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담의 그림창고




                                                                                 30 x 45 cm/종이에 먹과 수채/08.03.03      30 x 45 cm/종이에 먹과 수채/08.12.12
['나무물고기' 10 - 우리는 웃었다]

나는 마음속에 여유를 갖고 폐허만 남은 물속 바닥을 헤어갔다.
큰길로 접어들어 교차로를 만났을 땐 나도 모르게 신호등을 기다렸다.
내 이마 위엔 그들이 조잡하게 흉내 낸 신호등이 고장 난 채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지만
이미 폐허가 된 도시에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었다.
이 도로에 오고 갈 것이 전혀 없지만 나는 습관대로 좌우를 살펴보며 교차로를 조심스럽게 건넜다.

길가엔 여기저기 쓰레기들이 쌓여 있었다.
땅위에 사는 사람들이 서로 몰래 소야바다에 내다버린 생활쓰레기가 대부분이었다.
헌 냉장고나 세탁기 또는 폐차가 뒤집힌 채 버려져 있고 여기저기 수명이 다해 버려진 타이어들도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건축물 폐자재들이 여기저기 쌓여 있는 모습은 마치 작은 언덕을 보는 듯 했다.

물속에 잠겨 고요하게 앉아있는 쓰레기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의 존재감을 확실하게 갖고 있었다.
보이지 않아야 할 곳에서 보이는 것들이 있다.
식탁이나 찬장에 들어있어야 할 밥그릇이 화장실 변기 위에 올려져 있다면 그 존재감은 달라질 것이다.
어떤 사물이든지 그것이 어디에 놓여져 있는가에 따라 존재감이 달라진다.

검은 타이어 속에 붉은 별 하나가 떠 있다.
별은 둥그런 폐타이어를 밤하늘로 생각하고 돋아났을까.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죽어있는 불가사리였다.
문이 뜯겨진 채 누워있는 냉장고 안에 솜털이 돋은 짐승하나가 숨을 쉬고 있다.
하얗게 말라죽은 이끼들이 둥글게 엉켜서 물속 바람에 흔들리며 마치 숨을 쉬는 듯하다.
그들은 모두 살아있는지도 모른다. 죽음은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죽음 이후는 아무도 설명해 줄 수 없다.
그것들은 바로 이곳에서 죽음 이후의 또 다른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나의 눈만 보지 못하는 또 다른 삶이 바로 이런 것일 수도 있다.

이것저것 기웃거리며 쓰레기들이 갖는 각각의 존재감을 감상하고 있을 때
문득 누군가가 나를 따라오는 인기척을 느꼈다.
뒤를 돌아보니 그 괴물이었다.
나는 모른 채 하고 큰길을 따라 천천히 헤어가면서 태연하게 도시의 폐허를 구경 했다.
괴물은 줄곧 나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따라오고 있었다.

도시의 폐허가 끝나고 큰길도 끊겼다.
내가 멈추어서 잠시 주저하고 있는 사이에 그도 내 뒤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멈추어 섰다.
나는 물속도시를 두른 외곽도로를 한 바퀴 빙 돌아볼 생각을 하고 왼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내 뒤를 따라오는 괴물에게 여간 마음이 쓰였다. 방향을 틀면서 큰소리로 물었다.

‘왜 날 따라오지?’

‘그냥’

‘괴물도 외로움을 느끼는 모양이지?’

‘외로움? 너희들 끼리 개미떼처럼 모여 사는 아파트 숲도
멀리서 바라보면 외롭게 보이더구나’

‘그래. 맞아’

내가 그의 말에 수긍하는 대답을 하자 괴물이 배지느러미를 두어 번 잡아당겨 금방 내 등 뒤로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즉시 뒤로 돌아 괴물을 향해 경계를 했다. 내가 잠깐 대답을 잘못 선택했던 것이다.
그러나 인연이라는 것은 이렇게 잘못나간 한마디 대답 때문에 만들어지기도 한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다분히 의도가 있는 그의 말에 내가 넘어간 셈이다.

내 머릿속의 셈법은 상당히 복잡해졌다.
나의 물류창고에 들고나는 물건들 숫자를 뒤적여서 이리저리 아무리 셈을 해봐도
저 괴물과 나와의 관계를 따져줄 어떤 숫자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곳 물속에 들어온 이후로 나의 셈은 엉망이 되었다.
내 머릿속 한구석에서는 자꾸만 ‘절반’이라든가 ‘반의 반’ 혹은 ‘반의 반의 반’ 또는
내가 숫자로도 취급하지 않았던 소수점이 찍힌 숫자들이 점점 그 영역을 키우고 있었다.
이런 따위의 숫자들은 명확하지 않아서 마치 세포분열을 하듯이 숫자의 끝에 숫자가 매달리고
그 끝에 다시 두세 가지를 뻗어 애매모호한 숫자가 매달리고 또 그 끝에... 그 끝의 끝에 엉망이 된 숫자가
대롱대롱 매달리기를 끝없이 반복하며 확장한다.
나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숫자들로 가득찬 머릿속을 털어내려고 머리를 좌우로 크게 몇 번 흔들었다.
그런 나를 유심히 바라보던 괴물이 설핏 미소를 지었다.
미소를 띤 그의 얼굴은 의외로 천진했다.
그의 미소가 천진해 보이는 것은 오랜 세월의 풍파에 닳고 삭은 나무결이 도드라진 얼굴 때문일 것이다.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서 머쓱해진 나에게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런! 오늘은 난생 처음 보는 새로운 쓰레기가 이 물속바닥에 버려지는구나. 큭큭’

‘무슨?’

‘방금 네가 머릿속에서 비워 내버린 요상한 숫자들이 너의 발아래 무더기로 쌓이는데’

괴물 저 녀석이 나의 속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을 멋있는 말 한마디로 벗어날 수 있는 재간이 나에겐 없었다.
그가 큰 눈을 몇 번 끔적 거렸다. 나는 그저 멋쩍게 웃어보였다.
그도 나를 보고 웃었다. 그의 웃음을 보고 나는 좀 더 편안하게 웃었다.
나의 편안한 웃음이 보기 좋았던지 그가 크게 웃었다. 나도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흣흣 저기 봐! 처음 보는 새로운 쓰레기가 흰 눈처럼 내린다!'

‘어디?’

나는 손으로 이곳저곳을 가리키면서 웃음이 뒤섞인 소리로 말했다.

‘바로 여기! 저기! 우리들의 웃음이 여기저기 산처럼 쌓였어! 흣흣흣’

‘우리’는 정말 흰 눈처럼 내리는 웃음을 온 몸에 맞으며 마음껏 웃었다.
괴물과 나는 어린아이처럼 웃었다.   ‘우리’는....웃고... 또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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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무물고기' 10 - 우리는 웃었다]
이름: damibox


등록일: 2009-09-08 16:01
조회수: 2198 / 추천수: 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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