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담의 그림창고



                                                                                                                                         30 x 45 cm /종이에 먹과 수채/09.02.19
['나무물고기' 128 - 소리를 찾다]

우리는 그 명징한 소리를 귀 바퀴에 조심스럽게 감으면서 새벽이 열리는 곳을
향해 천천히 헤어갔다.
그러나 소리는 곧 다른 방향에서 들렸다. 대신에 아까보다 조금 더 소리가 굵어졌다.
내가 헤어가는 것을 잠시 멈추고 귀에 손을 대고 소리의 방향을 감지했다.
가까운 곳 어디에서 들리는 것 같아서 깜짝 놀라 두리번거리자
다시 소리는 먼 곳으로 움직였다.
그런 나를 보고 살며시 미소를 짓는 목어는 그냥 자기를 따라 오라고 눈짓을 했다.
나는 목어의 옆에서 헤어가며 소리를 찾았다.
목어가 속삭이듯이 말했다.
 
‘꼭 듣고 싶어?’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또 나의 귀에 대고 비밀스럽게 말했다.
 
‘내 배 밑으로 내려가서 내 몸을 봐’
 
나는 헤어가다 말고 몸을 돌려 그의 배 밑쪽으로 내려가 올려다보았다.
그의 배는 텅 비어 있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커다란 홈이 컴컴할 뿐이었다.
한 달 남짓 그와 함께 있었지만 그의 배가 텅 비어 있다는 것을 처음 보았던 것이다.
놀라는 나를 보고 그가 다시 속삭이듯이 말했다.
 
‘그 속으로 들어가 봐!’
 
주저하는 나의 등을 그가 턱밑 지느러미로 밀었다.
온통 캄캄했다. 바깥에서 보기엔 내 몸 하나가 딱 들어갈 만한 공간이었지만
들어가서 보니 그 넓이와 깊이를 측정하기 힘들었다.
마치 어둠의 끝에 들어선 느낌이었다.
아니, 세상의 모든 어둠이 시작되는 곳일 수도 있었다.
아까 밖에서 찾았던 소리가 이 어둠 속에서 들려 왔다.
처음엔 명주실처럼 가느다란 한가닥 소리였다가 다시 또 다른 소리 한가닥이 들렸다.
그 소리들 사이로 목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자세히 들어봐’
 
목어의 몸 밖에서 여태 들었던 목어의 목소리는 통울림이 섞인 두툼한 소리였는데
이 어둠 속에서 들리는 목어의 목소리는 풀 먹인 창호지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튕겨서
울리는 것 같은 가냘프면서도 시원하게 뻗는 목소리였다.
다시 새로운 소리 몇 가닥이 더 들렸다.
소리 한올 한올이 함께 어울리면서 소리는 점점 커졌다.
두올 세올이 서로 꼬여서 굵어지면 나머지 소리들은 옆에서 빙빙 돌며 잦아들고,
굵어진 소리가 내 가슴을 조였다가 풀어주면 옆에서 빙빙 돌던 소리가 점점 커졌다.
또 목어의 목소리가 아득한 곳에서 들렸다.
 
‘그가 처음으로 가르쳐 준 소리였어.
나는 이 소리를 통해서 바람도 보고 햇빛도 보지.
그의 영혼보다도, 나의 몸보다도,
어쩌면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의 모든 것 보다도
먼저 이 소리가 있었어‘
 
그의 목소리가 가늘고 투명했다.
그가 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는지, 춤에 맞추어 소리를 내는지 내 몸을 감싸고 있는
어둠이 천천히 출렁대기 시작했다.
나도 그 소리와 출렁대는 어둠에 내 몸을 자연스럽게 맡겼다.
소리도 점점 커지고 목어의 춤도 더 빨라졌다. 나의 귀도 나의 몸도 함께 빨라졌다.
나는 출렁대는 어둠을 그대로 뒤집어 쓴 채 밖으로 빠져 나왔다.
그리고 소리에 몸을 실어 목어와 함께 헤어가기 시작했다.
 
목어가 위로 솟구치면 나는 밑으로 비껴 내리고 그가 밑으로 급하게 내려오면
내 몸은 하늘 끝까지 올라갔다. 목어가 꼬리를 튕기면서 왼쪽으로 돌면
나는 발로 물을 차면서 오른쪽으로 돌았다.
소리는 점점 커져서 온 바다를 출렁이게 했다.
우리는 새벽 미명이 돋아나는 바다 속을 그렇게 춤을 추며 돌았다.
소야바다 물막이 방조제 앞에 동그마니 놓여진 큰가리섬이 멀리 보였다.
목어가 나의 얼굴과 한 뼘 사이를 두고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말했다.
그의 목소리가 맑은 방울 소리 같았다.
 
‘이젠 헤어져야 할 시간이 되었어’
 
나는 갑자기 할 말을 잊었다. 그와 이별을 위해서 미리 준비해 두었던
몇 가지의 말조차 모두 잊어버렸다.
그 대신에 줄곧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것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별똥별에 누워있던 그녀는.... 마고?’
 
목어는 눈을 감은 채 조용히 웃었다.
소리가 다시 커지자 바닷물도 따라서 출렁이기 시작했다.
우리의 몸도 출렁였다.
그 사이에 우리는 벌써 큰가리섬 서쪽 바다 밑에 다다랐다.
나는 눈을 감은 채 목어의 얼굴에 입술을 대고 물었다.
 
‘흰옷? 검은 옷?’
 
목어도 눈을 감은 채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였다.
그리고 그의 입술로 나의 이마를 지그시 밀었다.
나는 바로 등 뒤의 누런색 바위 사이에 시커멓게 입을 벌리고 있는 동굴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이 미끄러졌다.
동굴 반대편 아득한 곳에서 누군가가 강한 힘으로 내 몸을 빨아들였다.
뒤쪽에서 목어의 청아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건.... 우리들에게 조금도..... 중요하지 않아....’
 
한마디의 말이 더 이어졌지만 내 귀엔 이미 들리지 않았다.
나는 동굴 깊숙이 빨려 들어가면서 외쳤다.
 
‘목어..... 넌!..... 너는....마고....’
 
동굴은 꺼질듯이 밑으로 곤두박질을 치다가 다시 위로 굽이쳐 올라갔다.
이것은 분명히 ‘마고의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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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무물고기' 128 - 소리를 찾다]
이름: damibox


등록일: 2009-09-11 15:03
조회수: 1955 / 추천수: 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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