 다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균형에 짜임새가 있다. 아주 드문 일이지만 대담한 작업이다. 이러한 공간감각 이전에 나무가 지탱하는 하중의 처리를 아주 잘 속셈했다고 할 수 있다. 왜냐면 백년이 넘도록 이 집은 별 탈없이 조용히 자리를 잡고 있고 사람은 그 안에서 편안하게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럴 수 밖에 없을 때는 형편에 따라 하라는 말이 있다. 부처는 원칙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에 달린 것이니 있는 그대로 행하면 족하다고 설법했다.
  모든 사물을 바라보매 자신만이 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독단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이 세상 만물 속에 아주 작은 하나라는 진지한 명상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명상을 통해 이제 내 자신이 세상 만물의 보이지 않는 힘에 떠받쳐 중심적 전체로서 비로소 진정한 활달함에 도달한다. 그 진정한 활달함이 무한한 창조성을 가져다 주고 어떤 미미한 존재라도 그의 손을 거치면 막힌데 없이 구성지게 그 생긴 나름대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이러한 공간배치에서 우리는 여백을 발견한다.
  인위적 여백은 우리의 사고를 가둠으로서 억지로 쉬게 하지만, 자연스러운 여백은 인간의 사고에 한없는 자유스러움을 주어 스스로 풀어지게 한다. 이것이 공간감의 역동성이며 창조성이다.

  성주신의 골격을 상징하는 기둥이 세워지면 보와 도리가 결구되고 구조틀의 최상부에 ‘종도리’를 얹는 의식인 ‘상량식’을 하게 된다. 종도리는 건물의 최상부에 위치하는 구조체로서 이것이 설치됨으로서 건물의 골격이 완성된다. 즉 ‘상량’으로서 집의 형태가 완성되었다고 인식하는 것이다. 의례가 시작되기에 앞서 상량시기․건물의 좌향․공사에 참여하는 大木의 이름․재난을 피하고 복을 비는 기원을 내용으로 상량문이 작성되어진다. 이 상량시에 작성되는 상량문은 성주신의 호적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사람마다 그 출생일에 따라 사주팔자가 다르듯이 집도 제각각 사주팔자를 달리한다. 건물이 하나의 인격체라면 ‘상량’은 잉태의 과정을 거쳐 탄생하는 순간이다. 집의 탄생은 ‘성주’의 탄생이다. 다시 말해서 주추를 놓음으로서 어머니인 땅에 생명의 씨를 심고 기둥을 세워 골격이 형성된 후 그 기둥위에 종도리를 얹어 상량하므로서 머릿속에 혼이 불어 넣어져 비로소 생명을 갖게 되는 것이다.

    어기영차 상량이여 상량
    상량이로다 얼널 얼널 상사듸여 어기영차 상량이여 상량
    이 상량을 올리면은 성주님이 내려오사 어기영차 상량이여 상량
    이 상량을 올리면은 조상님이 굽어살펴 어기영차 상량이여 상량
    선조음덕 충만하고 자손창성 영화로다 어기영차 상량이여 상량
    태산같은 높은 명과 하해같은 깊은 복을
    이 댁으로 점지하여 주시옵소서 어기영차 상량이여 상량

  전남 화순군 능주면 잠정리에서 불리워지는 노동요 ‘상량노래’중 일부이다.

우리나라는 다른 곳에 비하여 크고 작은 산이 전국에 가득하다. 그리고 그 산들은 서로 연관성을 갖고 산과 산 사이를 굽이굽이 휘도는 강으로 나뉘어져 균형을 잡고 있다. 물과 산이 이렇게 서로 균제하니 正음․正양을 이룬다. 저 곳에 산이 너무 많다 싶어 저 산을 돌아 나오면 곧바로 비단결같은 물이 긴 자락을 이루어 산협을 휘어 나온다. 이렇게 正음․正양을 이루는 곳에 사람이 살 터가 마련된다.
  터가 좁으면 음택이 되고
  터가 넓으면 마을이 된다.
  깊은 산 협곡 사이에도 한자락 들이 열리기도 하고 강이 그 사이로 하얀 맨살을 드러내 부끄럽게 뒤척이며 흐르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러한 산 밑에 등을 대고 마을을 이룬다. 그렇게 산은 절대적 존재여서 아침에 일어나 집을 나올 때도 산은 이마에 맞닿아 있고, 저녁에 집으로 돌아갈 때도 산은 어깨에 걸쳐져 있다.
  늘 산을 바라다 보고 느끼며 살아야 했다. 산을 외경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연의 모든 정령들이 산에 있다고 여겨 산 그 자체가 살아 있음의 절대적 표상이다.

  집짓기는 기둥위에 종도리를 얹어 상량을 함으로서 ‘성주’라는 인격체로 태어났다.
  이제 그 위에 지붕을 얹는다.
  집은 지붕에 의해 시각적 무게를 갖는다. 권위적인 시대일수록 지붕의 조형은 무거운 모양이 된다. 중국의 건축은 지붕의 선이 사선으로 땅에 툭 떨어진 위압적 형태에 의해 땅을 짓누르는 형상이라면 조선의 건축은 처마를 살짝 위로 치켜드는 것으로 그 무게를 반감시겼다.
  집이 등을 댄 뒷 산을 닮게 지붕은 씌어진다.
  중국의 지붕은 중국의 산을 닮았고 일본의 지붕은 일본의 산모양을 닮았다.
  우리네 뒷 산을 닮게 지붕을 구성해 보자. 뒷산의 보드라운 능선을 따라 본채의 지붕이 가지런하게 진설되면, 뒷산 능선 바로 옆 규봉 하나 봉긋 솟으니 사랑채의 지붕도 그것을 따라 가볍게 솟아 보인다.
  뒷산을 닮도록 지붕을 구조한 마음을 단순히 미감의 발로라고만 할 수는 없다. 바로 뒷산에 마을의 모든 정령이 살아 계신다고 믿는 하나의 신앙적 체계에서 뒷산을 거슬리지 않는 존중의 마음이 뒷산의 아름다운 능선에 대한 미의식으로 잠재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자연의 형태에 가까울수록 자연으로 돌아가는 일이 쉽다.
  인간에게 ‘삶’도 어렵지만 죽는 일 또한 어렵다. 삶은 어차피 여러 사람과 협력의 관계로서 이루어지지만 죽음은 이승의 모든 인연을 끊고 나 혼자서 저승으로 가는 길목이다. 지붕이 뒷산을 닮는 이유도 한 인간의 삶에서 가장 객관적으로 보여지는 찬란한 대목인 집을 짓는 일에서부터 이미 죽음을 예비한다는 일일 것이다.
  뒷산의 정령들을 거슬리지 않고 그들이 사는 뒷산 모양을 닮게 얹은 지붕밑에서 삶을 꾸리다가 내 육신의 세월이 다 하여 내가 살았던 집 지붕을 닮은 뒷산에 묻히는 것,
  그리고 이승에서 내 자신이 만들었던 업장에 따라 죄는 벌로 받고 공은 상으로 받아 그 휴지기간에 차차로 소멸되어 다시 이 세상에 윤회하여 무엇으로 태어날까…
  솔씨로, 살로, 쌀로….  [19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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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집에 관한 명상(2) - '집'을 어떻게 지을 것인가
이름: damibox


등록일: 2006-10-17 11:14
조회수: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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