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담의 그림창고


[문규현 신부님]

저기 사람이 갑니다
저기 한 사람이 기어갑니다
저기 저기 신부님이 자벌레처럼 기어갑니다
하루내내 마른 등허리 위에 떨어지는
하얀 매화꽃 털며
야윈 등은 하늘에 닿고
누런 뼈 정강이와 배는 땅에 닿아
자벌레처럼 기어갑니다.

사방이 가로막힌 두터운 벽을
머리로 밀고 또 밀며
자벌레처럼 기어갑니다.

검은 하늘이 무겁게 내려와 등위에 앉더니
붉은 땅이 올라와 그이의 가슴을 메웁니다.
기어가는 작은 자벌레 몸 속 어디만큼에서
하늘과 땅이 만났습니다.

우리들 육신에서 흘러넘친 욕망의 쓰레기더미를
자벌레 연두색 머리로 밀고 또 헤치며
시속 백 킬로짜리 아스팔트 위를 천천히
아주 천천히 기어갑니다.

하릴없는 내가 그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자벌레에게 물었습니다.
이 강팍한 땅 하느님은 어디로 숨으셨나요.

그분은 항상 너의 몸속에 계신단다
네가 하느님이다
너의 눈에 보이는 사람들도 모두 가슴에 하느님이 계시구나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이나 생명이 없는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이다.
네가 사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네 몸속 하느님이 사람들의 가슴속 하느님을 보는 것이란다
네가 산과 강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네 몸속 하느님이 산과 강에 깃들은 하느님을 보는 것이란다.

그렇게 그이가 기어갑니다.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 피같은 땀 두방울이 떨어집니다
자벌레가 기어가고 난 후 빈자리는 태허의 적막감이
그이의 땀 한방울 떨어진 자리에 민들레 한송이가
소금꽃처럼 피었습니다.
그리고 한방울 땀은 마중물이 되어
새로운 강물을 만듭니다.
석삼년 가뭄 메마른 들을 굽이굽이 흐르는
새로운 강물을 만듭니다.

신부님
우리들의 신부님. (문규현신부님 정년퇴임식에서/ 29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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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문규현 신부님 (詩)/ 홍성담
이름: damibox


등록일: 2011-05-20 14:43
조회수: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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