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담의 그림창고



                                                                                                                                          30 x 45 cm /종이에 먹과 수채/09.02.16
['나무물고기' 125 - 바람이 말하다]

물속의 밤은 아름답다.
밤하늘이 물속에 드리운 검은 융단이 세상 끝까지 펼쳐졌다.
청둥이가 목어의 턱 지느러미 아래 엎드려 누워서 뭔가 열심히 쫑알대며
이야길 했다. 그러다가 나를 힐끗 보더니 내 옆으로 와서 부리로 괜히 내 어깨를
두드렸다. 그는 오늘밤 뭔가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했다.
 
내 곁에 누워있던 청둥이가 갑자기 몸을 불쑥 일으켜 반듯이 누워있는 내 얼굴 위로
목을 쏙 빼고 내려다보면서 눈을 끔쩍거렸다. 나도 눈을 끔쩍거리며 웃음을 날렸다.
나는 손을 더듬어 그의 발목에 채워진 노란발찌를 쓰다듬었다.
그가 부리를 내 귀에 대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꽃지와 네가 만들어 준 이 발찌는 이 청둥이가 죽을 때 까지 내 발목을 떠나지 않을거야.
나는 날개섬 우도 바다밑으로 가서 꼭 꽃지를 만나고 말거야‘
 
‘그렇지만, 가장 먼저 엄마와 형제들에게 날아가야 돼.
그들에게 더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구.
그래야 네가 더욱 강해질 수 있고, 꽃지가 잠들어 있는 날개섬 바닷밑 계곡의 수압을
이겨낼 수 있어. 꽃지를 만나러 갈 땐 우리랑 꼭 같이 가야 한다구! 알았지?‘
 
청둥이가 또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목어를 돌아보더니
다시 목어의 턱밑으로 가서 지느러미 위에 턱을 괴고 누웠다.
 
‘이제보니 열불이 저 인간이 요 지느러미를 참 잘 만들었네!
지느러미 결을 아주 잘 깎았어! 내 눈엔 김무석 스승님의 아들보다 훨씬 더 잘 깎았다.
목어 아저씨! 그렇지? 내 말이 맞지? 나도 보는 눈은 밝다구!‘
 
목어가 청둥이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든지 처음 하는 것이 힘들겠지만, 이미 했던 것을 좇아 자기의 마음을 심어서
다시 하는 것은 더 힘들다. 앞선 것을 너무 좇다보면 자기의 모습이 사라지고
자기의 모습을 너무 강조하다보면 자기 아닌 남에겐 필요 없는 일이 되어버리기 십상이지.
그러나.... 세상은 항상 자기가 무서워 못하는 것을 남이 대신 해주기를 바라더구나.
그렇게 남이 점점 괴이하게 변해가는 것을 즐기는 것이 세상사의 흥미거리가 되기도 한다‘
 
청둥이가 목어에게 또 몇마디 하면서 나를 바라보더니 다시 나에게 기어와서
반듯이 누워있는 나를 흉내 내어 내 팔을 베고 저도 반듯이 하늘을 보면서 누웠다.
 
‘애그그. 넌 엎드려 누워야지!
누가 보면 접시에 담긴 치킨인줄 알고 덤벼들겠다’
 
‘이 인간은 아직도 나를 보면 불손한 생각을 한단 말이지? 괙괙괙
그런데 내가..... 오늘 잘 날았어?’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청둥이가 왜 웃냐며 나에게 다그쳐 물었다.
처음 널 만났을 때 네가 날기 연습한답시고 좌충우돌 난리를 피우다가 나를 보고
꽥꽥거리던 것이 생각나서 웃는다고 말했다.
청둥이와 내가 서로 쳐다보면서 킥킥거리며 웃었다.
뒤에 금방 긴 침묵이 이어졌다.
 
‘넌 어디로 갈꺼야?’
 
갑작스런 청둥이의 질문에 나는 한참 동안 여러 생각을 해야 했다.
먼저 안개도시를 생각해야 했다. 그리고 창고 문을 잠구는 다섯 개의 열쇠 중에
고장이 나서 헐거운 네 번째 열쇠를 생각했다. 그 다음에 창고 안의 물건들을 생각했다.
그 물건들이 들고 나는 것을 깨알처럼 기록한 장부를 생각했다.
장부에 적힌 여러 가지 글씨와 숫자들이 어지럽게 내 머릿속을 잠식했다.
 
‘어디로 갈꺼냐구?’
 
‘응.... 가긴 가야지. 그런데 그냥 이곳에 이렇게 있고 싶어’
 
‘그러면 내가 엄마와 형제들을 만나고 금방 이곳으로 다시 돌아 올 때까지
나를 기다릴 수 있어?’
 
‘아니..... 난 다시.... 아마...안개도시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아’
 
‘흥! 이젠 이 청둥이가 꼴도 뵈기 싫은가보지? 내가 떠나니까 아주 시원한가보지?’
 
나는 소리내서 웃으면서 청둥이를 끌어 안았다.
그의 튼튼한 오른쪽 날개가 자꾸 힘이 솟는지 오히려 그가 날개를 펴서
나의 어깨를 덮어 주었다.
 
가을밤의 서늘한 바람이 물속을 헤매고 있다.
어떤 바람 한줄기가 목어의 등위로 지나갔다.
목어가 오래전에 느꼈던 바람결이다. 그 바람이 다시 휘돌며 그의 몸을 쓰다듬더니
여기저기 벌어진 틈새로 들어와 목어의 몸 안에 가득 찼다. 낯선 바람이 아니다.
목어는 이 바람을 잘 알고 있었다.
 
자네를 기다리고 있었네. 이제 나도 가야 할 때가 되었지.
진즉부터 생각이 많다네. 내 몸은 나무요, 모양새는 물고기라서 어디로 가야 할지...
망설이고 있다네.
 
바람이 대답했다.
 
우리가 가는 길은 몸도 모양도 한갓... 필요 없는 길이라네.
 
목어가 오랜만에 밝게 웃었다.
 
그렇지. 내가 곧 자넬 뒤따라 갈 것이야. 난...아무것도...아무런 여한도 없네.
 
바람이 다시 그의 몸에 벌어진 틈새를 타고 빠져 나와서 우리들이 누워있는 곳을
한 바퀴 돌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물속에 들어와 낮게 가라앉은 밤하늘을 바라보며 목어가 다시 빙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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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무물고기' 125 - 바람이 말하다]
이름: damibox


등록일: 2009-09-11 14:35
조회수: 2141 / 추천수: 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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