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담의 그림창고



[“과거를 향한 칼날이 부족하다”]

안산으로 가는 길. 바쁜 일정을 사이에 두고 약속을 정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문제를 좀 더 냉정하게 추려보아도 마감을 앞두고 시간 조절이 힘든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그와 함께 막걸리라도 한 잔 하면서
지난 일이며, 궁금했던 운동권 ‘야사’에 대해 듣고 싶었지만 이날은 그른 것 같아 찜찜했다.
하지만 이번 안산행은 어딘지 모르게 모험적인 일면이 있어 기운이 솟았다. 믿음직스러운 사상과 투지를 가졌던 그와의 만남을
즐기려는 생각만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밤이나 낮이나 꽉 찬 가슴으로 혁명을 위해 청춘을 바친 ‘조직 활동가’였고,
이제는 ‘화가’로 민중미술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고 있다. 그는 기자를 보자마자 “말지에 애정이 있다”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
“예전에 말지 김태홍 선배가 보도지침 사건으로 잠수함 탈 때 연락이 와 마포에 있는 여관에서 만났다.
그 때 디자인 하는 친구를 데려 와서 ‘말지가 새롭게 변해야한다’, ‘운동권 찌라시 수준이라서 바꿔야 한다’고 해서
도움을 준 적이 있다. 때로는 형식이 내용을 지배하기도 한다.”

'핏물로 지은 밥'

경기도 안산 원당마을.
홍성담(53) 화백의 작업실은 종이 뭉치와 물감 그릇, 갖가지 미술도구들로 어지럽혀 있었다.
과장하자면 발 딛을 틈도 없이 뭔가가 잔뜩 있어 가까스로 앉을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띤 것은 더럽고 낡은 스피커들.
음악을 꽤 좋아하지 않으면 작업실 내부에 쌓아놓기조차 부담스러운 물건이었다.
기자가 음악에 관심을 보이자 그는 “장르 가리지 않고 음악은 다 좋아한다”며 웃어버렸다.
더 이상 묻지 않았지만 그는 음악을 무척 좋아하거나 조예가 깊은 사람 중 하나였다.
홍 화백은 아주 달고 맛난 그림으로 시를 짓고 이야기한다. 화제와 흥미를 넘어 날카롭고 섬세한 사회성을 모두 품는다.
경탄과 경멸이 뒤섞여 있는 현실에 몸을 담근 채 느끼고 보았던 일들을 기록한다. 하지만 홍 화백이 정식으로 화가가 된지는
몇 년 되지 않았다. 故 윤한봉 선생과의 만남 때문이었다. 사람의 인생이 바뀌는 것은 다양한 형태와 경로가 있다.
거대한 바위가 산산조각 나듯이 단번에 바뀌기도 하고, 쉬지 않고 떨어지는 물방울에 바위가 구멍이 뚫리듯 서서히
변해가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이 두가지를 모두 겪었다.
대학시절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조금씩 의식화되다 투절한 운동가를 만나 애벌레가 껍질을 벗듯 과감한 탈피를 했다.
그는 1977년 미술대학을 졸업한 뒤 결핵을 앓고 무안에 있는 요양소에 들어갔다.
여기에서 그는 민청학련 사건과 긴급조치 위반으로 지명수배 받던 윤한봉·김남주씨를 만나
사회변혁 운동에 복무하는 문화운동가가 됐다.
이후 요양원에서 나온 그는 백은일·최열·박광수씨 등과 함께 ‘광주자유미술인협회’를 결성했다.
이 협회는 독재정권에 반발로 태동한 전국 최초의 민중예술단체였으며, 민중문화운동의 전국화에 크게 기여했다.
그리고 그는 5·18 때 ‘문화선전대’ 로 활동했다. 홍 화백을 설명하자면 ‘5월 광주’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광주항쟁 당시 현장에서 대자보를 써서 붙이고, 플랜카드에 구호를 적었다. 난리가 벌어진 광주에는 시민들이 시위를 하고,
외신기자들이 사진을 찍었다. 그러나 광주 시민들의 목소리를 전달할 수 있는 선전물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는 광주항쟁에서 “가장 완벽한 세상을 봤다”고 말했다. 그 10일 동안의 기억만으로도 평생 행복하게 지낼 수 있다는 것.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얘기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광주에서 태어난 기자는 그가 무엇을 이야기하는 지 잘 알고 있다.
기자는 아버지를 따라서 도청 앞으로 갔었다. 태극기에 덮여 있는 사람들과 총을 든 청년들.
부족했지만 어머니도 주먹밥을 만들어 나눠줬다. 대문을 열어놓고 살았던 터라 군인들에게 쫓긴 시민들이
우리 집으로 많이 들어왔다. 보일러가 있던 지하실로, 방으로 들어와 숨으면 아버지는 대문을 닫았다.
이것이 광주의 아버지와 어머니였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총소리가 들리던 날. 서로 걱정하고, 진정으로 같이 울어주던 마음이
광주에 있었다. 그의 ‘밥’ 시리즈의 탄생도 광주항쟁의 잊지 못할 기억 때문이다. 첫 발포가 있던 5월 21일 오전 10시.
금남로가 시위대로 발 딛을 틈 없이 꽉 차있던 날, 연발 사격 소리가 짧은 간격으로 들려왔다. 매우 작은 소리였다.
사람들은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도 광주은행 구 본점이 있던 골목에서 시민들과 함께 숨었다.
거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총 맞은 사람이 있어 두 사람이 낮은 포복으로 데려왔는데,
배에서 피가 콸콸 솟아지고 창자가 함께 끌려왔다. 그는 죽은 이의 몸에서 뭔가 반짝이는 물체를 발견했다.
삭지 않은 보리알이었다. 그는 “아침에 어머니가 해 준 밥을 먹고 그래도 민주화를 만들겠다고 나왔다 분절”한 것을 보고
광주항쟁을 떠올리면 그 보리 밥알만 생각났다.
이날 그는 너무 무서워 뒤돌아 집으로 향하면서 “저 보리 밥알을 심고, 저 시신이 거름이 돼 훌륭한 보리를 키워
황금 들녘을 이루고, 그걸 먹고 우리 후세들이 5월의 진실을 전국화 해야 한다”고 맹세했다.
그리고 그는 “그 보리밥알 하나에 절대 고독하면서도 절대 함께 해야만 하는 인간의 존엄성, 그 생명의 사슬이 끊임없이
순환된다는 것, 죽는 것도 살아있는 것도 없으며, 오직 살아서 우리 안에 떠돈다는 것”을 느끼고 ‘밥’ 시리즈를 완성했다.
일반인들은 홍성담 화백의 밥을 김지하 시인의 밥으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그의 밥은 절대 절명의 그 순간, 피로 지어진 밥이다.
그는 ‘5월 화가’로도 불린다. 감옥에 가기 전에 제작했던 ‘5월 판화’연작은 사람들의 뇌리에 깊게 각인돼 있다.
이 작품들은 모두 국립현대미술관과 서울시립미술관에 전시돼 있다. 게다가 그는 ‘통일화가’라는 수식어도 붙어있다.
바로 ‘민족해방운사’ 걸개그림 때문이다. 그는 1989년 ‘민족민중미술운동전국연합’ 후배들과 함께
갑오농민전쟁부터 통일운동까지 ‘민족해방운동사’를 그렸다. 길이가 77m에 이르는 대형 걸개그림이었다.
그는 이 그림의 슬라이드 필름을 미국 교포단을 통해 북한 평양청년학생축전에 보냈다.
‘이 그림은 남쪽 청년학생들이 그린 반쪽의 근현대사이니 북쪽에서 나머지 짝을 그려 완성하기를 바란다’는 편지도 함께 써넣었다.
이 때문에 그는 그해 7월 31일 간첩 협의로 안기부에 끌려가 알몸으로 고문을 당했다. 무려 25일 동안이었다.
몇 번이나 “이젠 내가 죽는 구나”생각하는 순간 다시 살아났고, 계속 고문을 당했다.
그가 고문을 받으면서 “민족과 조국은 배반할 수 있어도 친구는 배반할 수 없다”고 버틴 일화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전설이 됐다. 지금까지 조국의 이름으로, 민족의 이름으로 고문을 참고 견디는 사람은 있었지만
친구의 이름으로 고문을 참고 견디는 사람은 처음이었다.그는 대법원에서 간첩죄에서는 벗어났지만
이적표현물 제작·반포 혐의로 독방에서 3년 4개월을 지냈다. 출감 후 수개월 동안 밥도 삼키지 못하는 위장병에 시달렸고,
밤마다 찾아오는 불면증 때문에 두 눈을 부릅떠야 했다. 또 섬 출신이지만 물고문의 기억으로 물만 봐도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정면으로 돌파했다. 그러한 산고 끝에 ‘물속에서 스무날’ 연작과 ‘식구통’ 연작은 탄생했다. 기자는 끔직한 고문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던 이 작품들을 광주비엔날레에서 직접 봤다. 참으로 힘겨운 그림이었다.





'야스쿠니의 미망'

하얗게 빈 캔버스는 화가의 도전장이다. 영혼 속에 창조 본능이 깊이 박혀있지 않으면 선 하나 긋기 무서운 게 ‘하얀 캔버스’다.
그림을 그리는 기술은 배우고 노력하면 얼마만큼 극복할 수 있다. 입시미술도 외워서 그리는 도식이 상당 부분 존재한다.
하지만 진정한 정열이 담긴 그림은 그리는 이의 마음에 좌우된다. 뭔가 강하고 압도된 힘이 이끌어주지 않으면
그 길을 걷기 힘들다. 이는 그림이 단순한 재주가 아니라 삶의 자세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세상이 뭐래도 겁날 것 없고,
세상의 관습과 평판에도 개의치 않으면서 자신의 신념을 표현할 수 있으면 된다. 그래서 예술가는 탄생한다.
홍성담 화백은 작년부터 ‘야스쿠니’에 관한 그림을 그려왔다.
그동안 책으로는 꾸준하게 발표됐지만 아직까지 야스쿠니 문제를 다룬 그림이 없어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가 야스쿠니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동아시아 근현대사에서 가장 험난한 역사를 가진 곳이 한국과 대만, 오키나와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다.
모두 일본의 식민지였고 미국과 불가분의 관계였다는 것. 그는 동아시아에서 불안한 상황의 전개는 미국보다 일본의 재무장이라고 판단했고,
그 씨앗이 야스쿠니에 있다고 확신했다. 야스쿠니는 위폐를 봉안한 것에 머무르지 않고 메이지 시대부터 일본의 정권을 위해
싸우다 죽은 군인들을 군신으로 모시는 하나의 종교라는 이유다. 그의 불안은 마치 예언처럼 점점 현실화되고 있다.
얼마 전 일본은 중학교 사회과 새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 독도 영유권 명기하는 본색을 드러냈다.
머지않아 일본의 아이들은 독도를 일본의 보호령, 아니 영토로 색칠하면서 지리를 배우게 될지도 모른다.
그 깊은 뿌리에는 야스쿠니가 있다. 제국주의는 제국의 주먹과 힘만 믿는다.
식민의 나라에서 생산되는 노동력과 재화를 겁탈하기 위해 무력을 동원하고, 마음대로 다스릴 수 없다고 판단이 들면
협약 대신 최후의 통첩을 읽어 내려가는 게 제국이다. 일본 정부가 야스쿠니의 역사를 아로 새기는 한 제국의 야욕은
현재진행중일 것이다.
“이제 딱 한 점 남았다. 호텔에서 부탁한 그림이 있어서 중간에 잠시 중지 했었다.
처음 야스쿠니 그림을 준비한 것은 5년 전부터다. 작업을 위해 일본의 근현대사와 문화 관련한 책만 100권 넘게 읽었다.
신도(신사)문화의 준 전문가가 됐다. 예술가로서 감성적으로 접근하지 못하고 분석을 한 거다. 이게 내 성격이다.
신사에는 20번도 넘게 갔다. 일본인의 정신 구조는 천황제를 중심으로한 전근대성을 벗어나지 못했다. 야스쿠니로 상징되는
과거사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아서다. 일본인들은 언젠가 군국주의가 되살아나면 전쟁터로 나갈 사람들이다.
”그는 작년 11월에 도쿄 마키갤러리에서 ‘야스쿠니의 미망’이라는 제목으로 한 달 간 전시했다. 이 기간 동안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유엔본부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8월 4일에는 중국, 한국, 대만,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들이 참가하는 ‘안티야스쿠니공동행동’ 대회가 일본에서 도쿄교육회관 열리는데,
이 건물 1층에 있는 갤러리에서 그의 작품이 일주일동안 전시될 예정이다. 오는 8월 15일에는 제주도 스페이스씨에서 전시가 열린다.
향후 3~4년 동안 일본의 대동아전쟁 침략 피해국인 필리핀, 베트남, 인도네시아, 오키나와 등에서 순회전시를 가질 계획이다.
그의 그림은 전부 ‘두루마리’다. 프레임(액자)을 만들면 여러모로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돌돌 말아 운반한다.
이 과정에서 그림이 손상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다는 반응이다. 더없이 가볍고 소박한 성품이다.
그는 야스쿠니 그림에 앞서 일본군 종군 위한부에 대한 그림을 그렸다.
90년대 중반, 도쿄에서 열린 종군위안부 민간법정에 우연히 참석했다 태국 종군위안부 할머니를 만나면서 구체화 됐다.

'그래도 희망입니다'

홍성담 화백이 그림을 그리고 문규현 신부가 글을 쓴 책이 나왔다. ‘그래도 희망입니다’이다.
어디에서 많이 듣던 제목이라고 생각했는데, 1980년대 노동자 노래단이 불렀던 노래 ‘참사랑’의 가사 중 ‘노동의 꿈과 희망입니다’와 헷갈린 것이었다.
아뿔싸. 그가 문규현 신부의 책을 내게 된 경위는 198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문규현 신부님은 1989년 걸개그림 사건으로 감옥에 들어갔을 때 만났다. 신부님이 평양에 간 임수경을 데리고 들어왔을 때다.
감옥 들어가기 전 1985년 격동기 때 광주대교구정의평화위원회에서 프리랜서로 일했었는데, 그때는 이름만 알고 있었다.
어렸을 때 영세를 받았지만 한번도 성당에 간 적이 없었다. 4년 전에 결혼하면서부터 가게 됐다. 부인이 카톨릭 신자다.
나는 문규현 신부의 도움으로 세례명을 찾았다.”감옥에 나온 문 신부는 그에게 ‘언제 책 한 번 만드세’라고 운을 뗐다.
하지만 문 신부가 부안에 들어가 새만금 문제로 일하면서 기회가 좀처럼 생기지 않았다.
“신부님이 부안에서 신문을 만들었다. ‘부안독립신문’이다. 거기에 한 달에 2번 연재를 했다.
제일 처음 컷을 그린 건 권정생 선생님의 책이었다. 분도출판사에서 나온 책(초가집이 있던 마을)이다.
그 다음 컷이 생활성서사에 나온 이현주 목사의 책(예수와 만난 사람들)이다. 이번이 세 번째 컷이다.”
그는 문 신부와의 작업을 매우 흡족하게 생각했다. ‘완벽하게 진행된 컷’이라고 완연한 미소까지 지었다.
“신부님의 글을 한 번도 보지 않고 24컷을 그렸다. 그래서 글 때문에 구속받지 않을 수 있었다. 근데 글과 그림이 너무 잘 맞아 떨어져 기분이 좋았다.
원래 글이 상당히 길었다. 근데 현암사에서 축약했다. 글이 살아날 수 있을까 했는데 오히려 장점이 있었다. 군소리 없이 좋았다.
”그는 요즘 목어(木魚)이야기를 홈페이지(damibox.com)에 연재하고 있다.
“그려보고 싶은 컷이 있다면 텍스트를 따라 가는 컷이 아니라 내용과 상상력을 끌어가는 그림이다. 그래서 시작했다.
하다보니까 줄거리가 생기고 콘티가 나왔다. 이 이야기를 꼭 책으로 낼 생각은 없다. 그냥 매우 재밌는 작업이다.”



'이명박, 누구를 탓하느냐'

지난 두 달간 촛불이 타올랐다. 누가 시키지도, 독려하지도 않았지만 수많은 시민들이 거리에 나와 촛불을 들었다.
하지만 경찰은 시청 앞 광장을 원천 봉쇄하고 물대포를 쏘기 시작했다.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를 외치던 시민들이
이명박 정권 퇴진으로 구호를 바꾼 지 오래다. 점점 경찰의 탄압이 거세지고 있다.
시민들은 피와 땀으로 이룩한 민주주의가 20년 후퇴했다고 우려의 목소리를 높였다. 홍성담 화백도 거리에 나와 촛불을 들었다.
주말만 되면 날을 새고, 물대포도 맞았다. 그러나 한쪽 가슴에서 한숨이 터져 나오는 것은 숨길 수 없었다.
왜 먼저 자신을 되돌아보지 않느냐는 물음이었다.
“이명박이 대통령이 된 것은 우리가 자처한 일이다. 예술가로서 다른 각도로 풀어보면,
우리의 정치의식과 삶의 태도는 상당히 괴리가 있다. 정치의식은 발전해 있지만
근본적인 삶의 태도와 인간으로 살아야 되는 본질은 아닌 것이다. 산업화, 민주화를 급하게 이루면서 삶의 본질을 간과했다.
이명박이 대통령이 된 것은 본질과 상관없이 삶의 태도만으로 선택한 게 아닌가. 정치와 삶이 분리돼 나타난 결과다.
주말만 되면 날밤 까고, 물대포도 맞고 집에 왔는데 거기서 느끼는 게 있다. 국민의 주권, 자존심이 촛불을 들게 했지만
꼭 그 만큼 우리 삶의 본질을 보지 않아 아쉬웠다. 왜 식탁 밥상의 문제가 이 따위로 됐는지, 우리 삶에 대한
처절한 반성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촛불은 미래를 예약하는 불빛이 된다. 그런데 그런 점이 보이지 않았다. 속이 탔다.
우리가 가족끼리 대화하는 게 밥상이다. 우아한 사람들이야 커피 마시면서 대화하지만.
밥상공동체는 피를 나눈 공동체만큼 중요하다. 그러면 그 밥상에 올라온 모든 생산물에 어떤 농부의 땀이 깃들이 있고,
어떤 경로로 왔는지 그런 명상이 있어야 한다. 우리 삶에서 그런 것들이 송두리째 빠져있다.
쇠고기. 나 같은 사람은 먹어야 일 년에 두어 차례다. 마치 날마다 쇠고기를 먹는 것처럼 됐다.
촛불집회로 사람들의 의식 속에 쇠고기는 꼭 먹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박힐 것이다.
삶에 대한 반성이 되지 않으면 촛불 들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굿에서 잡신을 쫓아낼 때 무당은 칼춤을 춘다. 하지만 칼을 무조건 휘두르는 게 아니다.
먼저 무당은 자기 목과 가슴에 칼끝을 어른다. 몸속에 들어와 있는 악마, 나쁜 자기를 다스린 다음에 칼끝을 밖으로 향한다.
이번 촛불을 전체 굿이라 볼 때 과거를 향한 칼날이 부족하다. 이번 촛불의 미래가 밝지 못했다. 칙칙했다.
뭔가 음모가 있는 것 같다. 또 다른 욕망의 한 표현이랄까. 2002년 월드컵 때 붉은 악마를 보는 듯했다. 그 징조가 남아있다.
나는 국가와 민족을 인정하지 않는다. 아나키스트다. ‘노빠’도 모르겠다. ‘명빠’도 모르겠다. 그런 정파적인 얘기가 아니다.
그냥 ‘징조’라고 하고 싶다. 불빛 자체가 전반기에 소녀들이 나와서 할 때는 밝고 맑았는데 촛불이 흐려졌다.
아이들이 그렇게 말했을 때 어른들은 자신의 삶의 태도에 대해 반성해야 했다.
이명박이 그런 협상을 하고, 대운하를 마음대로 하는 것이 우리들의 의식구조다.
얼마나 천박하고 미천한지, 제정신이 아니면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우리의 의식구조가 그렇게 천박하다.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면 공짜 돈이 생기지 않겠느냐. 내가 사놓은 아파트가 이명박 정권 내에 2~3배는 뛰지 않겠느냐는
의식구조가 만든 것이다. 전두환 때는 군부독재시절이었다, 노태우 때는 두 김(김대중·김영삼)이 분리돼 그렇다고 변명을 할 수 있었다.
이제 제대로 된 신문 만들지 못해, 조·중·동에 의해 당선됐다고 그러겠느냐. 우리 국민의 천박성을 바탕에 두고 당선된 사람이니까
누구를 탓하겠느냐.”
홍 화백의 고향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고향인 전남 신안군 하의도다.
예향의 고장이기도 하지만 그는 어렸을 때부터 무당들의 굿을 보면서 자랐다.
그가 촛불을 굿으로 비유한 것은 핏속에 흐르는 태생적 토대에서 비롯된 것이다.

'안산에 부는 변화의 바람'

홍성담 화백은 안산에서 산지 4년째다.
그는 이곳에서 새로운 지역운동이 뿌리를 내리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안산주민단체 중에서도 마이너그룹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뭉쳐 안산 시내에 100평정도 사무실을 얻었다.
단체를 만들기는 쉽지만 내리기는 힘들다. 간판만 걸고 있는 사람도 있다. 그런 분들도 전부 모여서 상생의 길을 찾자는 것이다.
한쪽에 30평정도 복합공간을 만들어서 작은 콘서트도하고 강연, 전시를 할 것이다. 이번 주 안에 공사에 들어간다.
이 공간은 사무실에 들어온 개인이나 단체가 무료로 사용할 수 있다.
로고는 ‘저어새’다 덕적도, 시화호, 남양만에 사는 나그네새다. 영어로는 ‘스푼빌’(Spoonbill)이다.
수저 모양의 부리로 막 저으니까 갯벌이 통기가 잘 되게 한다. 빌은 영어로 ‘나대는 놈’, ‘난 놈’ 이라는 뜻이다.
어제, 오늘 로고를 만들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구상중인 로고를 펼쳐 보여줬다. 기자에게 "어떤 것이 좋냐"고 묻는다.
기자는 수저모양이 큰 게 좋다고 얘기해줬다. 그도 "이 로고가 좋다"고 맞장구를 쳤다.
스푼빌의 첫 무대는 옛날 ‘두렁’ 이론가였던 경기문화재단의 라원식 큐레이터가 장식한다.
이들은 ‘안산지역 문화를 새롭게 만들어보자’는 주제로 강연할 예정이다.
‘두렁’은 1983년 창조를 개인이 아니라 집단의 문제로 부각시키고 전통양식을 수용한 민중적 미의식을 표방했던 예술단체다.
“이에 앞서 ‘끝장 토론’이 있을 것이다. 안산지역에 올바른 언론을 만들자는 모토로 신문을 만드는 주체들이 모여
‘경영과 편집의 분리’, ‘기초 작업은 어떻게 할까’ 등을 얘기할 것이다. 지면을 내고 싶은데 돈이 문제다.
일단 인터넷으로 하겠지만, 무조건 하기로 했다. 안산은 매우 중요한 도시다. 공단이 있고, 최초로 환경운동이 승리한 곳이다.
또 가장 국제적인 도시다. 원곡동 동사무소에 등록된 주민 80%가 외국인이다.
거기에 가면 마치 태국 방콕의 ‘카오산로드’에 온 것처럼 평화롭다. 얼굴색이 다르지만 화해와 공존에 대한 학습이 필요하다.
세계 어느 나라를 가 봐도 한국만큼 외국인 구경하기 힘든 곳이 없다. 매우 배타적인 곳이다.
문화와 문화가 충돌하면 새로운 문화가 생긴다. 그것이 예술이다.
안산에서는 완성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화가 생산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이 ‘안산에서 안산다’고 해서 ‘안산’이라고 한다.
시골 사람들이 서울에 올라가면 돈이 많이 드니까 안산에 온다. 중간 거점이다.
여기서 돈 좀 벌어서 서울에 갔다 다시 ‘패자부활전’하려고 안산에 온다. 굉장히 역동적인 도시다.
외국인들이 많은 ‘원곡동’과 ‘미천한 자본주의’가 안산의 커다란 축인데 이 두 가지를 분석하면
우리의 미래에 대한 재밌는 대안이 나올 것 같기도 하다.사람과 사람, 사람과 단체, 단체와 단체, 거기에다 지역 현안까지,
모든 게 산 넘어 산처럼 느껴진다. 아무리 ‘의’가 있고, ‘마음’을 나눠도 갈등을 피할 수 없을 듯싶다.
“1997년에 광주를 떠났다. 가끔 광주에 가면 어떤 사람한테 뒤통수만 맞았다. 우리 성격이 음모가가 아니다.
쌍권총 스타일인데, 윤한봉 형 계보가 다 그렇다. 음모가들은 공개적으로 소풍가는 것도 비밀에 부친다.
그런 스타일이 뒤통수를 때린다. 근데 만나서 얘기해보니까 그 사람도 나한테 뒤통수를 맞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서로 트라우마(외상성 스트레스장애)가 같았다. 안산은 노동운동의 중심이었다. 노동자 200명밖에 없는 사업장에
4개 계보의 운동권들이 들어와 작업을 했다. 우리는 서로 일을 통해서 신뢰를 해야 했다.
우리 내부 치료를 위해서 일이 필요하고, 그래서 모여야 했다. 새로운 운동의 패러다임은 공감한다. 하지만 단절은 아니다.
아날로그 세대들이 디지털화 되지 못하지만 그들이 책임질 게 있다.
그런 것들을 모여서 잘 해보자 그래야 세대 간의 혼성이 일어난다. 그래야 디지털 세대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 잘 될 것이다.
”그 뒤에서 물심양면으로 안산을 돕기로 했다. 옛날에 활동가로 움직일 때는 시민운동을 조직하고 방향이나 의제를 설정하는데 관여했지만
예술가가 앞에서 나서면 망한다는 것. 그는 모두가 원하는 만큼 돕고 그렇게 움직일 계획이다.
안산에 불어오는 새로운 바람 속에 그는 딱 그만큼 있다.홍성담은 툭 까놓고 마음속 이야기를 털어놓는 사람이다.
정말 거침이 없다. 그가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소리 내면서 웃는 모습은 끝내 기자의 마음을 휘어잡아버렸다.
오랜만에 무미건조했던 생계형 만남에서 벗어나 마음 놓고 떠들 수 있는 평온을 그에게 얻은 것 같았다. 참으로 정겨운 사람이다.
기사입력 : 2008-07-24 16:50:50최종편집 : 2008-08-02 09:01:39
ⓒ월간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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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과거를 향한 칼날이 부족하다” /월간 '말' 2008년 8월호/글: 이동권 기자, 사진: 전문수 기자
이름: damibox


등록일: 2008-08-29 19:28
조회수: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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