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담의 그림창고



[그는 '5월 광주'를 얘기하며 크게 웃었다 ]
[천호영의 문화초대석] 일본에서 야스쿠니 개인전 여는 '5월화가' 홍성담

얼마 전 대학 시절 친구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요즘 (홍)성담이 형 뭐 하는지 아냐?" "글쎄, 못 본 지 오래됐는데….
" 친구의 말에 따르면, 그는 안산에 살며 도쿄에서 야스쿠니신사에 관한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야스쿠니라고? 몇 년 전 종군위안부에 관한 작품을 그렸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은데….

홍성담(53).
'5월 판화' 연작으로 '광주'를 세계에 알리고, '민족해방운동사' 그림사건으로 고문과 옥고를 치렀던 화가.
시대의 어둠에 맞서 붓을 칼처럼 썼던, 그렇기에 화가보다는 투사라는 칭호가 더 어울렸던 사람.
'오월화가' '통일화가'로 잘 알려진 그가 왜 야스쿠니 문제에 관심을 두게 됐을까.

80년대 중반 한 때 그와 나는 같은 문화운동단체(그는 광주에서 나는 서울에서)에 몸담았었다.
광주에서 처음 그를 만났을 때 술잔을 앞에 놓고 그가 쏟아내는 '5월 광주' 얘기를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당시 대학을 갓 졸업한 내게 그는 내 눈앞에 '살아있는 광주'였다.

그런데…, 무심했구나. 교도소에서 나온 뒤 그를 만난 기억이 없었다. 그와의 사이에 15년이 넘는 시간이 비어 있었다.
갑자기 그를 만나고 싶어졌다.
그를 만나 비어 있는 시간의 조각을 맞추며 지금 시대 그에게, 우리에게 광주는, 통일은, 예술은 무엇인지 묻고 싶었다.
'요즘 밥은 잘 먹고 사는지'도 궁금했다.

[야스쿠니에 묻혀 있는 전쟁의 불씨]

지난달 26일, 경기 안산 원당마을에 있는 홍성담의 화실을 찾았을 때 그는 일본 전시 작품에 마무리 손질을 하고 있었다.
인터뷰는 3시간 넘게 진행됐다. 재떨이에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여갔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의 말에는 거침이 없었다.
감칠맛 나는 남도 사투리도 여전했다.

홍성담은 2일부터 이달 말까지 일본 도쿄의 마키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연다.
제목은 '야스쿠니의 미망(迷妄)'.
야스쿠니 신사에 관한 작품 가운데 약 15점 정도를 추려 전시한다.




▲ 야스쿠니와 군위안부 캔버스에 아크릴 / 69 x 110 cm / 2007

- 이번 전시회를 열게 된 취지는?
"몇 년 전부터 동아시아 담론, 동아시아적 형상화 논리, 동아시아 아키타이프(Archetype, 민족 등 집단에 공통된 문화적 원형)에 관심을 가졌어.
그래서 직접 현장을 뛰어다녀 보니까 동아시아 근현대사에서
가장 철저하게 질곡에 빠져있는 곳이 한국과 대만·오키나와 이 세 곳이야.
세 곳 다 일본의 식민지였고, 미국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고.
그런데 이 질곡의 문화적 상징이 야스쿠니로 귀결되더라고.
동아시아에서 앞으로 가장 불안한 상태가 전개된다면 미국보다도 일본의 재무장이다,
그 불씨가 야스쿠니에 묻어져 있는데 야스쿠니하고 천황제하고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이걸 면밀히 분석해봐야 할 필요가 있다.

야스쿠니는 그냥 위폐를 봉안해서, A급 전범자든 뭐든 간에 그들의 영혼을 위무하는 그런 정도가 아니야.
야스쿠니는 하나의 종교지. 지들 메이지시대 때부터, 지들 정권을 위해서 싸우다 죽었던 군인들을 군신으로 모시는."

작업을 위해 그는 관련 자료와 책자 등 50여 권을 찾아 읽었다.
화실 탁자 위 여기저기에 <日本の侵略><사쿠라가 지다, 젊음도 지다><천황의 군대와 성노예><1945년 8월 15일, 천황 히로히토는 이렇게 말하였다><일본인과 천황> 등의 책이 쌓여 있었다.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책을 통해선 야스쿠니 문제가 꾸준히 얘기되고 있고.
그런데 아직 야스쿠니 문제를 건드린 그림들은 안 나왔어.
활자의 힘과 시각매체의 힘은 전혀 다르니까. 일단, 내가 한번 본격적으로 고리를 걸어보고…."

일본에서 발간된 <야스쿠니 유치관(遊就館) 도록>도 눈에 띄었다.

"야스쿠니에 가면 유슈칸 전쟁박물관이 있는데 전시장 입구에 칼이 하나 걸려 있어.
무사도 정신이 일본의 정신이다 이거지.
자기 나라 정신을 얘기하면서 칼을 내세우는 나라가 어디 있겠어, 무협영화도 아니고.
또 인간 어뢰, 가미카제로 전시가 끝난다고. 완전히 전쟁 미화지.
어린이 놀이터도 아니고 유치하기 이를 데 없어."

"우익들이 칼들고 설치는데, 이런 전시가 약간 위험하지"

그는 일본은, 정확히는 일본인의 정신구조는 아직도 전근대성을 못 벗어나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리고 그 뿌리를 천황제에서 찾았다.
"천황제를 중심으로 군인도 정치인도 심지어 야쿠자까지도 세습체제가 이뤄지는 전근대성".
그것은 또 "바로 야스쿠니로 상징되는 과거사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일본사람들 스스로 속마음, '혼네'가 다르다고 하는데 징용으로 전쟁터에 나간 아들이 죽어 돌아와도 슬퍼하지 못했어요.
슬퍼하면 '비국민'이라고 일본사회에서 왕따를 당한다 말이야.
그러니까 일본 국민은 지금까지 마음껏 웃어보지도 못하고, 마음껏 울어보지도 못했다고. 정신적으로 아주 짓눌려있다고.
언제든지 국가라는 이름으로 군국주의가 되살아나면, 전시체제에 동원될 수 있는 정신적 상태라고.
난 그것이 굉장히 무서워."

그는 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대단한 사유를 하던" 도쿄제대, 교토대 수재들이
"죽어서 야스쿠니의 뜰에 핀 사쿠라꽃으로 만나자"며 가미카제로 출정한 이유를
"아직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그래서 더욱 두렵다.




▲ 바리데기 '바리데기' 연작중에서 / 1998

- 최근 들어 일본 극우세력의 활동이 심상치 않은데 전시가 위험하진 않는지?
"좀 위험해. 처음엔 야스쿠니 문제만 다루려고 생각했는데,
야스쿠니 문제를 다루다 보니까 천황제 문제를 언급 안 할 수가 없어. 동전의 양면이니까. (천황제는 일본에선) 우리나라 국가보안법 문제보다 몇배 더 터부시돼 있어.
우익들이 칼 들고 설치고, 약간 위험하긴 해."

그는 혹시 전시 전 벌어질지 모를 불상사를 우려해
전시 일정에 맞춰 기사를 올려줬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아직 별다른 소식이 없어 괜찮은 듯싶어 이 기사를 출고한다).

그는 이미 지난해에도 8월 15일을 전후해 도쿄 일원에서 열린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 행사에 참여했다.
또 전시회 기간인 11월 5일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같은 단체가 뉴욕 유엔본부 앞에서 벌일 시위에도 참가할 예정이다.
내년 설날까지 야스쿠니 그림을 40~50점 정도 그려 대만·중국·오키나와 등 순회전시를 할 계획도 세워두고 있다.

[바리데기는 바로 종군위안부... "분노만으로 안 돼, 낙관을 가져야지"]

그는 야스쿠니 그림에 앞서 일본군 종군위안부를 주제로 한 작품들을 그려왔다.
1998년 '세계인권선언 50주년'을 기념해 일본 여류작가 도미야마 다에코(富山竗子)와 현해탄을 오가며 2인전을 열기도 했다.

평소 관심은 있었으나 종군위안부 문제를 그림으로 그려야겠다는 결심은 90년대 중반,
도쿄에서 열린 종군위안부 민간법정에 우연히 참석했다가 만난 한 태국 종군위안부 할머니와 나눈 대화에서 비롯했다.
그가 들려주는 당시 태국 할머니와 3중 통역으로 나눈 대화.

"할머니 어떻게 사세요?"
"꽃 가꾸는 재미로 살아."
"그게 그렇게 재밌으세요?"
"꽃은 꽃을 피우잖아. 작은 꽃이든 큰 꽃이든 사람들을 기쁘게 만들잖아.
뒤뜰에서 꽃이 피면 창 앞에 내놔.
그럼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보고 즐거워하고 나도 즐거워져."
"앞으로 뭘 제일 하고 싶으세요?"
"꽃을 더 많이 길러서 내 집앞 다니는 사람 더 즐겁게 해주고 싶지."

"우리 할머니들이랑 너무 비교가 돼. 너무 편안하고 넉넉해. 그러니까 힘이 나오지.
우리 할머니들 보면 분노가 아직 가라앉지 않았어. 당연하겠지.
거기다 모두 그런 건 아니겠지만 가슴에 분노만 불길질하는 단체들도 있고.
또 당시 화가들 그림을 보면 순 강간하고 다 그거야.
일본놈이 닛폰도 차고, 앞에다 여자 가랑이 벌려놓고, 이런 식이야.
물론 실제로 처참했으니까. 그런데 분노만으론 해결이 안 돼.
그래서 종군위안부 문제를 그려야겠다 생각했지."

그는 '바리데기 설화'를 떠올렸다.
바리데기가 종군위안부고, 종군위안부 할머니가 바리데기 공주였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바리데기 공주가 그 부모를 살리기 위해 저승에 건너가 자신의 몸을 팔아 생명수를 구해오는 여정이,
조국에서조차 외면받았던 할머니들의 처절했던 삶과 포개졌다.
그는 거기서 절망과 분노가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보았다.

"종군위안부를 바리데기 설화로 가져오면서 이걸 새로운 생명을 잉태해내고,
정말 버림받은 참담한 전쟁이 없는 사회를 만들 수 있는
창조적 에너지를 만드는 것으로 가져가겠다 해서 바리데기를 그린 거거든."

-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해결 전망은?
"단기간에 해결되리라고는 생각 안 해. 그렇다고 절대 포기하지 않아.
이건 일정한 연대와 조직화가 이뤄져야 한다,
완전히 사그라진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그들과 연대전선을 형성하고. 그러려면 참담한 분노보다는 넉넉한, 낙관적인 힘을 가져야 해.
문제는 우리가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로서 어떻게 낙관의지를 성취할 것인가야.
참담한 피해의식을 가지고는 연대전선도 형성이 안 되고, 절대 해결이 안 된다고.
그리고 극악한 분노는 또 다른 파시즘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동아시아, 문화의 연대전선을 펴라]

그가 동아시아 문제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건 80년대 중반부터였다.
그 때 이미 란 잡지 등을 중심으로 민중문화예술인들 사이에서
동아시아 아키타이프에 대한 논의들이 진행됐다.

"예술에서 제일 중요한 건 양식의 문제라고.
예를 들자면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감동을 주는 것은 내용은 기본이고, 그것의 양식화란 말이에요.
그 양식은 기본적으로 그 사회를 지탱해온 전통문화로부터 원용해야 한단 말이에요.
이것이 아키타이프의 문제라고. 그렇게 했을 때 보편화 과정을 갖고 다른 사람도 알아먹어. 이미 자기의 문화적 전통을 확고하게 틀어쥐고 있으면서도 다른 문화권에 있는 사람들이 다 이해를 해주는…."

그는 그와 관련 '무속'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가고 있다.
그에 따르면, 스키토시베리아의 샤머니즘 문화가 쭉 내려와 완성된 곳이 한반도라는 것.
3년 전 시베리아 샤머니즘 벨트를 직접 둘러보기도 했다.

"황해도 해주까지만 내려와도 강신굿, 내림굿인데,
동해안 별신굿의 꽃춤 같은 걸 보면 상당히 미학적으로 형상화됐거든.
이것이 진도 씻김굿으로 오면 미니멀해진다고. 형식적으로 완성된다고. 색깔이 없잖아.
하얀 수건에 하얀 옷에 하얀 창호지. 굿이 딱 완성되지."

그는 "내가 섬 출신(그는 화가 김환기와 김대중 전 대통령의 고향인 전남 신안군 하의도 출신이다)이라서
어렸을 때 그런 굿 속에서 살았으니까. 어쩔 수 없이 내 DNA에 흐르니까 (그런 그림들이) 나올 수밖에 없다"고 했다.





▲ 그는 지난해 8월 도쿄에서 열린 '안티 야스쿠니' 행사에 참가해 우익테러의 위협을 무릅쓰고 메이지공원 앞에서 그림을 그렸다.
촬영/김기

그는 또 우리의 전통문화에서 동아시아 아키타이프를 찾는 작업은
"일종의 문화적 정복논리인 '한류'와는 차원이 전혀 다르다"고 했다.

- 그럼 동아시아 아키타이프를 통해 이루려는 것은 무엇인지?
"연대지. 그런 문화가 국가적으로 장려가 될 때는 소위 국가주의에 동원된다 말이야.
국가는 절대 환경이나 평화나 문화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합니다.
반면 자생적으로 자기문화적 DNA를 원용해서 양식화한 문화들은 서로 잘 꿰진다고.
이런 문화의 연대전선, 이것이 인간의 삶의 가치를 새롭게 생성시키는 계기가 되는 것이지."

이런 '문화의 연대전선'을 위해 그는 아시아 다른 나라 작가들과 교류를 활발히 해왔다.
중국·일본·대만뿐만 아니라 캄보디아·말레시아·태국·베트남·라오스….

캄보디아·태국 작가들을 광주비엔날레에 초청하기도 했다.
이라크전쟁 때는 태국·캄보디아·스리랑카 작가들과 함께 각 나라 미국대사관 앞에서 동시에 전쟁반대 시위를 조직하기도 했다.
최근 들어 작품 활동 때문에 다소 소홀했는데, 내년부터 다시 '연대'를 복원하는 데 힘을 기울일 계획이다.

["'해방광주'는 완벽한 세상, 그 기억만으로 행복하다"]

이제 '5월 광주' 얘기를 꺼낼 때가 됐다.
그는 80년 5월 항쟁 당시 현장에서 '광주자유미술인협의회' 회원들과 함께 문화선전대로 활약했다.
그림은 못 그리고 글씨만 썼다.
포스터 만들고, 대자보 써서 붙이고 페인트로 플래카드에 구호를 적었다.
그는 "내가 하려고 해서 한 게 아니라"고 했다.

"이미 지도부는 와해돼 버렸어.
그 전날, 확대 계엄령이 내려지기 전에 이미 한번 수거를 해가버렸고, 또 전부 도망가불고. 그러니까 뉴페이스인 우리만 남은 거야.
난리통에 자전거 타고 선배들 찾아다녀도 아무도 없어요. 잡혀갔거나 도망갔거나.
근데 시위대들은 차 몰고, 시위하고, 외신기자들도 사진 찍고 하는데, 뭐가 보여야 되잖아. 우리의 정확한 구호가. 그래서 좌판을 벌였지."

당시 법원 앞에 화실이 있었다.
화실 커튼을 뜯고, 종이를 긁어모아 후배들과 구호를 적기 시작했다.

구호를 적은 건 그였지만, 구호를 정한 건 그가 아니었다.
"(내가 구호를) 만들 엄두가 안 났어. 전부 눈에 핏발이 서있어 가지고.
" 뭘 원하느냐 묻고, '김대중을 석방하라' '군부독재 물러나라' '전두환을 찢어죽이자',
부르는 대로 썼다. '지도부의 오더'를 받아 쓰기도 했다.

"그 중에서 제일 얼척없는 글씨가 어떤 거였는지 알아? 미군함이 부산항에 정박을 했대,
우리가 며칠만 버티면 우리를 구해준대, 그래서 시민들 며칠만 더 버팁시다, 대자보를 썼어, 하하하. 이게 다 미국놈들 때문에 벌어진 일 아니여?
정말 내 손목을 잘라 버리고 싶더라고, 하하. 아, 그 때만 해도, 참… 뭘 몰랐지, 하하하하."

그는 '5월 광주'를 얘기하면서 자주 큰 소리로 웃었다.



마치 즐거웠던 추억을 떠올리는 듯했다.

"광주가 좌절되고 나서 외부에 알려지긴 피바다가 됐잖아.
그러니 천주교니 개신교니 인권 보고서를 내기 위해 사람들이 광주에 온단 말이야.
그런데 남아 있는 사람이 우리밖에 없으니까 내가 손님들을 맞이했단 말이야.
그럼 사람들이 눈물이 글썽글썽해, 얼마나 고생했냐고. 우리는 재밌었는데, 하하하.

그런데, 우리를 짠하게 보고 불쌍하게 생각하는데 내가 웃을 수는 없잖아.
아주 얼굴 오만상을 찡그리고 슬픈 척하고, 그러기도 참 힘들더라고. 무슨 말인지 알겠지?"

["광주가 내게 준 교훈은 관념적 과격성을 극복하는 것"]

도저히 계속 '슬픈 척' 연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외부에서 온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들려줬다고 한다.

"나는 항쟁 10일 동안 가장 완벽한 세상을 봤다.
우리는 항쟁 10일간의 기억만으로도 아무리 힘든 일이 있더라도 평생을 행복하게 지낼 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말이 무슨 말이지 몰라."

계속 이어지는 그의 얘기.

"평상시에는 눈이 마주치면 '뭘 봐' 하고 신경질 내고 다투던 사람들이
항쟁 10일 동안은 눈만 마주쳐도 그렇게 반가웠어.
서로 '당신 동네 어디서 사요, 거긴 괜찮소' 물어보고, 서로 걱정하고.
사재기 같은 거 없었어. 길거리에 과자, 빵들이 굴러다녔어.
시민군들에게 과자, 빵들을 던져주니까 그걸 먹겠어, 긴장돼 있는데, 총을 들고 있는데,
오늘 저녁 내일 저녁 (계엄군이) 밀고 들어오느냐 그런 판에.
그러니까 과자 같은 거 애들 골목길에 모여 있으면 던져주는 거야.
서로가 서로를 걱정해. 서로 질서를 지키자고 해."




▲ 대동세상 목판화

시민의 뜻으로 동사무소도 다시 열고, 초등학교도 다시 열고, 도청 앞에서 시민의 손으로 시장을 뽑을 계획도 세웠다.
그런 점에서 '해방 광주'는 '코뮌'이었다.
그는 거기서 대동세상을 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경험한 대동세상을 판화로 새겼다.

"글로 백날 써놓아 봐야 사람들이 몰라. 읽은 사람만 알아.
그런데 광주를 경험하지 않은 애들이 5월을 그리는 걸 보면
시민군들이 총 들고 분노에 찬 모습만 그린다고. 현장을 못 봤기 때문에.

내 5월 판화를 보면 그렇게 관념적인 과격성이 있는 판화가 없어.
쭉 물처럼 흘러가. 세상이여, 세상, 똑같은 세상.
5월을 겪고 나서 리얼리즘 화가인 나에게 가장 중요하게 단초를 던져줬던 게 뭐냐면
관념적 과격성을 극복하는 거야."

그러면서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게 있다"고 했다.

"총 들고 죽창 들고 어쩌고 하는 판화를 보면 다른 사람 판화인데
전부 내 판화로 생각한다는 거지, 하하. 실제 내 5월 판화를 보면 총 든 판화가 별로 없어. 한두 점에 불과해.
그런데 사람들은, 젊은 애들이 그려놓은 기타 등등의 판화들을 홍성담의 것으로 착각해."

그럴 만도 했다. 그는 감옥가기 전까지 무려 350점의 판화를 제작했다.
그 가운데 5월에 관한 작품은 50점이 넘었다.
그의 '5월 판화' 연작은 '전투적 신명'이 살아있는 작품으로 국내외에서 많은 호응을 얻었고,
전작이 국립현대미술관과 서울시립미술관에 전시돼 있다.

[광주의 명예, 광주의 멍에]

- 항쟁에 직접 참여했음에도 이후 5월 관련 단체들의 활동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걸로 아는데?
"난 처음부터 비판적이었어, 하하. 예술가란 게 원래 권력욕이 없잖아.
예술가는 개인 자체가 하나의 정부고, 하나의 권력이기 때문에.
광주가 하나의 운동 권력이 되니까, 선배들, 정치하고 싶은 선배들이 자꾸 혀를 댄단 말이야.
그러면서 광주운동이 변질되고,
좋은 의미가 아니라 나쁜 의미로 분화되고, 분파가 생기고, 계보가 생기고.

감옥 나오고 나서 한 3년 정도 노력했어. 뭔가 새로운 광주운동으로 진입해야 되겠다.
그런데 감옥 나와 보니까 이미 전부 대장급이 돼 가지고 내 말들을 안 들어.
그래 도저히… 내가 광주에 더 이상 있으면 있는 권력이나 탐하고 있겠다 싶어.

토호예술가가 되면 그 권력이 만만치가 않아.
예술가가 그런 걸 향유하고 있으면 타락한다고. 예술이 타락하면 아주 심각해져.
문화는 그 사회를 대표하는 상징적 도구이기 때문에 예술이 타락하면 아무도 그걸 고칠 수 없다고.
그래서 광주의 기득권을 모두 버렸지. 그러고 떠나자고 하고 간 게 서울로…."

그에게는 광주의 명예가 점점 멍에로 느껴졌다.
95년 '넋 올리기'란 작품을 통해 광주와 자신을 위한 '씻김굿'을 치렀다.
그리고 97년 광주를 떠나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 상계동, 일산을 거쳐 결혼을 하며 이곳 안산으로 왔다.

- 대선을 앞두고 정치인들, 특히 범여권 후보들은 광주표심 잡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그건 좀 우스운 일이야. 노무현 대통령이 됐던 큰 계기점이 광주 경선이었는데,
그것은 정권을 계속 잡겠다는 광주시민들의 권력욕이 그런 정치적 판단을 하게 만든 거야. 정말 사람들이 더불어 살 수 있는 멋진 미래를 만들어내겠다고 그렇게 한 건 아니라고.
나쁘다는 건 아니야. 그 정치적 판단이 그 당시엔 유효했지. 아주 좋았어.
노무현을 선택한 건 아주 잘한 거야.
그렇지만 이미 노무현을 정치적으로 한 번 선택함으로써 그 선택권이 이젠 광주시민들한테 없어.
그걸 자꾸 언론이 기삿거리로 쓰는 건 광주시민들한테도 별로 좋지 않아.
지금은 광주시민보다는, 오히려 정확하게 보자면
DJ 권력이 정치적으로 훨씬 세지. 그 말 한 마디에… 하하하."

- 광주항쟁 이후 27년이 흘렀는데, 여전히 발전시켜야 할 광주의 정신·가치는 무엇인지?
"광주는 첫째, 자기에게 주어진 문제를 절대 피하지 않았어. 그것을 가슴으로 받았다고.
둘째, 그렇게 주어진 문제를 가슴으로 맞받아 안을 때 이념이 생겨.
이념이란 책에 씌어있는 것이 아니야. 자연발생적으로 현장에서 생성되지.
그것이 바로 공동체정신이야.
셋째, 그렇기에 이제 어떤 참담한 패배에서도 다시 힘을 소생시켜낼 수 있어.
이것이 광주정신인 것 같아.
이 얼개를 논리적으로 잘 규명하면 광주가 우리에게 주는 새로운 이념이 창조될 것 같은데 그건 글쟁이들이, 학자들이 할 일이고."

["민족과 조국은 배반할 수 있어도 친구는 배반할 수 없다"]





▲ 민족해방운동사 걸개그림 '민족해방운동사' 중에서 광주항쟁 부분 / 1989

그에게 '5월화가'에 이어 '통일화가'란 수식어가 붙게 된 결정적 계기는
'민족해방운동사' 그림 사건.

그는 1989년 당시 준비위 상태였던 '민족민중미술운동전국연합' 후배들과 함께,
11폭에 나눠 갑오농민전쟁부터 통일운동까지 '민족해방운동사'를 그렸다.
70여명의 화가가 작업에 참여한, 길이만도 77m에 이르는 대형 걸개그림이었다.

그는 그 슬라이드 필름을 미국 교포단을 통해 북한 평양청년학생축전에 보냈다.
'이 그림은 남쪽 청년학생들이 그린 반쪽의 근현대사이니
북쪽에서 나머지 짝을 그려 완성하기를 바란다'는 내용을 담은 그의 편지와 함께.

그 때문에 그는 그해 7월 31일 광주에서 안기부 수사관들에게 연행, 체포됐다.
'간첩' 혐의였다.
그리고 변호사 접견도 금지당한 채 안기부에서 수사를 받았다.
완전히 발가벗긴 상태에서 고문·취조·또 고문이 25일간 계속됐다.
당시 안기부 수사관에게 "민족과 조국은 배반할 수 있어도 친구는 배반할 수 없다"며 버틴 그의 일화는 '전설'이 됐다.

그는 대법원에서 간첩죄 혐의에 대해선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이적표현물 제작ㆍ반포 혐의에 대해선 유죄가 확정됐다.
그리고 독방에서 3년 4개월을 지낸 뒤 다시 세상으로 나왔다.
한동안 밥만 삼키면 토하고, 밤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또 섬 출신인 그가 물고문의 기억으로 물만 봐도 두려운 지경이 됐다.

그러나 그는 피하지 않았다. 광주에서 그랬듯이 가슴으로 받아 안았다.
그림으로 상처를 치유해나갔다.
그에게 고문과 옥중 체험은 새로운 작품의 자양분이기도 했다.
'식구통' 연작과 '물속에서 스무날' 연작을 통해
옥중체험과 물고문은 '밥'과 '물', 생명의 근원으로 다시 태어났다.

- 이제 마음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됐는지?
"겉으로는 좀 해결된 것 같은데, 그래도 어느 때 그 생각이 나면 지금도 분노가 일지.
속일 수가 없드만."

- '밥' '물' 연작을 그리면서 어느 정도 풀리지 않았나?
"많이 해소는 했어. 정신적 궁핍함은 벗어나고 그랬는데. 어떨 때, 특히,
국가보안법 문제라든가, 이시우 같은 친구들이 국가보안법으로 잡혀가든지 하면 아, 분노가! …사람이 정말 절망적이 돼.
그래서 이놈들이 절망시키려고 그러나 봐, 하나씩 하나씩 사람을…, 하하하, 약으로,
하하하. 이시우 때도 이가 갈리더라고."

['통일화가'의 북한체제 비판]

그는 지난 6월 남북 6·15 공동선언 기념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평양을 다녀왔다.
그 곳에서 북한 문화예술인들을 만나 '민족해방운동사' 슬라이드를 평양에 보냈을 당시 사정도 들을 수 있었다.

"처음에 만수대창작단 지도부에선 우리 그림을 보고 '주체미학과 틀리다, 그릴 수 없다'고 했대.
자기들로 볼 때는 우리 쪽 저항미술, 민중미술도 남쪽의 사상이니까.
청년들은 '그래도 그려야 한다'고 했고. 3, 4일을 내부에서 격렬한 논쟁이 붙었대.
그런데 그때 임수경 패션이 유행이었잖아, 하하. 그래서 젊은 애들이 이긴 거야.
한 50명이 달라붙어 3일 만에 그걸 그렸대.
4개 대도시 순회전을 했고, 지금은 인민군미술관에 소장돼 있다네."

평양을 다녀온 뒤 그 느낌을 이번엔 '평양소견'이란 연작으로 그렸다.
남과 북이 다르기도 하지만 '같기도' 하다는 사실을 짚어내고 있다.




▲ 물 속에서 스무날 연작 중에서 / 캔버스에 혼합재료 / 65 x 53 cm / 1999

- 남북이 정말 같기도 하다고 느끼나?
"같지. 거기는 소위 수령체제의 병영집체사회라고 한다면,
세상에 어디 그런 국가가 있어, 그건 국가가 아니야 감옥이지.
우리나라는 이식된 천박한 자본주의에 의해서 배금주의로 가득 찬 사회지.
여기는 돈이 정점이고, 거기는 수령이 정점이지. 둘 다 인간성이 상실된 사회지.
그 점에선 형제간이 똑같아, 하하. 어떻게 그렇게 똑같을 수가, 하하하."

- '민족해방운동사'를 보낼 때에 비해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진 건 아닌지?
"절대 달라진 게 아니고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어.
나는 북한에 대해서, 1987년 이후 한창 통일운동 일어날 때도 굉장히 비판적인 입장이었어.
단지, 그들이 이 국제정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안쓰럽게 노력하는 게 안타깝지.

북한의 주체사상이라든가, 이런 거엔 절대 찬동 안 해.
주체이론 그림을 보면서도 아주 흥분했어, 성질이 나서. 어디 이게 그림이냐.
새마을 그림이지. 체제 선전이지. 예술가가 할 짓이 못된다. 그
래서 (운동권) 내부에선 마치 그림에 있어서 주사파의 대표격인 사람으로 돼있는 내가
그런 비판을 하니까, 후배들이 그걸 봉합을 하느라고 참 애터졌어."

- 북한체제에 대해 거침없는 표현을 그대로 실어도 될지? 다시는 평양 못 가는 거 아닌지?
"난, 상관없어. 안 가도 뻔히 다 알고, 가봐도 모르고 그러는 건데.
자기들이 보여주는 것만 보는데 내가 어떻게 아노.
중요한 건 철로도 터지고 도로도 터지고 그랬으니까, 사람들이 지신을 많이 밟아야 돼.
분단에 멍울져 있는 악귀들도 자꾸 밟아대면 사라지고….
지들도 우리 쪽의 좋은 모습만 닮아가야 돼.
그런데 사람들은 꼭 나쁜 모습만 닮거든…."

- 그럼 지금 시기 예술가들은 통일문제에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풍경화나 그런 것 거둬 와서 합동전이나 하고 이것도 별 의미가 없고.
레지던스 프로그램으로 북한 화가들 데려와서 여기서 한 3~4개월 그림을 그리라는 것도
북한이 OK할 리도 없고.
또 지금 이런 자본주의의 천박한 미술류들이 북한에 들어가 봐야 북한에 좋을 일이 하나도 없고.
어쨌든, 북한은 살아남아야 되니까. 그래야 우리한테 편하니까. 저게 깨지면 어떻게 하노.
그 체제는 경제만 어느 정도 살릴 수 있다면 존속시키는 게 중요해.
수령 중심의 체제가 아니고 인민 중심의 체제를 어떻게 형성시켜내느냐가 문제지.
예술가는 다른 건 필요 없어. 지들 그림 열심히 그리라 하고 물감도 좀 보내주고,
캔버스 천도 좀 보내주고, 그런 정도 교류 폭 외에는 없어요.
냉정하게 생각하면 그렇단 말이에요. 괜히 둥둥 뜰 필요가 없지."

["나는 판화를 하면서도 칼질하기 싫었어"]

그는 80·90년대 민중미술진영의 대표적인 화가이자 운동가였다.
항쟁 이후 광주 지역에 시민미술학교를 열어 새로운 대중미술 교육방법을 실천하면서
판화·걸개·깃발·벽보 등을 가리지 않고 현장 중심의 작품활동을 해왔다.
그리고 또 조직가로서 민족민중미술운동전국연합(민미련) 등의 결성에 적극 참여했고,
옥중에서 민미련 공동의장에 추대되기도 했다.
그런데 그는 출옥 이후 오히려 민미련 조직의 해체를 주장했다. 왜?

"감옥에서 나와 지역조직을 둘러보니까 전부 권력이 돼 있어.
그림도 열심히 안 그리고. 아, 이래선 안 되겠다, 1년 유예를 준다,
그 동안 작품도 열심히 하고 각 지역별로 전시회도 좀 하고 해라. 1년을 기다렸지,
그런데 안 해. 전부 어른 노릇만 해. 예술가들이 권력이 되는 그 꼴은 정말 못 보겠어.
그래 과감하게 해체 수순을 밟았지. 정말 우리 총회장이 각목 대회장이 됐어.
일부에선 담이 형을 납치해 놓더라도 해체 못 하게 한다, 그래 '웃기네 자식들' 하고, 하하하. 목포에서 깡패들 한 트럭 댔고 왔지. 지켜라. 하하하."

어쨌든 민미련은 94년 1월 해체됐다. 그런데 그가 다소 뜬금없는 얘기를 털어놨다.

"나는 감옥 가기 전까지는 화가가 되려는 생각이 별로 없었거든.
나는 그림 그리는 것 싫어했어요. 탈춤이나 추고 학생운동 한다고 왔다 갔다 하고.
그리고 원래 서양미술이 전공인데, 판화가도 아니지. 광주를 알릴 방법이 없으니까,
내가 경험한 것들을 하나씩 둘씩 파서 인권단체를 통해서 외국에도 보내고.
전시회 하면서 광주 알리고 그림 팔아서 기금으로 오고. 그것 때문에 판화를 했지.
현실이 요구하니까.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라.
아유, 판화하면서도 아주 하기 싫었어. 칼질을 하는 게 좋은 게 아니더라고, 하하."

계속 이어지는 그의 고백.

"그런데 사람들이 내가 잡혀가니까,
독일이나 영국이나 일본이나 미국 같은 데서 구명운동을 해야 하는데
앞에 화가라는 소리를 붙여야 더 잘 되겠잖아. 예술가를 잡아가다니, 그러고.
그래서 자꾸 화가란 소리를 붙였나 봐. 그래서 나와 보니까 내가 화가가 되어있어.
완전히 곶감 귀신 이야기지, 하하하."

실제 그의 구속 이후 독일 영국 미국 등지에서 그의 석방을 요구하는 판화전이 열렸다.
또 1990년 국제 앰네스티본부에선 그를 탄압받는 예술가 3명 중 한 명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 정말 출옥 이전엔 직업화가로서 자의식이 없었나?
"전혀 없었지. 그러니까 서양화가가 판화 하고, 걸개그림 그리고, 또 연극 한다면서 연극 대본 쓰고 연출하고.
그런데 나와서 보니까 화가가 되어 있어. 소도둑놈이 신령님이 돼 있는 거지.
내가 화가가 안 되면 큰일 나게 생겼어. 내가 화가가 못 되면 석방운동해준 사람들은 얼마나 얼척 없겠어. 그것도 외국에서까지.

거기다가 제도권 화가들이 민중미술 공격할 때 그림 못 그리니까 민중미술 한다, 요런 소리를 했잖아. 즈그들도 못 그리면서.
그러니까 민중미술 1세대로서 책임감과 부담감이 엄청나게 가.
내가 화가 안 되면 여러 사람 죽이게 생겼더라고. 그래서 감옥 나와서 그림을 열심히 그리기 시작했지.
그때부터 내가 화가가 돼야겠다 생각했지. 그 전엔 그림을 도구 정도로밖에 생각 못했어요."

1999년 서울에서 연 개인전 '탈옥'에 부쳐 미술평론가 윤범모는
"홍성담의 근작을 보고 필자는 민중미술의 새로운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이제 우리는 운동가 홍성담에서 화가 홍성담을 기대해도 좋다"고 썼다.

["붓은 칼"]

- 그럼 화가가 된 지금 그림은 어떤 존재인지?
"남이 관심갖고 있는 거 똑같이 하면 아무 필요도 없재.
남이 관심 갖기 싫어하고, 남들이 주저주저하는 곳을 내가 들어가야지.



그것이 우리 시대 리얼리즘 예술가로서 몫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여전히 붓은 칼이다,
인간의 행복과 평화를 위협하는 곳에 과감하게 칼질을 하는 도구다,
예술은 그 다음이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래서 내 평생에 해야 할 일이 뭐냐 물어보면, 국가폭력과 싸우는 것이라고 얘기해.
박정희의 철권통치를 젊은 시절에 겪어냈고, 현장에서 5·18을 겪었고,
또 감옥 가서 두드려 맞고, 수없이 많이 그런 동료를 봐 왔고,
그래서 이 국가폭력이라는 게 얼마나 인간을 파괴하고 무서운 것인가를 잘 알거든.
그것이 예술이 아니라도 좋다는 거지.
누군가 국가폭력과 싸우는 도구로 그림을 선택했냐고 물으면 난 맞다고 그래.
그럼 예술이 도구지. 인간 외에는 살아 있지 않은 모든 것은 다 도구지."

- 직업이 화가는 맞나?
"그렇지, 화가 맞지."

- 그럼 속된 말로 그림으로 '밥벌이'가 된다는 얘긴가?
"그게 밥벌이가 돼. 좀 중견이 돼 놓으니까 가끔 화랑 같은 데 내 그림을 사러 오는 사람들이 있는가 봐.
또 개인적으로도 판화 같은 거 (사겠다는) 연락이 오고. 그래서 겨우겨우 먹고 살지, 하하. 또 큰 컬렉터들은 그림 사가면 큰 그림들을 사가잖아. 몫돈이 들어오기도 하고.
그런데 최소한의 먹고 사는 것 외에는 안 팔아.
예술가는 돈 많이 있으면 그것 쓰느라고 정신 모자르는 짓거리 하니까."

기왕 내친김에 '신정아 파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그는 "그런 큐레이터가 어디 한두 명이겠냐, 쎄고 쎘지"라고 했다.
그리고는 세 가지 문제점을 지적했다.
첫째, 재벌들이 운영하는 사설 미술관에 전문성이 전혀 작동하지 않고 있다.
둘째, 화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팔기 위해 큐레이터를 '괴물'로 만들어놓았다.
그리고 셋째 우리나라 현대미술의 취약성을 들었다.

"모더니즘도 그렇고 우리 현대미술은 본류인 정신은 빼먹고 양식만, 형식만 가져왔지.
작가든 큐레이터든 모두 모르는 거야. 아무거나 덧칠해 놓으면 돼. 얼마나 웃겨.
니도 모르고 나도 모르고, 하늘도 모르고 땅도 모르는,
그러니까 대충 포장하면 현대미술이 되는.
그러나 젊은 화가들 가운데선 바람직한 모습들도 있어요.
한국의 전통적인 사상 속에서 아키타이프를 찾아내고,
그걸 미니멀하게 현대미술에 접근시켜서 보여주는 영리한 애들도 많이 생겼재."

['21세기 풍속화가' 홍성담]

그는 현재 몇 가지 평생 작업을 생각하고 있다.
하나는 앞서 얘기한 동아시아의 아키타이프를 찾는 것과 함께 국가폭력의 문제에 그림으로 끝까지 맞서 싸우는 일이다.
특히, 동아시아 다른 나라들의 국가폭력 문제에도 좀 더 관심을 기울이려 한다.
그는 그것을 "80년대 민중미술운동 경험을 수출하는 것"이라고 불렀다.

"어차피 우리가 같은 경제공동체로 갈 건데,
각 나라의 국가폭력 문제가 좋아지지 않으면 항상 이용당하거든.
우리 한국한테 일본한테 중국한테 잘 사는 나라한테 이용당한다고. 우리가 그랬잖아.
내가 광주 오월을 경험하면서도 그랬고, 감옥에 있으면서도 그랬고,
인권 선진국, 선진국이란 말이 ×같은 말인데, 어쨌든 그런 나라 사람들 도움을 많이 받았잖아.
지금은 내가 그런데 좀 도움을 줘야 될 것 같아.
그래서 스리랑카·캄보디아·라오스… 네트워크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야스쿠니 전시가 첫 출발이 되겠지."

또 하나는 자신이 현재 살고 있는 안산 지역의 문제를 그림에 담아보고 싶다고 했다.

"우리나라 여러 가지 질곡들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곳이 안산이야.
안산을 보면, 천박한 자본주의의 농축된 모습이 보인단 말이야.
대부분 지방에서 서울로 바로 가기 힘드니까, 안산으로 몰려온다고.
여기서 조금 돈 벌고 성공하면 금방 떠. 안산에선 안 살아. 그래서 안산인가 봐, 하하.

그리고 안산은 우리나라 최고의 국제도시야.
우리나라는 영어공부는 그렇게 열심히 하면서 외국인에 대한 배타성이 강하다고.
그래 가지고 자기들 말처럼 세계화가 되겠어? 아주 위험해.
안산은 그나마 피부색깔 다르고 말도 다른 사람들과 섞여 살아가는 방법을 알아가고 있다고.
이주노동자들을 위해 스리랑카어 태국어로 간판을 단 곳은 아마 안산밖에 없을 걸.

다음에 시화호라는 문제가 딱 버티고 있어. 실패를 하든 성공을 하든 핵이야.
이걸 시민들이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전혀 모양이 달라질 거라 말이야.
어쨌든, 안산에는 새로운 문화를 태동시킬 수 있는 단초가 무한하게 잠재돼 있다고."

그가 안산에 애착을 갖고 있는 이유가 또 하나 있다.
그의 화실이 있는 곳은 안산시 단원구.
18세기 풍속화가 김홍도의 고향으로, 그의 호(檀園)를 따서 구 이름을 지었다.
그는 단원을 "우리나라 통틀어서 내가 가장 존경하는 화가"라고 했다.
민중미술 할 때도 단원의 영향이 컸다.




"내 스승이 살던 고장으로 왔고, 단원의 풍속화의 배경이 바로 여기 안산이고.
그래서 김홍도의 눈과는 다른, 300년 후의 김홍도 후배가 안산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재밌는 거 아니겠어. 해서 21세기 풍속화를, 재밌을 거 같아, 하하하."

'21세기 풍속화가' 홍성담? 그는 21세기를 앞둔 어느 시점, 이런 글을 썼다.
광주에서 통일로, 또 밥과 물의 해원(解冤)을 통해 동아시아로…
그의 붓이, 칼이 계속 빛을 뿜어내기를 기대한다.

"생명 앞에서 연민하는 것이야말로 거룩한 정신이다.
타자와 고통을 함께 나누고, 느낌을 함께한다는 뜻을 갖는 말인 '연민'은 사랑의 궁극적인 표현이며
그 사랑을 지키기 위한 분노와 증오의 광범위한 영역이기도 하다.
물론 이기주의적인 인간형인 예술가들에게 서로의 고통과 아픔을 나눈다는 것은 번거로운 일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인간성을 고립, 차단시켜 그 속에서 죽게 하는 것보다는
고통을 나누면서 인간성을 확장시켜 나가는 것이
생명을 창조하는 예술가의 또다른 역할이기도 하다.
우리들, 적극적으로 '연민'하지 않고는 다가오는 21세기도 역시 핏빛에 잠겼던 20세기의 반복일 수밖에 없다."
('인권-저항과 명상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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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인터뷰] 그는 '5월 광주'를 얘기하며 크게 웃었다 -천호영의 문화초대석/오마이뉴스
이름: damibox


등록일: 2007-11-16 09:48
조회수: 2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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