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담의 그림창고


화가 홍성담의 청와대 ‘풍수 미학’  ---- 월간 신동아 98년 3월호

북악산 밑 청와대‘YS 실정’ 이어 ‘DJ 독재’ 부르나

천성적으로 카리스마가 강한 DJ와 유아독존적인 북악산의 만남은 그 속성상 마이너스 상승 효과를 내지는 않을까. 그것이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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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북한산과 인왕산 등 서울 주변 산에 자주 오르는 편이다. 그럴 때마다 청와대 터를 조형적인 관점에서 멀리서나마 조망하곤 했다. 정치적이거나 사상적 따위의 무슨 목적의식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화가적 입장에서 청와대를 바라보았던 것이다.

청와대 뒷산, 그러니까 북악산(北岳山)은 언제 보아도 가장 눈에 거슬리는 산이다. 일단 북악산의 모양새 자체가 반듯하지 못하고 동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산의 머리에 해당하는 정상도 삐딱하게 제껴져 있다.

마치 엄지 손가락을 보는 듯하다. 오른손 주먹을 쥐고 엄지 손가락을 곧게 세운 다음 그 옆면을 보면 엄지의 끝이 바깥으로 휘어져 있는 모양새가 된다. 서울 광화문 사거리나 세종로 어느 곳에서 바라보더라도 북악산은 그런 엄지손가락 형상으로 다가온다. 게다가 북악산의 동편에는 큰 바위들이 허옇게 붙어 있는데, 그 위치가 엄지의 손톱자리에 해당할 뿐 아니라 모양도 비슷하다. 그리하여 북악산은 엄지손가락을 쫙 펴고 『내가 세계 제일이야』하듯이 뽐내고 있는 것이다. 으스대고 뽐내는 산은 결코 좋은 산이 되지 못한다.

이번에는 경복궁으로 발걸음을 옮겨보자. 평일 오전, 하루중 가장 조용하고 지기(地氣)가 승할 때 경복궁 안에서 북악산을 바라보면 산의 정상이 시선을 철저히 외면하려는 듯 고개를 돌리고 있다. 아예 산 전체의 몸뚱어리가 삼청동 쪽으로 활처럼 휘어져 있다.

북악산을 삼각형으로 볼 때 위 꼭지각이 한쪽으로 틀어져 있으니 사람의 시선도 급속한 방향전환을 요구된다. 마치 교통표지판의 화살표와 같다. 북악산 자신이 앉아 있는 땅의 지기를 한꺼번에 동쪽 하늘로 쏘아대고 있는 꼴이다. 그리하여 그 기운은 하늘에서 포물선을 그리면서 자신을 낳아준 모산(母山)인 북한산의 정수리에 닿는다. 아울러 바라보는 사람의 몸도 자꾸만 북악산의 삐딱하게 틀어진 방향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기에 민감한 사람들은 경복궁 전체가 요동치면서 한쪽으로 무너진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대개의 경우 산은 사람의 눈길을 포근하게 받아낸다. 좋은 산일수록 사람의 눈길을 흡수하듯이 머금을줄 안다. 나는 화가로서, 또 산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좋은 산이 주는 미덕을 느껴왔다.

그런데 북악산은 사람의 눈길을 튕겨내버린다. 북악산에 바위가 군데군데 박혀 있고 나무가 울창하지 못하다는 이유만이 아니라, 산의 생김새나 주변 환경이 기운을 반사하는 작용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북악산은 자신의 어미산을 꼬나보듯 기운을 쏘아대고 있으니, 배반의 역사를 가질 수밖에 없는 숙명을 타고 난듯 싶다. 사람으로 치면 숙명적으로 정도(바른 길)를 걷기 어려운 인간형이다. 북악산 자락에 들어선 권력자들의 행로를 미리 암시해주는 듯하다.

「신동아」 98년 1월호에서 「청와대 터」에 대한 글을 읽었다. 땅을 해석하는 풍수학자의 관점이, 터에 대한 필자의 조형적이고 미학적인 관점과 유사한 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 풍수학자(김두규 우석대 교수)는 조선의 역대 왕들과 대한민국의 대통령들이 청와대 터와 인연이 맞지 않았다고 밝혔다. 청와대 주인치고 좋은 꼴로 나간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 글을 읽으면서 필자는 새 대통령인 DJ(김대중)와 청와대 터의 인연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생각해보았다.


고집불통의 북악산

원래 산은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저 혼자 그렇게 생겨먹은 것이다. 그래서 반듯한 산을 찾기는 힘들다. 그러나 대부분의 산들은 좌우에 있는 산들이 서로 받쳐주거나 감싸줌으로써 안정과 균형의 미를 갖추고 있다. 바로 그것이 자연의 아름다움이다.

그런데 북악산은 저 혼자 우뚝 서 있는 형상이어서 사람에게 편안함을 주지 못한다. 저 홀로 잘났다고 오만불손하게 서 있으며, 남의 의견을 전혀 듣지 않으려는 고집불통의 모습이다. 게다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곧추세운 엄지처럼 기울어진 산의 모양을 바로 잡아줄 주변의 산들도 없다. 마치 정도(正道)를 걷지 못하는 권력자를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는 신하들이 없는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고 했던가, 북악산은 옆이나 뒤에서 서로 조응해주는 주변 산이 없으니 날개(산)가 없어 추락하는 새의 형상인 것이다.

그러한 북악산 밑에서 그 산의 기운을 온몸으로 받으며 살다간 사람들을 찾아보기로 하자.

『터가 길하고 흉한 것을 알려면 3대에 걸친 터의 주인을 보면 된다』라는 말이 있듯이…. 혹시 이 말이 풍수들의 허황된 논리라고 하면서 거부감을 표시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필자는 풍수지리 신봉자도, 풍수를 배척하는 기독교인도 아니지만 서울신학대 권혁승교수의 풍수론에 공감한다. 권교수는 「목회와 신학」(98년 1월호)에 「성경으로 본 풍수지리와 땅」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발표했다.

『우리 선조들은 오래 전부터 자연과 더불어 조화롭게 살아가는 지혜를 알고 있었다. 그런 지혜의 일면을 엿보게 하는 것이 풍수지리 사상이다. 풍수지리의 근본적 개념 중 하나는 하늘과 땅과 사람을 하나의 상관적 관계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과 더불어 조화롭게 살아가는 지혜는 후대에 이르러 이기적인 기복사상과 접목되면서 잘못된 풍수 속설로 전락하고 말았다』

기독교 신학자들은 풍수에서 말하는 기(氣)란 성경에서 말하는 「하느님의 입김」의 동양적 표현이라고 해석하면서, 풍수지리의 부정적 요소를 제거하되 긍정적 부분에 대해서는 신학적으로 수용함이 마땅하다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그러한 전제 하에서 필자는 북악산을 바라보면서 짐 보따리를 챙겨 떠나는 김영삼 대통령과 새로이 짐을 싸들고 청와대로 들어오는 김대중 새 대통령을 먼저 떠올려본다. 흔히들 DJ와 YS를 비교하여 평할 때 자주 언급되는 대목이 있다.

『DJ는 논리 정연한 데다가 달변이어서 주로 남을 설득하는 유형이다. 바로 그 때문에 사람들이 주눅이 들어 그의 주변에 잘 모이지 않는다. 반면 YS는 남들의 의견을 주로 들어주는 유형이라 사람들이 많이 모여든다』

남들의 의견을 경청하는 자세로 사람을 끌었다던 YS는 청와대에 입성한 후 어떠했던가. 자신이 먼저 세계화를 주창해놓고 가장 조심스러워야 할 주변국과의 외교관계, 특히 대북관계에서 그는 언뜻하면 종주먹을 들이대면서 「오만한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또 OECD 가입으로 선진부국 대열에 들었다고 호기를 부린 지 불과 몇 개월도 지나지 않아 온나라가 IMF의 혹독한 운명을 맞았다. 청와대에 들어간 후 아랫사람들의 의견을 『씰데없는 소리』라고 일축했던 YS는 결국 「아시아에서 가장 무능한 대통령」으로 낙인찍혔다.

나는 YS가 종주먹을 쥐고 호기를 부리는 모습을 보면서, 북악산의 그것과 꼭 닮았다는데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의 안하무인격 행동이 『혹시 바로 저 놈의 뙤똥한 북악산 때문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청와대의 전 주인인 이승만·박정희 대통령에게서도 그러한 모습이 나타났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더욱 우려스러운 대목이 DJ의 청와대 입성이다. 스스로 『머리는 빌려서 채울 수 있다』고 말한 YS조차 저렇게 북악산을 닮아갔는데, 천성적으로 카리스마가 강한 DJ와 북악산의 만남은 어떻게 될 것인가? 아무리 국민의 지지를 많이 받는 정권일지라도 대통령의 독선은 또다른 독재를 불러오게 된다.

사실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죽음을 몇번씩이나 경험했던 DJ 앞에서는 그 어떤 민주투사도 큰소리를 칠 수 없다. 그 뿐이랴, 뛰어난 인식 능력과 판단 능력 앞에 그 어떤 학자나 행정 전문가도 간단하게 격파당하기 쉽다. 더구나 이들 엘리트는 고등고시나 외국 유학의 길을 걸으면서 우리 사회의 민주화 운동에 동참하지 못했다는 열등의식에서 하고 싶은 말을 아낄지도 모를 일이다. 이처럼 여러모로 뛰어나 보이는 DJ와 저 유아독존적인 북악산이 만나면 그 속성상 마이너스 상승 효과를 내지는 않을까?


도적의 무리가 들끓다

『인자수지』라고 하는 풍수 고전이 있다. 중국 명나라 때 서선술, 서선계라는 쌍둥이 형제가 40여년간 답사와 연구 끝에 저술한 방대한 서적으로, 당시 풍수지리를 총정리한 것이다. 지금까지도 그에 버금갈 만한 책이 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인자수지』에서는 마치 북악산 정상을 겨냥한 말인 것처럼 여겨지는 대목이 자문자답으로 나온다.

『그대에게 묻나니 도적의 무리가 많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산머리가 기울어졌기 때문이지!』

그간 「대통령 자리가 크게 한밑천 잡는 자리」라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들은 권좌를 이용해 수천억원을 거두어들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그 돈 때문에 나란히 감옥에 들어가 인류 역사상 보기 드문 장면을 세계사람들에게 보여주었고, 지금은 그들이 석방된 후 감춰둔 비자금을 찾느라 검찰이 수사를 벌이고 있다 한다. 또 YS 정권 초기 4백억~5백억달러이던 외채가 정권 말기에 1천5백억달러 이상으로 늘어났고 결국 IMF시대를 맞게 됐다. DJ조차 정부 금고가 텅 빈 것을 보고 도무지 왜 그렇게 늘었는지 알 수 없다고 했다 한다. 중간에서 누가 잘라먹은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다시 북악산을 바라보자. 북악산은 그 몸뚱이가 매우 오만하게 우뚝 서 있지만 내려앉은 산 밑둥의 지세가 전혀 곧지 못하다. 도대체 종잡을 수 없을 만큼 지세가 헝클어져 있고 어수선하다. 마치 전두환·노태우 정권이 국민의 돈을 감춰둔 속주머니처럼 복잡하고 어수선하다. 과연 검찰은 그 돈을 찾아낼 수 있을까?

어쨌든 문어발처럼 헝클어진 가닥을 추려보면 북악산 아래 청와대를 중심으로 동편으로는 첫째 둔덕의 줄기가 춘추관 아래로 뻗어 있고, 둘째 줄기는 바로 그 뒤 감사원을 지나 원서동 쪽으로 급하게 떨어진다. 그 셋째 줄기는 응봉에서 창경궁과 종묘 쪽으로 한 갈래를 떨구어 놓은 다음 다른 한 갈래는 성균관대와 혜화문을 지나 낙산에 이른다. 바로 청와대를 보좌하는 좌청룡(左靑龍)이라 일컫는 줄기이다. 그런데 이 좌청룡 줄기는 응봉을 자체의 주산으로 삼는 격이 돼, 청와대의 주산인 북악산과 마주 서는 형국이 돼버렸다. 풍수 이야기대로 하자면 부자지간에 싸움이 끊일 날 없게 된다.

한편 청와대를 중심으로 서편으로는 첫 둔덕이 궁정동과 무궁화공원 쪽으로 어렵사리 기어 내려가고, 둘째 줄기가 경복고교까지 희미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셋째 줄기가 자하문 터널을 지나 인왕산으로 뻗어가는 우백호(右白虎)인데, 이미 줄기의 중간이 도로가 나 분리돼 있다. 그래서 인왕산 역시 주군인 백악산을 젖혀두고 홀로 뽐내는 산이 돼버렸다.


홀로 잘난 산

좌청룡(인왕산)과 우백호(낙산)에게 배신당한 북악산은 그 어미산인 북한산과도 이별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남산 타워 같은 높은 곳에서 북악산을 바라보면 그 현장을 목격할 수 있다.

북악산은 지기(地氣)를 받아 땅으로부터 솟아나온 산이 아니라 하늘에서 툭 떨어진 산처럼 보인다. 평지에서 돌로 만든 거대한 무덤인 이집트 피라미드처럼 삼각형의 커다란 돌덩이 하나가 하늘에서 떨어져 그 여파로 급작스럽게 헝클어진 파도 모양 줄기를 몇 가닥 만든 형상이다. 그러니 줄기들은 북악산의 기운을 일정하게 받아 흐르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짓누른 북악의 압력에 밀려난 흙더미에 불과하다.

이렇게 북악산은 위에서 떨어져 생성된 모양새니, 그 스스로도 어미산인 북한산과 분리되지 않으려고 자꾸만 북한산(삼각산) 쪽으로 몸을 틀고 있다. 그러나 급하고 매몰차며, 제가 천하제일이라고 뽐내는 북악을 북한산이 받아줄 리 만무하다.

북한산과 북악산이 그나마 겨우 이어져 있던 곳이 북악 터널 위의 보토현(補土峴)이다. 보토현은 궁궐이 있는 북악과 서울의 진산인 북한산의 용맥(龍脈)을 잇는 탯줄과 같은 곳이다. 이 탯줄이 지형 변화상 자꾸만 분리현상을 일으키자 조선조 세조 때 백성들을 동원하여 그 위에 흙을 덮었고 새로 숲을 조성했다. 보토현이라는 이름도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그 뒤로도 수차례에 걸쳐 흙을 돋우는 작업이 있었다.

그런데 수백년이 지난 현대에 와서 북악터널이 뚫어지고 만다. 북악 터널은 물론 삼청 터널, 구기 터널, 자하문 터널들도 북악과 북한산으로 이어진 명맥을 끊어버렸다. 북악과 북한산은 어쩔 수 없이 분리되는 숙명에 있었던가 보다.

어미산과 헤어지지 않으려고 북악이 억지로 삼청동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으니 결국 사단이 난다. 자연 청와대 집무실은 북악의 등쪽으로 붙어버린 꼴이 됐고, 관저는 북악의 중력으로 밀려난 흙더미들 때문에 주위 풍광이 어수선할 수밖에 없다. 주변 공기의 흐름도 마치 큰 포성이 터진 다음의 확장된 압력으로 말미암아 일정한 가닥을 추리지 못한 채 제멋대로 풀어헤쳐져 아우성치는 느낌이다.

그 을씨년스러운 모습은 북악산 군데군데에 삐져 나온 바위들로 인해 섬뜩함까지 안겨준다. 북악의 독특한 바위 형상들은 역사적으로도 명물이었던가 보다. 북악산 정상 바로 밑 우측에 솟은 「삿갓바우」(일명 負兒岩 혹은 해태바위)는 겸재 정선의 산수(山水) 그림에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북악산의 괴이함 때문에 작품 소재가 되었던 것이지 미적 균형을 갖춘 아름다움 때문은 아니다.


대통령들은 늘 불안했다

더욱이 산꼭대기로부터 급하게 내려오는 동쪽 경사면에는 험하게 생긴 큰 바위 두 개가 흰 눈동자를 굴리면서 아래로 굴러 떨어질 듯 아슬아슬하다. 그 바위가 굴러 떨어진다면 영락없이 기자들이 있는 춘추관에 처박일 것이다. 이것은 마치 청와대라는 권력과 언론의 관계를 설정해주는 것 같다. 언론이 권력을 감시하는 것이 아니라 청와대라는 권력이 시종 언론을 감시하는 꼴인 것이다. 국민들은 지금까지 숱하게 권력에 대한 언론의 굴종을 목격해왔다. 그것이 DJ시대라고 바뀔 수 있을 것인가?

으스름 달빛 드는 교교한 밤이 되면 이 바위들은 눈알을 부라리며 청와대와 경복궁을 째려본다. 기가 약한 사람은 지레 그 기에 질려 죽게 되고, 기가 센 사람은 더욱더 기고만장하게 될 듯하다. 단지 필자의 감상이 아니라 풍수에서도 그러한 바위를 흉하게 본다. 『인자수지』는 말한다.

『그대에게 묻노니 어찌하여 칼과 군대의 난이 많은가?

주산(主山)의 바위가 험하기 때문이네!』

남산 타워에서 방향을 돌려 남쪽의 관악산을 바라보자. 관악산 정상의 뾰족한 바위들이 말 그대로 「관(冠)」처럼 날카롭게 북쪽인 청와대를 들여다보고 있다. 경복궁보다 북악산 깊이 들어가 있는 청와대에서 보면 더욱 실감난다. 이처럼 안산(남산) 너머의 조산인 관악이 마치 담 너머로 마당을 엿보는 도둑의 형상을 하고 있다.

이를 꼭 풍수적으로 해석하지 않더라도 청와대에서 볼 때 앞산 뒤로 다른 산머리가 슬쩍 비치는 것은 사람의 정서에 늘 불안감을 심어 준다. 누군가가 나를 엿보고 있으며 내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한국의 대통령들은 자신의 자리를 보전하는 일에 모든 임기를 허비했다. 자신의 코가 석자라서 도무지 국민들의 삶을 돌아볼 여유도, 염두도 없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그는 늘 쫓기는 심정으로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북악산 밑에서 제일 오래 살았던 박정희는 가장 북악을 닮아 독재의 길로 치달았다. DJ는 박정희의 약점을 끊임없이 공격했고 대통령 박정희는 언제나 정서불안 증세를 보였다. 박정희 입장에서는 DJ가 고집 불통으로 보였을 테고, DJ 역시 박정희를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두 사람은 생전에 단 한번의 공식적인 대화도 하지 않았다. 김대중은 79년 10월26일 박정희가 죽은 뒤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생전에 한번 만나서 충분히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다. 이제는 그렇게 할 수 없어 유감이다』

DJ만이 유감인 것은 아니다. 두 사람이 만나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었다면 아마 한국 현대사가 그렇게 흘러가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DJ와 YS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또 차기의 김대중 대통령과 그의 정적간에도 해당할 수 있을 것이다.

DJ는 정적이기도 했던 역대 대통령의 모습에서 과연 무엇을 배웠을까? 그들의 몰락이 반면교사로 작용해 권력자가 아닌, 민중과 함께 하는 지도자의 길을 걸을 것인지, 아니면 더욱 교묘한 통치방법을 개발해나가다 누구보다도 더 큰 몰락을 맞을 것인가. 두려운 것은 북악의 홀로 잘난 모습, 정적과의 대화를 용인하지 않은 그 매몰찬 모습이다.


한국의 청와대·핀란드의 대통령궁

건축가들은 지배자의 공간을 통해서 그 사회의 권력구조를 알 수 있고 서민의 공간을 통해서 인간 집합의 사회적 구조를 알 수 있다고 말한다. 프랑스의 베르사유궁과 영국의 윈저궁, 중국의 자금성을 통해서 왕정시대의 국가 조직을 이해할 수 있고 엘리제궁(프랑스), 다우닝가 10번지(영국), 백악관(미국) 등을 통해 민주시대 통치자의 역할과 민주주의의 권력 구조가 갖는 공간 형식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건축가 김석철씨는 최근 어느 건축잡지에서 90년대에 지어진 대표적인 대통령 관저 두 곳, 곧 한국의 청와대와 핀란드의 대통령 관저를 다음과 같이 비교하고 있다.

『83년 헬싱키를 방문했을 때 대통령궁 현상공모 설계가 진행중이었다. 그때 청와대도 대대적인 확장과 신축이 기획되고 있었다. 한국과 핀란드 두 나라 모두 민주주의를 국시로 하고 있는 나라인데, 대통령궁 건축의 시작부터가 달랐다. 하나는 설계가 공모돼 누구나 알 수 있도록 투명하게 진행되었고, 다른 하나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계획이 입안되고 집행되었다.

그러는 10년 사이 드디어 두 나라 대통령의 집이 완성됐다. 두 건물은 설계 과정의 공개와 비공개라는 차이보다 더 극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경복궁과 북악산 사이에 전통 건축형식으로 들어선 청와대는 자연과 대립하고 역사의 공간을 압도하는 복고 형식의 집인데 비해, 헬싱키 교외에 선 대통령 관저는 핀란드의 자연과 문명에서 시작된 창조적 공간이었다』

자기를, 선거를 통해 뽑힌 「왕」쯤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북악산과 현재 청와대 건물의 생김새가 어울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청와대는 분명 자연과 역사의 공간을 해치고 있는 집이다. 건축가 김석철씨가 청와대가 복고 형식의 집이라고 한 것은 그나마 점잖은 표현이다.

필자가 보기에 청와대는 풍수는커녕 건축학적 조형미조차 고려하지 않았다. 청와대 바로 뒤의 북악산 경사면은 쏟아지듯이 매우 급하게 내려오는데, 그 급한 기운이 한 박자 쉬어야 할 청와대 뒤편 둔덕은 너무 낮아 보잘 것이 없다. 오히려 하늘로 솟을 듯한 집무실 처마 아래로 둔덕이 낮게 깔려버린다. 또한 북악 본줄기와 청와대가 앉은 자리 사이가 너무 비좁다. 더구나 관저는 훌륭한 건축물인데도 음습한 곳에 박혀 임시방편으로 스쳐지나가는 별장이나 여인숙 같은 거처로 보일 수밖에 없다.

국가 지도자의 집은 거주 공간과 일하는 공간이 서로 만나 하나가 된 집이다. 국가 지도자의 집은 21세기의 새로운 주거 형식이 될, 삶과 일이 함께 하는 집의 본보기가 돼야 한다. 사람이 사는 집은 주변 자연과 어울려 살아 있어야 하고, 역사를 기반으로 해 미래를 제시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북악산은 홀로 뽐내며 외롭고, 청와대 건물은 더욱 하늘로 높이 솟으려고만 한다. 북악산과 청와대 집무실은 서로 좋지 않은 쪽으로 상승 작용해 국민들의 삶과 일의 터에서 자꾸만 떠나려고만 한다.

이러한 기운은 김영삼 대통령이 특히 잘 보여주었다. 그는 집권 초기 90%에 가까운 국민의 지지를 받았으나, 이후 내내 「나 홀로」 정책 결정방식을 취했고, 그것은 즉각 「사고」를 일으키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퇴임을 며칠 남기지 않은 시점에서 그는 『저녁시간에 혼자 있을 것이 아니라 현장에 있는 사람들의 생생한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하며 후회했다고 한다. 그러나 청와대 땅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사람이 거주하기에 적절치 못한 땅을 굳이 대통령 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을까? 청와대가 들어선 경복궁은 사람이 살 터가 아니었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한다. 임란왜란 이후 2백70년 동안 그대로 방치된 곳이었다. 우리 옛 대중가요에 「황성옛터」라는 노래가 있다.

「황성 옛터에 밤이 드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 가엾다. 이 내몸은 그 무엇 찾으려 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어 있노라/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라/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못 이루어 구슬픈 벌레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박정희 대통령은 술에 취하면 이 노래를 읊조렸다고 한다. 임란 이후 불에 탄 뒤 잡초만 무성했던 옛 궁터를 그대로 표현해주는 듯한 노래다. 앞서 지적한 대로 온갖 기운이 어지럽게 방사되는 어수선한 자리에서 교교한 달빛이 흐르는 밤에 그의 술취한 노래소리가 한가닥 흘러나온 것이다. 북악 밑의 지형을 그렇게 맞춤하게 잘 설명해 주는 노래도 없을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이 땅은 민가가 들어서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궁궐 부근의 수백채 민가가 철거되는 사건이 조선조에 있었다. 경복궁 주변의 지기(地氣)가 집들 때문에 손상된다는 이유에서였지만 땅이 그렇게 시켜서 한 것이다. 조선조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도 그런 일이 반복됐다.

박정희 정권 때 청와대 부근에 거주하는 민간인들을 내쫓고 소위 「안가」를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박정희는 바로 그 안가에서 총탄에 맞아 쓰러졌던 것이다. 전두환 정권 때는 경복궁 옆 별궁에 거주하는 이씨 왕족의 후손조차 내쫓고 역시 안가를 만들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외면적으로 볼 때는 왕과 대통령이 민간인을 내쫓아버린 것처럼 여겨지지만, 실상은 그 땅이 사람이 살 곳이 아니기 때문에 자꾸 사람들을 밀어내는 것이다.


여신(女神)이 사는 북악산

필자는 평소 청와대 터는 신사(神社)를 지어야 마땅할 자리라고 생각했다. 여기에는 역사적 근거도 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고려를 멸하고 나라를 세울 때 전국 명산의 신들에게 제사를 지냈다. 이때 지리산과 북악산, 두 개 산만은 여신(女神)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조선 시대 대부분의 문서들은 북악산을 백악(白岳)이라고 적고 있다. 이 이름은 그 상봉에 조선 초부터 백악신사(白岳神祠)가 있었기에 연유되었다. 즉 태조 4년(1395년) 12월에 한양 주변 백성의 요구에 따라 「백악산신」을 진국백(鎭國伯)으로 삼아 국가에서 제사를 받들게 하니 그 사당을 백악신사라 하고, 그 신사가 있는 산을 백악이라 하였던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백악 신위는 정녀부인(貞女夫人)이라는 여신이었는데, 영험하다 해서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서 복을 빌었다. 항간에서는 북악의 진국백이 여신인 것을 두고 서울의 몇몇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로 여겨왔다.

여하간 백악신사는 북악의 정상에 있었으며, 국가에서는 해마다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냈다. 백악신사에는 백악의 신위 뿐만 아니라 삼각산 신위도 함께 모셨다. 삼각산 신위는 남쪽을 향하여 북쪽에 있었고, 백악신위는 서쪽을 향하여 동쪽에 자리잡고 있는 형태였다.

삼각산 신위인 남신과 백악산 신위인 여신이 함께 있는 곳, 바로 이 일대가 신들의 유희 장소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지리산에서 남녀가 방사를 하면 탈이 생기는 것은 지리산 산신이 여자 신이기 때문에 질투를 하기 때문이란다. 그러한 지리산의 생김새도 어머니의 치마 자락을 펼쳐 모든 것들을 품어안는 자세인데 반해 북악산은 그렇게 마음씨 넓은 산도 아닌 듯하다. 마치 그 생김새가 삐뚜름하게 토라진 것처럼 앉아 있는, 심술궂은 계모처럼 말이다.

그런데 북악산에 대한 이러한 느낌은 필자만의 생각이 아님을 알았다. 이미 풍수학자 최창조씨(전 서울대 교수)가 이곳이 신의 유희장소로 적당하다는 주장을 펼쳤다. 왜 이곳이 신들이 노니는 터로서 적당할까?

청와대 뒷산은 북한산, 도봉산으로 이어지는데, 크게 보면 한북정맥의 한 지맥(支脈)에 지나지 않는다. 백두대간에서 갈라져 나온 한북정맥은 임진강과 한강을 양쪽에 두고 백암산(1,110m) 적근산(1,073m) 대성산(1,175m) 광덕산(1,046m) 백운산(904m) 운악산(936m) 죽염산(601m)을 차례로 만들고 도봉산에 이르러 한강 하류인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지점인 교하쪽으로 우회한다.

그런데 산의 흐름은 일정한 룰이 있다. 대간(大幹)이 방향을 바꾸게 되면 그 지맥인 정맥(正脈)이 그 반대 방향에서 지렛대 노릇을 해주고, 정맥이 방향을 틀 때면 그 기맥(岐脈)이 뒤편에서 받쳐주게 마련이다. 이렇게 보면 한북정맥이 도봉산에 이르러 우회를 할 때 그 반대 방향에 있는 북한산 줄기가 지렛대 역할을 해 준다. 북한산 줄기가 등 뒤에서 든든하게 버텨주는 도움을 받아 한북정맥은 원만하고 자연스럽게 우회하여 원당을 지나 임진강과 한강 두 지류의 합수지점인 교하 장명산에서 끝난다. 결국 한북정맥의 끝자락이 우회하면서 문산·금촌·교하·원당에 이르는 큰 벌판을 만들어 내니 풍수의 원리로 하자면 그곳이 편안한 땅이며, 청와대가 있는 북악(북한산의 줄기)은 그 지렛대 역할, 곧 사람의 등 뒤에서 사람들의 삶터를 이루도록 받쳐주고 있으니 신의 역할을 하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한북정맥이 품안으로 끌어들인 쪽이 파주, 고양 쪽이요 등을 돌린 쪽은 서울이다. 얼굴 쪽, 즉 양의 세계는 사람이 살기에 적합하고, 등쪽 즉 음의 세계는 죽은 자 혹은 신들의 영역이다. 그렇다고 하여 북악산 일대가 죽은 자를 위한 공간 즉 무덤 터가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북악은 돌로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한 까닭으로 한양, 특히 경복궁 터는 신들의 장소로 적합하다는 것이다.


새로운 도읍지를 찾아라

여기서 의문이 생길 수 있다. 풍수에 대단히 관심을 기울인 태조 이성계가 개성에서 도읍지를 천도하려 할 때 왜 한북정맥의 얼굴 쪽인 파주 고양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당시 임진강과 한강이 교차하는 이 지점은 군사상 방어에 문제가 많았으리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곳에서는 강 건너 개성이 보인다.

이성계로서는 고려의 기운이 강하게 남아 있는 개성이 빤히 보이는 지점에다 도읍지를 정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태조로서는 개성의 지식인들이나 토호들에게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그들로부터 등을 돌려 한북정맥의 등에 해당되는 북악에 남면했던 것들은 어쩌면 증오의 한 표현일 수 있다. 자신에게 반대한다고 해서 북쪽을 외면하고 휙 둘러앉은 꼴이 되었으니, 어쩌면 태조가 북악 밑에 거처를 정하게 된 때로부터 우리 민족의 분단을 예고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한양이 수도로 정해지던 조선 초기의 한양 인구는 10만명 정도였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4만으로 줄었다가 영·정조를 거쳐 서서히 증가하여 조선 말기에는 20만까지 육박했다. 조선왕조의 도읍지로서 한양은 결국 인구 10만에서 20만 정도를 수용할 능력을 갖고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지금의 서울 인구는 얼마인가? 서울 시내 4대문 안만 하더라도 몇백만 인구는 족히 될 것이다. 이 많은 사람들이 살기에 충분한 하중 능력을 한양이 갖추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한마디로 그 하중 때문에 서울은 자꾸만 가라앉고 있다. 압력 때문에 땅이 밀려나 한강의 폭은 점점 좁아지고 강바닥은 갈수록 낮아진다. 게다가 서울과 인접한 세계 최대 습지인 서해 갯벌까지 메워지게 됐다. 굳이 풍수들의 이야기를 빌리지 않더라도 한양의 지기가 쇠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반면 한북정맥이 끝맺음을 하고 있는 파주 고양 일대가 좋은 땅이라는 것은 역사적으로 알려진 사실이다. 임진왜란 이후 한양의 궁궐이 모두 타버리고 인심이 흉흉해지자 이의신이란 풍수가 「교하 천도설」을 주장한다.

이의신은 선조 때부터 광해군에 걸쳐 국가 풍수로 활약했던 고수였다. 전라도 광주가 고향인 그는 비록 서자 출신이지만 초시에 합격한 사람이었다. 조선 팔도 중 6도의 모든 산들을 편력한 풍수의 대가였다. 당시 선조도 이의신이 올린 글을 보고『글을 아는 사람』이라고 할 정도였고, 선조가 이의신의 풍수 실력을 물으니 당대의 명신 이항복이 적절한 평을 하기도 했다.

그러한 이의신이 광해군 4년(1612년)에 임금에게 상소를 올렸다. 그것이 그 유명한 교하 천도론으로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20년 후의 일이었다. 교하 천도론의 요점은 『도성의 왕기가 이미 쇠하였으므로 도성을 교하현에 세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당시 왕권을 강화하려는 광해군의 의도를 읽고 교하 천도론이란 「수」를 썼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대신들은 그를 죽이자고 하였다. 광해군의 비호하에 다행히 목숨을 구했지만, 광해군이 권력 싸움에 밀려 임금자리에서 쫓겨나면서 그의 행적 또한 묘연해졌다. 전해지는 말로는 중국 해남도로 망명을 갔다고 한다. 그러다가 1990년 초 풍수학자 최창조씨가 통일 이후의 잠정적 도읍지로 교하를 거론하고 나선 것이다.


청와대를 개명하려는 이유?

우리 역사에서 봉건 왕조체제는 아주 오래 전에 끝났다. 그리고 국민 정부의 등장으로 이제는 군사 독재와 그 잔재마저 청산되는 시점이다. 청와대가 더 이상 대통령 궁이 될 이유가 없다. 인간의 공간이 아닌 신의 공간에서 장막을 쳐놓고 위에서 내려다볼 것이 아니라 아래로 내려와야 한다. 국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자리로 대통령궁을 옮겨야 한다.

경복궁과 북악산 사이를 비집고 들어선 청와대는 그 주변 길을 거니는 모든 사람들에게 불안감을 주고 있다. 북악산과 경복궁 전체를 하나의 오뚝이로 볼 때 청와대는 너무 올라가 있다. 그래서 청와대를 보면 마치 무게 중심이 위로 올라간, 불안한 오뚝이를 보는 느낌이다. 오뚝이란 무게 중심이 밑부분에 있어야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만약 청와대가 굳이 북악산 아래에 있어야겠다면 약간 아래쪽으로 내려와야 무게 중심이 안정을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 위치는 어디쯤이 좋을까. 경복궁 근정전과 현 청와대 사이의 중간 지점 정도면 어떨까. 비단 필자만의 생각이 아니다.

단종에 대한 절의를 지켜 죽임을 당한 사육신 중 한 사람인 성삼문은 단종 즉위 초에 임금에게 글을 올렸다. 거기서 임금의 거처를 경복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기자는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성삼문은 경복궁을 에워싸고 있는 성 북쪽(현재 청와대 자리 부근)에 세종이 땅을 헤치고 불당을 짓는 바람에 세종과 문종이 연달아 죽는 불상사가 생겼으니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이후에도 경복궁 터에 대한 의견이 매우 분분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신동아」 98년 1월호 참조)

여하간 김대중 대통령측도 청와대에 대한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얼마전 청와대라는 이름이 좋지 않다 하여 새로운 이름을 찾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름을 개명해 새로운 기를 만들어 내려는 의도도 개입돼 있을 것이다. 그것은 조선왕조가 서울의 동쪽 기운을 보강하기 위해 동대문의 기를 강화한다는 의미로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 이름붙인 것과 같은 뜻일 게다. 그러나 청와대 터는 이름을 개명한다 해서 기운이 바뀌는,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니다.

이보다는 대통령궁을 이전하는 것이 더 간단하다. 이미 최창조 교수는 전두환씨가 자신의 「퇴임후 통치」를 위해 지어놓은 성남의 세종 연구소 터를 추천한 바 있다. 필자도 그곳에서 근무하는 관계자로부터 입지에 대해 들은 바 있다. 천혜의 조건에다 돈 한푼 들일 필요가 없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의 청와대는 기념관이나 전시관을 만들어 독재정치를 경계하는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활용하는 게 좋겠다. 김영삼 정권은 일제 유물의 상징인 중앙청 건물을 철거하였다. 청와대라고 온전히 있을 이유가 없다.

이제 글을 마무리하기로 하자. 필자는 21세기의 새로운 비약과 장차의 남북통일을 위해서도 더 이상 청와대 터는 대통령 궁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국민들에게 끊임없이 오만방자했던 청와대에 적잖은 사람들이 진저리를 치고 있을 것이다.

청와대 새 주인인 DJ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앞으로 예상되는 내각제 개헌 등 어려운 정치일정 속에서 탁월하다는 정치력도 자칫 북악산 일대의 어수선한 기운에 눌려 전 대통령들보다 나을 것 없는 불행한 결과를 낳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의 불행은 그에게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온 국민에게 미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경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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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화가 홍성담의 청와대 ‘풍수 미학’ - 월간 신동아/ 98년 3월
이름: damibox


등록일: 2006-10-17 14:02
조회수: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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