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담의 그림창고


敍事巫歌 바리데기와 生態의 因緣
-그림 [바리데기 연작]과 [新夢遊桃源圖]를 중심으로
                                            
                                                           (홍성담 / 화가)

이글은 미술과 관련하여 나의 주의주장을 담기보다는 단순한 그림설명과 작업배경에 관한 설명에 불과하다.
참고로 나는 지금까지 내 작업에 관해서 단 한번도 설명을 해 본 적이 없다. 굳이 작품 설명이 꼭 필요한 작업들,
이를테면 거대한 설치작업이나 공허한 비디오 아트 그리고 혀가 짧은 개념미술이나
유약한 성격으로 퇴폐의 길을 모나게 걸을 수밖에 없는 팝아트들에서는 적당한 작품 설명이 필요할지 모르겠으나
나의 작업은 촌스러울 정도로 직접적인 형상들로 만들어내는 구상화이기 때문에 작품설명을 항상 거부해 왔다.
간혹 누군가가 작품설명을 부탁하면 나의 설명이 오히려 작품을 보는 사람들에게 감상의 폭을 좁혀줄 수 있다는 핑계로
그런 자리를 애써서 피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요즘 한국의 여러 상황들이 불가피하게 환경과 생태, 그리고 생명의 문제에 대해 새롭게 조명하고자 하는 욕구들이
우리 미술계 각성한 한 부분에서 강력하게 요구되어 있는 시점이고 나 또한 이런 주제들을 그림에 담아가는 예술가의 한 사람으로써
이 글에서 신화와 생태 환경이 어떻게 만날 것인가라는 문제에 답하기 위한 일환으로 어쩔 수 없이 나의 그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아마 내가 직접 이렇게 내 그림에 대해서 설명하는 일은 분명히 나에겐 최초일 가능성이 크다.

(1)
사실 요즘 나는 우리 인류의 생존문제에 대해서 절망적이다.
인류의 산업발전을 가져왔던 화석연료는 이제 점점 그 정점을 향해 치달리고 있다. 지구의 곳곳은 기후변화로 몸살을 앓고 있다.
글로벌이라는 이름으로 단일화된 세계의 자본시장은 언제든지 무너지지 일보직전이며 지구촌 한 곳에서 무너지면 그 여파는
금방 세계각국의 경제로 전이되어 서로 몸살을 앓게 된다.
인간들의 무참한 탐욕 때문에 자본시장의 생태계는 이미 그 생명을 다 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 한국은 이명박 정권 3년동안 분단이데올로기가 더욱 강고하게 중국 미국 일본의 이해관계에 물려있고 전국토는
‘4대강 살리기’라는 이름으로 엉망진창이 되고 있다.
‘죽이기’가 ‘살리기’라는 이름으로 언어적 회절을 겪고 있는 이런 망할 세상에 우리들의 피폐한 삶이 놓여있는 것이다.
아마 은하계의 역사를 통틀어서 ‘인간’ 만큼 잔인하고 무도한 생물이 또 있었던가. 한마디로 단언하자면 인류의 미래는 죽음뿐이다.
멸절이다.
단, 조류독감이나 광우병이나 수퍼박테리아등등으로 천천히 죽어가느냐, 아니면 핵이 터지든지 또는 급속한 빙하기가 밀어닥치든지 해서
한꺼번에 급하게 몽땅 죽느냐 라는 두 가지 선택만 남은 것 같다.

(2)
서사무가 바리데기는 이승과 저승의 생태에 관한 이야기이며 인간의 생명에 관한 서사시다. ‘
바리데기’는 사람에게 버림받아 내쳐 ‘버려졌다’는 말로 명토를 박은 이름일 수도 있고, 사람들 중에 가장 못난 사람,
즉 비루먹은 인간에게 총칭하는 애잔한 이름일 수도 있다. 흔히 우리는 ‘바리데기’를 바리공주라고도 부른다.
또한 바리공주는 저승의 온갖 미션을 겪으며 생명수를 가져와서 총체적으로 병이 든 나라(國)를 살리는 ‘생명공주’다.
일부 사람들은 이것을 巫俗說話라고 규정하지만 나는 감히 神話라고 주장한다.
서사무가 바리데기는 신들의 이야기이니 神話가 분명하다.
하여, 바리데기가 어떻게 神으로 좌정하게 되었는가를 서사적으로 풀어내는 본풀이를 ‘오구풀이’라고 한다.
바리데기 서사무가는 함경도의 함흥으로부터 남쪽의 고흥에 이르기까지 한반도 전 지역에서 전승되는 무속신화다.
바리데기 무가의 전승본은 서울지역의 전승본, 동해안 무가의 전승본등이 있는데
여기서는 전남에 전승되는 바리데기 무가를 간단하게 정리해 본다.

1.오구시왕 부부가 결혼하여 딸만 여섯을 낳는다.
2.명산대천에서 기자정성을 하고 태몽을 꾼 후 일곱째를 낳았으나 또 딸이었다.
3.부친이 일곱째 딸을 쑥대밭에 버린다.
4.학이 날아와 보호하고 양육하니 잘 자란다. 이때 버려진 딸아이의 눈코입과 허리에 개미와 벌레들이 꽉 차 있었다.
5.부친이 병이 들어 죽게 된다.
6.문복을 하니 대사가 서천서역국의 약물로 구할 수 있다고 한다.
7.모친이 딸 여섯에게 약물을 구해올 것을 부탁하나 거절당한다.
8.바리데기가 약을 구하러 떠난다.
9.바리데기가 서천서역국의 길목을 지키고 있던 석장승에게 산값 길값 물값 삼년씩을 살아주며 일곱 아들을 낳아주고 약물을 구한다.
10.바리데기가 약물과 환생초를 구해와 죽은 부친을 살린다.
11.바리데기가 巫祖 오구신으로 좌정한다(또는 아들들과 함께 十王에 봉해진다).

(3)
1980년대 후반, 우리 사회의 민주화에 힘입어 한일 양국간에 비밀스럽게 숨겨져 있던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본격적으로 수면위로 떠올랐다.
잇따라 위안부 할머님들이 자신들의 고난의 역사를 증언했다.
한국과 일본의 여성운동그룹과 양심적인 시민단체들의 노력으로 위안부 문제는 곧 일본의 과거사 책임문제들 중에 이슈가 되었다.
이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역시 감각적인 시각매체를 다루는 화가들의 손길이 가장 빠르게 대응했다.
화가들 중 누군가는 할머님들의 미술치료를 전담했다. 할머님들이 직접 붓을 들고 자신들의 고통스러운 인생역정을 그림으로 풀어냈다.
어떤 화가들은 할머님들의 생생한 증언을 판화로 혹은 여러 형태의 그림으로 그려냈다.
그림의 내용은 대부분 일본군에게 강제로 끌려가는 상황이나, 혹은 강제로 성노예가 되어야 했던
차마 입에 담기도 고통스러운 상황들이 내용의 주를 이루었다.

나는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피맺힌 증언에서 ‘바리데기’ 서사무가를 떠올렸다.
그들의 증언에서 당시 이 땅에 총체적으로 병들어 있는 모습을 보았다.
식민지 상황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서 식자들은 위안부 종군을 격려하고 또한 이 땅의 아들들을
천황의 신민으로써 종군을 하라는 그 병든 모습을 본 것이다.
그리고 할머님들이 매주 종로에서 수요집회를 열며 과거사 문제에 대해 사과와 보상을 해 줄 것을
수년 동안 요구하고 있음에도(지금까지도 수요집회는 계속되고 있다) 한일 정부당국은 서로 못 본체 하고 있는 모습에서
우리시대 역사와 도덕과 윤리가 총체적으로 병들어 있는 모습을 보았다.
이 할머님들은 일제강점기에 식민지 우리나라가 자유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이 된 지금까지도 내쳐버린 ‘바리데기’들이다.
할머님들의 가슴 아픈 증언은 바로 우리시대의 그런 병든 모습을 치료하고 살려낼 수 있는 ‘생명수’에 다름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일본군 위안부 할머님들을 바리데기 서사무가의 ‘생명공주’로 본 것이다.
1994년부터 제작된 나의 그림 ‘바리데기 연작’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님들이 주인공이며 바리데기 서사무가는 작품의 주제가 된 셈이다.
나는 그 둘의 결합을 통해서 역사적 현실의 생태 환경을 분석하고 싶었다(나는 여기서 生態라는 개념을 자연환경에만
국한 시키는 협소한 의미를 벗어나서 우리의 현실 삶 전체로 확대하고 싶다.
물론 이러한 나의 희망은 무모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예술가의 상상력이란 때때로 이런 무모함을 결행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사회가 추구해야할 진실과 윤리와 도덕의 생태환경을 조망하고 싶었다.

(4)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죽음과 직면한다. 죽지 않는 것은 생명이 아니다.
스페인 지중해 연안 어디엔 죽지 않은 해파리가 등장했다고 엊그제 뉴스가 전한다.
아프리카 어떤 벌판엔 절대 죽지 않는 식물이 등장했다고 한다. 모두 기후변화가 일으킨 생명의 재앙이다.
생명은 온갖 아름다움과 온갖 추함 사이의 여백에서 탄생한다.
생명은 온갖 선함과 온갖 악함 사이에 존재하는 틈새에서 탄생한다.
생명의 탄생 앞에서는 아름다움도 추함도 선함도 악함도 한갓 인간의 생각일 뿐이다.

다음은 오구시왕이 일곱 번째 딸 바리데기를 버린 이후에 어떤 공덕 노부부에 의해 발견된
아기 바리데기의 상황을 표현한 본풀이 한 대목이다
(이 사설대목에는 무당이 작은 징을 방석위에 뉘어서 일체의 진동음을 방석으로 제어하고
작은 징채로 가볍게 두드리면서 장단잽이를 한다).

“.....(중략)...바리데기를 옥함에 넣어 쑥대밭에 버렸고나.
저기 쑥대밭에 서기가 반공하고 향내가 진동하고 사람이 있어도 하늘 아는 사람이 있을 거요.
짐승이 있어도 하늘 아는 짐승이 있을 거요. 저기 저곳을 가보라.
자 세치 옥함에 자 세치 아기 버린덕이가 누워있는데
아기 입에는 불개미가 가득하고 아기 눈에 왕개미가 가득하고
아기 허리에는 앙금앙금 털벌레와 실개미가 얽혔더라......(중략).....”(羅孫 金東旭 本 ‘바리공주’ 필사본, 1958년)

나는 환경과 생태, 그리고 생명에 관해서 인간의 입과 손으로 읊은 글 중에
저 대목보다 더 구체적이고 아름다운 글이 없다고 생각한다.
한 인간의 생명이 정좌해야 할 자연과 생태환경을 확실하게 밝히고 있다.
여기에서 생태학의 기본 개념에 대해 또는 생태운동에 대해 환경 운동가연 하거나,
학자연하며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는 것은 내 주제에서 벗어난다.
다만, 내 작업과정에서 신화 바리데기가 어떤 과정을 통해서 생태라는 인연으로 내 화면 안에 들어오게 되었는지를
간단하게 설명하는 것으로 족하다.
위의 바리공주 필사본에서 바리데기의 탄생은 인간의 삶에서 쫓겨나 내버려진 이후에 온갖 개미와 벌레들과 함께 새롭게 찾아온다.
베들레헴 마굿간의 송아지와 양들이 보는 앞에서 탄생한 예수 이야기보다 훨씬 더 감동적이다.
사람은 온갖 생명과 무생명과 함께 할 때 하늘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온갖 생명 하물며 풀벌레 개미까지도
인간과 함께 할 때 하늘을 아는 짐승이 되는 셈이다. 그
래서 生態란 ‘하늘을 아는 것’이라는 적극적인 개념이다.

(5)
1999년. 새로운 세기를 앞두고 나는 지난 세기를 정리하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바리데기 연작 중에서 마지막 여덟 번째 작품 ‘新夢遊桃源圖’가 그것이다.
이 그림에서 나는 선과 악의 개념을 아주 극단적으로 단순화 시켰다. 역시 무모한 상상력이 발동한 것이다.
지난 세기를 남성중심의 역사로 극단화 했다. 그리고 이 남성중심의 역사는 실패한 역사로 규정했다.
탐욕과 전쟁으로 인간들의 살과 피를 받아먹고 발전한 문명으로 설정한 것이다.
나는 남성의 탐욕과 전쟁 속에서 시커먼 고통을 당해야 하는 여성성을 한껏 받들어 올려야 다가오는 새로운 세기엔
그나마 눈곱만한 희망이라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큰 화면을 정확하게 반을 갈라 왼편은 陰의 세계, 즉 여성성의 세상을 그렸다.
그리고 오른쪽은 몰락해가는 陽의 세계, 남성이 이루어 놓은 인류파멸의 역사를 그렸다.
그런데 너무 양쪽의 극단적인 내용 때문에 중앙에 들어갈 중심형상이 생각나지 않았다.
正陰正陽을 위해서 왼쪽 陰의 세계와 오른쪽 화면 陽의 세계가 확실하게 화해하는 내용의 형상이 필요했다.
그 둘이 무엇으로 화해를 할 것인가.

생명의 새로운 탄생이 답이었다.
나는 지체 없이 초원에 누워있는 아기 바리데기를 그려 넣었다.
온갖 벌레가 아기의 입속에, 눈망울 속에, 가슴위에 엉켜 있는 바리데기의 형상이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우리들에게 유전된 아름다움과 추함이 동시에 바리데기를 받쳐 들고,
또한 오늘 이 시간 까지 전이되어오는 선과 악의 모든 개념이 아기 바리데기를 받들어 올리는 그런 형상이었다.

(6)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어느 한곳이 무너지면 우리의 생명도 무너진다.
우리 인간과 세상의 모든 생명, 무생명과 연결되어 있는 고리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그 생태와 평화와 예술의 연결고리를 어디서 찾아낼 수 있을까.
그 연결고리를 나는 주저하지 않고 샤마니즘과 에니미즘이라고 답하고 싶다.

바이칼호 연안의 북방 샤마니즘이 동진하면서 한반도의 동해안을 따라 내려왔다.
동해안 별신굿에 오방색 철릭을 입고 푸너리 장단에 맞춘 ‘꽃춤’에서 만개하는 생명의 약동과 화사함을 볼 수 있다.
이것이 서라벌로 내려와서 신라문명을 이루고, 남해안을 휘돌아 진도 씻김굿에서 샤마니즘이 예술적으로 완성되어 일상의 문화가 되었다.
이것이 다시 바다를 건너 일본열도에 들어가 세계에서 유래가 없는 가장 양식화된 신도문화를 이루었다.
신도문화는 샤마니즘과 에니미즘을 정형화의 극한까지 밀어붙여 미니멀한 양식으로 만들어 버렸다.
참고로 베링해를 건너 동진했던 북방샤마니즘은 아메리카 인디언 문화의 근간을 이루었다. 그
러나 신대륙을 찾았던 서구 백인들에 의해 인디언 문화는 남김없이 잔인하게 파괴되어버렸다.
최근에 우리나라에서도 회자되었던 영화 ‘아바타’에는 아메리카 백인들의 잔인성에 대한 콤프렉스가 오롯이 남아있다.
동아시아는 신화와 생태가 연결되는 이야기의 보고다. 캄챠카 반도엔 약 7천개의 신화가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우리가 상상력으로 조금만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대부분 생태와 신과 인간의 이야기다.

무지막지한 승자 생존의 법칙, 1등만 살아남는다는 오늘날 우리 인간이 억지로 만들어놓은
몸서리치도록 무섭고 두려운 생태환경은 인류를 절망과 파멸로 몰고 간다.
못생긴 꽃은 못생긴 대로 잘생긴 꽃은 잘생긴 대로, 작은 꽃은 작은 대로 큰 꽃은 큰 대로 모두 동시에 환하게,
골짜기에 있던 벌판에 있던 그것이 어디에 있던지 모두 제각각 나름대로 동시에 활짝 꽃을 피우는 황홀한 광경,
바로 이것이 생태의 완결구조다. 즉, 화엄의 세상이다.
이 화엄의 세상을 보듬어 은유하는 이야기가 아직도 우리 산천의 동네마다 살아있다.
삼국유사를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우리나라 산천 골골마다 산마루마다 마을마다 신화와 설화가 넘쳐난다.
즉 생태와 생명을 그리는 예술의 모본이 될 스토리는 삼천리강산에 가득하다. 문제는 창조적인 상상력이다.
이 화엄의 이야기들과 현실 삶을 연결할 수 있는 끝없는 상상력이다.
그래서 우리시대 예술가는 더욱 본격적으로 창조적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그만큼 오늘날의 예술가는 이 핍진한 시대를 이겨내기 위해 더욱 무모한 상상력을 필요로 하고 있다.  -끝-
(목포민족미술협의회 강연/ 2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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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敍事巫歌 바리데기와 生態의 因緣 / 홍성담
이름: damibox


등록일: 2011-05-20 14:33
조회수: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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