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담의 그림창고


[‘4.3의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제주도 畵家들 / 홍성담(화가)]

1.
우리 동아시아의 푸른 바다위엔 근현대사의 모든 질곡과 고통을 보듬고 있는 3개의 섬이 떠다니고 있다.
‘타이완’과 ‘오끼나와’ 그리고 ‘제주도’가 오늘날 동아시아 역사의 모든 것을 상징하는 맨얼굴이다.
이 3개의 섬은 동아시아 現代史의 ‘무의식’과 ‘잠재의식’ 그리고 ‘현실’ 사이를 서로 겹치기도 하고 엇갈리기도 하며
우리들에게 그 서러운 얼굴을 내밀고 있다.
하지만, 도대체 우리들은 마치 몽환 속에서나 본 듯한 얼굴로 착각하거나 혹은 보지 않았던 것으로 치부해 버린다.
기억은 되돌아서면서 희미해지고 이 섬을 떠나면 송두리째 잊어버린다.

‘제주도’를 말하면 그것이 ‘오끼나와’의 역사인것 같고, ‘오끼나와’를 말하다보면‘타이완’의 이야기로 들리고,
‘타이완’을 말하다 보면 어느덧 나는 푸른 바다가 四方을 벽처럼 둘러쳐 있는 제주도의 어느 해안가에서 하얗게 울고 있는 파도소리를 듣고 있다.


2.
설룬어멍 날 설아올 적
어느바당 메역국 먹곡
보름불적 절일적마다
궁들리멍 못나는구나

세상에서 가장 서글프고 애를 끓는 노래들이 제주도에 있다.
함지박 물위에 엎어놓은 바가지를 두드려 장단 소리를 낸다.
한반도의 굴곡진 역사 속에서 무참하게 흘려야 했던 제주도민들의 눈물,
세상의 모든 빗물 보다 더 많이 흘렸던 그들의 눈물바다를 때리는 소리와 같다.
어둡고 습기 찬 세월의 공간속에서 끊이질 않는 恨의 웅얼거리는 소리, 이 노래는 바람이나 물결이 칠적마다 흔들리며 살아가는
해초 미역에 자신의 험난한 인생을 비유하면서 미역의 생리를 닮아 잇따르는 고초를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감내해야 함을 노래하고 있다.

이 서글픈 민요를 통과한 제주도의 한 시인은
오늘 다시 아시아에 횡횡하는 국가폭력들 앞에서 이렇게 외치고 있다.

한 끼니 밥도 아닌 네가/ 한 방울의 물도/ 한 방울의 피도 아닌 네가/
저 절절한 죽음 앞에서/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Your life is important/ My life is important, too/
Really, I don't want to die, please!”//
꽃다운 젊음 하나 지켜주지 못하는 조국에서/ 더 많은 젊음을 조공하려 혈안이 된 조국에서/
너를 부여안고 눈물 흘린들 풀 한 포기 키워내겠느냐/
꽃 한 송이 피어나겠느냐//
그러니, 시여/ 차라리 죽어버려라   -- 김수열「시여, 차라리 죽어버려라」전문

이제 더 이상 혼자서 그림자처럼 웅얼거렸던 노래를 멈추고 우리 다함께 이 못난 역사를 성찰해 보자며 절규하듯 노래하고 있다.
시인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인 詩 조차도 포기하고 새로운 시각으로 우리들의 현실을 바라보자고 외치고 있다.

근세기에 벌어진 국가폭력중 가장 잔혹한 상처를 남겼던 제주 4.3 은 미군정 아래에서 한민족이 안고 있던 모순이 집약되어 나타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제주 인구의 1/10 에 해당하는 3만여 명 이상이 목숨을 잃어야 했다. 이후 약 반세기 동안 4.3은 누구도 말해선 안되는 사건이었다.
군부독재정권은 4.3을 은폐 왜곡했고 철저히 금기시했다.
그에 따라 오랜 기간 제주도민들은 4.3을 입에 담지도 못했고 심한 허무주의와 레드콤프렉스에 시달려야만 했다.
국민들조차 고립무원의 섬에서 발생한 이 처절한 학살극에 대해 사건 당시는 물론이고 그 이후에도 제대로 알지도 못했다.
교과서는 왜곡된 내용만을 전달하고 있을 뿐이며 언론도 오랫동안 침묵으로 일관해왔을 뿐이다.
제주도는 더 이상 대한민국이 아니었다.
제주도민은 더 이상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었다.

2.
가장 먼저 문학이 제주 4.3의 진실이 은폐된 지하의 빗장을 열었다.
제주 4.3을 직접 경험했던 老작가 부터 바람에 묻어온 진실을 귓전에 담았던 젊은 작가들까지 김석범, 현기영, 한림화등의 소설과
이산하와 김수열의 시가 반세기 동안 감추어진 4.3의 상처를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여주었다.

80년 ‘탐라민속연구회’의 출발은 제주도의 서글프고 애잔한 노래들 속에 가득찬 제주도민들이 오랫동안 가슴에 품고 살아야 했던 恨에서
거대한 낙관의 뿌리와 긍정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81년 극단 ‘수눌음’의 ‘항파두리’ 마당극은 위 문학적 성과들을 한꺼번에 모아 대동굿판으로 끌고 나왔다.
혼자서 물박을 두드리며 웅얼거림으로 풀어야 했던 恨을 드넓은 광장으로 끌고 나와 탐라도의 자기 정체성에 대해 성찰하는 대동굿이었다.

3.
인간은 모두 자신의 경험을 설명하는 서사를 가지고 있다. 때문에 트라우마로 산산조각 난 세계를 다시 맞추기 위해서는,
개인이 주체가 되어 자신의 이야기를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타의에 의해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강요당한 피해자들이 자신의 경험을 반복해서 말하고, 자신의 두려움과 고통, 분노와 대면하는 과정이 중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트라우마는 결코 사라지지 않지만, 개인은 그 기억을 견디면서 새로운 자아로 살아갈 수 있다.
치유는 상처를 가슴에 보듬은 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획득하는 것이다.

굿은 視知覺 이미지와 소리다.
굿을 베푸는 司祭는 시각이미지로써 세상에 現象을 알리고 ‘소리’를 통해 치유를 한다.
司祭로써 화가들은 그림을 통해 그동안 사람들이 애써서 외면해 왔던 4.3의 실제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사람들은 지난 상처와 현실을 보게 되고, 극복의 대안을 구상한다.

평론가의 평론이 회화나 소설, 시를 대변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론이 필요하듯, 증언이 아닌 생존자가 만들어내는 이야기는 계속되어야 하는데,
이야기를 함으로써 개인은 자신을 주체로 세우고 기억을 제어하는 연습을 통해 자신에게 강요되는 상처의 기억을 치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나쁜 기억은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표현해 배출해 버려야 한다.

五感은 視知覺으로 부터 열린다.
회화가 敍事性을 획득할 때 그 논리적 구조의 형상화에 의해서 ‘이미지’와 ‘소리’를 함께 갖는다.
그림에 나타난 각종 형상들은 각기 그 나름의 미학적 원리에 의해 사람의 정서를 움직인다.
정서적인 것은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에 강한 힘으로 작동한다.
정서의 움직임은  대개 무의식중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더욱 강력한 힘을 갖는다.
그들 화가들의 4.3을 그린 화폭에는 제주도만이 갖는 풍광의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았다.
그것이 단순한 풍광이라면, ‘순수한 자연’은 얼핏 악의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국가에 의해 사건을 은폐하는 중요한 정책의 도구가 되어버린다.
그러나 그들은 제주도의 '순수한 자연' 속에 감추어진 역사의 진실을 그려 넣었다.
한없이 아름다운 이 섬의 풍광과 이곳에서 벌어진 잔혹한 국가폭력 사이에 미학적 긴장이 형성된다.
이 긴장관계가 생명을 위협하는 모든 유형 무형의 것들에 대하여 저항의 상징으로 작동한다.
그러므로 視知覺은 일종의 상징이다.
굿판에서 모두 함께 나누어 먹는 음식과도 같다.
제주도의 화가들은 4.3의 트라우마를 치료하는 司祭로써 자신들의 그림을 통해
국가폭력에 저항하는 상징을 만들어 냈고 그리고 그 그림들을 젯상에 음식으로 올려 제주는 물론 한반도의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어 음복(飮福)하게 했다.

‘4.3 주제 미술’은 1994년부터 2003년까지 10년 동안 제주 ‘화가 司祭’들에 의해서 줄기차게 ‘그림굿판’이 이루어졌다.
이 굿판에 의해서 이 땅의 근현대사에서 국가폭력에 의해 감추어진 상처와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80년 광주, 여순, 지난 조국전쟁때 무참하게 저질러진 여러 유형의 집단 학살들,
그리고 일제에 의한 학살과 군위안부 문제들도 수십년만에 수면위로 떠 올랐다.
모두 이곳 제주도 화가들이 자신들의 그림을 역사의 젯상에 올려 우리 모두에게 음복(飮福)을 베풀었던 결과들이다.
이 제주도 司祭 화가들의 굳건하고 아름다운 이름을 일일이 거론하는 것 조차 외경스럽다.
강요배,고길천, 김영훈, 박경훈, 오윤선, 오석훈, 이원우, 현경화등 총 26명의 화가들이다.

4.
제주의 서글픈 저 민요처럼 가슴속 한가운데 모과 덩어리같은 恨을 안고 살았던 사람들이 이제부터 그 상처를 회복하고 새로운 대안을 찾아 나서고 있다.
국가는 항상 이런 새로운 대안을 자신들이 도맡아서 해야 한다는 실적주의에 매몰되어 있다.
인간 삶의 보편적 권리인 환경과 생명 그리고 평화에 관한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낸 국가 권력은 인류역사상 단 한 번도 출현한 적이 없다.
그러기엔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기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국가란 ‘파괴’와 ‘은폐’와 ‘죽임’으로 권력을 지탱하는 것이 그 속성이기 때문이다.

이젠 4.3의 굿판과 제사를 국가가 빼앗으려 하고 있다.
어떤 의미로든 제사를 지내는 국가는 건전하지 못하다.
새로운 전쟁을 만들기 위해서 국가는 제사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저지른 죽엄의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서도 제사를 필요로 한다.
국가의 제사는 다시 4.3의 상처를 덧나게 할 뿐이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지척에 공존해야하는 제주도민들은 이제 새로운 화해와 화합의 철학을 만들어 가야 할 때다.
불행한 과거를 청산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망각하느냐, 기억하느냐. 선택은 하나다.
‘이제는 잊고 화해하자’는 망각의 해법은 ‘그만하면 됐다’는 가해자 입장의 선택이다.
하지만 진실과 정의를 외면한 과거사 청산은 사죄와 용서를 전제로 한 화해가 아니라 단지 야합일 뿐이다.
손에 피를 묻힌 그들도, 수 십명 아니 수 백명 수 천명의 인간 생명을 절단시킨 저 피묻은 손들이 겪는 트라우마도 역시 자손들에게 그대로 되물림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가해자들 스스로 세상의 살아있는 모든 ‘생명의 가치’에 대한 깊이 있는 자기 성찰이 없는 한 진정한 화해와 평화는 깃들지 않는다.

이제 이 민요는 어둡고 습기찬 세월 속에서 그림자처럼 웅얼거릴 때가 아니라, 가해자들의 깊이 있는 자기 성찰을 위해
이 가을 환한 햇빛아래서 우리 모두 함께 큰소리로 외쳐 불러야 할 때가 지금쯤인 것 같다.

설룬어멍 날 설아올 적
어느바당 메역국 먹곡
보름불적 절일적마다
궁들리멍 못나는구나                                              (이상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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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일본 평화학회' 가 주최한 '동아시아의 평화'에서 파이널토크에 발제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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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4.3의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제주도 畵家들 / 2007.11/ 홍성담
이름: damibox


등록일: 2008-02-17 18:53
조회수: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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