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담의 그림창고




                                                                                                                                          30 x 45 cm /종이에 먹과 수채/09.02.21
['나무물고기' 129 - 새벽 (終)]

동굴은 길고도 길었다.
아래로 꺼질듯이 내려가다가 솟구치기를 몇 번이고 거듭했다.
내 몸의 중력이 사라진 것 같았다.
‘마고의 길’은 분명히 롤러코스터 같을 거라고 예상했던 청둥이의 말이 맞았다.
나는 동굴 깊이 빠른 속도로 빨려 들어가면서 다음에 청둥이를 만나게 되면
이 길을 꼭 가르쳐 주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몸이 다시 한 번 아래로 아득하게 곤두박질을 하다가 곧이어 수직으로 솟았다.
점점 속도가 잦아들면서 머리에 뭔가 강하게 부딪쳤다.
빨려 들어가던 몸이 멈추었다.
주변에 마른 풀과 흙덩이들 그리고 날선 돌멩이들이 손바닥에 느껴졌다.
둥굴 입구를 누르고 있는 큰 바위 주위의 돌멩이를 몇 개 걷어내고
밖으로 빠져 나와서 주변을 둘러보니 거대한 채석장이었다.
돌을 깨 낸 하얀 바위가 절벽처럼 둘러쳐져 있었다.
마고의 길을 따라 빨려 들어 간 나는 저울섬 형도에 내던져 진 것이다.
 
저울섬 형도는 이미 거의 절반이나 파헤쳐져 있었다.
나는 깨다 만 바위들 사이를 겨우 비집고 저울섬 중턱으로 나올 수 있었다.
발아래 새벽 소야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고 건너편엔 여전히 자욱한 안개 위로
높다란 건물들의 꼭대기만 보였다. 도시의 불빛이 안개 속에 잠겨 있었다.
도시의 왼편엔 공단의 굴뚝들이 안개 위로 머리만 내밀고 기웃거리며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른 채 장승처럼 우뚝 서 있었다.
안개는 저울섬 형도 아래도 자욱했다.
나는 안개를 헤치며 도시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미 누런색으로 변한 갯가의 갈대들이 줄기 끝에 하얀 솜뭉치를 매달고 있었다.
양쪽 겨드랑이가 갑자기 가려웠다.
팔짱을 끼듯이 양쪽 겨드랑이에 손을 가져갔다.
보드라운 깃털이 손끝에 느껴졌다.
청둥이가 떠나기 전에 우정의 표시로 꼽아둔 것이었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으나 그를 다시 만날 때 까지 나는 이 겨드랑이의 깃털 두 개를
잘 보관할 것이다.
창고지기인 나에게 간수할 물건이 하나 더 생긴 셈이다.

바닷가로 내려 갈수록 안개는 농밀해졌다.
저 앞에서 누군가 걸어오고 있었다.
낚시대를 어깨에 맨 바로 그 노인이었다.
내가 먼저 눈인사를 했다. 노인이 나를 머리꼭대기부터 아래로 주욱 훑어보다가
나의 엄지손가락에 시선을 고정하고 역시 지난번과 똑 같은 말을 했다.
 
‘호! 젊은이는 원래 여그 사람이 아니제?
여긴 소야바다가 아니라 쌍섬 앞바다라구. 쌍섬 앞바다!
나 젊었을 적엔 여기를 소야바다라고 부르지 않았어.
시방 젊은이가 발딛고 서 있는 여그는 마고의 집이 있던 저울섬 형도야.
 
내가...쌍섬 앞바다에 고기 한 사발 물 한 사발일 때 저 건너 사리포구에서
야거리 고깃배를 저어 바다 한 가운데로 나가는데
저그 저쪽 잿머리에서 커다란 물고기 같은 뱀이 구불거리며 하늘로 솟아오르다가
힘이 부쳤는지 건너편 갯벌위에 뚝 떨어지는 것을 보았지.
그 물건이 불쌍하게 생각되어 그쪽으로 노를 저어가 삿대를 그 짐승 앞에 대 주었더니
그녀석이 삿대를 돌돌 감고 올라와 배 이물칸 덕판위에 또아리를 딱 틀고 앉아서
나를 바라보았지.
머리 양쪽에 큰 귀가 달린 물고기처럼 생긴 뱀이었어.
그 놈이 자꾸만 이곳 저울섬 형도를 향해 머리짓을 하는거야.
그걸 보고 내가 머리를 끄덕이며 저울섬 형도 저쪽 바닷가에 배를 대어주었더니
나에게 고맙다는 듯이 인사를 꾸벅 하고 내려가 저 형도 숲속으로 기어 올라갔어.
 
그날 고기를 한배 가득 잡아 돌아오는데 큰가리섬과 작은가리섬, 저 두 개의 쌍섬에
안개가 자욱하고 위로 무지개가 둥글게 솟았어.
그날은 쌍섬에 용마루가 하늘로 날아갈 듯한 기와집이 보이드라구...
사나흘 전엔 둥근 초가집이 보이더니...‘
 
말을 마친 노인은 잿머리쪽을 바라보면서 낚시대를 왼쪽 어깨에 옮겨 매고
내 어깨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나는 내 걸음 숫자를 세면서 안개를 밟았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걸음에서 어김없이 노인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손짓을 하며 다시 나를 불렀다.
 
‘어이! 젊은이!’
 
내가 뒤돌아서자 노인은 방금했던 똑 같은 말을 반복하고 나서 안개 속으로 걸어갔다.
낮게 깔린 안개가 나의 무릎 아래를 휘감았다.
 
내 이마를 눌렀던 목어의 입술이 생각났다.
내가 미처 어떻게 해볼 틈도 없이 황망 중에 ‘마고의 길’ 동굴로 빨려 들어갔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나의 이마를 지그시 눌렀던 것은 분명히 활 같은 붉은 입술이었다.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건너편 안개도시와 소야바다에 내렸다.
그리고 나의 이마에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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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무물고기' 129 - 새벽 (終)]
이름: damibox


등록일: 2009-09-11 15:11
조회수: 3148 / 추천수: 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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