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담의 그림창고



                                                                                                                               30 x 45 cm /종이에 먹과 수채/09.02.09
['나무물고기' 119 - 슬픔의 무게]

밝은 아침 햇살이 바다 속에 가득 들어왔다.
폭풍우가 지나간 자리에 완연한 가을 햇빛이 드넓게 펼쳐졌다.
목어가 엎드린 채 턱밑 양쪽 지느러미를 조심스럽게 몇 번 까닥여보다가
이젠 되었다 싶어서 양 옆으로 기지개를 하듯 한껏 벌렸다.
새로 깎아서 단 왼쪽 지느러미에서 삐그덕 소리가 두어번 나더니
그 뒤론 아무런 소리가 없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그리고 꼬리를 조금씩 움직여 보았다. 수선한 몸통의 틈에서 나무판이 엇갈리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리고 그 소리는 금방 부드럽게 변했다. 그가 몸을 움직일 때 마다 내는
삐그덕 거리는 소리는 내 귀엔 마치 작은 배의 노 젓는 소리처럼 친근하게 들렸다.

‘이정도면 또 완전하게 새로운 몸뚱이가 되었어.
이젠 소야바다까지 헤어가기에 충분하다.
천천히 출발할 준비를 하여 오늘 정오쯤에 떠나자‘

청둥이가 걱정스런 눈빛으로 목어를 바라보았다.
나는 바위 틈새에 소중하게 보관했던 망태를 꺼냈다.
처음엔 분명히 망태 안의 깃털풀말이 반짝이는 갈색이었는데
지금은 붉은 색으로 변해 있었다.
내가 놀란 눈으로 망태를 살펴보자 목어도 깜짝 놀라면서 말했다.

‘벌써 붉은 색이 되었구나. 이제 저 붉은 색이 점점 옅어져 갈 것이다.
허연색으로 변하기 전에 소야바다에 도착해서 날개를 만들어야 한다‘

나는 망태의 끈을 풀어서 깃털풀말을 꺼냈다.
정확하게 네 포기 였다. 잘려진 줄기에 꽃지의 집게발로 문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깃털말풀의 줄기엔 가는 실핏줄이 엉켜 있는 것 같아서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붉은 피가 돌고 있는 듯 했다.
줄기와 솜털같은 잎들을 반듯하게 펴 네 포기를 가지런하게 눌러서 끈으로 묶어
뭇단을 만들었다. 청둥이가 그것을 보고 또 흐느껴 울었다.

‘꽃지가 이걸 가져오려고 깊은 바다 속에서 죽었어!
이까짓 것이 뭐라고.... 그까짓 날개가 뭐라고....
이따위 것과 꽃지의 목숨을 바꾸었어!
난 지금까지도 오른쪽 날개가 없이 왼쪽 날개만 갖고도
아무런 불편 없이 살아 왔다구!
이걸 왜 갖고 가냐구!. 버리라구! 난 저 깃털말풀이 이제 꼴도 보기 싫어!
꽃지의 목숨을 앗아간 저 깃털을 바다속에 버리라구! 어허헝 엉엉‘

‘청둥아. 꽃지는 저세상으로 올라가기 전에 이 깃털을 너에게 마지막 선물로
남겨놓은 거야. 네가 이것으로 오른쪽 날개를 만들어 달고 꽃지를 찾으러 가야지.
아마 꽃지는 널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거야. 그리고 이건 꽃지의 목숨을 바쳐서
얻은 것이지. 넌 이 깃털들을 마치 꽃지의 생명처럼 귀하게 여겨야 돼‘

청둥이는 깃털말풀에 얼굴을 부비면서 울었다.

‘으헝엉엉! 그래, 나는 오른쪽 날개를 달고 꽃지를 찾으러 갈거야.
저 바다 속 컴컴한 골짜기에 홀로 외롭게 있을 꽃지를 꼭 찾아 나설거야‘

청둥이는 깃털말풀에 엎드려서 얼굴을 묻고 서럽게 흐느꼈다.
그 사이에 가을 해가 우리의 머리 위를 지나갔다.
내가 깃털말풀 뭇단을 청둥이의 등에 올려 주황색 나일론 끈으로
그의 가슴을 둘러서 단단히 묶어 주었다.
우리는 가을 햇빛에 반짝이는 서해바다를 헤어가기 시작했다.
맨 앞에 목어가 헤어가고 그 뒤를 청둥이가, 그리고 내가 헤어갔다.

청둥이는 가끔 고개를 돌려 자기 등에 묶여진 깃털말풀과 왼발목에 찬 노란발찌를
번갈아 보며 열심히 물속을 헤었다.
깃털말풀을 등에 매고 왼쪽 날개 하나만으로 헤어가는 청둥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살아있다는 것의 애처로움을 생각했다.
삐거덕거리며 헤어가는 목어의 헐거운 몸도, 언젠가는 다시 안개가 뒤덮인 도시로
돌아가야 할 나의 야윈 몸도 모두 애처롭기는 똑 같았다.
그리고 나는 살아있는 모든 생명들이 자신들의 가슴 깊숙이 감추어둔
슬픔의 무게를 생각했다.
문득 눈자위가 시리더니 눈물이 돋았다.

우리는 덕적도에서 하룻밤을 쉰 다음에 다음날 점심 무렵에 자월도에 도착했다.
청둥이는 서해바다를 헤어오는 동안 내내 별로 말이 없었다.
꽃지와 이별이후 청둥이는 부쩍 성숙해 보였다.
동쪽으로 수평선 아래 영흥도의 높다란 화력발전소의 굴뚝이 멀리 보였다.
바로 저 굴뚝이 뿜어내는 하얀 연기 너머에 우리가 다시 돌아가야 할 소야바다가 있다.
마치 고향집에 가까이 온 것처럼 마음이 한결 푸근해졌다.

물속에 가끔 기름 냄새 같은 것이 스쳐지나가고 퀴퀴한 냄새도 풍기기 시작했다.
무엇인가 반갑고 그리운 것들이 갑자기 가슴속에 가득 찼다.
어둡고 썩은 냄새가 나는 소야바다가 그리웠다.

‘하아! 우리나라 냄새가 나네! 드디어 우리나라가 가까워졌는가 봐!’

오랜만에 활기를 찾은 듯한 청둥이의 말이 반가웠던지 목어도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 우리나라의 그리운 냄새가 풍기기 시작하구나. 여기 자월도 바다 밑에서
오후까지 쉬었다가 저녁참에 영흥도 업벌리 바다로 가자.
하얀사람이 옥귀도 감옥에서 풀어주었다는 그 독갑이를 찾아야 한다.
독갑이는 밤에만 돌아다닌다‘

청둥이의 등에 묶여있는 깃털말풀의 붉은 색이 점점 옅어져 가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목어의 마음이 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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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무물고기' 119 - 슬픔의 무게]
이름: damibox


등록일: 2009-09-11 13:14
조회수: 2174 / 추천수: 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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