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담의 그림창고


1) ‘집’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흙에서 태어나 다시 흙으로 되돌아 간다.  
생명은 물에서 태어나 다시 물로 되돌아 간다. 이 끝없는 순환과정이 바로 인간과 생명의 역사이며 이 순환의 거대한 수레바퀴가 어떤 방향과 목표를 갖고 돌아가느냐에 따라 우리들 역사가 진보와 퇴행을 거듭해 왔다.
  
문명의 발달로 인해 인간생활의 편리함이 진보라고 이야기 할 수 없다는 것은 이제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며, 때로 문명발달만이 인간 삶의 미래를 보장할 수 있다고 기염을 토하는 논자들 마저도 속으로는 내심 문명발전에 따른 심각한 모순에 절망하고 있다.
  
지금 우리 인간들은 미래의 자손들에게 할당된 몫의 자원까지도 미리 댕겨다 사용하여 버렸고 그 댓가로 약간 더 편리한 삶을 누리고 있는지 모른다.  
이러한 급격한 산업화는 역시 ‘생명’의 순환을 급격하게 만들었고 ‘땅’과 ‘물’은 그 순환의 속도를 채 따라가지 못하고 헐떡거리며 방치된 상태로 절망에 가까운 몸짓을 하고 있다.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다시 되돌아가고 물에서 태어나 물로 다시 되돌아가는 이 거대한 순환의 고리.  태어날 흙도 병들었고 되돌아갈 흙도 더이상 찾을 수도 없으며, 태어날 물도 이미 메말랐거나 오염되어 있고 되돌아갈 물도 스스로의 자정능력 마저 상실되어 버린지 오래다.
  
그렇게 ‘물’과 ‘흙’으로 되돌아가지 못하고 떠도는 이 세상 모든 것들.  중음신이란 바로 그러한 것들을 일컫는다.  급격한 산업화 과정에서 생성되는 폐기물들. 무절제한 소비생활이 내뿜는 생활 쓰레기들. 온 산과 들을 뒤덮는 검은 연기…. 결국 인간의 역동적이고 편리한 생활을 위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 밖에 없는 이 쓰레기들은 ‘흙’으로 되돌아가지 못하고 무채명의 중음신이 되어 우리들 주위를 떠돌며 인간생명의 미래를 천천히 아주 완만하게, 때로는 급격하게 ‘죽음’의 세계로 인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인간은 지친 육신 쉴곳도 마땅치 않다.  볼만한 산과 들을 겨우 찾아 가족들 앞세워 나서는 것도 현대인에게는 어쩔 수 없는 한가지 ‘행사’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쉴만한 곳은 어딘가. 그리고 어제를 정리하고 오늘의 피로를 풀어내며 내일을 계획하는, 다시 말해서 적당한 긴장과 안정을 새롭게 유지시켜주는 진정한 쉼터는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어떤 사람은 한적한 곳에서 홀로 안정을 누리므로써 고달픈 생활이 가져다 주는 갈등의 피로를 풀 수 있다 하기도 하며, 어떤 사람들은 대중목욕탕에서 뜨거운 물에 온몸을 담그므로써 생활의 피로가 풀어진다 라고 말을 한다.  오죽 했으면 삶에서 주어지는 갈등을 자기 혼자서만이 해결해야 하는 비극적 인생이 되었는지, 더 나아가 혼자서 벌거벗고 크로르칼키 소독냄새 자욱한 물속에 들어가 자신의 헐거운 육신에 묻은 때를 벗겨내며 피로를 풀어야 하는 절망적인 인생이 되었는지, 이러한 삶들이 결코 행복한 삶인지 세밀하게 자기 자신을 되돌아 보아야 할 때 인것 같다.    
세상사는 그렇게 만만치 만은 않다.  세상사에서 얻어지는 갈등과 피로가 사람을 떠난 곳에서 진정한 쉼터가 있을 수 있는 것일까.
  
인간삶이란 이미 일정한 공동체의 테두리를 가질 수 밖에 없는 인생의 목적성을 갖고 있다.  그 공동체의 질이 좋냐 나쁘냐, 결속력은 어떻느냐 등등을 따지기 전에 인간이 인간을 떠나서는 그 삶을 유지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것은 숙명이며 바로 ‘함께 살아가는 것’에서 온갖 승리와 좌절, 희망과 절망, 기쁨과 슬픔, 긴장과 이완으로 개개인은 물론 그 집단 그 사회 그 국가의 역사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한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공동체이며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최초 단위의 공동체가 ‘가족’이고 그 가족을 묶어 주는 물적토대가 ‘집’으로 대별된다.
  
어쨌든 인간은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가듯이, 인간은 ‘집’에서 나와 ‘집’으로 되돌아 간다.  하루의 출발이며 하루의 도착이 ‘집’에서 이루어진다.  인간이 세상에 갓태어나 최초의 삶을 바라보는 것도 ‘집’이며 이제 그 생명이 다해 몸져 누워 숨결을 놓는 곳도 ‘집’이다.  그러므로 인생은 ‘집’에서 태어나 ‘집’으로 되돌아 간다.  하루 하루가 지고 새는 것도 역시 어제와 내일의 중도지점, 하루가 소멸하고 하루가 생성되는 바로 그 시각적 지점에 인간은 가장 인간적인 상태, 무방비하고 편한 자세로 잠들어 있어야 하는 장소도 역시 ‘집’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집’은 인류의 발길이 끝없는 행진 속에서도 음과 양이 탁월한 차원에서 통일되는 지점이며 正음. 正양을 이루는 인간의 최초이자 마지막 거처인 셈이다.
  
음양 태극의 보이지 않는 운행이 우리들 집안에서 이루어지고 그곳에서 시간의 소멸과 생성, 온갖 생명의 소멸과 생성, 모든 감정의 소멸과 생성이 비롯되고 아래로 땅과 위로 하늘을 두고 화합시켜, 자신을 중심으로 해서 우주간에 생식하는 만물이 화육, 안정되는 것을 느끼고 태평한 세계를 형성해 간다.  그래서 인간의 ‘집’은 자연의 한부분에 해당한다.  들에 풀 한포기, 산에 나무 한그루 이렇듯이 저 산자락끝에 집한채 라고 일러 말한다.  다시 말해 산자락에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집’을 지어 산자락을 완성하는 개념이다.  즉, 저 산자락은 태초에 이미 그 끝에 맞춤한 ‘집’을 필요로 하고 있다.  이것이 자연과의 조화 개념이다.
  
뒷산과 앞에 흐르는 시냇물은 각각 음과 양이 되어 어울리며 조화를 이루게 되고 그 조화에서 생성되는 기운을 산천의 정기라 하며 그 산천의 정기가 그곳 집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전해진다.  집안에 그득히 고여 운행하는 음과 양의 소멸과 생성, 그리고 하늘과 땅의 지혜로운 조화속에서 우리들의 미래를 담고 있는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다.
  
이 새로운 생명이 세상에 처음 나와 가장 먼저 발견하는 세계가 ‘집’이다.  그가 누워 바라보는 천정 서까래의 자연스러운 배치나 혹은 천정의 사방연속무늬속에서 혼돈과 질서를 배운다.  창호를 통해서 은은하게 내려오는 빛과 창살의 편안한 안정적 배열속에서 자기 인생의 미로를 헤쳐가는데 가장 필요한 ‘균형감각’을 체득한다.

어린이는 어른의 축소판이 아니다.  오히려 어린이의 상상력은 모든 인위적인 것에서도 무한한 생명을 발견해 낸다.  필요가  다되어 내버려졌거나 방치된 하찮은 물건이나 돌맹이 하나 못조각 하나에서도 어린이는 생명을 찾아내고야 만다. 하물며 ‘집’, 우주의 축소판인 ‘집’에서야 어쩌랴! 어린이에게는 때떄로 이 방에서 저 대청, 바로 낮은 문턱 하나로 나뉘어진 방과 대청이 서로 별개의 세계가 될 수도 있다.  이 방이 자기가 발딛고 사는 우리의 땅이라면 문턱 너머 저 대청은 하늘나라가 될 수도 있고, 바다건너 이국의 땅이 될 수도 있다.  이 방이 너른 들이라면 저 문턱이 큰 산맥이되고 산맥너머 대청은 전혀 새로운 미지의 세계로 상상 되기도 한다.  그들은 집안에서 비바람을 만나기도 하고 눈이 내리기도 하고 큰 산을 만들고 바다를 만들고 강을 흐르게 한다.
  
물론 이것을 단순한 소꼽장난이라고 치부해 버릴 수도 있으나 어린이는 그러한 상상력 속에서 천지를 사귀게 되고 그 조화의 방식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듣고 배운 것을 집안의 모든 것들과 함께 어우러져서 기억되게 한다.  이것을 ‘집’이 갖는 여백의 기운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여백을 통해 그 집안에 사는 사람은 그 땅의 기운을 촉촉하게 받아 들인다.  밝은 창하나 형식적으로 뚫어져 있는 네모 반듯한 방 한칸을 따로 떼어 준다고 해서 자기만의 여백이 아니고, 자기만의 세계가 구축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소우주이듯 ‘집’도 우주적 개념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집의 우주적 개념이란 바로 자연과의 조화, 인간과의 조화를 말한다.  내가 있으므로 방안의 모든것이 생명을 얻고, 그리고 사람끼리 함께 삶으로써 집은 더욱 빛이 난다.  인간이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다시 되돌아가 음과 양의 조화속에서 이름모를 들풀로 새로 돋아나거나 하나의 기운이 되어 새로 태어날 생명의 가느다란 숨결이 되듯이, 바로 그 영혼의 쉼터가 ‘집’이요, 그 인간의 역사가 ‘집’안에서 비롯된다.  
  
이제 인간은 무한한 소비와 편리함을 누리는 뒤끝에 자연과 환경의 폐허만을 남겨 놓았다. 자손들 미래의 몫까지 미리 빚내어 파헤쳐 먹는 주제에 이상적인 원래의 ‘집’에 관한 명상을 해야할 여유마저 인류 행복에 관한 한 최대의 모순개념인 ‘문명의 발전’에 빼앗겨 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현대인은 이상적 형태의 ‘집’, 우주적 개념으로서의 집,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서의 ‘집’의 창조를 인위적으로라도 만들어 가야 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을 짊어지고 있다.  ‘집’이 앉아야 할 ‘지기’, 즉 땅의 기운도 이제는 역시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 가야 할 의무를 지닌다.
  
그러나 근대화된 개념의 ‘도시계획’이라는 낱말은 인간의 이기적 욕망이 중심이 되는 개념에 불과하다.  물론 거기에도 자연환경에 대한 배려가 ‘계획’속에 나타나고 있을 수 있으나 그것은 ‘계획’을 위한 자연의 배치에 불과할 뿐, 역시 인간의 욕망에 의하여 ‘자연과의 조화’라는 대 전제는 종속적 가치로 전락해 버린다.  그러므로 ‘도시계획’이라는 개념은 ‘자연계획’, ‘환경계획’, 또는 ‘인간과 자연의 진정한 조화계획’이라는 개념으로 바뀌어야 한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보다 가치 있게 하기 위해서 집을 짓는다.  세계의 여러민족과 사회집단은 그들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집을 지어 왔다.  이러한 방식들은 그들의 자연환경과 생활양식과 가치관에 따라 만들어졌고 그들의 역사와 더불어 발전해 온 것이다.  그곳에는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담겨 있고, 그들이 살고 싶어하는 세계의 이상적 모형이 있고, 그들에게 주어진 조건이 있으며, 주어진 조건 속에서 이상세계를 구현하려는 고유한 방법이 있다.
  
그 고유한 방법을 ‘전통’이라 하며 전통의 현대적 속화과정은 단지 선비나 양반의 갓모양을 본떠서 지었다거나 (예:서초동 예술의 전당), 백자나 청자의 곡선을 본 떴다거나 (예:잠실 주경기장), 지붕 꼭대기에 기왓장을 몇 개 얹어 놓는다(예:남산기슭 신라호텔)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전통’ 이 갖는 ‘우리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 즉 인간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천지의 기운속에서 생명을 창조해 내는 그 거룩하고 위대한 사상적 가치체계의 실용화의 값진 전통을 현실적으로 응용해낼 때 올바른 의미에서의 ‘계승’이고 ‘전통의 재현’이다
  
인간은 자신의 숨결이 다 해 감을 느낄때 다시 흙으로 되돌아 갈 채비를 하기 위해 온갖 것과 무상한 대화를 하기 마련이다.  나보다 먼저 바로 이 ‘집’에서 태어나 다시 이 ‘집’에서 돌아가신 선친들이 살아 생전에 앉아 쉬던 마루며, 그들의 손때 묻은 기둥이며, 당신의 유년시절 온갖 상상력으로 발견해 내었던 우주적 질서를 ‘집’안에서 다시 찾아 보게 된다.  이것은 지난 자기인생에 대한 확인이다.  선친들도 죽음을 앞두고 바로 나처럼 이렇게 저것들과 무상한 대화를 나누었으리.
  
그러므로 죽음이 두렵지 않고 외롭지 않다.  내가 흙으로 되돌아 가면 저렇게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굵은 기둥나무가 되기 위해 새로운 싹으로 다시 태어난다거나 아니면 저 벽을 바르는 진흙으로 풍화되어 땅의 숨결을 고른다거나….  이런 저런 생각으로 방안에 누워 문득 천정을 올려다 보니 길게 뻗은 서까래의 공간 배치가 눈에 들어오고, 어린시절에 품었던 여러가지 의문들, 저기 두번째 세번째 서까래는 약간 굽은 나무를 저렇게 아무런 스스럼없이 사용했을까!  서까래와 기둥이 만나는 저 창방의 각도나 서까래가 걸쳐진 넓이의 비율이 똑 일정치 않은지….  이러한 의문들이 한꺼번에 풀리면서, 굽은 서까래는 굽은 그것대로, 똑 일정치 않은 서까래와 서까래의 공간에서 자연적인 여백을 만나고서야 내가 이세상 가장 편안한 곳에서 살아왔고 이제 바로 그곳에 누워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어릴때 가졌던 그 작은 의문들이 내 인생을 풍부하게 만들어 주었다는 것을 이제 비로소 알게 되는 것도 바로 마지막 ‘집’안에 누워 있을 때다.  이제 내가 비로소 흙으로 다시 되돌아가 저 선친들의 눈길과 손때가 묻은 기둥이나 흙벽 속에 나의 정령이 새롭게 살아 숨쉬게 된다는 것을, 생명이 다 하매 조금은 아쉽지만 그래도 내 인생이 저렇듯 우주속으로 환원되므로써 보잘것 없는 작은 강줄기 실개천이라도 이루어 역사의 장강에 합류된다는 것을, 그러므로써 죽음은 그저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기약한다는 것을….
  
결국 소중한 삶이란 자연의 질서, 우주의 질서속에서 자신을 확인하는 삶을 말한다.  우주와 나의 조화, 자연과 나의 균형이라는 것도 쉽게 말하여 우주와 자연의 운행속에서 내 자신을 스스로 깨우쳐 가는 것이라고 할 때 ‘집’은 한 인생에게 그 문제를 던져주는 화두이자, 그 화두를 풀어주는 해답인 셈이다.  그래서 ‘집’은 ‘시작’이며 ‘끝’이고 그리고 다시 ‘시작’이다.
  
집을 올바르게 짓는 자들, 집을 짓는 일에 진정한 고민을 하는 자들, 모두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 내는 창조자들이며 자연과 우주 그리고 인간을 조화롭게 하려는 ‘신의 손길’을 이미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19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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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집에 관한 명상(1) - '집'이란 무엇인가
이름: damibox


등록일: 2006-10-17 11:11
조회수: 3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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